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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오례의로 본 명나라 사신 접대 예법 고증폭군의 셰프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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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 장소: 태평관에서의 접대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태평관(太平館)이라는 국영 객관(客館)에서 연회로 접대했습니다 . 국조오례의의 빈례(賓禮) 편, 특히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 조항에 따르면 왕은 궁궐에서 명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다례(茶禮)를 행한 뒤, 사신을 태평관으로 모셔 연회를 베풀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 실제로 명 사신이 한양에 도착하면 도착 연회(하마연)부터 시작해 다음 날 임금이 친히 참석하는 익일연, 돌아가기 전 전별연까지 거행되었는데, 이 중 임금이 참석한 익일연이 바로 드라마에 등장한 장면과 같은 상황입니다 . 이러한 연회는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공식 의례서에 명시된 절차대로 시행된 것입니다 .

좌석 배치: 동쪽이 상석인 이유


국조오례의에는 이 연회의 좌석 배치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 명나라 사신의 자리는 동쪽 벽에, 어좌(임금의 자리)는 서쪽 벽에 위치하게 되어 있다고 명시되어 있어, 왕과 사신이 같은 높이에서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했습니다 . 다시 말해, 왕이 높은 어좌에 앉고 사신이 아랫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앉도록 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쪽 좌석이 오히려 상석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입니다. 유교 예법에서 방위는 곧 서열을 뜻했는데, 전통적으로 동쪽이 서쪽보다 격이 높은 자리로 취급되었습니다 . 예컨대 조정의 정승들도 좌의정(左議政)이 동쪽 편에, 우의정(右議政)이 서쪽 편에 서열지어 앉았으며,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배열되곤 했습니다 . 따라서 명나라 사신을 동쪽에, 조선 국왕을 서쪽에 앉힌 것은 예법에 따라 사신을 상석에 모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이처럼 동서 좌향으로 나란히 앉는 연회 배치는 조선이 자주적 권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국제적 힘의 역학관계상 명 황제의 사자를 높이는 의전 규범을 충실히 따른 결과입니다. 이는 흡사 현재 미국 상무부장관 하워드 러트닉이 이재명대통령보다 실질적으로 훨씬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고 더 큰 영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인사 예법: 왕의 읍례와 사신의 답례


연회 석상에서 왕과 사신이 나란히 앉기 전 주고받는 인사 예법(읍례)도 국조오례의에 근거한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왕이 연회에 참석한 사신을 마주할 때 먼저 가볍게 읍(揖)하여 인사하고, 이에 대해 사신이 답읍(答揖)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여기서 읍(揖)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가볍게 머리 숙이는 예(禮)이고, 답읍은 그에 대한 답례를 의미합니다. 왕이 먼저 예를 표하고 사신이 응하는 이러한 절차는 명나라 사신이 명 황제를 대리하는 존재로서 의전 서열이 조선 국왕보다 높았기 때문입니다 .

특히 공식 국빈 의례에서는 이러한 위계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예를 들어, 명 황제의 칙서를 접수하는 엄숙한 자리에서는 조선 국왕이 북쪽 하늘을 향해 네 번 절(四拜)을 올리고 사신은 이에 답배하지 않는 절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만큼 명 황제를 대신한 사신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춘 것입니다. 다만 연회의 경우에는 비교적 부드러운 형식으로, 왕과 사신이 서로 읍례를 교환하는 수준의 인사로 격을 조율했습니다 . 왕이 몸을 낮춰 먼저 인사하고 사신이 답례를 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사신을 높이되 예를 갖춰 서로 예우를 주고받은 것입니다.

고증 평가: 역사 기록에 부합한 연회 장면


결론적으로, 국조오례의를 비롯한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드라마 ‘폭군의 셰프’ 속 연회 장면은 당시 예법을 충실히 반영한 고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474년에 간행된 국가 예법서 국조오례의는 연산군(연희군) 시대를 기준으로 불과 수십 년 전에 편찬된 지침서로서, 그 빈례 규정이 극중 상황과 정확히 부합합니다  . 다시 말해, 문제 된 장면의 연출은 조선시대 외교 의례에 비추어 볼 때 충분한 사료적 근거가 있는 사실적인 고증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각주: 역사 기록 출처를 참고하면, 국조오례의 빈례 조항 원문에 사자의 좌석을 동쪽에, 전하의 좌석을 서쪽에 설치한다고 되어 있으며 연회 시 왕과 사신이 함께 절을 행한 후 좌석에 나아가 앉는다고 나옵니다 . 또한 승정원일기 등에는 명 사신을 맞을 때 국왕이 먼저 읍하고 사신이 답례하거나, 국왕이 칙사 앞에서 사배하고 사신은 절하지 않는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어 이러한 의전 관례를 뒷받침합니다  . 이는 곧 드라마 속 장면이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당시 조선과 명의 외교 의례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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