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건의 배경과 발생 시기·장소


사주귀당 사건은 9세기 중반 당나라 말기인 848년(당 선종 대중 2년)에 현재의 둔황(敦煌) 지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 여기서 사주(沙州)는 둔황 일대를 가리키며, 티베트계 제국인 토번(吐蕃)이 약 8세기 말부터 지배하고 있던 하서주랑(河西走廊) 지역을 뜻한다. 안사의 난(755~763) 이후 당나라는 국력이 약화되어 781년경부터 토번이 사주와 과주(瓜州) 등 서북 방면 영토를 점령하였고, 790년대까지 둔황을 포함한 간쑤성 일대가 토번의 통치하에 놓였다. 그러나 842년 토번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내란이 일어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각지 식민 통치가 느슨해지면서 둔황 지역도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 이러한 혼란을 배경으로 848년 간쑤성 둔황(사주)에서 주민들이 당의 지원 없이 자력으로 봉기하여 토번 세력을 몰아내고 당에 귀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이를 가리켜 흔히 “사주귀당(沙州歸唐)” 사건이라고 부른다.
2. 관련 주요 인물과 각자의 입장·역할
이 사건의 주역은 둔황 출신의 한인 한족 호족 장의조(張議潮)였다. 장의조는 토번 치하 둔황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부친 장겸일(張謙逸)이 토번 정권에서 사주도독을 지낼 정도로 지역 정세에 밝았다 . 그는 토번의 지배에 반감을 품은 한인(漢人)과 여러 소수민족 세력을 규합하여 848년 거사를 계획하였다. 장의조의 봉기에 동참한 인물로는 한인 승려 홍변(洪辯), 속특인 계통의 안경달(安景達) 등이 기록에 전하며, 이외에도 현지의 위구르계(裕固)・토욕혼(吐谷渾)・강족(羌族) 출신 병사들까지 인종을 초월해 연합하였다 . 장의조는 이들과 함께 무장 봉기하여 둔황 성을 습격, 토번 주둔군은 저항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 장의조는 즉시 둔황 일대를 장악하고 스스로 사주자사(沙州刺史) 겸 임시도독의 지위를 자처하면서, 당 중앙정부에 사자를 보내 토번 세력을 몰아냈음을 고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
당나라 조정에서는 장의조의 봉기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당시 당 선종(宣宗) 이침(李忱)은 회창 연간의 폐불 사건 등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 회복을 도모하던 시기였는데, 서북 변경에서 토번을 축출하고 당의 영토를 회복했다는 보고를 받고 장의조를 사주 지역의 공식 통치자로 승인하였다. 851년, 장의조의 동생 장의담(張議潭)이 둔황을 비롯한 11개 주의 지리 도면과 호구 장부를 가지고 장안에 입조하자, 당 선종은 장의조를 정식으로 사주방어사(沙州防御使)에 임명하였고 , 나아가 해당 지역에 귀의군 절도사(歸義軍節度使) 직을 신설하여 장의조에게 제수하였다 . 한편 토번은 둔황을 잃은 후 반격하지 못했고, 토번의 간섭에서 해방된 둔황 주민들은 장의조를 지도자로 적극 추대하였다. 이로써 장의조는 당의 관직과 작호를 받는 형식으로 둔황 및 하서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으며, 토번 측에서는 통치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장의조는 당 조정의 지원 없이도 독자적으로 둔황을 수복한 뒤 당국에 귀부하여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함으로써, 당과 지역 세력 모두 윈윈(win-win)하는 결과를 만든 셈이었다 .
당 측 인물로는 선종(宣宗) 황제가 가장 중요하다. 선종은 장의조의 사자를 통해 토번 축출 소식을 접하고는, 그를 “河西 11州 절도사 겸 도독”으로 책봉하는 칙령을 내렸다 . 이는 당나라가 해당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화한 조치로, 선종은 장의조를 통해 오랜만에 서쪽 변경에서 거둔 성과를 과시하고자 했다. 이 밖에 당 조정에서는 토번 정권에 맞선 장의조의 공을 치하하며, 그의 봉기를 돕기 위해 파병하지는 않았지만 각종 칭호와 은전을 내려 회유하였다. 한편 장의담은 형을 도와 장안에 가서 당 조정에 사주 지역 지도를 바치는 외교 임무를 맡았고, 이후 장의조 정권의 외교 창구 역할을 하였다. 장의조의 조카 장회심(張淮深) 역시 훗날 장의조의 뒤를 이어 귀의군 통치자가 되어 당과의 외교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3. 사건의 전개 과정과 당시의 정치적 맥락
사건의 전개는 비교적 단기간에 이뤄졌다. 848년 음력 9월경 장의조가 주도한 봉기가 성공하여 둔황을 포함한 사주성이 당 하루아침에 해방되었다 . 이어서 장의조 세력은 849~850년 무렵 주변 거점들을 연달아 평정하였다. 그 결과 851년까지 과주(瓜州), 이주(伊州), 서주(西州), 감주(甘州), 숙주(肅州), 란주(蘭州), 산주(鄯州), 하주(河州), 민주(岷州), 확주(廓州) 등 둔황 주변의 **열 개 주(州)**가 추가로 장의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 이로써 장의조는 총 11개 주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토는 현재의 중국 간쑤성 둔황에서 장예 일대, 그리고 신장 하미와 투르판, 청해성 동부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 당나라 입장에서는 오랜 기간 상실했던 서쪽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한 셈이 되었다. 장의조는 정복한 각 주 현지에 친당(親唐) 자치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당 중앙에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내 귀순의 예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851년 당 선종이 사주에 귀의군 절도사를 설치하고 장의조를 그 절도사로 삼는 칙명을 반포함으로써, 이 지역은 명목상 당 제국의 통치 질서로 복귀하게 되었다 .
당시의 정치적 맥락을 살펴보면, 이 사건은 당나라와 토번의 오랜 세력 다툼 속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8세기 후반 이후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과 이어진 번진(藩鎭) 할거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어 직접 먼 변경을 공략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토번은 8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신강, 간쑤 일대를 장악하였으나, 9세기 들어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 842년 티베트 황제가 암살된 뒤 권력 공백이 생기자 토번 제국은 급속히 붕괴되어 여러 지방 군벌들이 할거하였고, 둔황 인근에서도 토번 관리들이 서로 다투느라 중앙 통제가 약화된 상태였다 . 장의조는 이러한 호기를 놓치지 않고 주민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토번은 사주 및 하서 지역을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며, 이후 더 이상 당나라에 큰 위협을 주지 못하였다.
한편 이 사건이 일어난 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정세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당나라는 중흥을 도모하던 선종 치세에 서역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동쪽으로는 신라 및 발해 등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발해는 8세기 초 반목을 거친 뒤 9세기에 이르러 당과의 외교가 안정되어 여러 차례 사신을 교환하였고, 그 국력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만큼 융성해졌다 . 발해 문왕과 선왕 시기에는 당 황제로부터 “발해국왕”으로 책봉받는 등 명목상 조공국 관계를 맺었으며, 9세기 중엽에도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문화・무역 교류를 이어갔다. 통일신라 역시 당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당나라 말기까지 신라가 당에 보낸 사절만 50여 차례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는 발해와 더불어 남북국 시대를 형성하며 당과 균형 잡힌 외교를 펼쳤고, 9세기에는 장보고의 해상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는 등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둔황에서의 사주귀당 사건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즉각적 긴장이나 충돌을 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의 국력이 부분적으로 회복됨으로써 주변국들도 안도감을 갖고 당과의 교류를 지속하였으며, 발해와 신라는 당의 서쪽 안정이 동아시아 전반의 안정에 기여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다만 이 사건에 발해나 신라가 직접 관여하거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어서, 발해와 신라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군사적 파급효과는 거의 없었다.
4. 사주귀당 사건의 정치·외교적 영향
당나라에 대한 영향: 사주귀당 사건은 당 중앙정부의 입장에서 오랜만에 거둔 눈부신 성과로 받아들여졌다. 당 선종은 장의조의 귀순을 받아들여 서역 하서(河西) 지방과 농우(隴右) 지방을 다시 당 통제하에 두었다고 선전하였고 , 이를 통해 황실의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둔황 일대에 당의 군정 기관(귀의군)이 설치되고 관료가 파견됨으로써, 당 제국의 서쪽 경계가 한층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이로써 안사의 난 이후 끊어졌던 비단길 무역로가 부분적으로 재개되어 중앙아시아 및 서역 각국과의 교류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둔황, 감숙 일대가 당의 영향권에 들어오면서 서역 상인들의 안전이 확보되고 불경과 비단의 교역로가 복원된 것이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하서 회랑을 되찾음으로써 당나라는 토번과 회흘(回鹘) 등의 남하를 견제할 완충 지대를 확보하였다. 일례로 당 선종은 장의조에게 하서 일대 방위를 맡기고 토번이 재침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후 장의조 세력은 토번 잔당이나 서북 유목 세력이 침입할 때 몇 차례 격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이러한 점에서 사주귀당은 당나라의 서방 방어선이 일시적으로나마 회복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내 알 수 있듯 당 중앙의 통제력 회복은 형식적인 데 그쳤다. 선종과 그 아들 의종 치세에 당 조정은 내부적으로 환관 세력 다툼과 재정난에 시달려 서북 변경까지 직접 통치할 여력이 부족했다. 실제로 당은 둔황에 “귀의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장의조를 절도사로 삼았지만, 그에게 보내준 것은 관직과 인장(印章) 정도였을 뿐 병력이나 재정 지원은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 당나라는 서역 경영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귀의군 정권은 사실상 장의조 일가의 자치 정권으로 기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의조가 끝까지 당의 봉건 질서에 귀속되는 형태(“귀당”)를 취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중앙 권력으로부터 거의 독립적인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당의 일원임을 표방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둔황 지역 주민들에게도 안정적인 정통성 기반을 제공하였다. 장의조와 후계자들은 9세기 후반 동안 “당의 절도사” 신분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독립 정권처럼 통치함으로써, 당 왕조 멸망(907년) 직전까지 약 60년간 그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지속시켰다 . 당조 역시 이들을 공식적으로 토벌하지 않고 자치를 용인하였는데, 이는 당이 그만큼 약화되어 한때 회복한 하서 지역을 더 이상 관리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 국가에 대한 영향: 사주귀당 사건의 여파는 주로 서방 정세에 국한되었고, 발해나 신라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는 직접적 영향이 크지 않았다. 토번의 경우, 둔황 상실로 인해 서쪽 팽창이 좌절되고 급속히 세력이 쇠퇴하였다. 이미 내분으로 약해진 토번은 둔황을 되찾지 못했고, 9세기 말까지 이어진 지리멸렬한 분쟁 끝에 결국 왕조 자체가 소멸하고 말았다. 이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사이의 길목에서 토번이 차지하던 위상이 크게 축소되었음을 의미한다. 토번의 쇠퇴로 당나라는 서북변 방어에 대한 압박을 덜게 되었고, 이후 이 지역에서는 당과 토번 간 대규모 전쟁이 재발하지 않았다.
발해에 대해서는, 사주귀당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발해는 당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갈등이나 변화가 없었다. 발해 사신들은 당 선종 조에 여러 차례 장안에 와서 조공 무역을 행했고, 당도 변함없이 발해 왕을 책봉하는 등 외교 의례를 이어갔다. 당이 둔황을 회복한 사실은 발해로서도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당의 국력이 일부나마 회복될 경우 거란이나 흑수말갈 등 공통의 북방 위협에 대처하는 데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실제로 9세기 중엽 발해는 북쪽 흑수말갈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거란 및 돌궐과 연대하였고, 당나라는 이에 대응하여 신라 및 흑수말갈과 제휴하는 복잡한 국제 역학이 펼쳐졌는데 , 이러한 상황에서 당-발해 간에 직접 충돌이 없었던 것은 양국 관계가 비교적 안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사주귀당 이후 당과 발해의 우호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발해 선왕 대인수 역시 당 의종으로부터 “발해국왕”으로册封받아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 따라서 발해 입장에서 사주귀당은 당나라의 체면이 선 사건 정도로 여겨졌을 뿐, 발해의 대당 전략이나 영토 분쟁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신라의 경우도 이 사건으로 인한 특별한 정세 변화는 없었다. 신라는 9세기 중반 이미 해상 무역으로 번영하고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하대(下代) 귀족 연립체제의 혼란 조짐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사주귀당으로 당이 서역에서 권위를 회복한 것은 신라로서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안정이라는 긍정적 신호였을 것이다. 신라 조정은 당 선종에게 축하 사절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기존대로 친선을 이어갔다. 예컨대 신라 승려들이 당과 인도를 오가는 육로 순례길(비단길)이 다시 안전해지면서, 당 선종 연간에 신라의 승려 혜초가 남긴 여행기 등이 전해지는 등 문화 교류가 지속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신라는 당과의 우호 관계가 확고해진 가운데, 발해와는 때때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직접적인 군사 충돌 없이 외교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 그러므로 사주귀당 사건은 신라의 외교 정책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했고, 동아시아 해역의 정세에도 직접적인 영향은 미미했다. 다만 당나라의 권위가 일정 부분 회복됨에 따라, 신라는 후일 9세기 말 내부 혼란기에도 당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계속 의지하게 되었다.
요약하면, 사주귀당 사건은 당나라 자체의 국력 회복과 대외 위신 제고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주변국에 대한 영향은 간접적이고 제한적이었다. 당나라는 이 사건으로 서역에서의 체면을 세워 한때 “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나, 정작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구도(남북국 시대)에는 큰 변화를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과 주변국들은 모두 이 사건을 계기로 상호 간 평화와 교류를 한동안 지속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지역 안정을 촉진한 측면이 있다.
5. 사주 지역(四鎭)의 지리적 범위와 전략적 중요성
사주귀당 사건의 무대가 된 사주(沙州) 지역은 오늘날 중국 간쑤성 둔황시와 그 주변의 광범한 지역을 의미한다. 특히 이곳은 역사적으로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 불리는 좁고 긴 지리적 통로에 해당한다. 하서회랑은 북쪽으로 고비 사막, 남쪽으로 치롄산(祁連山)맥 사이에 위치한 길이 약 1,000km의 통로로서, 중국 내지에서 중앙아시아로 향하는 실크로드 육로의 핵심 구간이었다. 당 태종 이래 이 지역에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설치되고 쿠처·쿠찰 등 안서 4진이 경영되는 등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으나, 8세기 후반 토번에 빼앗겨 당의 영향력이 끊어진 바 있다 . 848년 장의조가 되찾은 사주 지역은 그동안 상실되었던 이 하서회랑을 다시 확보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장의조 세력이 장악한 11개 주의 범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심지인 사주(沙州)는 둔황으로서 사막 오아시스 도시이며, 과주(瓜州)는 사주의 동쪽에 인접한 안서성(安西城, 옛 명칭 고창국) 일대였다 . 이주(伊州)는 오늘날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하미(哈密)에 해당하고, 서주(西州)는 투르판(吐魯番)에 해당하며, 두 지역 모두 실크로드의 중간 거점이었다 . 감주(甘州)는 간쑤성 장예(張掖) 일대로 오아시스 농경지대였고, 숙주(肅州)는 주천(酒泉) 인근 지역이었다 . 란주(蘭州)는 황하 상류의 중요한 군사 도시(현재의 간쑤성 성도)이며, 산주(鄯州)는 청해성 동부의 시닝(西寧) 부근, 하주(河州)는 간쑤성 임하주(臨夏州), 민주(岷州)는 간쑤성 딩시(定西) 지역에 해당한다 . 마지막으로 확주(廓州)는 청해성 동쪽의 맹서(孟塞) 일대이다 . 이처럼 사주를 포함한 11개 주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간쑤성 중부에서 서쪽으로 신장 변경, 남쪽으로 청해 고원에 이르는 광활한 범위에 걸쳐 있었다 . 이는 장의조 정권의 판도가 동서 약 4,000리에 달하고 호구 수 백만을 거느린 거대한 규모였음을 뜻한다 .
이 지역은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큰 요충지였다. 우선 경제적으로 하서회랑을 차지함으로써 동서 무역로의 관문을 확보하게 된다. 당나라는 사주 지역을 통해 비단, 차, 도자기 등을 서역으로 수출하고 대신 말, 보석, 향료 등을 수입할 수 있었다. 둔황은 예로부터 비단길의 거점 도시로서 많은 대상(隊商)들이 오가던 곳이었으며, 다시 당의 지배하에 들어온 후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군사적으로도 사주 지역은 국경 방어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둔황과 과주 일대는 서쪽에서 중국 본토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므로, 이곳을 장악하면 토번이나 기타 유목 세력이 함부로 간쑤 방면으로 쳐들어올 수 없었다. 실제로 장의조는 귀의군을 거느리며 수차례 토번의 잔여 세력과 회흘 등 외부 세력의 침략을 물리쳐, 당의 서북 변경 수비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 지리적으로 볼 때도, 하서회랑은 비단길 뿐 아니라 불교 전파의 길목이기도 했다. 불교 승려들과 순례자들은 당의 통제가 회복된 둔황을 거쳐 인도, 중앙아시아와 교류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당대 불교 문화의 국제적 교류가 재점화되었다. 둔황 막고굴에 새롭게 대형 석굴들이 조성된 것도 이 시기 장의조 정권의 안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
한편 질문에 언급된 “四鎭(사진)”이라는 표현에 대해 부연하면, 이는 문자 그대로는 “네 개의 진(鎭)”, 즉 네 개의 요새 도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사주귀당 사건 문맥에서 “사진(四鎭)”은 종종 당나라가 서역에 설치했던 네 개의 군사 거점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당 고종은 7세기 중엽 서역에 안서 4진(安西四鎭)이라 불리는 쿠차(龜茲), 쿠찰或焉耆, 카스가르(疏勒), 호탄(于闐) 등을 경영하였으나, 8세기 중반 이들 거점이 모두 토번에 함락된 바 있었다 . 848년 장의조의 활약으로 당이 되찾은 사주 지역은 이 안서 4진보다 다소 동쪽에 치우쳐 있지만, 하서 회랑의 4개 주요 거점(둔황, 안서, 숙주, 감주 등)을 회복했다는 의미에서 “사진 귀당”이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즉, 둔황과 그 인근의 네 요새 도시가 당나라 품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요컨대 사주 지역은 지경학적으로도 군사적・경제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았으며, 이를 확보한 것은 당나라 국방과 교역에 커다란 이익이 되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당 선종은 장의조에게 하서 11주의 절도사직을 주어 해당 지역을 책임지게 하였고, 장의조는 둔황에 근거를 두고 “서쪽으로는 이우(伊吾, 하미)까지, 동쪽으로는 영무(靈武, 닝샤)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하서 일대를 굳건히 지켜냈다 .
6. 현대 사학계의 해석 및 이 사건에 대한 주요 학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사주귀당 사건과 장의조의 업적에 대해 다양한 분석과 평가를 내놓고 있다. 먼저, 사료적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정사(正史)에 비교적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회창 연간(841~846) 이후 당말의 혼란기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여, 장의조의 행적을 별도의 열전으로 서술하지 못했고 선종·의종의 본기(本紀)에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쳤다 . 실제로 두 당서 모두 장의조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자치통감』 등 후대 편찬 사서에서도 그의 활약상이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 이에 따라 장기간 정사에서 잊혀진 영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 그러나 20세기 초 둔황 막고굴에서 다량의 문헌과 비문이 발견되면서 장의조 정권에 대한 일차 사료가 새롭게 빛을 보게 되었다. 청말의 금석학자 나진옥(羅振玉)은 이러한 둔황 출토자료를 토대로 『보당서 장의조전』을 저술하여, 정사에 누락되거나 잘못 전해진 내용을 바로잡았다 . 이를 통해 오늘날 학계는 장의조와 귀의군 정권의 실상을 훨씬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둔황 굴내 벽서(壁書)인 「막고굴기(莫高窟記)」에는 “대중 2년(848) 장의조가 서역의 여러 부족을 거느려 토번을 몰아내고 하서 11주를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의 공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 또한 막고굴 제156굴의 벽화에는 장의조 부부가 위용 있게 행차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장의조 정권의 위세와 둔황 사회의 안정을 보여준다 . 이러한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현대 연구자들은 장의조의 생애와 그가 세운 귀의군 정권을 재평가하고 있다.
학계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장의조 정권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일부 역사가는 장의조의 귀의군 정권이 사실상 독립 왕국과 다름없는 자치 정권이었다고 해석한다 .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당 중앙이 군사・재정 지원을 거의 못 했기 때문에, 장의조 일가는 당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자체적인 연호와 관제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귀의군 정권은 당 멸망 후에도 5대 10국 시기까지 존속하며 장씨 일족이 세습 통치했는데, 이는 중앙정부와 느슨한 봉건적 관계를 유지한 채 사실상 반독립 상태로 존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례로 당 멸망 이듬해인 908년 장의조의 아들 장승풍(張承奉)은 스스로 **“서한 금산국(西漢金山國)”이라는 국호를 칭하고 왕을 자처하기도 했는데, 학자들은 이를 중원 왕조에 대한 반란이라기보다 주변의 티베트・회흘 등 세력에 대비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장의조 정권은 표면상 당의 번진(藩鎭)이었으나 실제로는 서역에서 한족 문명권을 유지한 독자적 정권이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의조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장의조는 일개 지방호족의 신분으로 대제국 토번에 맞서 둔황을 해방하고, 곧바로 당 조정에 귀순함으로써 자신의 사리보다는 대의를 선택한 인물이다. 중국 역사에서 외국의 지배를 물리친 세력이 자력으로 독립하지 않고 중앙왕조에 자진 귀속한 사례는 매우 드문데, 장의조가 바로 그런 예라는 것이다. 예컨대 남북조 시대의 양만춘(梁満春)이나 수당교체기의 선모(冼夫人) 등이 중앙에 귀부한 사례가 있지만, 이들은 중앙정부의 군사압박 또는 회유가 작용한 경우였다. 반면 장의조는 당이 전혀 강요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속국의 예”를 취한 점이 특이하며, 이를 두고 후대에 “고독한 충신(孤臣赤子)”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 장의조 본인은 당 황실에 인질로 잡혀간 형 장의담을 끝내 구하지 못하고 평생 둔황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의 후손들은 60여 년간 귀의군을 유지하며 끝까지 중원 왕조에 충성을 표방하였다 . 이러한 행적은 당시 혼란기의 군웅들 가운데 특히 도덕적 명분을 지킨 사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장의조 정권이 지속된 덕분에 둔황을 비롯한 하서 지역 각족(各族) 주민들은 토번 노예 지배의 고통에서 벗어나 비교적 평화롭고 번영된 시기를 누릴 수 있었다고 현대 학자들은 분석한다 . 실제로 귀의군 시대 둔황에서는 한인, 토번계, 위구르계 주민들이 공존하며 경제활동과 종교활동을 자유롭게 영위했고, 막고굴 석굴 예술도 재흥할 수 있었다. 이는 장의조와 후계자들의 안정적 통치가 가져온 긍정적 효과라 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현대 사학계에서는 사주귀당 사건을 당 말 혼돈기 속 한족 세력이 거둔 값진 성취로 평가하는 한편, 그 한계도 함께 지적하고 있다. 장의조는 뛰어난 군사·지도력으로 토번을 몰아내고 당의 옛 영토를 회복한 영웅적 인물로 조명되며, 그의 귀의군 정권은 중화 문명의 변경 수호라는 의의를 인정받는다  . 그러나 동시에 그 정권은 당 제국의 통치 체계에서 실질적으로 이탈된 분권 세력이었고, 당 왕조 부흥에 근본적 기여를 하지는 못한 채 역사적 삽화로 끝났다는 현실도 아울러 언급된다 . 결국 사주귀당 사건은 당나라 역사상의 마지막 영광이자 마지막 번쩍임으로 볼 수 있다. 둔황의 귀의군 정권은 당이 멸망한 후에도 한동안 존속하며 현지 문화를 꽃피웠지만, 10세기 초 거란이 등장하고 서하(西夏)가 흥기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점차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오늘날 장의조와 사주귀당 사건은 당말 혼란기에 지역 사회를 지켜낸 책임감 있는 리더십의 사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중국학계에서는 장의조를 민족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 이러한 다양한 해석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실은, 사주귀당 사건이 동서 교류로 번성했던 당 제국의 서방 교두보를 되찾은 역사적 쾌거였다는 점이다 . 비록 일시적이지만 그 성공으로 인해 둔황의 등불은 당대가 저물 때까지 계속 밝게 타오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주귀당 사건은 그 역사적 의미를 지금까지도 빛내고 있다.
참고 자료: 『旧唐书』 권18, 『新唐书』 권4; 돈황 막고굴 제156굴 벽화 및 「莫高窟記」 비문 ; 羅振玉, 補唐書張議潮傳; 郭晔旻, 「晚唐第一名将张议潮」 国家人文历史 (202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발해, 신라 항목  ; 『자치통감』 권24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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