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하나의 유물, 세 개의 시선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된 고대의 칼, 칠지도(七支刀). 일곱 개의 가지가 뻗어 나온 독특한 형상과 금으로 상감된 60여 자의 명문(銘文)은 이 칼이 단순한 무기가 아님을 증명한다. 4세기 후반 백제가 제작하여 왜(倭)에 보낸 것으로 알려진 이 유물은 고대 한일 관계사를 규명할 수 있는 '타임캡슐'이자, 동시에 한·중·일 삼국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역사 전쟁'의 최전선이다.
칠지도를 둘러싼 핵심 쟁점은 "누가,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주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된다. 한국은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下賜)'한 것이라 주장하며, 이는 당시 백제의 우월한 국력과 문화적 영향력을 상징한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백제'가 '천황'에게 '헌상(獻上)'한 것이라 주장하며, 이를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강력한 증거로 내세운다. 중국 학계는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지만, 명문에 새겨진 연호 '태화(泰和)'를 근거로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칠지도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본고는 이 세 가지 시선을 심층적으로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칠지도 명문의 판독 내용과 핵심 쟁점을 살펴보고, 이어 한국의 '하사설', 일본의 '헌상설', 그리고 중국의 '제3자적 관점'을 각각의 논리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정치적 함의까지 다각도로 조명할 것이다. 나아가 유사한 주장을 펴는 국가들을 묶어 그 논리의 대립 구도를 명확히 하고, 왜 1600년 전의 낡은 칼 한 자루가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규명하는 것을 넘어, 역사가 어떻게 현재의 국가 정체성과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Ⅰ. 칠지도 명문(銘文)의 내용과 핵심 쟁점
칠지도 명문은 칼의 앞면과 뒷면에 금상감 기법으로 새겨져 있으며, 오랜 세월로 인해 일부 글자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이는 해석의 차이를 낳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현재까지의 연구를 종합한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면 (表)]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鋼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 판독: 태■ 4년 11월 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모든 병사를 물리칠 수 있으니, 공손한 후왕(侯王)에게 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 해석: (한국 측) 태화 4년(백제 고유 연호 또는 동진 연호 차용) 11월 16일 병오라는 상서로운 날에, 잘 벼린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고 있으니, 제후왕(侯王)에게 하사하기에 마땅하다.
* 해석: (일본 측) 태화 4년... (중략)... 후왕에게 공급하기에 마땅하다. (여기서 후왕은 백제왕 자신을 낮추어 칭하는 것이거나, 왜의 여러 제후 중 하나를 의미한다고 주장)
[뒷면 (裏)]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 판독: 선세 이래로 이러한 칼은 없었다. 백제 왕세자가 성스러운 음(音)으로 태어난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 해석: (한국 측) 예로부터 이런 칼은 없었다. 백제 왕세자(훗날의 근구수왕)가 상서롭게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왜왕 '지(旨)'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으니 후세에 길이 전하며 자랑하여라. (명령형)
* 해석: (일본 측) 예로부터 이런 칼은 없었다. 백제 왕세자가 왜왕의 성스러운 뜻(聖音)에 따라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왜왕의 명령을 받아 제작했다는 의미)
[핵심 쟁점]
* '태화(泰和)' 연호의 주체: 이 연호가 백제의 독자적인 연호인가, 아니면 중국 동진(東晉)의 연호(366-371년)를 차용한 것인가? 이는 당시 백제의 위상과 직결된다.
* '후왕(侯王)'의 의미: '후왕'이 백제보다 한 단계 아래의 제후왕을 의미하는가(하사설의 근거), 아니면 백제왕이 스스로를 겸칭한 표현인가(헌상설의 근거)?
* '성음(聖音)'의 해석: '성음'이 '백제 왕세자의 상서로운 탄생'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왜왕의 성스러운 가르침이나 명령'을 의미하는가?
* '위왜왕지조(爲倭王旨造)'의 주체와 목적: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구절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 목적이 하사인가 헌상인가?
* '전시후세(傳示後世)'의 어조: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는 마지막 구절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의 어조인가, 아니면 간절한 바람의 표현인가?
이러한 쟁점들은 각국의 역사적 입장과 맞물려 '하사설'과 '헌상설'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담론을 형성했다.
Ⅱ. 한국의 해석: '하사설(下賜說)' - 동아시아의 맹주, 백제의 선물
한국 학계의 정설은 '하사설'이다. 이는 4세기 후반 백제가 동아시아의 해상 강국으로서 강력한 국력과 높은 문화 수준을 바탕으로, 당시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뎠던 왜에게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주장이다.
1. 명문 해석에 기반한 논증
* '공공후왕(宜供供侯王)': '후왕(侯王)'이라는 표현은 황제(皇帝)나 왕(王)보다 한 단계 낮은 제후를 칭하는 용어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위계질서에서 자신을 '왕'이라 칭하는 국가가 다른 나라의 군주를 '후왕'이라 칭하며 물건을 준다는 것은, 두 국가 사이에 명확한 상하 관계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백제왕이 왜왕을 '후왕'으로 지칭한 것은 백제가 왜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제후국으로 인식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공공(供供)'이라는 표현 역시 '공급하다', '주다'라는 의미로, 하사의 의미를 뒷받침한다.
* '백제왕세자... 위왜왕지조(百濟王世子...爲倭王旨造)': 제작의 주체가 '백제 왕세자'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는 훗날 근구수왕이 되는 인물로 추정되며, 왕위 계승자가 직접 나서서 왜왕을 위한 칼을 만들었다는 것은 백제 측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행위임을 보여준다. 만약 헌상이었다면 "왜왕의 명을 받들어(奉命)"와 같은 표현이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위(爲)'는 '~를 위하여'라는 뜻으로, 시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전시후세(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는 구절은 명백한 명령형 어미로 해석된다.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하명(下命)의 형태로, 백제왕이 왜왕에게 "내가 이 귀한 칼을 주니, 대대손손 가보로 삼고 나의 은혜를 잊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헌상하는 입장이었다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랍니다(願傳示後世)"와 같은 겸양의 표현을 썼을 것이다.
2. 역사적 맥락과 고고학적 증거
* 4세기 백제의 위상: 칠지도가 제작된 4세기 후반은 근초고왕(346-375)의 치세로, 백제의 최전성기였다. 근초고왕은 남쪽으로 마한을 완전히 병합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중국 동진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요서(遼西), 산둥(山東), 규슈(九州) 지방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해상 활동을 펼친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 당시 왜의 상황: 반면, 당시 일본 열도의 야마토(大和) 정권은 아직 통일된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고고학적으로도 당시 한반도의 철기 문화, 특히 백제의 금속 공예 기술은 왜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다. 백제의 선진 기술과 문물은 왜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실제로 수많은 백제계 도래인(渡來人)들이 왜에 정착하여 기술과 문화를 전파했다는 사실이 여러 유물과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 일방적인 문화 전파: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의 문화 전파는 일방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과 국력이 뒤떨어진 왜가 백제에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조공을 받았다는 일본 측의 주장은 역사적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진국인 백제가 후진국인 왜에게 통치력을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인 칠지도를 하사하며 자신들의 정치적·문화적 영향권 아래에 편입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하사설'은 칠지도 명문의 합리적인 해석과 4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 및 고고학적 증거에 기반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평가받는다.
Ⅲ. 일본의 해석: '헌상설(獻上說)' - 대일본의 위상과 임나일본부의 증거
일본 학계의 전통적이고 지배적인 입장은 '헌상설'이다. 이는 백제가 왜의 야마토 정권에 복속하여 칠지도를 조공품으로 바쳤다는 주장으로, 메이지 시대 이후 제국주의적 역사관과 맞물려 형성되었으며,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핵심 논거로 활용되어 왔다.
1. 《일본서기(日本書紀)》 기록에 대한 의존
일본 헌상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자국의 역사서인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 조의 기록이다.
> "백제의 구저(久氐) 등이 와서 칠지도 하나와 칠자경(七子鏡) 하나 등 여러 보물을 바쳤다(獻)"
>
일본 학계는 이 기록에 등장하는 '칠지도'가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와 동일한 것이며, '헌(獻)'이라는 글자가 명백히 '바쳤다'는 의미이므로 칠지도는 헌상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물 자체의 명문보다 후대에 쓰인 자국의 역사 기록을 더 우위에 두고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2. 명문의 자의적 해석
일본 측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명문의 내용을 꿰어 맞추기 위해 다소 무리한 해석을 시도한다.
* '후왕(侯王)': 백제왕이 스스로를 낮추어 '후왕'이라 칭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야마토 정권의 군주를 황제와 같은 더 높은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군주가 외교 문서에서 스스로를 제후로 칭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며, 다른 어떤 사료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 '성음(聖音)'과 '위왜왕지조(爲倭王旨造)': 뒷면의 '백제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 구절을 "백제 왕세자가 상서롭게 태어났다"가 아니라, "백제 왕세자가 (왜왕의) 성스러운 가르침(聖音)을 낳았다(生)" 즉, '성스러운 가르침을 받들었다'고 해석한다. 이를 통해 '위왜왕지조'는 "왜왕의 뜻(旨)을 받들어 만들었다"는 의미가 되어, 칠지도가 왜왕의 명령에 의해 제작된 헌상품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생(奇生)'은 '기이하게 태어나다', '상서롭게 태어나다'는 의미로 쓰이는 고유한 숙어이며, '성음'을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문맥상 부자연스럽다.
* '태화(泰和)' 연호: 명문의 '태화' 연호를 동진의 연호로 인정하면서, 이는 백제가 중국의 제후국이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국의 제후국인 백제가 또 다른 강대국인 왜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논리.
3. '임나일본부설'과의 연계
헌상설은 '임나일본부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4~6세기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군사·통치 기관을 설치하고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칠지도를 백제가 왜에게 바친 '조공품'으로 규정하는 것은, 당시 백제-왜의 관계가 왜의 우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물증이 된다. 즉, 칠지도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근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제국주의 사관의 핵심 도구로 기능해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임나일본부설은 한국 학계는 물론,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서구 학계에서도 그 실체가 부정되고 있다. 《일본서기》 기록의 연대 문제, 고고학적 증거의 부재 등을 이유로 현재는 허구적인 학설로 평가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그 핵심 논거인 칠지도 헌상설 역시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Ⅳ. 중국의 시선: '동진 하사설' 또는 중재적 관점
중국 학계는 칠지도 논쟁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중립적이거나 제3자적인 관점을 취한다. 중국 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명문에 기록된 '태화(泰和)' 연호이다.
* '태화' 연호의 중요성: 중국 동진(東晉)은 366년부터 371년까지 '태화'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칠지도의 '태화 4년'은 369년에 해당하며, 이는 근초고왕이 고구려와 큰 전쟁을 벌이고, 동진과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372년)하기 직전의 시점이다.
* '동진 하사설': 일부 중국 학자들은 칠지도가 백제나 왜가 아닌, 동진에서 제작하여 백제를 통해 왜에게 전달된 하사품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당시 동진은 북방의 5호 16국과 대치하면서 남쪽의 백제, 왜와 같은 해상 세력과의 연대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동진 황제가 백제와 왜의 군주 모두를 자신의 제후로 책봉하면서, 그 상징물로 칠지도를 하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후왕'은 동진 황제의 입장에서 백제왕과 왜왕을 모두 지칭하는 표현이 된다.
* 백제의 연호 차용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칠지도의 제작 기술이나 양식이 백제 고유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동진 제작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백제가 당시 동아시아의 선진국이자 중화 문명의 중심이었던 동진의 연호를 '차용'하여 칼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당시 주변국들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으며, 이는 반드시 완전한 종속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제는 동진과의 외교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국의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시선은 칠지도 논쟁을 백제와 왜의 양자 관계가 아닌, 중국을 포함한 4세기 동아시아의 다자적인 국제 질서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백제가 동진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백제가 동진 중심의 '천하(天下)'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이것이 곧 백제가 왜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었다는 일본의 헌상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진이라는 선진 문명과 교류하던 백제가, 그렇지 못했던 왜에게 문명의 전달자로서 시혜적인 입장에서 칠지도를 주었을 가능성을 더 높여준다.
Ⅴ. 유사 주장 국가 묶기 및 대립 구도 분석: '하사' 對 '헌상'의 역사 전쟁
칠지도 해석을 둘러싼 한·중·일의 입장을 종합해 볼 때, 명확한 대립 구도를 형성하는 것은 한국의 '하사설'과 일본의 '헌상설'이다. 중국의 관점은 이 두 주장의 배경이 되는 국제 질서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할 뿐, 어느 한쪽과 뚜렷한 유사성을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칠지도 논쟁은 본질적으로 한일 양국의 역사관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대립 구도 1: 국가 위상과 관계 설정]
* 한국 (하사설): 백제(상위) > 왜(하위)
* 4세기 백제는 한반도의 패자이자 동아시아의 해상 강국.
* 왜는 백제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던 미개한 정치체.
* 칠지도는 선진국이 후진국에게 내리는 '선물'이자 '복속의 상징'.
* 일본 (헌상설): 왜(상위) > 백제(하위)
* 4세기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강대국.
* 백제는 왜의 번국(藩國) 또는 동맹국으로서 군사적 원조를 구걸하던 입장.
* 칠지도는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바치는 '조공품'이자 '충성의 맹세'.
이처럼 양국의 주장은 4세기 백제와 왜의 관계를 180도 다르게 설정하고 있으며, 이는 자국의 고대사를 영광스럽게 기술하려는 민족주의적 욕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대립 구도 2: 핵심 증거의 차이]
* 한국 (하사설): 유물 자체의 명문(金石文) 중시
* 1차 사료인 칠지도 명문의 '후왕', '전시후세' 등 객관적인 텍스트 분석에 집중.
* 고고학적 증거와 당시의 국제 정세 등 거시적 맥락을 통해 명문 해석을 뒷받침.
* 일본 (헌상설): 후대 역사서(文献史料) 중시
* 8세기에 편찬된 자국 역사서 《일본서기》의 '헌(獻)'이라는 한 글자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
* 명문의 내용은 역사서의 기록에 부합하도록 자의적으로 해석.
이는 역사 연구 방법론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한국 측이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1차 사료를 우선시하는 반면, 일본 측은 자국 중심의 서사를 담은 2차 사료를 기준으로 유물을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일본서기》가 천황 중심의 국가관을 확립하기 위해 편찬된, 상당 부분 신화와 전설, 그리고 정치적 의도가 가미된 사서라는 점을 간과한 결과이다.
[대립 구도 3: 정치·이데올로기적 함의]
* 한국 (하사설): 식민사관 극복과 문화적 자부심
*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고, 일제에 의해 왜곡된 고대사를 바로 세우려는 탈식민주의적 성격.
* 고대 한민족이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파한 문화 강국이었음을 강조하며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
* 일본 (헌상설): 제국주의 사관의 계승과 우익 이데올로기
* 메이지 시대 이래로 '정한론(征韓論)'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던 제국주의 역사관의 연장선.
* 일본이 고대부터 한반도에 대해 우월한 입장이었다는 인식을 재생산하며, 현대 일본 우익의 역사 수정주의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
결국 칠지도 논쟁은 과거의 사실을 규명하는 학술적 논의를 넘어, 현재의 국가 정체성과 자존심, 그리고 미래의 역사 교육 방향까지 결정하는 치열한 '역사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결론: 칠지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1600년의 시간을 넘어 우리 앞에 서 있는 칠지도. 일곱 개의 칼날은 한·일 양국의 얽히고설킨 역사를 상징하는 듯 복잡하게 뻗어 있다. 명문에 대한 심층 분석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의 '하사설'이 일본의 '헌상설'보다 훨씬 높은 역사적 개연성과 논리적 타당성을 지닌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4세기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가 제철 기술과 국력이 미약했던 왜에게 자신들의 우월한 문명을 과시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최고 수준의 기술로 제작한 위세품을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다. 반면, 일본의 헌상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자국 사서에 의존하고 명문을 자의적으로 왜곡하며,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인 '임나일본부설'을 고수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칠지도는 백제가 왜에게 칼을 '바쳤다'는 굴욕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고대 한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문명 교류'의 자랑스러운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여전히 헌상설을 고수하는 이유는, 칠지도가 단순한 유물을 넘어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역사관의 근간을 이루는 상징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칠지도는 과거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교훈을 동시에 던져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하나의 유물도 그것을 해석하는 자의 관점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실증적인 증거에 기반하여 역사적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이다. 칠지도를 둘러싼 논쟁이 소모적인 역사 전쟁을 넘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의 역사를 존중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건강한 학술 토론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칠지도의 녹슨 칼날 위에는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과거의 숙제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길이 함께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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