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후사란?
무후사 (武侯祠)란 일반적으로 제갈량을 모시는 도교 사당입니다. 중국 쓰촨성 청두 시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고 원조입니다. 무후라고 하면 보통 제갈량을 말합니다. 이 사당은 촉나라의 승상 제갈량과 그의 임금 유비를 함께 모신 사당입니다.
무후사는 제갈량의 출사표인 '한소열묘'에서 따온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출사표는 중국 3대 명문 중 하나로 꼽힙니다. 무후사는 제갈량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후세 사람들이 그의 작위였던 무향후를 줄여 그를 (제갈)무후라고 불렀던 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삼국시대 촉한의 명재상 제갈량을 모시는 이곳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가 합장된 사당입니다. 삼국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고 싶다면 무후사를 찾아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제갈량 업적
제갈량은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으로, 다양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주요한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유비와의 만남: 그 유명한 고사 삼고초려의 중심인물인 제갈량은, 유비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2. 촉한 건국: 유비를 도와 촉한을 건국하고 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3. 오나라와의 동맹: 오나라와 동맹을 맺어 위나라와 맞서 싸웠습니다. 특히 주유와 연합하여 조조에 크게 승리한 적벽대전이 유명합니다.
유비와 제갈량
유비와 제갈량은 삼국시대 중국의 역사적 인물로, 그들 간의 관계는 흥미로운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1. 초기 관계
- 유비는 제갈량을 찾아가기 전에 다양한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이고, 유비와의 관계를 점점 친밀하게 만들었습니다.
2. 중간 단계
-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고 백제성에서 탁고를 할 때, 제갈량은 그를 지지하고 도와주었습니다.
- 다른 인물들도 유비의 성공에 기여했지만, 제갈량의 역할은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3. 마지막 단계
- 유비가 병으로 쓰러진 후, 제갈량은 유비의 후사를 도와야 했습니다.
- 유비는 제갈량을 신뢰하고,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유비와 제갈량은 '수어지교'라는 표현처럼 물과 물고기처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정치적, 군사적 재능을 인정하며 그를 지지했고, 유비 역시 제갈량을 믿고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삼국시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출사표 전문 및 해석
(전문)
臣亮言
신량언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선제창업미반 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피폐 차성위급존망지추야.
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연시위지신 불해어내 충지지사 망신어외자 개추선제지수우 욕보지어폐하야.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성의개장성청 이광선제유덕 회홍지사지기 불의망자비박 인유실의 이색충간지로야.
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궁중부중 구위일체 척벌장비 불의이동.
若有作姦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 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약유작간범과급위충선자 의부유사 논기형상 이소폐하평명지리 불의편사 사내외이법야.
侍中侍郞 郭攸之費褘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 以遺陛下.
시중시랑 곽유지비위동윤등 차개량실 지려충순 시이선제간발 이유폐하.
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우이위궁중지사 사무대소 실이자지 연후시행 필능비보궐루 유소광익.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 是以衆議擧寵爲督.
장군상총[9] 성행숙균 효창군사 시용어석일 선제칭지왈능 시이중의거총위독.
愚以爲營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必能使行陳和睦 優劣得所也.
우이위영중지사 사무대소 실이자지 필능사행진화목 우열득소야.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친현신 원소인 차선한소이흥륭야.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친소인 원현신 차후한소이경퇴야.
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
선제재시 매여신론차사 미상불탄식통한어환영야.
侍中尙書長史參軍 此悉貞良死節之臣 願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시중상서장사참군 차실정량사절지신 원폐하친지신지 즉한실지륭 가계일이대야.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신본포의 궁경남양 구전성명어난세 불구문달어제후.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선제불이신비비 외자왕굴 삼고신어초려지중 자신이당세지사 유시감격 수허선제이구치.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閒 爾來二十有一年矣.
후치경복 수임어패군지제 봉명어위난지간 이래이십유일년의.
先帝知臣謹愼 故臨崩 寄臣以大事也.
선제지신근신 고임붕 기신이대사야.
受命以來 夙夜憂歎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수명이래 숙야우려 공부탁불효 이상선제지명 고오월도로 심입불모.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興復漢室 還于舊都.
금남방이정 병갑이족 당장솔삼군 북정중원 서갈노둔 양제간흉 흥부한실 환우구도.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차신소이보선제 이충폐하지직분야.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褘允之任也.
지어짐작손익 진진충언 즉유지위윤지임야.
願陛下 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원폐하 탁신이토적흥복지효 불효즉치신지죄 이고선제지령.
若無興德之言 則責攸之褘允等之咎 以彰其慢.
약무흥덕지언 즉책유지위윤등지구 이창기만.
陛下亦宜自謀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폐하역의자모 이자추선도 찰납아언 심추선제유조.
臣不勝受恩感激.
신불승수은감격.
今當遠離 臨表涕零 不知所言.
금당원리 임표체읍 부지소언.
建興五年 平北大都督 丞相 武鄕侯 領益州牧 知內外事 諸葛亮
건흥오년 평북대도독 승상 무향후 영익주목 지내외사 제갈량
(해석)
신 량이 삼가 아뢰옵니다.
선제(先帝)께옵서는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중도에 붕어[11]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오니, 참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하오나 폐하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안에서 나태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런 무사들이 밖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제께옵서 특별히 대우해주시던 황은을 잊지 않고 오로지 폐하께 보답코자 하는 마음 때문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들의 충언에 귀를 크게 여시어 선제의 유덕을 빛내시오며, 충의지사들의 의기를 드넓게 일으켜 주시옵소서. 스스로 덕이 박하고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셔서 그릇된 비유를 들어 대의를 잃으시면 아니되오며, 충성스레 간하는 길을 막지 마시옵소서.
또한, 궁중과 부중이 일치 단결하여 잘한 일에 상을 주고 잘못된 일에 벌을 줌에 다름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옵니다. 만일 간악한 짓을 범하여 죄 지은 자와 충량한 자가 있거든 마땅히 각 부서에 맡겨 상벌을 의논하시어 폐하의 공평함과 명명백백한 다스림을 더욱 빛나게 하시옵고, 사사로움에 치우치셔서 안팎으로 법을 달리하는 일이 없게 하시옵소서.
시중 곽유지와 비의, 시랑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하오며 뜻과 생각이 고르고 순박하여 선제께서 발탁하시어 폐하께 남기셨사오니, 아둔한 신이 생각하건대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들에게 여쭤보신 이후에 시행하시면 필히 허술한 곳을 보완하는 데 크게 이로울 것이옵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에 밝은지라 지난 날 선제께서 상총을 시험삼아 쓰신 뒤 유능하다 말씀하시었고,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그를 도독으로 천거했사오니, 아둔한 신의 생각으로는 군중의 대•소사는 상총에게 물어 결정하시면 반드시 군사들 사이에서 화목할 것이오며,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모두 적재적소에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다할 것이옵니다.
전한 왕조가 흥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멀리했기 때문이오며, 후한 왕조가 무너진 것은 탐관오리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 때문입니다. 선제께옵서는 생전에 신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일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셨사옵니다. 시중과 상서, 장사와 참군 등은 모두 곧고 밝은 자들로 죽기로써 국가에 대한 절개를 지킬 자들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들을 가까이 두시고 믿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머지않아 한실은 다시 융성할 것이옵니다.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로 남양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제께옵서는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시어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을 받들었사옵니다. 그 후 한실의 국운이 기울어 싸움에 패하는 어려움 가운데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하며 위난한 상황에서 명을 받들어 일을 행해온 지 어언 스물하고도 한 해가 지났사옵니다.
선제께옵서는 신이 삼가고 신중한 것을 아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탁고의 대사를 맡기셨사옵니다. 신은 선제의 유지를 받은 이래 조석으로 근심하며 혹시나 그 부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여 선제의 밝으신 뜻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끝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사옵니다. 이제 남방은 평정되었고 인마와 병기와 갑옷 역시 넉넉하니, 마땅히 삼군[13]이 북으로 나아가 중원을 평정시켜야 할 것이옵니다.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대한 황실을 다시 일으켜 옛 황도로 돌아가는 것만이 바로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드리는 신의 직분이옵니다. 손익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 드릴 일은 이제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몫이옵니다.
원컨대 폐하께옵서는 신에게 흉악무도한 역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킬 일을 명하시고, 만일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엄히 다스리시어 선제의 영전에 고하시옵소서. 또한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의 허물을 책망하시어 그 태만함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옵소서. 폐하께옵서도 마땅히 스스로 헤아리시어 옳고 바른 방도를 취하시고, 신하들의 바른 말을 잘 살펴 들으시어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좇으시옵소서.
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을 올림에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건흥 5년(227년) 평북대도독 승상 무향후 영익주목 지내외사 제갈량
후출사표 전문 및 해석
(전문)
先帝慮 漢賊不兩立 王業不偏安 故託臣以討賊也
선제려 한적불양립 왕업불편안 고탁신이토적야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敵强也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以託臣而弗疑也
이선제지명 양신지재 고지신벌적 재약적강야 연불벌적 왕업역망 유좌이대망 집여벌지 시이탁신이불의야
臣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 思惟北征 宜先入南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幷日而食 臣非不自惜也
신수명지일 침불안석 식불감미 사유북벌 의선입남 고오월도로 심입불모 병일이식 신비부자석야
顧王業不可偏安於蜀都 故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 而議者謂爲非計 今賊適疲於西 又務於東 兵法乘勞 此進趨之時也 謹陳其事如左
고왕업불가편안어촉도 고모위난이봉선제지유의 이의자위위비계 금적적피어서 우무어동 병법잉로 차진추지시야 근진기사여좌
高帝明幷日月 謀臣淵深 然涉險被創 危然後安 今陛下未及高帝 謀臣不如良平 而欲以長策取勝 坐定天下 此臣之未解一也
고제명병일월 모신연심 연섭험피창 위연후안 금폐하미급고제 모신불여량평 이욕이장책취승 좌정천하 차신지미해일야
劉繇王朗各據州 論安言計 動引聖人 群疑滿腹 衆難塞胸 今歲不戰 明年不征 使孫策坐大 遂幷江東此臣之未解二也
유요왕랑각거주 논안언계 동인성인 군의만복 중난새흉 금세부전 명년부정 사손책좌대 수병강동차신지미해이야
曹操智計 殊絶於人 其用兵也 彷彿孫吳 然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逼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僞定一時耳
조조지계 수절어인 기용병야 방불손오 연인어남양 험어오소 위어기련 핍어여양 기패북산 태사동관 연후위정일시이
況臣才弱 而欲以不危而定之 此臣之未解三也
황신재약 이욕이불위이정지 차신지미해삼야
曹操五攻昌覇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 而李服圖之 委任夏侯 而夏侯敗亡 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臣之未解四也
조조오공창패불하 사월소호불성 임용이복 이이복도지 위임하후 이하후패망 선제매칭조위능 유유차실 황신노하 하능필승 차신지미해사야
自臣到漢中 中間期年耳 然喪趙雲 陽群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合 鄧銅等 及曲長屯將七十餘人 突將 無前 賓 靑姜 散騎 武騎一千餘人
자신도한중 중간기년이 연상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등 급곡장둔장칠십여인 돌장 무전 빈 청강 산기 무기일천여인
此皆數十年之內 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 若復數年 則損三分之二也 當何以圖敵此臣之未解五也
차석수십년지내 소규합사방지정예 비일주지소유 약복수년 즉손삼분지이야 당하이도적차신지미해오야
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則住與行 勞費正等 而不及早圖之 欲以一州之地 與賊持久 此臣之未解六也
금민궁병피 이사불가식 사불가식 즉왕여행 노비정등 이불급조도지 욕이일주지지 여적지구 차신지미해륙야
難平者 事也 昔先帝敗軍於楚 當此之時 曹操拊手 謂天下已定 然後先帝東連吳越 西取巴蜀 擧兵北征 夏侯授首
난평자 사야 석선제패군어초 당어지사 조조부수 위천하이정 연후선제동련오월 서취파촉 거병북정 하후수수
此操之失計 而漢事將成也 然後吳更違盟 關羽毁敗 秭歸蹉跌 曹丕稱帝 凡事如是 難可逆見
차조지실계 이한사장성야 연후오갱위맹 관우훼패 자귀차질 조비칭제 범사여시 난가역견
臣鞠躬盡力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竟睹也.
신국궁진력 사이후이 지어성패리둔 비신지명소능역경도야.
(해석)
선제께옵서는 "한나라와 역적은 서로 양립할 수 없으며, 황업(皇業)은 천하의 한 귀퉁이로만 안주할 수 없다" 하시어 신에게 역적의 토벌을 당부하셨나이다. 선제께서 그 밝으심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니 역적을 벌함에 신의 재주가 얕고 역적은 강함을 아셨사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아니한다면 황업 또한 망할 터이니,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린다면 누구와 더불어 역적을 징벌하오리까. 이 때문에 신에게 탁고하시고 의심하지 않으신 것이옵니다.
신은 선제의 명을 받은 이래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사옵니다. 북쪽을 칠 생각을 하니 우선 남방부터 평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난 건흥 3년(225년) 5월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의 양식으로 이틀을 먹는 고생을 한 것은 신이 몸을 아끼지 않음이 아니라, 황업을 생각하오니 촉 땅에서 편안히 지내서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어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선제의 유지를 받든 것이옵니다. 그런데 따지기 좋아하는 무리들은 이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고 하나이다. 이제 역적은 마침내 서쪽에서 고달파지고, 다시 동쪽에서 오나라의 군사들과 싸워 지쳐 있사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피로할 때를 타 공격하라 하였으니[15], 지금이 바로 과감하게 나아갈 때라 사료되옵니다. 이에 신은 삼가 몇 가지를 아뢰옵나이다.
옛날에 고제께옵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고 신하들의 재주가 연못처럼 깊었으나 험난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입으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해지셨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옵서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신료들 또한 감히 장량과 진평같은 자가 없는데도,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좋은 계책으로만 승리하여 가만히 앉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수 없는 첫 번째 일이옵니다.
또한 유요와 왕랑은 각각 주와 군을 다스리며 안위와 계책을 말하면 입만 열면 성인을 운운하고 벗속에는 의심이 가득하여 여러 어려움 앞에서는 겁내고 두려워 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올해도 싸우지 않고 다음해에도 싸우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손책이 앉아서 강동을 차지하였으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일이옵니다.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 그 용병술은 손자와 오자를 닮았으나 남양에서 어려움에 처하고 오소에서 험한 일을 겪고 기련에서 위태로움에 처했으며 여양에서 핍박을 당하고 북산에서 거의 패배하고 동관에서는 죽을 뻔한 뒤에야 비로소 한때나마 거짓으로 천하를 평정했는데, 재주도 미약한 신하들이 어찌 위태로움을 겪지 아니하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일이옵니다.
조조는 다섯 번이나 창패(昌覇)를 치고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였고 네 번이나 소호를 건넜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복(李復)을 등용하였으나 오히려 배반당하고 하후연에게 일을 맡겼으나 하후연이 패망하였사옵니다. 선제께서 항상 뛰어난 인물이라고 칭찬하신 조조조차 이렇게 실패하곤 하였는데, 하물며 신 같이 아둔한 사람이 어찌 쉽게 이기기만을 바라겠나이까.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네 번째 일이옵니다.
신이 한중에 온 지 이제 1년 남짓 되었는데, 그 동안 조운,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 등 70여 명의 곡장과 둔장을 잃어 선봉장으로 앞장설 사람이 없사오며 종수, 청강, 산기, 무기 등 1,000여 명을 잃었사오니 이는 모두 수십 년 동안 사방에서 모아온 정예병이지 익주 한 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만약 또 다시 몇 해를 보내면 셋 중 둘을 잃게 될 터이니 그때는 무엇으로 역적을 도모하겠사옵니까.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섯 번째 일이옵니다.
바야흐로 백성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사오나 대사를 그만둘 수는 없사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지키고 있는 것이나 나아가서 싸우는 것이나 그 노고와 비용은 같은데도, 속히 도모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 주에만 머물러 역적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사오니 이는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섯 번째 일이옵니다.
무릇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나 천하의 일인지라, 옛날 선제께옵서 초 땅에서 패하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천하는 평정되었다고 좋아했사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제께옵서는 동쪽의 오월과 손을 잡으시고, 서쪽으로는 파촉을 취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쳐서 하후연의 목을 베셨사옵니다. 이는 바로 조조의 실수로 한나라의 대업이 이루어지려 하였사오나 동오가 맹약을 어겨 관우를 죽이고 선제께옵서는 자귀에서 패하시오니 조비가 황제를 참칭했사옵니다. 이렇듯 일은 미리 헤아리기가 어렵사옵니다. 이제 신은 엎드려 몸을 바치고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일할 뿐이오니[27], 일의 성패와 이해에 대하여서는 신이 미리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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