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회의 일부 담론에서는 국제 관계나 문명사를 논할 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전략적으로 바꾸어 외부의 강력한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중적 행태가 관찰됩니다. 이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외부의 권위나 힘을 빌려오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이자, 주체적인 정체성 확립의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편협한 사고의 결과물입니다. 이러한 '선택적 동일시'는 논리적 일관성보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1. 현상 분석: 상황에 따른 선택적 동일시
이러한 방어기제는 주로 두 가지 상반된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빌려온 정체성(Borrowed Identity)'에 기반합니다.
가. 서양을 비판할 때: '위대한 동양 문명(중국)'으로의 환치
서구 문명(예: 로마 제국, 중세 유럽) 대비 동양의 우수성을 주장할 때, 일부는 중국 왕조(한, 당, 송나라 등)의 발달된 문명과 과학 기술을 핵심 근거로 제시합니다.
* 행태의 특징: 이 과정에서 '중국'의 성과는 '동양'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환치되고, 화자는 마치 중국의 역사가 곧 자신의 역사인 양 동일시합니다. 해당 성과에 대한 한국사의 기여가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명의 권위를 빌려와 서구에 대한 비교 우위와 자부심을 확보하려는 시도입니다.
나. 중국을 비판할 때: '강력한 서방 세계(미국)'로의 빙의
반대로 현대 중국의 문제점을 비판할 때는 정체성이 급변합니다. 이때는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의 시각에 빙의하여,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내세우며 중국을 비난합니다.
* 행태의 특징: '동양'이라는 범주에서 이탈하여 '서방 세계'의 일원으로 위치를 재설정합니다. 이는 거대한 이웃인 중국을 상대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초강대국인 미국의 힘을 빌려 심리적 안정감과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입니다.
2. 원인 분석: 왜 이러한 이중적 행태가 나타나는가?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는 단순한 논리의 빈곤을 넘어, 한국 사회가 처한 복합적인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에서 기인합니다.
(1) 지정학적 불안과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심리적 유산
한국은 역사적으로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하며 생존과 주체성 확립을 끊임없이 고민해왔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은 외부의 힘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과거 조선 시대의 사대주의는 중국 중심 질서 속의 생존 전략이었으나, 이는 강자의 권위에 의존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심리적 습성으로 남았을 수 있습니다. 대상이 과거의 중국에서 현재의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외부의 강력한 존재에 의탁하려는 패턴은 유사하게 반복됩니다.
(2) 불안정한 정체성과 인지 부조화
근본적으로 이는 주체적인 정체성의 중심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서양에 대해서는 역사적 깊이를 자랑하고 싶고(고대 중국에 의존), 중국에 대해서는 현대적인 선진성과 힘을 내세우고 싶은(미국에 의존) 욕구가 충돌하며 인지 부조화가 발생합니다. 이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가장 유리한 외부 정체성을 빌려오는 '상황적 정체성'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재된 열등감을 해소하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손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3) 중국에 대한 양가감정(Ambivalence)
중국은 역사적으로 문명을 전파한 '중심'이었기에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근현대에는 침략자이자 경쟁자, 지정학적 위협으로 인식됩니다. 이러한 동경과 경멸이라는 양가감정은 상황에 따라 중국 문명을 차용하거나(대 서구), 중국을 강력하게 배척하는(대 중국) 모순된 형태로 발현됩니다.
(4) 이분법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 교육의 부재
교육적 측면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복잡한 역사나 국제 관계를 '선과 악', '동양 대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단순화하는 경향은 이러한 편협한 사고를 강화합니다. 또한, 역사 교육이 민족적 자긍심 고취에 집중하면서 세계사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조망하거나, 논리적 모순을 검토하는 비판적 사고 훈련이 부족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주장에 내재된 모순을 인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3. 극복 방안: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의 확립
이러한 이중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은 성숙한 사회적 담론 형성을 저해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1) 자기 객관화와 사실 기반의 인식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객관화'입니다. 중국의 역사적 업적은 중국의 것으로 인정하고, 한국사와의 연관성과 차이점을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힘은 동맹의 자산일 뿐 우리의 것이 아니며, 미국의 이익이 항상 한국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인지해야 합니다.
(2)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일관성 함양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복잡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주장을 펼칠 때는 감정적인 동일시가 아닌, 논리적 일관성과 객관적 사실에 기반해야 합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다양한 관점을 비교 분석하고 토론하는 훈련을 강화해야 합니다.
(3) '빌려온 힘'이 아닌 '자생적 힘'에 기반한 정체성 확립
외부의 권위를 빌려오지 않고, 한국 사회가 스스로 이룩한 성취(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 문화적 소프트파워 등)에 기반하여 주체적인 담론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생적 힘'에 집중할 때 건강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으며, 서양을 비판하든 중국을 비판하든 일관된 원칙과 가치 기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결론
상황에 따라 중국의 역사적 영광을 차용하거나 미국의 현재적 힘에 빙의하는 이중적 태도는, 강대국 사이에서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심리적 방어기제이자 불안의 표현입니다. 이제는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는 대신, 객관적인 현실 인식과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주체적이며 일관된 목소리를 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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