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라는 이름의 밀림

이른 아침, 서울 도심의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도심은 잠시 고요하고, 나는 그 적막 속을 헤치며 나아간다. 적막한 거리 위에는 내 발걸음 소리만 조용히 퍼져 나간다. 간간이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며 이른 아침의 차분한 공기를 전한다. 주변에는 유리와 강철로 만들어진 고층 빌딩들이 빽빽한 숲처럼 늘어서 있다. 거대한 건물들은 마치 하늘을 향해 솟은 나무들 같고, 투명한 유리 표면은 거울이 되어 아침 하늘과 이웃 건물들의 모습을 조용히 비추고 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빌딩 사이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남산과 그 위의 타워는, 마치 밀림 속 유일하게 남은 자연의 봉우리 같다. 사방은 각지고 차가운 구조물 투성이지만,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초록의 나무와 푸른 하늘 조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딱딱한 콘크리트 틈바구니마다 작은 생명이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볼 때면, 유리와 강철의 밀림에도 숨쉬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이 뛴다.

발밑의 인도는 회색이지만 그 위로 떨어진 아침 햇살은 따스하다. 가로수 한 그루의 그림자가 인도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 잎사귀 사이로 햇빛이 반짝이며 쏟아지고,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빛과 그림자를 바라본다. 매일같이 바삐 지나치던 거리인데, 이렇게 천천히 걸어보니 평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철제 기둥에 기대 선 채 커피를 마시는 사람, 유리창 너머 사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이의 모습, 출근길에 서로 스치며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 모두 이 거대한 도시의 풍경을 이루는 작은 존재들이다.

문득 이 밀림 한가운데 홀로 선 듯한 고독감이 밀려온다. 빌딩 숲은 웅장하지만 그 사이에 선 나는 한없이 작게 느껴진다. 수많은 사람과 자동차 소리가 뒤섞인 거리에서도, 때때로 나는 스스로 고요한 섬처럼 느껴진다. 유리로 된 높은 벽들은 서로를 비추면서도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막을 세우는 것만 같다. 가까이 있어도 멀기만 한 도시의 군중 속에서, 나는 나만의 속도로 숨을 고르며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이 고독 속에서도 도시의 숨은 아름다움들이 나를 위로한다. 유리 건물에 비친 아침 노을의 색,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는 작은 나뭇가지, 인적 드문 골목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분주한 일상 틈에서도 문득 눈에 들어오는 이런 장면들이 마음을 흔든다. 유리와 강철로 가득한 풍경 속에 비친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넓고 투명하다. 나는 스스로 이 밀림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에 살짝 미소 짓는다.

천천히 걷는 이 아침, 서울이라는 거대한 밀림은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늘 보던 거리이지만 오늘은 다르게 다가온다. 복잡한 일상에 익숙해진 나의 눈에도, 고개를 들면 새로운 풍경이 있다. 거울 같은 창들에 비친 내 모습과 그 너머의 하늘을 번갈아 보며 생각한다. 이 거칠고 차가운 도시에도 분명 따뜻한 숨결과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고. 비록 빌딩의 그늘 아래 때로는 외롭더라도, 내가 걷는 이 길 위에는 매일 조금씩 다른 빛이 내리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