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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정치

일본의 기독교 수용 실패에 대한 심층 분석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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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개신교 선교 실패 사례와 요인


역사적 배경: 일본의 기독교 선교는 16세기 중반 가톨릭 선교사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규슈 등 남부 지역의 다이묘(영주)들은 서양 무기 확보를 위해 정치적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이며 집단 개종하기도 했습니다 .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금교령을 내려 수만 명의 신자가 순교하고 17세기 이후 250년 가까이 기독교는 지하로 숨어들었습니다 .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으로 개항 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복음을 전했지만, 전도 대상의 폭이 좁았습니다. 메이지 시기 선교는 주로 무사 계급 출신의 엘리트 지식인 층에 국한되어 전개되었는데, 이는 일본 인구의 약 5%에 불과한 상류 지식층이었습니다 . 서민과 농민층보다는 도시의 지식인 중심 선교가 이뤄지다 보니, 기독교는 일반 대중과 유리되어 “서양 문명의 종교”, “지식인·엘리트의 종교”라는 인식이 자리잡았습니다 . 그 결과 기독교 교세는 인구의 1% 내외의 소수에 머물렀고,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일본 교회의 약점으로 남았습니다 .

문화적 요인: 일본 초창기 개신교 선교는 언어와 문화 측면에서도 한계를 보였습니다. 선교 초기 일본어 성경이나 자료가 부족하여 중국어 성경이나 서적에 의존했는데, 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한문 소양이 있는 일부 지식층뿐이었습니다 . 또한 서양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영어 교육과 근대 문물 소개를 병행했는데, 이는 기독교를 일본인들에게 하나의 문화교양이나 학문처럼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 기독교 신앙 자체보다는 서구문명 학습 수단으로 여겨지면서, 일반 서민들은 문턱 높은 종교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 반면 한국의 선교 사례를 보면, 초기부터 **평민들의 언어(한글)**와 민중 전도를 중시하여 여성·노동자 등 폭넓은 계층에 스며들었습니다 . 이처럼 대중 친화적 접근의 부재는 일본 선교의 초반 실패 요인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민중 속에 파고들어 뿌리내렸기에 일제의 탄압기에도 국민과 함께하는 교회로 성장했지만 , 일본 교회는 엘리트 중심으로 출발하여 역동성과 대중성이 부족한 “고급 종교” 이미지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제도적·정치적 요인: 메이지 정부는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종교 정책을 통해 기독교 전파를 제한했습니다. 명목상 1889년 메이지 헌법에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황국신민으로서 의무를 해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습니다 . 이는 국가(천황)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는 어떤 종교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기독교 개종이 곧 국가에 대한 불충으로 간주될 소지를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우치무라 간조가 1891년 교육칙어에 대한 최경례(最敬禮)[^1]를 거부했다가 *“불경 사건”*으로 해직된 사례는, 천황제 국가에서 기독교인의 양심과 국가충성이 충돌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일본에서 한때 일어났던 1880년대의 부흥 운동마저 급속히 사그라들었습니다 . 국가 권력이 신사참배를 비롯한 국가신도 의례를 강제하면서, 여기에 협조하지 않는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은 의심과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압력 속에 일본 교회는 위축되거나 타협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복음 전파는 정체되었습니다 .

구체적 사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미군정 치하(1945~1952년)에서 일본에는 잠시 **“기독교 붐”**이 일기도 했습니다. 연합군 총사령부(GHQ)를 이끌었던 맥아더 장군의 권고로 수백 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한때 기독교인 총리(예: 카톨릭 신자인 마츠오카 노리타케 총리 등)와 도쿄대 총장이 배출되며 교회마다 새 신자로 붐볐습니다 . 미션스쿨이 전국에 세워지고 예배당에 인파가 몰렸으나, 이는 외세 주도의 피상적 현상이었습니다. 1952년 연합군이 철수하고 일본이 자주권을 회복하자, 불과 몇 년 사이 교회 출석자들은 급감하고 사회 전반의 관심도 식어버렸습니다 . 나카무라 사토시 교수는 이를 예수가 말한 **“돌밭에 뿌린 씨”**에 비유했습니다. 외부 영향으로 수동적·일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기에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아 금세 시들었다는 분석입니다 . 결국 일본교회는 자생적 부흥 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채 외형적 성장 기회를 놓쳤고, 기독교 인구는 다시 소수로 회귀했습니다. 현재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는 약 1백만 명 수준에 불과합니다 .

2. 신도(神道)와 천황제의 구조적 관계 – 정치종교적 기능과 기독교 거부 배경


국가신도의 형성: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근대 국가를 구축했습니다. 근대 이전부터 일본 사회에는 왕실(천황가)을 중심으로 한 신도 신앙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메이지 정부는 이를 적극 정치화하였습니다. 메이지 초기에 추진된 신불분리(神佛分離) 정책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뒤섞여 공존하던 신도와 불교를 인위적으로 분리해, 불교는 민간의 일반 종교로 격하하고 신도는 국가의 공적 이념으로 격상하는 조치였습니다 . 그 결과 신도는 사실상의 국교(國敎) 지위를 얻게 되었고, 천황을 정점으로 **“제정일치(祭政一致)”**적 국민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 메이지 정부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신도를 국가의식(儀式)으로 규정했습니다 . 이를 통해 국가신도를 초종교적 시민종교로 삼아 모든 국민에게 강요할 수 있었고, 학교 교육과 시민 윤리에까지 천황 숭배와 신사 참배를 내면화시켰습니다  . 다시 말해,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신도는 정치와 종교가 교묘히 결합된 세속 종교(Civil Religion)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개인 신앙 여부와 무관하게 공유하는 집단적 종교성, 즉 시민종교로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자리잡은 것입니다 .

천황제의 정치종교적 기능: 이러한 천황제 국가에서는 천황이 현인신(現人神), 즉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천황은 국가 공동체의 영적 통합의 상징이자 제사의 최종 주체로서 존재했고, 국민의 궁극적 충성 대상이 되었습니다 . 일종의 가족국가 관념 아래 국민은 천황을 부모처럼 받들며 일체감을 느꼈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 곧 종교적 경건과 동일시되었습니다 . 이 체제에서 기독교와 같은 초월적 유일신 신앙은 구조적으로 뿌리내리기 어려웠습니다. 우선 신앙의 충돌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므로, 천황이나 신사에 대한 종교적 예배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국가신도 체제하에서는 신사 참배와 황실에 대한 존경 의례가 애국의식으로 요구되었습니다. 이를 거부하면 국가 방침에 불순응하는 행위로 낙인찍혔고 ,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비애국적 외래 종교 취급을 받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우치무라 간조의 사례처럼, 천황에 대한 최고 예절을 행하지 않는 기독교인의 양심적 선택은 곧 불경죄가 되었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했습니다 . 또한 일본 사회에 강력한 동조 압력이 작용한 것도 정치종교로서 천황제의 영향력 덕분입니다. **“열에 아홉이 따르는 것을 한 사람이 거스르지 않는다”**는 와(和) 문화 속에서, 국민 100명 중 99명이 따르는 천황 숭배를 거부하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사회적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 결국 많은 일본인들이 주류에서 이탈하게 되는 기독교 개종을 꺼리게 되었고, 이는 일본에서 기독교 수용이 저조했던 핵심 배경입니다.

기독교 수용 거부의 역사적 맥락: 일본 지배층은 기독교를 서양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의심해 배척한 측면도 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금교령을 내린 명분 중 하나는, 가톨릭 신자가 늘어나는 것이 서양 열강의 침략 명분이 될까 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근대 이후에도 남아, 메이지 정부는 기독교를 공식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가능한 억제하려 했습니다. *“기독교는 배척하지 않지만, 일본의 국체(國體)를 해치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인식이었습니다. 이는 종교의 자유와 국가 충성 사이에 모호한 경계선을 그어두어, 필요시 국가가 종교를 제약할 여지를 남긴 것입니다 . 결국 천황제 국가에서는 기독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가 사회 중심부로 편입되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제한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연합국의 지시로 천황의 신격화가 공식 부인되고 정교분리가 이루어졌지만, 천황제가 가진 문화적 권위와 신도의 영향력은 일본인의 정신문화에 깊이 남았습니다. 천황은 더 이상 신이 아니어도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헌법에 자리하고 있고, 신사는 전통문화로 포장되어 여전히 많은 일본인의 생활 속에 녹아 있습니다. 따라서 전후에도 일본 다수 국민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버리고 서양을 추종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정서가 남았습니다. 한마디로, 천황제와 신도를 중심으로 확립된 일본인의 집합정체성이 강력했기 때문에, 그와 대립각을 세우는 기독교를 대대적으로 수용할 사회심리적 여지가 매우 적었던 것입니다.

3. 한국·일본·중국의 종교와 정치 – 비교문화론적 분석


동아시아 세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특히 기독교·불교·유교의 영향과 국가 통합 메커니즘, 정체성 형성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아래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를 비교 분석합니다.

① 국가 통합 메커니즘의 역사:
• 한국: 전통적으로 조선 왕조는 성리학적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유교 정치질서를 구축했습니다. 유교 예치(禮治)를 통해 왕과 사대부 계층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종교적인 권위보다는 윤리와 예법이 국가 통합의 접착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조선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면서 유교 이념의 통합력이 급속히 약화되었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 시기(1910~1945)를 거치며 전통 질서는 붕괴되고 민족 정체성이 위협받자, 기독교가 새로운 민족 통합의 영적 기반으로 부상했습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3·1 독립운동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민족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해방 후에도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국가 건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요컨대 한국에서는 외래 종교인 기독교가 민족 정체성과 결합하여 국가 통합에 기여하는 독특한 경로를 밟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인구의 약 **3분의 1 (32%)**이 기독교 신자로, 동아시아에서 유례없이 높은 기독교 비중을 보입니다 . 이는 한국 종교지형의 중층다원성(무속·유교·불교에 더해 기독교까지 포함)의 결과이며, 이러한 다원성 속에서도 기독교가 중요한 축을 이루는 점이 일본·중국과 크게 대비됩니다 .
• 일본: 일본은 앞서 살펴보았듯 천황제와 신도를 근간으로 근대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메이지 시대 국가신도는 일본인에게 민족신화와 황실 숭배로 일체감을 부여하며 국가 통합의 역할을 했습니다 . 불교와 유교도 일본에 전래되었으나, 메이지 정부는 고의적으로 전통 신도를 부흥시키고 불교·유교 등은 민간 신앙이나 도덕 차원으로 재편했습니다 . 특히 불교는 신도와 역사적으로 습합(習合)되어 있었지만 분리 정책으로 국가 의례 영역에서 배제되었고, 유교는 통치 윤리로는 영향을 주었으나 종교적 색채는 적었습니다. 그 대신 **“일본 정신(和魂)”**을 내세워 서구 문물을 수용하면서도 정신적 기틀은 전통으로 유지한다는 노선을 취했습니다 . 이처럼 **전통 신앙(신도)**과 **국가 권력(천황제)**이 결탁한 구조적 특성 때문에, 일본에서는 기독교나 외래 이념이 국가 정체성의 중심을 차지할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패전 후 미국의 영향으로 민주주의와 평화헌법이 도입되었지만, 일본 정치문화에는 여전히 비공식적 시민종교로서 일본 민족주의와 천황제가 잔존합니다. 가령 일본의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행위는 법적으로는 종교와 국가의 분리 원칙에 어긋날 수 있으나, 많은 국민은 이를 애국 행위로 인식합니다. 이는 국가신도의 맥락이 현재까지도 정치 상징으로 살아있음을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서구의 보편종교인 기독교의 토착화가 더욱 어려웠음을 시사합니다.
• 중국: 중국은 오랫동안 **유교(儒教)**를 통치 이념으로 한 관념적 통합을 이루어왔습니다. 중국 황제는 *“천자(天子)”*로 불리며 하늘의 권위를 부여받은 정치적 주체였고, 유교적 세계관 속에서 **충(忠)과 효(孝)**의 윤리가 사회 통합을 뒷받침했습니다. 다만 유교는 제사와 예법을 통해 삶의 방식에 스며든 문화적 종교였지, 조직적인 교단 종교는 아니었습니다. 민간에서는 불교와 도교, 그리고 다양한 민간 신앙이 두루 신봉되며 다원적인 종교 전통이 공존했습니다. 19~20세기 격변기에 서구 열강의 침략과 기독교 선교가 활발해지자, 중국에서는 양면적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한편으로 기독교는 소수 지식인과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사상적 기반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화단 운동(1900)처럼 외세와 기독교에 대한 격렬한 반발을 낳기도 했습니다. 1949년 공산화 이후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 무신론을 내세워 종교를 철저히 통제·억압했습니다. 마오쩌둥 시대엔 사실상 공산당 이데올로기와 마오 주석 개인숭배가 준-종교적인 국가 통합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후 개혁개방으로 일부 종교의 부활이 허용되었으나, 중국 정부는 여전히 종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경계합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외세 개입의 통로로 의심하여 정부 승인 하의 삼자교회만 인정하고, 지하 교회는 탄압하는 이중적 정책을 취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사회변화 속에서 기독교 신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현재 약 수천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대략 인구의 5% 안팎) . 하지만 중국에서는 종교가 공식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통합 기제로 기능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국가가 **“사회주의적 핵심가치”**를 통해 국민 통합을 도모하고, 전통문화(예: 공자 사상)를 재발견하여 시민윤리의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중국은 정치이념 중심의 통합을 추구하며 종교는 개인 신앙 영역으로 한정되고, 이는 종교적 다원성은 존재하지만 기독교와 같은 외래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제약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② 종교와 정체성의 관계:
• 한국의 정체성과 종교: 한국은 근대 이후 민족주의와 기독교가 부분적으로 결합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곧 근대적 민족 정체성의 구성 요소로 자리잡은 측면이 있습니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에 교회는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의 근거지였고, 해방 이후에도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믿는 것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어긋나지 않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수 종교 중 하나로 뿌리내린 기독교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발전과 정의를 담론하는 도덕적 기반 역할도 했습니다. 물론 한국에는 불교, 유교, 무속 등 다양한 전통이 함께하고 있어 종교적으로 복합 정체성을 지닙니다. 하지만 개인의 종교 선택이 곧 국가나 민족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한민족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강하지만, 그것이 특정 종교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에 종교 선택의 자유가 비교적 보장되며, 특히 민주화 이후 종교는 사적 영역에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 일본의 정체성과 종교: 일본인의 정체성에는 오랫동안 신도와 천황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인 = 천황의 신민”*이라는 등식이 교육과 사회규범을 통해 내면화되었고, 전통 신사 행사는 곧 애국 의례로 장려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 구조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은 단순한 개인 신앙 변화가 아니라, 일본인의 정체성을 탈피하는 것으로 간주되곤 했습니다. 특히 19~20세기에 “기독교인이 된다 = 서양인이 되려 한다”는 편견이 있었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황무지(皇務, 천황께 바치는 충성)를 저버린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전후 일본은 공식적으로 세속 국가가 되었지만, 많은 일본인은 여전히 자신을 **무종교(無宗敎)**라고 하면서도 전통 의례에는 적극 참여합니다  . 예를 들어 새해에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조상의 불단 앞에 절하며, 심지어 결혼식은 기독교식 예식을 올리는 등 복합적 정체성을 보입니다 . 일본에서는 이러한 생활양식이 특별한 모순으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는 일본인의 종교성이 문화적 습속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 측면에서 보면, 일본인은 하나의 조직적 종교에 깊이 귀의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한 종교 활용을 해왔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처럼 독점적 충성을 요구하는 종교는 일본인의 다중적 정체성과 충돌하여 널리 퍼지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일본에서는 **“일본 문화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하게 작용하여, 개인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일상적 정체성 범주에서 이탈하는 행위처럼 인식된 것입니다.
• 중국의 정체성과 종교: 중국인의 정체성은 중화문명에 대한 자부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큰 축으로 합니다. 역사적으로 한족(漢族)의 정체성은 유교적 문화질서를 공유하는 데서 나왔고, 불교나 도교는 생활신앙으로 자리했을 뿐, 민족 정체성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20세기 들어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이 부상하면서, 애국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이 새로운 정체성 서사가 되었습니다. 현대 중국에서는 종교 신앙보다 **애국/애당(愛黨)**이 상위의 가치로 요구됩니다. 따라서 종교 활동도 중국 특색 사회주의 이념 아래에서 허용 범위를 넘지 않아야 하며, 외부 영향에 종속되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기독교의 경우, 중국 정부는 종교 단체에 민족주의적 자율성을 강조하여 “중국화된 기독교”를 지향합니다 .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이 중국인 정체성과 신앙인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정부가 허용하는 삼자교회는 애국적 입장을 견지해야 하고, 가정교회(지하교회)는 탄압 위험 속에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종교를 개인 영성이나 윤리적 틀로 받아들일 뿐, 공개적으로 정체성의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이는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 등 다른 종교에도 적용되는 현상입니다. 대체로 중국인의 정체성에서 종교는 부차적 정체성으로 간주되고, 국가/민족 정체성이 우위를 차지합니다. 이러한 환경은 중국에서 기독교 교세가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공동체의 주류 정체성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③ 종교 수용성의 차이:
한국, 일본, 중국의 종교 수용성은 앞서 언급한 역사·정치·문화적 차이로 인해 상당히 다릅니다. 한국인은 비교적 종교 선택에 개방적이고, 특히 기독교에 대한 수용성이 높았습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위로부터의 개혁 실패와 민중의식의 각성 속에 기독교는 근대화와 민족 부흥의 대안으로 호소력을 가졌습니다. 일제시대의 억압을 겪으면서 종교의 자유에 대한 열망도 컸고, 한국 교회의 헌신적 사회활동은 해방 후에도 대중적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렇듯 긍정적 이미지와 사회적 연계 덕분에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이례적으로 기독교 신자가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 반면 일본인은 새로운 종교에 냉담하거나 신중한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 문화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와(和), 즉 조화와 통일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매우 경계합니다 . 기독교 신앙처럼 가족이나 주변과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선택에 대해 일본인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설령 기독교 교리에 공감해도 사회적 갈등을 우려하여 표면적인 참여에 그치거나, 문화적 요소만 차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앞서 언급했듯 일본인의 약 절반 이상이 교회식 결혼식을 올리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등 기독교 문화요소는 수용하지만, 정작 신앙 고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현상이 그 예입니다 . 중국의 경우는 정부 차원의 제한이 큰 변수입니다.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실용적이고 공동체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가 있어 종교 간 관용도 높은 편이지만, 공산당 정권 하에서는 공식 허가된 종교 외에는 적극적인 포교나 개종 활동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중국인들의 종교 수용성은 정치 상황에 민감하며, 개인들이 숨어서 신앙을 갖거나 아예 무종교로 표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최근 수십년 사이 경제 성장에 따른 가치관 혼란 속에서 기독교가 정신적 대안을 제시하며 젊은 층과 지식인 중심으로 개종자가 늘었습니다. 단, 이러한 흐름도 체제 순응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대규모 확산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정리하면, 한국은 다원 전통 속에서도 기독교를 적극 흡수하여 국가와 사회 발전의 파트너로 삼았고, 일본은 자국의 전통 종교와 세속 이념을 고수하며 기독교를 주변부 종교로 묶어두었으며, 중국은 국가이념이 종교를 압도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만 기독교의 성장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문화적 차이는 각국의 정치제도와 문화심리가 종교 수용에 미치는 영향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4. 21세기 이후 일본의 기독교 선교 전략과 한계


현대 일본 사회의 환경 변화: 21세기 일본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세속화된 사회입니다. 전후 경제성장과 함께 종교는 개인의 내면 영역으로 철저히 분리되었고, 정치 권력이 특정 종교를 동원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종교의 탈정치화 환경에서는, 기독교 선교가 직면했던 과거와 같은 정치적 탄압은 없지만 반대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새로운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수의 일본인은 스스로를 무종교라고 인식하며, 종교를 삶의 필수 요소로 여기지 않습니다 . 특히 청년 세대의 종교적 무관심이 두드러집니다. 정보기술 발달과 개인주의적 문화 확산으로, 젊은층은 전통 공동체나 제도권 종교로부터 독립적인 개인 취향의 영성을 추구하거나 아예 초월적 관심 없이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이지만, 일본에서는 기존에도 낮았던 종교 참여율이 젊은 세대에서 더욱 떨어져 교회 고령화 현상이 심각합니다 . 실제 통계에 따르면 일본 가톨릭의 경우 성직자 수 감소와 신자 고령화로 위기 의식이 대두되고 있고, 개신교 교회들도 젊은 신자 유입이 적어 교인 평균 연령이 높아지는 문제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저출산으로 인해 잠재적 신자층 자체가 감소하는 인구구조 문제도 선교의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21세기 선교 전략의 모색: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본의 선교 전략은 과거와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첫째, 문화적 접근과 대화가 강조됩니다. 전면적인 복음 제시보다는 관계 형성과 봉사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여는 전략이 채택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많은 선교단체들이 영어 회화 클래스, 음악·예술 행사, 카페 사역 등 비종교적 공간을 활용해 젊은이들과 소통하려 합니다. 둘째, 현지화와 토착화 노력이 이루어집니다. 서구식 예배 형식보다 일본인의 정서에 맞는 명상적이고 조용한 예배, 일본어 정서에 공감할 수 있는 찬양과 설교를 개발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 교회가 비판받아온 지나친 서구 문화 의존을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입니다. 셋째, 소그룹 공동체와 제자훈련을 통해 개인주의 속 외로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가족 같은 유대감을 제공하려는 전략도 있습니다. 현대 일본 청년들 중에는 사회의 경쟁과 압박 속에 고립감을 느끼는 층이 있는데, 교회가 따뜻한 커뮤니티를 제공한다면 이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실제로 도쿄 등지에서는 5~10명 규모의 가정교회나 셀 모임으로 시작해 서서히 신앙을 나누는 형태의 선교가 시도되고 있습니다.

선교의 한계와 실패 요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선교는 여전히 여러 한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첫째, 앞서 언급한 사회적 무관심의 벽입니다. 일본인 대다수는 종교 없이도 윤리적으로 선량하고, 실제 삶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주의적 문화가 약화된 도시생활에서 교회는 일종의 낯선 커뮤니티일 뿐이며, 굳이 시간을 들여 참여할 동기가 약합니다. 둘째, 일본 특유의 눈치 문화와 신중함이 전도의 속도를 더디게 만듭니다. 이를테면 서구나 한국에서 효과적이었던 대형 집회나 거리 전도 방식이 일본에서는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1995년 도쿄 돔에서 개최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당시, 많은 준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즉석에서 신앙 결단을 하지 않고 망설이는 모습이 두드러졌습니다 . “다음에 더 생각해보겠다”는 식으로 미루는 성향이 강해, 단기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셋째, 교회 내부의 문제로 평신도 지도력 부족과 교단 분열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약 8천 개 교회가 있으나 그 중 1천여 곳은 상주 목회자가 없고 평신도들만 예배를 지키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 이는 헌신된 인력이 부족하고, 신학생 수급이 원활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또한 교회들이 연합하여 전략을 수립하기보다는 작은 교파들로 나뉘어 독자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 협력 선교에 한계가 있습니다. 넷째, 일본 사회의 종교에 대한 경계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95년 옴진리교(Aum Shinrikyo)의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등으로 인해, 일본인들 사이에는 종교=위험하거나 광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비록 기독교는 그런 위험과 거리가 멀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모든 종교단체에 대한 본능적 거리두기가 생겼습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나는 특정 종교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며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려 하기에, 적극 권유를 부담스러워합니다.

다변화하는 전략과 한국교회의 역할: 이런 가운데 일본 선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는 시도로, 한국 교회 및 제3세계 교회들의 협력이 활발합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의 교회들은 일본을 선교 최우선 이웃으로 여기고,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 왔습니다 . 그러나 문화 차이를 몰라 생긴 시행착오도 있습니다. 일부 한국 선교팀이 한국식 열정만을 앞세워 “십자가 군병” 식의 공격적 전도를 시도했다가 일본인들의 마음 문을 얻지 못한 사례도 보고됩니다 . 이에 따라 한국 교계 내에서도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섬김의 자세를 갖춘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의 세계관(다종교 혼합성, 현실 존중 등)에 맞춰 변증법적 대화로 복음을 전하거나 , 일본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하면서 배우는 자세로 동역하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한편 일본 교회 자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기독교 문화는 퍼졌지만, 정작 기독교 복음은 스며들지 않았다”는 뼈아픈 평가처럼 , 교회가 사회 속에서 삶으로 본을 보이고 영적 깊이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반성이 일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교세 확장보다는 진정성 있는 신앙 공동체를 세워가는 데 주력하고, 작은 변화일지라도 꾸준히 추구하는 씨 뿌리는 선교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습니다.

미래 전망: 21세기 일본의 기독교 선교는 여전히 도전 투성이입니다. 개인주의적 라이프스타일, 영적 무감각, 전통문화의 강한 관성, 여기에 최근 부상하는 신국가주의 경향까지 모두 선교의 어려움을 더합니다. 나카무라 사토시 교수가 지적하듯, 일본 사회는 현재 우경화 조짐을 보이며 1920~30년대와 유사한 분위기가 일부 감지된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 이는 잘못하면 과거처럼 교회가 국가주의와 타협하거나, 반대로 다시 소수로 위축될 위험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선교의 성공 여부는 결국 일본 교회 자체의 각성과 성숙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 강요된 변화가 아닌, 일본인 신자들 내부에서 영적 갱신 운동이 일어나고 삶의 자리에서 섬김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신뢰를 쌓을 때, 비로소 복음이 뿌리내릴 토양이 마련될 것입니다 . 1907년 한국 평양대부흥과 같은 자발적 회개와 기도운동이 일본에 일어나길 기대하는 시각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 요약하면, 21세기 일본 선교의 전략은 장기적 관점에서의 토양 개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빠른 결실보다는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가고, 작지만 꾸준한 변화를 축적해가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일본 교회와 세계 교회가 함께 지혜를 모은다면, 언젠가 일본도 기독교 수용의 1% 벽을 넘어서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1]: 최경례(最敬禮): 메이지 시대 학교에서 황실 사진이나 교육칙어에 대해 허리 90도로 깊이 굽혀 예를 표하던 의식. 우치무라 간조는 신앙 양심상 이것을 우상숭배로 여겨 거부했다가 불경죄로 몰렸다.  

참고자료: 일본 기독교 선교 역사 강연   , 선교사의 현장 보고  , 종교사회학적 연구  , 동아시아 종교 비교 통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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