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가지 모양 칼날에 금상감 명문이 새겨진 칠지도(복제품). 4세기경 백제에서 제작되어 왜왕(倭王)에게 전달된 이 칼은 독특한 칼날 형태와 길이 75cm 내외의 대형 의례용 철검이다 . 칠지도는 한반도의 백제와 일본 열도의 왜국(야마토) 사이에 오간 외교 공물로서, 그 명문(銘文)에 새겨진 문구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학계의 오랜 논쟁 대상이 되어왔다 . 본고에서는 칠지도의 정치적 의미, 군사·외교적 맥락, 사료 해석 문제를 각각 검토하고, 백제-왜 관계를 종속·동맹·균형외교 중 어느 유형으로 볼 수 있을지 구조적으로 비교한다.
정치적 의미: 하사품인가 진상품인가?
칠지도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핵심 쟁점은 이 칼이 백제 왕실에서 왜국 왕실로 보내진 방식과 위상이다. 다시 말해,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는가, 아니면 “진상”했는가 하는 해석 차이가 있다  . 일본의 전통적 시각에서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52년조의 기록에 주목하여 “백제 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바쳤다(헌상했다)”는 주장을 펴왔다 . 이는 칠지도가 왜국에 대한 백제의 조공품 또는 선물로서, 백제가 외교적으로 열위에 있음을 나타낸다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반면 한국(남·북한)의 다수 학자들은 1960년대 이후 “**백제 왕세자가 이 칼을 만들어 **후왕(侯王)인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을 제기하며, 칠지도가 백제의 우위에서 왜국에 내린 하사품이라는 해석을 강조해왔다 . 이러한 **‘헌상설’ 대 ‘하사설’**의 해석 대립은 양국의 민족주의적 자존심과도 맞물려 오랫동안 평행선을 그려왔다 .
한일 학계의 해석 차이는 칠지도 명문 속 특정 구절의 해독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칼 앞면 명문에 등장하는 “供侯王” 부분을 한국 측은 “제후국의 왕(후왕)”으로 읽어 왜왕을 백제에 예속된 제후로 해석한다  . 이는 백제국왕이 자신의 제후국 왕(왜왕)에게 칼을 내려주는 상하 관계로 파악한 것이다. 반면 일본 측은 이 구절을 공손하고 덕망있는 왕에 대한 찬사 정도로 간주하거나, 중국식 겸양 표현으로 해석하여 왜왕의 종속성을 단정하지 않는다 . 또한 뒷면 명문에 나오는 “百濟王世子奇生聖音” 구절도 해독 차이가 있는데, 한국 학자 다수는 이를 “백제 왕세자 **기생(奇生)**이 **성음(聖音)**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보아 왕세자의 탄생에 얽힌 문구로 풀이한다 . 특히 홍성화 연구원은 ‘기생성음’을 “부처님의 가호로 진기하게 태어났다”는 의미로 보고, 칠지도가 백제 왕세자의 출생을 계기로 제작되어 왜왕에게 하사된 칼이라고 주장하였다 . 반면 일부 일본 연구자는 해당 한자를 **“聖晋”**으로 읽어 *“백제왕의 세자가 성스러운 **진(晋)**나라에 생(生)을 의탁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거나, “왜왕의 뜻(旨)”이라는 식으로 풀기도 했다 .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칠지도는 중국 동진(東晋) 황제의 연호와 위광을 빌어, 백제 왕이 왜왕에게 황제의 뜻(旨)을 전달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 이처럼 동일한 명문을 두고도 백제 왕세자의 출생 기념 선물이라는 해석부터 중국 황제의 칙명 전달 상징까지 여러 층위의 의미 부여가 이뤄진다.
정치적 맥락에서 볼 때, 칠지도의 제작·전달은 백제-왜 사이의 관계 설정을 상징하는 외교 행위였다. 백제가 칠지도를 보낸 의도가 일방적 조공이었는지, 우호 동맹의 표시였는지에 따라 이 유물의 의미는 달라진다. 일본서기의 서술(백제가 보물들을 바쳤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백제 → 왜국으로의 종속적 조공으로 볼 소지가 있으나, 해당 기록이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신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왜곡되었다는 점은 현대 사학계의 정설이다 . 실제로 일본 학계조차 『일본서기』 신공기 기록의 신빙성이 낮다는 데 동의하고 있어, 칠지도 헌상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견해는 현재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 오히려 다수의 한·일 연구자들은 칠지도를 백제와 왜가 맺은 군사동맹의 산물, 곧 상호 호혜적 선물 교환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추세다 . 이는 백제가 칠지도를 통해 동맹의 증표를 제공하고, 왜국 역시 이에 상응하는 지원이나 우호를 약속함으로써 대등한 협력관계를 보여준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정리하면, 칠지도는 백제와 왜가 국제정세 속에서 전략적 동맹을 맺었음을 나타내는 외교 선물이며, 이를 둘러싼 상하관계 논쟁은 양국이 각자 우월적 지위를 주장해온 학술사적 배경을 반영한다.
군사·외교적 맥락: 백제–왜 동맹과 국제정세
칠지도가 만들어진 45세기경의 백제–왜 관계는 고구려의 남하 압박과 한반도 남부의 정세 속에서 형성된 군사적 동맹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백제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백제 근초고왕이 371년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지만,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 광개토왕의 적극적인 남진으로 백제는 국력을 위협받았다. 『광개토왕릉비문』은 399년을 가리켜 “백잔(백제)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더불어 화친하였다”고 기록하는데 , 이는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종속적 맹약을 깨고 왜국과 군사 동맹을 맺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397년 백제 아신왕은 **태자 전지(腆支)**를 왜국에 볼모로 파견하며 왜와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양쪽에 이 사실이 나타난다  . 백제가 차기 왕위 계승자인 왕자까지 보내면서까지 왜국과 밀접히 손잡은 것은 그만큼 고구려에 대항할 군사협력이 절실했음을 보여준다 . 즉 백제-왜 동맹은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제휴였던 것이다.
당시 신라와의 관계도 이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 신라는 본래 백제와 경쟁 관계였는데, 4세기 후반 고구려의 군사력을 빌려 백제·왜 연합군의 압박을 막아내는 형세가 나타났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400년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 왜군을 격퇴하였고, 이때 왜군과 백제군이 함께 신라를 공격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 이 사건은 곧 백제–왜 vs. 신라–고구려의 구도가 형성되었음을 시사한다. 백제로서는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해상 세력인 왜와 연대할 필요가 있었고, 왜 역시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넓히거나 철기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와 손잡는 이익이 있었다  . 일본열도 야마토 정권은 철제 무기 생산에 필요한 철 자원을 가야 등 한반도 남부에서 주로 구했는데, 백제와의 동맹을 통해 이러한 전략 자원 공급망을 안정화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 다만 당시 왜는 가야 등 여러 세력 연합체였을 것으로 보여, 백제와의 동맹은 야마토 왕권이 한반도 내 입지를 확보하는 데도 중요한 외교적 승리였다.
**중국 남조(南朝)**와의 외교 또한 백제–왜 관계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백제는 4세기 후반 동진(東晋) 및 5세기 **유송(劉宋)**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외교적 승인을 얻고자 했다. 예컨대 백제 침류왕 때인 384년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고, 이전인 근초고왕 대에도 진과 통교하여 관작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칠지도 명문에 동진의 연호 **“태화(太和)”**가 새겨진 사실은 백제가 중국 천자의 권위를 원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일부 연구자(야마오 유키히사 등)는 이를 근거로 동진 황제가 369년에 궁정 제작한 원본 칠지도를 백제에 하사하고, 백제가 이를 372년 모조하여 왜왕에게 선물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 비록 설에 불과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백제가 중국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활용하여 왜국과의 관계에서도 우위를 점하려 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결국 백제는 한편으로 중국 남조와 교류하여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다른 한편으로 왜와의 동맹을 통해 북방의 고구려 및 신라에 군사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다중 외교 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칠지도는 그러한 전략 속에서 백제가 왜와 맺은 군사적 연대의 표상으로 제작된 의례용 무기였다고 할 수 있다. 칼에 새겨진 “百兵을 물리친다”는 문구나 도교적 상징성 은 이 칼이 실제 전투용이라기보다 동맹에 힘을 불어넣는 주술적 상징물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칠지도는 백제–왜 군사외교 동맹의 상징물로서, 양국이 맺은 약속과 상호 지원 의지를 쇠붙이에 새긴 정치 군사적 선포였던 것이다.
사료 해석: 칠지도 명문과 관련 사료들의 증언
칠지도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데에는 명문 해독과 함께 『삼국사기』, 『일본서기』, 광개토왕비문 등 동시대 사료의 비교 검토가 중요하다. 우선 칠지도 칼날 양면에는 각각 34자, 27자의 한자가 금으로 상감되어 있는데, 이 명문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
• 앞면: “태△ 4년 11월 16일 병오날 정오에 백 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 뒷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칼은 없었다.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위는 비교적 직역에 가까운 해석으로, 여기에는 제작 시기, 제작 주체와 목적, 수취 대상, 후세에 전할 것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 문구를 둘러싸고 앞서 살핀 대로 여러 **이설(異說)**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연대 표기인 “泰△四年”의 해독이 그렇다. 일본 학계는 이를 중국 **동진의 연호 태화(太和) 4년(369년)**으로 보아 근초고왕 대의 제작설을 택했는데 , 근년에는 X레이 판독을 통해 ‘십(十)’ 자 흔적이 확인되면서 11월 16일 병오일에 맞는 해를 계산한 결과 **408년(백제 전지왕 4년)**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  . 홍성화 연구는 백제 전지왕이 즉위 직후인 408년에 왕세자 출생을 기념하여 칠지도를 만들고 이듬해(409) 왜왕에게 사신을 보내 전달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 나아가 홍 연구원은 “泰△”를 백제의 독자 연호로 볼 가능성도 언급하며, 칠지도 명문이 백제가 자체 연호를 사용했을지도 모를 사료로 주목된다 했다 . 그러나 아직까지 백제가 독자 연호를 공적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는 무령왕릉 지석 등에서 발견되지 않아 이 부분은 추론에 머문다 . 어쨌든 연대 해석에 따라 칠지도 제작 시점이 **근초고왕대(369년)**설부터 **전지왕대(408년)**설, 나아가 일부 일본 연구자들의 **태봉(후고구려) 건국기설(468년)**까지 분분하나  , 369년설과 408년설이 현재 한일 양국 학계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논의되는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제작 주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네 가지 가설이 사료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 (1) 백제 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헌상), (2) 백제 왕이 왜왕에게 내린 것(하사), (3) 동진 황제가 백제를 거쳐 왜왕에게 하사한 것, (4) 대등한 관계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선물로 준 것. 이 가운데 (1)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조를 근거로 하나, 해당 기록 자체가 신화적 서사로 왜곡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거의 부정된다 . (3) 역시 명문에 동진 연호가 보인다는 점 때문에 나왔지만, 삼국 시대에 중국 연호 차용례는 흔한 일이고 명문의 “聖音”을 굳이 “聖晋”으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강하여 설득력이 떨어진다 . 따라서 현실적인 해석의 무게는 (2)와 (4), 즉 백제 왕의 일방적 하사설이냐 대등한 동맹 선물설이냐로 모아진다 . 백제측 사서인 삼국사기에는 칠지도 수수에 대한 직접 기록이 없으나, 397년 왕자 파견과 404~405년 왜의 원군 파병설 등이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 한편 일본서기 응신기(應神紀) 8년조에는 백제 아신왕이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내왔다는 기술과 함께, 405년 왜국이 백제에 군사 지원을 한 후 백제가 학자 왕인을 파견해주었다는 대목이 있다  . 이 기록은 칠지도 하사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된다고 여겨지는데, 즉 백제가 왜의 군사원조에 보답하여 칠지도 및 문화적 혜택(박사 파견 등)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면, 칠지도 교환은 상호 이익에 기반한 외교 선물 교환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며,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조공을 바치거나 종주로 군림한 증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중론이다  .
끝으로 광개토왕비문은 칠지도와 함께 한일 고대사 논쟁의 쌍벽을 이루는 사료다 . 비문에는 4세기 말~5세기 초 백제·신라·왜의 역학 관계가 암시되어 있는데, 일제 강점기 일본 학자는 “왜가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김석형을 비롯한 한국 학자들은 오히려 칠지도 명문을 들어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면서, 백제 등 삼국이 **일본 열도에 분국(分國)**을 두었다는 파격적인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 비록 김석형의 **“삼한·삼국 분국설”**은 현재 대부분 기각되었지만, 그가 주장한 “백제왕 칠지도 하사설” 자체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학계에 광범히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현대에 이르러 한일 공동 역사연구 등에 따르면, 광개토왕비와 칠지도 명문은 4세기 말 백제와 왜의 군사동맹 및 한반도 남부에서의 세력 균형을 드러내는 자료로 해석된다 . 즉 왜가 한때 백제·신라와 교전할 만큼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왜의 식민 지배나 일방적 종속 관계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칠지도의 명문에 분명히 *주는 자(백제 왕세자)와 받는 자(왜왕)*가 명시되고 “후세에 전하라”는 선언적 어투가 새겨진 점은, 이 칼이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 맺은 특별한 약속의 기록물임을 웅변한다  . 그런 점에서 칠지도는 한일 간 외교관계의 상징이자 증표로서, 그 해석은 당시 국제정치 질서 속 백제와 왜의 위상과 전략을 복합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왜 관계의 성격: 종속, 동맹, 혹은 균형외교?
以上의 분석을 토대로 칠지도 교환에 나타난 백제–왜 관계의 성격을 규정해 보면, 세 가지 모델인 종속, 동맹, 균형외교 중 동맹 관계에 가장 가까웠던 것으로 평가된다. 먼저 ’종속 관계’로 보는 해석은 일본의 헌상설과 한국의 하사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주장된 경우다. 전자는 백제가 왜에 조공을 바친 예속 관계를 뜻하고, 후자는 왜가 백제의 제후국이었다는 주장을 담는다 . 그러나 앞서 살핀 역사적 맥락에서 백제가 군사적 실리 없이 굳이 왜에 머리를 숙여 공물을 바칠 이유도 없었고 , 반대로 철기와 해상력을 보유한 왜가 백제에 완전히 예속되어 복종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 실제로 백제는 371년 고구려를 격퇴할 만큼 강대했고, 그 무렵 왜의 군사 도움 없이도 독자생존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 또한 왜 역시 가야 지역을 통해 철을 조달하며 자급 가능한 자원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백제에 굴복해야 할 필연성이 크지 않았다 . 따라서 칠지도 교류를 일방이 타방을 복속시켰다는 증거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하다.
동맹 관계설이야말로 다수 학자들이 지지하는 현실적인 설명이다. 백제와 왜는 **공동의 위협(고구려)**에 직면하여 상호 방위를 도모한 파트너였으며, 칠지도는 그 동맹의 서약을 상징화한 것이다 . 양국 왕실은 혼인 동맹이나 인질 교환까지 시행하며 결속을 다졌고, 군사 작전을 공조하거나 문화적 지원을 주고받는 등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 칠지도의 명문에 담긴 표현(“함께 후세에 전하라”)에서도 두 나라의 우호를 영원히 간직하자는 의지가 엿보인다  . 이는 동맹국 간에 통용되는 우의(友誼)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동맹에도 상하 역할 차이는 있을 수 있는데, 백제는 문물과 제도를 앞서 받아들인 문화 선진국으로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고, 왜는 이를 배우고 지원받는 후발 국가로서 동맹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상호 이익과 필요에 의거한 협력이지, 일방이 일방을 복속시킨 종속관계와는 구별된다.
마지막으로 ‘균형외교’ 관점에서 보면, 백제–왜 동맹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 세력 균형 전략의 일환이었다. 백제는 강대국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남쪽 해양세력(왜)**과 손을 잡는 동시에, 중국 남조와 교류하며 다른 차원의 지지세력을 확보했다. 이처럼 다자간 외교를 통해 백제는 고구려-신라 연합에 대응하는 하나의 균형추를 형성했고, 왜 역시 이 연대에 참여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균형에 가담했다. 따라서 칠지도 동맹은 양국이 처한 국제환경에서 제3세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도모한 외교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균형외교적 측면은 동맹 관계설과 양립하는 개념으로, 결국 백제–왜 관계는 공동의 위협에 맞서 힘을 합친 균형자 동맹이라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결론: 칠지도가 증언하는 백제–왜 동맹의 함의
칠지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고대사의 퍼즐을 풀 단서를 쥔 상징적 유물이다. 그 금상감 명문을 둘러싼 한일 학계의 해석 차이는 오랜 시간 자국 중심의 역사인식과 맞물려 왔지만, 최신 연구 경향은 이 유물을 백제와 왜의 군사·외교 동맹의 증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왜가 군사적으로 강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백제는 강력한 해상국가인 왜를 단순 부속국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필요한 동반자로 대우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백제는 왕세자 파견이나 귀한 철제 보검 하사 등 파격적인 조치를 통해 왜와 유대를 맺었고, 왜 역시 군사원조와 인적·문화적 교류로 화답하면서 호혜적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 칠지도 제작과 전달은 이러한 동맹 관계를 공식화하는 외교 이벤트였으며, 칼날에 새겨진 문구는 두 나라의 약속을 영구히 새긴 외교 문서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칠지도는 백제–왜 동맹의 정치적 의미(상호 연합), 군사적 의미(공동 대처), 외교 의례적 의미(선물 교환과 맹약)의 층위를 모두 담고 있다. 이는 곧 백제–왜 관계를 종속적인 조공관계가 아니라,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하여 맺어진 실용적 동맹으로 이해해야 함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칠지도의 역사적 의미는 다층적이다. 겉으로는 한 자루의 의례용 보검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백제가 왜와 맺은 동맹의 이념과 목적이 함축되어 있다. 고구려의 압박과 신라와의 경쟁 속에서 백제와 왜는 협력하여 생존을 도모했고, 칠지도는 그 동맹의 상징으로 제작되어 교환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칠지도가 가리키는 백제–왜 관계를 일방적 종속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 동맹, 나아가 세력 균형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에 가깝게 위치시킨다. 오늘날 남아있는 칠지도 명문과 관련 사료들의 증언을 최대한 종합하면, 4세기 후반 동아시아 무대에서 백제와 왜는 서로의 힘을 인정하고 연대했던 균형외교의 동반자였으며, 칠지도는 바로 그 역사의 흔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칠지도 명문 관련 한일 학계 연구  , 광개토왕비문 및 삼국사기·일본서기 해당 기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칠지도 항목  , 경향신문 기사   등. (모든 출처는 해당되는 부분에 각주로 명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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