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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전한 명장 곽거병 생애 인물 프로필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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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개요 : 한나라와 흉노의 전쟁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는 복잡하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원전 200년경, 한 고조가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하여 화친을 맺은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후 한무제 때까지 한동안 화친 정책이 지속되었으나, 한무제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면서 흉노와의 화친정책에 불만을 품고 세 차례의 대규모 전쟁을 벌여 흉노를 북방 지역까지 몰아냈습니다.

한-흉노 전쟁은 기원전 133년부터 기원후 89년까지 이어졌으며, 한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흉노를 축출하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소국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습니다. 이 전쟁은 한나라의 국력 강화와 영토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흉노는 내전과 한나라의 공격으로 인해 점차 약화되어 갔습니다.

기원후 58년, 흉노의 내전으로 인해 동흉노가 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서흉노를 멸하고, 한나라는 흉노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습니다. 이후 제2차 분열 이후인 89년에는 북흉노가 멸망하면서 220년간의 한-흉노 전쟁은 한나라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결국 흉노는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선비족에게 대초원을 빼앗기고 오르도스 지역의 소국으로 전락했습니다. 남흉노는 한의 속국이 되어 120여년을 더 지속하다가 후한말에 조조에게 대패하고, 마지막 선우가 조조에게 항복함으로써 국가로서의 흉노는 소멸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한나라와 흉노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곽거병 프로필과 생애

곽거병 초상화

 

한제국 불세출의 명장 곽거병은 평양현의 관리인 곽중유(霍中孺)와 평양후 집안의 여종인 위소아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곽중유가 평양이후 조시(의후 조참의 증손)의 집에서 일할 때 둘이 만나서 곽거병을 낳았는데, 곽중유는 관리를 마친 후 집으로 가서 결혼해 곽거병과 곽중유의 관계는 끊겼습니다. 곽거병의 이모인 위자부가 무제의 총애를 받아 여태자를 낳아 황후에 올랐기 때문에, 친족이자 총명한 곽거병도 무제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위소아는 이후 한나라 개국공신 진평의 현손 진장(陳掌)과 밀통하고 있었는데, 위자부가 부인이 되면서 진장도 귀해졌습니다. 곽거병은 나중에 자기 아버지가 곽중유인 걸 알았지만 찾아가지는 않았다. 표기장군이 되어서 출진할 무렵 하동군을 지났는데, 하동태수가 직접 마중을 나왔고, 전사에서 관리를 보내 곽중유를 맞이했고 여기서 곽중유가 종종걸음으로 나아와 배알하자, 도리어 곽거병이 절하고 무릎을 꿇어 말했습니다. 

“거병은 일찍이 대인께서 남기신 몸임을 몰랐습니다!”

곽중유도 부복하고 고두하면서 대답했습니다.

“노신이 장군에게 목숨을 의탁할 수 있음은, 하늘의 힘입니다.”

이에 곽중유에게 밭과 집과 노비를 사주고 떠났습니다. 아울러 돌아오면서 또 들러서는, 씨다른 동생인 곽광을 데리고 갔습니다.

18세가 되자, 그는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정복 군주로 유명한 한무제의 총애로 입궁해 시중이 됐습니다. 기사에 능해, 흉노와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이긴 외삼촌 위청(衛靑)을 따라 거듭해 흉노 정벌에 나섰고, 씩씩한 용사로 인정받아 표요교위(剽姚校尉)가 됐습니다. 원삭 6년(기원전 123년) 원정에도 종군했는데, 원정 자체는 조신과 소건 두 장군의 군대가 괴멸되는 등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본인은 빠르고 용감한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본대를 떠나서 몇백 리를 떠나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습니다. 무제는 조서를 내려 흉노의 상국과 당호, 선우의 큰아버지뻘인 적약후(籍若侯) 산(産)을 베고 작은아버지 나고비(羅姑比)를 사로잡은 공로가 군중의 으뜸[관군(冠軍)]이므로 남양군 양현의 노양향(盧陽鄕)과 완현의 임조취(臨駣聚)를 떼어 1600호 규모의 관군후국(冠軍侯國)을 만들어 하사했습니다. 그 후 몇 번이나 흉노 정벌에서 공적을 올려, 기원전 121년에 표기장군에 임명되고,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의 본거지를 격파해, 위청과 함께 대사마로 임명되었습니다. 큰 공로와 무제의 총애, 그리고 젊은 나이의 권세를 가졌던 곽거병이었지만, 기원전 117년 불과 24세의 나이로 병사했습니다.

 

주요 업적

곽거병은 전한 시대의 위대한 장군으로, 흉노와의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는 기원전 121년에 발생한 것으로, 곽거병은 감숙성 지역으로 출동하여 흉노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이 지역을 평정했습니다. 이 전투는 그의 부대가 기련산까지 진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봉분은 이 전투를 기념하여 기련산을 본떠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곽거병은 흉노 수만 대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홀로 분전하여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결국 포위를 풀 수 있었던 전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의 전투 기술과 지휘 능력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으며, 그의 전략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곽거병의 전투 업적은 그가 단 6년간 활약한 이후 단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사에서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고, 아울러 2000년간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하며,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군인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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