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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해 노을에 물든 화개정원과 교동도의 가을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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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단풍나무 사이로 선선한 가을바람이 스며들던 오후, 우리는 도심을 벗어나 강화도 교동도의 화개정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강화대교를 건너자 서해의 드넓은 바다와 갯벌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고, 길가엔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들녘이 끝없이 펼쳐졌다. 파란 하늘 아래 솜털 같은 구름들이 천천히 흘러가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에는 짭짤한 내음과 함께 여행의 설렘이 실려 왔다.

섬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화개정원 입구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가장 먼저 정원 곳곳에 놓인 독특한 조형물들이 눈길을 끌었다. 잘 손질된 나무들과 어우러진 이 조형물들은 정원을 하나의 야외 미술관처럼 보이게 했고, 오색의 가을 꽃들과 어울려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 정원에는 국화와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가을 정취를 한껏 더하고 있었으며, 밤나무 가지마다 탐스러운 밤송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 화개산 정상의 생김새가 솥뚜껑을 엎어놓은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만큼, 거대한 솥뚜껑 모양의 조형물도 여기저기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

정원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가을 풍경을 만끽했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니 한쪽에 옛 초가와 울타리를 재현해 놓은 장소가 나타났다. 알고 보니 이 조용한 섬 교동도는 조선의 연산군이 유배되었던 역사적인 곳이라고 한다 . 권력의 정점에 섰다가 쓸쓸히 귀양 와 생을 마감한 왕의 이야기를 떠올리니, 눈앞의 고즈넉한 초가가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나니 맑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작은 인공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졸졸 흐르는 폭포 소리가 남아 있던 늦더위마저 식혀주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시원함을 만끽했다 . 또 다른 길목에서는 나무 지게에 형형색색 꽃을 가득 실어 놓은 아기자기한 장식이 보였는데, 쓰러진 고목과 어우러진 그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 이렇듯 곳곳에 놓인 작은 예술 작품들과 자연이 조화된 정원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원을 충분히 둘러본 후, 해가 지기 전에 산 정상의 전망대에 올라보기로 했다. 화개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은 비교적 완만했지만 중간중간 경사가 있는 구간도 있었다.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 오르는데 노란색 모노레일 한 대가 우리를 앞질러 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 모노레일은 주말이면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라지만, 우리는 가을 산의 정취를 더 오래 느끼고 싶어 걸어서 오르기로 했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숲길을 지나 정상에 가까워지자 숲 너머로 전망대의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정상에 다다르자 탁 트인 하늘과 함께 거대한 전망대, 그리고 그 아래로 펼쳐진 서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개정원의 전망대는 강화도의 상징새인 저어새의 모습을 형상화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바닥 일부에는 유리로 된 아찔한 스카이워크도 설치되어 있었다 . 난간에 기대어 서자 발 아래로 교동도 화개정원과 섬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저 멀리 서해 바다 위로는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었고, 수평선 넘어 북녘 땅까지도 어렴풋이 이어져 있었다 . 이윽고 서쪽 하늘로 붉은 해가 기울자 온 하늘과 바다가 황금빛 노을로 물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석양의 풍경은 가슴 벅차도록 아름다워서 마치 자연이 건네준 선물을 받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 함께 있던 일행과 나는 연신 감탄을 쏟아냈고, 주위에 모인 사람들 역시 숨죽인 탄성을 터뜨리며 저무는 태양을 지켜보았다 .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내려놓은 채 천천히 변화하는 하늘빛을 눈과 마음에 담았다 .

해가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 주황빛 노을은 보랏빛 여운으로 바뀌었고, 곧 주위에 어스름이 깔렸다. 하나둘씩 하늘에 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발 아래 보이는 마을에도 작은 불빛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전망대 구조물에는 은은한 조명이 들어와 어둠 속에서 반짝였고, 정원 곳곳에도 부드러운 조명이 더해져 밤의 정취를 자아냈다. 낮의 풍경과는 또 다른 고요하고 운치 있는 야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밤공기의 선선을 느꼈다. 선선한 밤공기를 마시며 산길을 내려오는 길에는, 황홀했던 석양의 여운과 섬의 평화로운 풍경이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으로 퍼져나갔다.

교동도의 밤은 도시와 달리 적막하고도 평화로웠다. 산 아래 마을로 내려와 섬의 작은 시장 거리도 잠시 둘러보았다. 6·25 전쟁 당시 고향 황해도를 떠나 교동도에 정착한 이들이 모여 만든 대룡시장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1960년대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 낡은 간판을 내건 가게들과 슬래브 지붕의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에서는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분단의 아픔을 안고 떠나왔던 사람들이 삶을 꾸렸던 이 거리는 이제 조용히 옛 추억을 간직한 채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교동도는 아픈 역사를 딛고 이제 ‘평화의 섬’이라 불릴 만큼 고요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곳이었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 마주했던 풍경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짙은 단풍 사이로 불어오던 산들바람, 서해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황홀한 노을, 그리고 사연 많은 역사를 품고도 한없이 평화롭게 느껴지던 섬의 정취까지 모두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바쁜 일상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행복을 얻은 듯했다. 날씨 좋은 가을날에 찾은 화개정원과 교동도에서의 경험은 정말 잊지 못할,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이 아름다운 순간들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였다면 그 감동이 더욱 빛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언젠가 소중한 사람과 다시 이곳을 찾아 오늘 느낀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품으며, 우리는 깊어가는 가을밤 달빛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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