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길버트(개리 마커스 저)의 『클루지(Kluge)』에서 강조하는 바, 인간의 기억은 컴퓨터처럼 특정 위치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뇌 전체에 분산된 신호 패턴으로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뇌는 메모리를 주소로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단서(신호)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진 기억 흔적을 불러옵니다 . 이러한 내용 기반의 기억 시스템은 진화 과정에서 얻어진 즉흥적 해결책으로서 장단점을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뇌과학, 인지심리학, 철학, AI/컴퓨터 공학의 관점에서 인간 기억의 분산 신호 기반 메커니즘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클루지』가 주장하는 임시방편적 설계와 기억 메커니즘의 연관성을 분석합니다.
1. 뇌과학적 관점: 분산 저장과 신호 기반 기억의 생물학
해마(보라), 편도체(남색), 전전두엽(녹색) 등 다양한 뇌 구조가 기억 형성·저장에 관여하는 모습. 인간의 기억은 이처럼 여러 뇌 영역에 분산되어 저장된다.
현대 신경과학에서는 기억이 특정 한 곳에 국소적으로 저장되지 않음을 잘 보여줍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기억은 해마, 신피질(대뇌피질), 편도체, 기저핵, 소뇌, 전전두엽 등 여러 상호 연결된 뇌 영역에 걸쳐 분산 저장됩니다  . 예를 들어:
• 일화적·명시적 기억 (자서전적 사건 기억, 사실 지식 등): 해마(측두엽 깊숙한 구조)에서 초기 형성과 인덱싱이 이루어지고, 이후 신피질로 정보가 옮겨져 장기 저장됩니다  . 편도체는 여기에 정서적 의미를 덧붙여 기억을 강화합니다 .
• 암묵적 기억 (절차 기억, 운동 학습 등): 해마 없이도 기저핵과 소뇌 등의 회로가 담당하며, 몸으로 익힌 기술은 이러한 영역에 저장됩니다 . (실제로 뇌전증 수술로 해마를 잃은 환자 HM도 새로운 운동기능은 습득했지만 해당 경험은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는 해마가 새 기억 형성엔 필수지만 영구 저장소는 아님을 보여줍니다 .)
• 단기 작업기억: 전전두엽이 주로 관여하여 일시적으로 정보를 활성화하고 조작합니다 . 이처럼 작업기억은 뇌의 “메모장” 역할을 하며, 복잡한 사고와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잠시 보유합니다.
이러한 분산 메모리 체계에서는 특정 기억이 여러 뉴런들의 집합적 패턴(engram)으로 저장됩니다. 하나의 기억을 구성하는 뉴런들의 그룹은 뇌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기억을 불러올 때 이들 뉴런 군집이 다시 활성화됩니다  . 최근 MIT의 전뇌 매핑 연구는 단일 기억도 뇌 여러 영역에 걸쳐 넓게 분포된 연결망 형태로 저장됨을 입증했습니다 . 특히 기억 흔적(engram)이 전통적 기억 중추인 해마·피질뿐 아니라, 시상, 중뇌, 뇌간 등 예상치 못한 부위들까지 포괄한다는 결과가 나왔고  , 복수의 영역을 동시에 재활성화할 때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재생됨도 확인되었습니다  . 이는 기억이 하나의 장소가 아닌 네트워크 전체의 패턴으로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분산 저장”**된 기억은 신호(단서) 기반의 연상 작용으로 작동합니다. 뇌에서는 정보를 주소로 찾아가기보다 연관된 내용이나 단서가 뉴런들을 자극하여 기억을 불러냅니다. 이를 **내용 주소 가능 기억(content-addressable memory)**이라고 부르며, 한 개념을 떠올리면 연관된 다른 기억들이 퍼져나가는 활성화로 함께 회상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여우”**를 생각하면 그와 연관된 “사냥”, “교활한 동물”, 동화 속 여우 등에 관한 기억이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식입니다 . 이런 신호 기반 접근 덕분에 우리는 부분적인 정보나 힌트만으로도 전체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해마 및 피질의 뉴런들은 학습 시 함께 발화(fire)하며 연결 강도를 높이고(“뉴런들이 함께 활성화되면 연결된다”는 헤브 법칙), 이후 유사한 신호 패턴이 들어오면 그 연결망 전체가 재가동되어 기억이 떠오릅니다. 맥락이나 단서가 기억을 호출하는 열쇠가 되는 셈입니다  .
그러나 이러한 병렬 분산처리는 정확도 측면에서 한계도 있습니다. 뉴런 네트워크의 활성 패턴은 컴퓨터 칩보다 속도가 훨씬 느리기에, 뇌는 이를 보완하고자 관련 정보들을 동시에 빠르게 떠올리도록 진화했지만 , “옳은” 기억이 항상 재생되는 보장은 없습니다 . 뇌 속 기억은 위치가 아닌 단서에 강하게 좌우되다 보니, 서로 비슷한 기억들이 경쟁하거나 간섭하여 혼동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 예를 들어 어제 아침식사 메뉴를 기억하려 해도, 그 단서(“아침식사”)로 촉발되는 여러 날들의 아침 기억이 뒤섞여 정확한 회상이 어려워지는 식입니다 . 이는 뇌과학적으로 기억의 분산 저장과 신호 호출이 가지는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인지심리학 관점: 기억의 왜곡, 구성적 특성 및 맥락 의존성
인간의 기억은 완벽한 복사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재구성되는 정보로서, 이 과정에서 여러 왜곡과 오류가 발생합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밝혀냈습니다:
• 맥락 의존성: 인간의 기억은 학습이나 경험 당시의 환경, 상태, 맥락과 깊이 연관되어 저장됩니다. 그래서 기억을 인출할 때 당시와 유사한 맥락이나 단서가 주어지면 회상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예를 들어 고전 연구에서 잠수부들이 물속에서 단어를 암기한 경우, 나중에 물속 시험에서 그 단어들을 더 잘 기억했고, 땅 위에서는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 이처럼 기억은 상황 의존적으로 형성되기에, 장소나 신체상태, 기분 등이 달라지면 인출 효율이 변합니다. 다만 이러한 맥락 의존성이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닌데, 정보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학습 상황과 달라지면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 (예컨대 집에서 “화장지 사기”를 다짐해도, 정작 슈퍼에 가면 집이라는 맥락이 없어 까먹는 식입니다.)
• 기억의 구성적 특성: 우리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고 조각들을 뽑아 의미있게 구성합니다. 프레데릭 바틀릿의 고전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낯선 옛날 이야기를 기억할 때 자신의 지식과 문화에 맞게 부분적으로 각색하여 재구성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의 세부는 사라지고 자신만의 개연성 있는 버전으로 회상하곤 했습니다  . 현대 연구들도 기억 회상은 복수의 인지 과정(지각, 추론, 상상 등)이 얽힌 재구성이며, 이 과정에서 오류나 왜곡이 개입된다고 말합니다  . 즉 기억은 재생(reproduction)이 아니라 재구성(reconstruction)이며, 회상 시 현재의 지식, 신념, 감정에 의해 부분적으로 다시 만들어집니다  . 이러한 구성적 기억 특성 때문에 목격자 진술도 절대적 진실이 아닐 수 있으며, 사람들은 틀린 기억도 사실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예컨대 감각 입력 단계부터 인출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 오류 여지가 있으며 , 기억 빈틈을 기존 지식이나 추측으로 메우는 경향(콘퍼뷸레이션)도 확인됩니다  .
• 기억 왜곡과 암시 영향: 우리의 기억은 사후 정보나 암시에 취약하여 쉽게 왜곡됩니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유명한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똑같은 자동차 충돌 영상을 보여준 뒤 질문에 사용된 단어만 살짝 달리했습니다. “차들이 세게 충돌했을 때 속도가 어땠나요?”라고 물은 집단은 “차들이 접촉했을 때…”처럼 부드러운 표현을 들은 집단보다 훨씬 높은 속도로 달렸다고 기억했습니다 (예: 시속 65km vs 51km) . 이처럼 사소한 언어 차이도 기억의 재구성 결과를 바꿔놓을 만큼 기억은 유연하고 쉽게 오염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 다른 기억들의 융합도 흔한 왜곡입니다. 방금 배운 정보가 과거 기억을 덮어쓰거나 (예: 오늘 먹은 딸기 요거트가 어제 바나나 요거트 기억을 흐리게 함), 반대로 과거 기억이 새 학습을 방해하는 간섭 현상이 일어납니다 . 이런 특징 때문에 비슷한 얼굴이나 상황을 혼동하기 쉽고, 범죄 목격자 기억처럼 정확성이 중요한 경우에도 오인 가능성이 생깁니다  .
• 기분과 신념의 영향: 기억은 정서 상태와 선행 지식에도 영향을 받아 선택적으로 왜곡됩니다. 사람들은 현재 기분과 일치하는 과거 사건을 더 잘 회상하는 기분 일치 효과를 보이며 , 기존 신념에 부합하면 거짓 정보도 쉽게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적 기억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기억은 수동적 기록장치가 아니라 능동적 스토리텔러에 가깝습니다. 우리의 뇌는 매 순간 들어오는 정보를 맥락과 의미 속에서 해석하며 저장하고, 인출 시에도 현재의 정신 상태와 단서에 맞추어 기억을 재구성합니다  . 그러므로 인간의 기억 내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될 수 있으며,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 가짜 기억도 실제만큼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상의 이유로 인간 기억은 신뢰도가 제한적이며 늘 가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억 시스템은 보통의 상황에서 우리의 적응과 학습에 유용하도록 진화했습니다. 다만 컴퓨터의 메모리처럼 매번 동일한 정보를 정확히 제공해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간은 기억 오류를 보완하기 위해 메모를 하거나 기록을 남기는 등 여러 전략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3. 철학적 해석: 기억의 진실성과 개인 정체성, 의사결정, 책임
기억이 이렇게 재구성되고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은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기억의 진실성 문제는 곧 나 자신에 대한 진실성, 그리고 도덕적·법적 책임의 문제로 연결되곤 합니다:
• 개인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기억과 정체성의 관계를 논의해왔습니다. 존 로크(John Locke)는 기억이 곧 나 자신이라 여겨, 과거 행위를 기억하지 못하면 그때의 나는 현재의 나와 동일인이라 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 예컨대 내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그 기억이 전혀 없다면, 기억 상의 “나”는 단절되었으므로 처벌받아 마땅한 동일한 자아가 아닐 수 있다는 논지입니다 . 이러한 주장은 극단적으로 들리지만, 기억이 우리의 정체성에 핵심 기둥임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자신의 기억 이야기들을 모아 정체성의 서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본 대로 기억이 왜곡·개조될 수 있다면, 정체성도 고정불변이 아니라 유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실제로 신경과학자들은 기억은 정체성의 토대이면서도 왜곡자라고 말하며, 기억이 재구성될 때마다 현재의 자기상이 과거의 기억을 다시 색칠함으로써 “어제의 나”상(像)도 변화시킨다고 지적합니다 . 극단적인 경우, 알츠하이머나 기억상실증 환자는 기억이 사라지면서 자아의 연속성에도 혼란을 겪습니다. 다행히 정체성은 순전히 기억에만 의존하지는 않지만, 내 삶의 서사를 기억하지 못할 때 스스로 누구인지 상실하는 느낌이 든다는 보고가 많습니다. 결국 기억의 진실성 문제는 “진짜 나”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맞물려 있으며, 기억이 불완전하기에 우리의 정체성 역시 완전히 투명하거나 일정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 우리의 결정과 판단은 과거 경험에 크게 의존하는데, 이 경험들이 저장된 것이 바로 기억입니다. 그런데 기억이 부정확하거나 편향되어 있다면 의사결정 역시 왜곡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기억에 잘 남는 극적인 사건(예컨대 비행기 추락 사고)을 실제보다 더 자주 일어난다고 여기곤 합니다. 이는 기억의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으로, 뚜렷이 기억나는 사례에 지나친 가중치를 두어 판단을 내리는 오류입니다. 그 결과 통계적으로 안전한 비행기보다 자동차를 선호하는 등 합리적이지 못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거짓 기억도 미래 행동을 바꿉니다. 한 연구에서는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달걀 샐러드를 먹고 심하게 아픈 적이 있다”는 가짜 기억을 심어주었더니, 나중에 이 거짓 기억을 믿게 된 사람들이 실제로 달걀 샐러드를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 이처럼 잘못된 기억이라도 일단 자신의 일부가 되면, 그 기억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되어 행동과 태도마저 변화합니다 . 결국 기억의 진실성 문제는 합리적 판단의 전제인 “경험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흔들어, 개인의 선택과 미래 계획에 영향을 줍니다. 이는 도덕적 판단에도 마찬가지여서, 과거의 잘못된 기억이나 편향된 회상이 현재의 도덕적 결정(예컨대 타인에 대한 신뢰나 용서)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 책임 개념에 미치는 영향: 철학과 법률에서 책임(responsibility)은 흔히 기억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에 대해 내가 한 일로 기억하고 인식할 때 도덕적·법적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이 조작되거나 상실될 경우 책임 개념은 복잡해집니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로크의 관점에서, 자신이 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 현대 법정에서는 범죄 후 고의로 기억 상실을 주장하는 사례부터, 실제로 해리성 기억장애로 자신의 행동을 기억 못하는 피고인까지 다양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법은 *기억 못해도 행위의 결과는本人의 것이라 보아 책임을 면제하지 않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현재의 나”는 “그 일을 한 과거의 나”와 동일인인가? 하는 흥미로운 논쟁이 됩니다. 또한 증언의 경우, 목격자의 기억이 진실되지 않을 수 있기에 잘못된 기억으로 남을 죄인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실제로 DNA 증거가 없던 시절 수많은 오심이 기억에 의존한 증언 때문에 발생했고, 지금도 기억의 신뢰성이 법적 책임을 물을 때 핵심 쟁점이 됩니다. 더 나아가, 미래에는 SF에서처럼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거나 삭제하는 기술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될 경우 책임과 처벌의 개념은 완전히 재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범죄자의 나쁜 기억을 지운다면 그는 같은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 또 처벌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이 새 질문으로 떠오릅니다. 이렇듯 기억의 불완전성과 유동성은 개인의 자기동일성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 내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이라는 개념도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요약하면, 재구성되는 기억은 나라는 존재, 내가 내리는 결정, 내 책임의 범위를 모두 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삶의 의미와 도덕을 성찰하는 철학적 문제로 이어지며, 기억의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4. AI/컴퓨터와의 비교: 인간 기억 vs 인공 기억
인간의 뇌 기억 메커니즘은 흔히 컴퓨터 메모리나 인공지능의 학습 방식과 비교됩니다. 둘 사이에는 흥미로운 유사점도 있지만 구조적 차이가 큽니다:
• 컴퓨터 메모리(HDD/SSD/RAM) vs 인간 뇌: 컴퓨터는 정보를 정해진 주소(address)에 정확히 저장하고, 그 주소를 통해 직접 접근합니다. 예컨대 특정 파일이 디스크 어느 섹터에 기록되어 있는지 알면 항상 동일한 데이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 인간의 뇌는 주소가 아닌 내용(단서)에 따라 기억을 인출하며 , 기억 흔적이 뉴런들 사이에 분산되어 중복적으로 저장됩니다 . 메모리 접근 방식부터가 위치 기반 vs 내용 기반으로 다르기에, 컴퓨터는 정확하지만 유연성이 낮고, 인간은 부정확할 때가 있어도 연관 정보를 융통성 있게 끌어오는 장점을 가집니다 . 또한 컴퓨터 메모리는 변하지 않는 기록(read-only처럼)을 전제로 하지만, 뇌 기억은 회상할 때마다 강화 또는 변형(재기억화)되는 가소적 저장입니다. 정보의 신뢰성 측면에서 컴퓨터는 한번 저장된 비트가 그대로 유지되지만, 뇌의 시냅스 가중치는 경험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여 기억이 왜곡되거나 잊힐 수 있습니다  . 한편 용량과 구조 면에서, 인간 뇌는 약 1조(10^12)개의 시냅스로 추정되는 방대한 연결망을 통해 병렬 처리를 수행하는 반면, 컴퓨터는 선형 연산을 매우 빠르게 반복하여 병렬성 부족을 보완합니다. 뇌는 느리지만 병렬적, 컴퓨터는 빠르지만 직렬적이라는 차이가 있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아키텍처를 보면, 컴퓨터는 CPU(처리)와 메모리(저장)가 분리되어 있지만, 뇌뉴런은 그 자체로 처리와 저장을 겸함(시냅스 변화로 학습하고, 동시에 전기활동으로 처리)합니다. 요컨대 뇌는 소프트웨어·하드웨어가 구분 없는 학습기이고, 컴퓨터는 프로그램과 데이터 메모리가 분리된 체계입니다. 이런 근본 구조 차이 때문에, 인간 같은 창의적 연상은 컴퓨터에게 본래 어렵고, 반대로 컴퓨터 같은 정확한 기억은 인간에게 본래 어렵습니다.
• 인공신경망(딥러닝) vs 인간 뇌: 현대 AI의 딥러닝 신경망은 뇌를 모방하여 설계되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사점으로는, 딥러닝 역시 지식이 개별 노드가 아닌 전체 네트워크의 가중치 분포로 저장되는 분산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뇌의 분산 기억과 유사하여, 한두 개 노드가 망가져도 전체 성능에 치명타가 없고(내성 있음), 여러 입력에서 추상화된 특징을 학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형 언어모델이나 이미지 인식 신경망은 훈련 데이터의 공통패턴을 학습해 새로운 입력에도 일반화하는데, 인간 뇌도 부분적인 단서로 전체 개념을 유추하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뚜렷합니다. 학습 알고리즘 측면에서, 딥러닝은 주로 역전파(backpropagation)라는 전역적인 오류 수정 신호를 이용해 가중치를 조정합니다. 이는 모든 계층의 노드들이 오류 기여도에 따라 한꺼번에 갱신되는 방식으로, **로컬하게 이루어지는 뇌의 시냅스 강화/약화(헤브식 학습)**와는 다릅니다 . 뇌는 각 시냅스가 지역적 연합 규칙(예: 동시에 활성화되면 강해짐)을 따르며 학습하고, 해마 등에서 빠른 연합 학습이 일어난 뒤 피질로 기억을 천천히 통합하는 등 다단계 과정을 거칩니다. 반면 딥러닝은 단일 네트워크에 대량의 데이터를 주입하여 일괄적으로 가중치를 최적화하는 식이죠. 또 학습 속도와 데이터 효율에서 인간 뇌는 종종 소량의 경험으로도 학습하지만, 인공신경망은 방대한 데이터와 반복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아이는 몇 번의 예시로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지만, 딥러닝 모델은 수천 장의 이미지 학습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망각 패턴도 다릅니다. 인간은 오래 쓰지 않은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중요한 기억은 오랫동안 유지하며, 새로운 지식을 배워도 기존 지식을 완전히 덮어쓰지 않습니다. 반면 기본적인 딥러닝은 “파국적 망각(catastrophic forgetting)” 문제가 있어서, 새로운 작업을 학습하면 이전에 학습한 것을 급격히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 이는 신경망이 가중치를 최적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임무에 중요했던 가중치까지 변경해버리기 때문인데, 인간 뇌는 수면 중 재활성화 등의 기제를 통해 과거 기억을 통합함으로써 연속 학습을 가능하게 합니다  . 최근에는 인공신경망도 이러한 뇌의 메커니즘을 모방해, 잠재공간 리플레이나 규제화 등을 통해 학습시 과거 지식이 유지되도록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구조적 차이로, 뇌에는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희소 연결, 자기조직화 등 복잡한 생물학적 요소가 있지만 딥러닝 모델은 수학적 노드와 가중치로 추상화된 단순화 모델입니다. 따라서 감정이나 동기 부여가 기억 형성에 미치는 영향 (예: 보상에 의한 기억 강화)은 뇌에서는 중요하지만, 인공신경망에는 별도로 설계되지 않는 한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요약하면, 딥러닝은 인간 뇌의 어떤 원리는 공유하지만 학습법, 유연성, 생물학적 복잡성에서 차이가 있어, 인간 기억의 모든 면을 재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인간 기억 시스템은 컴퓨터나 AI와 구조적으로 다르며 각각 장단점을 지닌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컴퓨터/AI는 정확하고 방대한 기억 저장·검색이 가능하지만, 문맥적 이해나 창의적 연상에서는 인간에 못 미칩니다. 반대로 인간 기억은 오류와 왜곡이 있을 수 있어도, 의미와 맥락을 연결짓고 적은 정보로도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는 진화 vs 공학적 설계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다음에서 살펴볼 ‘클루지’로서의 뇌 설계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5. 진화의 산물, ‘클루지’로서의 기억 메커니즘
『클루지(Kluge)』에서 개리 마커스는 인간의 마음(뇌)이 완벽한 엔지니어링 산물이 아니라 진화가 임시방편으로 조합한 “서투르지만 그럭저럭 굴러가는” 시스템임을 역설합니다 . 이는 인간 기억 메커니즘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기억 시스템은 군더더기 없고 최적화된 완제품이라기보다, 진화의 누더기적 해결책들의 모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다시 말해, 시간과 환경의 압력 속에서 급하게 꾸려온 기능들의 집합이지,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 아래 만들어진 정교한 기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기억은 컴퓨터처럼 완벽하지 않을까요? 진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생존에 유용한 방향으로 발전할 뿐 정확성을 위해 추가 설계를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기억 체계는 수억 년에 걸친 자연선택 과정에서, 그때그때의 필요에 맞게 덧붙여진 결과물입니다. 초기 생명체들이 지닌 단순한 연합 학습 메커니즘(예: 한 자극을 다른 자극과 연결짓는 기억)이 맥락 기억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지각 시스템에서 발전한 이러한 연합 기제는, 당시에 주변 환경을 빠르게 판단하는 데 효과적이었고 사실 대개는 충분히 정확했습니다 . 보고 있는 것은 실제다라는 전제 하에서는, 본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인간이 언어나 추상적 정보를 다루는 단계에 이르면서도 여전히 같은 형태의 기억 기제를 물려받았고, 이로 인해 언어로 들은 정보까지도 맥락에 휘둘려 쉽게 믿거나 왜곡하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 요컨대, 우리 기억 시스템은 원래 지각 중심의 단순한 구조에서 출발해 그 위에 여러 개선이 덧붙여졌을 뿐, 처음부터 논리적이고 일관되게 설계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 임시방편적 설계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낳았습니다. 첫째, 우리 기억은 맥락 의존적으로 우선순위를 매기는 편향을 띱니다. 컴퓨터 같으면 모든 정보를 균등하게 저장하겠지만, 인간은 진화적으로 당장 유용한 정보를 빨리 떠올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 자주 쓰거나 최근에 본 정보, 또는 현재 상황에서 중요했던 정보가 다른 것보다 먼저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죠 . 이는 느리고 제한적인 뉴런 속도로도 실생활에 충분히 대응하게 해주는 효율적인 속임수(trick)입니다. 그러나 둘째, 이러한 맥락 기반 작동은 기억 혼동과 오류를 불가피하게 가져옵니다 . 단서가 비슷하면 엉뚱한 기억이 소환될 수 있고, 앞서 본 것처럼 단어 하나 다르게 들었다고 기억 내용이 달라질 만큼  우리의 기억은 유연하지만 신뢰도 낮은 시스템입니다. 진화는 완벽한 정확성보다는 속도와 생존을 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허술한 기억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 셋째, 뇌는 기존 시스템을 완전히 뜯어고치기보다 새 층위를 덧붙이는 식으로 진화했기에, 원초적 기억의 흔적 위에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되어 비합리적인 구석들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복과 보상 체계도 논리적으로 최적화된 설계가 아니라 쉽게 속을 수 있는 조잡한 기제들의 모음이라고 『클루지』는 말합니다 . 기억 역시 이와 같아서, 강력한 감정에 의해 왜곡되기 쉽고, 단서가 바뀌면 결정도 덩달아 바뀌는 비합리성이 나타납니다 . 이는 진화의 흔적(scars)으로 볼 수 있습니다 .
그럼에도 이 엉성한 해결책들의 묶음인 기억 메커니즘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놀라울 만큼 효과적이기에 인류 생존에 기여했습니다 . 예컨대 맥락 기억 덕분에 관련 정보들을 빠르게 떠올려 위협에 대응할 수 있었고, 가용한 뇌 자원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분산 저장 덕분에 한 부분이 손상돼도 다른 연결로 기억을 되살리는 탄력성(resilience)도 얻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기억은 종종 합리성을 저해하고 실수를 유발하지만 , , 이것 역시 인간다움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화는 “충분히 작동하는” 해결책을 선호하지, 최고의 엔지니어처럼 오류 없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습니다 . 인간 기억의 클루지적 특성은 바로 이 진실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뇌는 수백만 년의 구식 부품들과 최신 부품들이 뒤섞인 복잡한 레거시 시스템이며, 기억은 그중에서도 옛 연합 학습 메커니즘에 덧붙여진 맥락 처리 장치라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 기억은 컴퓨터 메모리처럼 정밀하지 않고, 진화의 산물답게 임시방편적 면모를 지니지만 우리에게 적응적 이점을 주는 분산 신호 기반 시스템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왜 우리가 종종 기억 실수를 하고, 맥락에 좌우되며, 과거를 현재 시점에서 재해석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AI를 개발할 때도 완벽함보다는 유연성과 효율을 고려해야 인간-like한 기억 시스템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클루지로 가득한 뇌이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발휘되는 창의성과 학습 능력이 바로 인간 마음의 매력일 것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불완전한 기억을 스스로 인지하고 보완하면서, 동시에 컴퓨터와 AI의 장점을 활용해 인간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는 균형을 찾는 일일 것입니다.
참고한 자료: 인간 기억의 분산 저장 구조와 뇌 영역들  , 기억의 맥락 의존성과 왜곡 현상  , 기억 재구성 이론과 오류 발생 메커니즘  , 뇌와 컴퓨터/인공지능 기억 방식의 비교 연구  , 그리고 『클루지』에서 제시된 진화론적 해석   등을 종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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