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부: 개경의 봄, 1274년
가마로 – 조용한 청년의 삶
1274년 고려 개경. 조용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가마로는 일찍이 잠에서 깼다. 스무 살 남짓한 그는 개경 남문 밖 빈민가에 자리 잡은 낡은 토담집에서 살고 있었다. 원 간섭기의 어려운 시절, 가마로의 집안은 중인 계급이라 불렸지만 생활은 하층 민초와 다를 바 없이 빈궁했다. 아버지는 몽골과의 전쟁 통에 병사(兵死)하여 가족을 남겨 두고 떠났고, 가마로는 홀로 남은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이른 나이에 가장이 된 그는 세상에 순응하듯 말수가 적고 묵묵했지만, 주변을 세심히 살피는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청년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가마로는 도시의 행상을 도우며 품삯을 벌곤 했다. 오늘도 인력거에 짐을 싣고 개경 시내를 가로질렀다. 봄이라 하지만 아직 쌀쌀한 아침 공기 속에, 개경의 거리는 전쟁의 상흔을 숨기지 못한 채 고요했다. 십수 년에 걸친 몽골과의 항쟁으로 도성 곳곳이 퇴락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마로는 짐수레를 끌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힐끗 보았다. 해묵은 누더기 옷을 걸친 노파가 사원 앞 돌계단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이고, 절룩거리는 다리로 구걸하는 노군(老軍)이 성벽 곁에 기대어 있었다. ‘아버지도 저런 모습으로 돌아오셨다면…’ 문득 가마로는 생각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이를 더 떠올리지 않으려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이처럼 도시와 사람들의 마음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원의 그늘 아래 고려
개경의 아침 해가 성곽 위로 올라오자, 왕궁 만월대의 처마 끝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러나 그 찬란함과 달리, 성 아래 민심은 황폐하였다. 고려는 몽골 제국에 항복한 뒤 명목상 평화를 되찾았으나, 백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랜 대몽 항전으로 이미 사회 전체가 극도로 피폐해진 데다, 패전 후에도 원나라가 요구한 막대한 배와 군량을 마련하느라 나라 살림은 더욱 거덜 나 있었다 . 몽골과의 전쟁이 끝났건만 고려 백성의 시름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개경 환도 이후 원 세력의 간섭은 날로 심해졌고, 조정은 원나라에 바칠 공물과 원정 준비에 급급할 뿐 민생엔 무기력했다.
왕궁 근처의 넓은 대로를 지날 때, 가마로는 말다툼하는 소리를 들었다. 주정뱅이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관가의 방군(防軍)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나라가 나라냐! 나랏님이 있고 뭐 해! 다 소용없어!” 취객의 탄식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방군이 눈을 부릅떴지만, 곁의 백성들은 말리는 대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조정은 부패했고 무능했다. 개경의 권세가들은 원나라의 힘을 빌어 권력을 차지한 뒤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 과거 실력 대신 음서와 연줄로 벼슬을 독점하고,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큰 농장을 일구었다 . 백성들에게 세금은커녕 노비로 삼는 횡포까지 일삼았고, 그 결과 국가 재정은 거덜 나고 민생의 폐해만 커져갔다 . 땀 흘려 일군 논밭과 가족을 잃고도 버텨 온 백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이처럼 부원세력의 탐욕과 압박뿐이었다. 가마로는 성 안 저택들에서 들려오는 잔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입을 굳게 다물었다. 왕족과 몇몇 귀족을 제외하면, 모두가 가난했고 모두가 지쳐 있었다.
길가에는 봄볕을 쬐며 한숨 쉬는 행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대에 대한 우국지탄을 나누고 있었다. “원나라가 또 일본을 치겠다지, 우린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꼬…” 한 노인이 중얼거리자, 다른 사내가 혀를 찼다. “삼별초 같은 용사들이 끝까지 몽골에 맞섰건만, 다 소용없었어. 결국 이렇게 되니…” 몹시 고된 얼굴의 사내였다. 말을 잇던 그는 가마로가 곁을 지나자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원나라의 앞잡이가 들을까 모두들 조심하는 눈치였다. **‘일본 원정’**이라는 말이 가마로의 가슴에 박혔다. 언제부턴가 개경의 뒷골목에서는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준비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곧 또다시 고려의 백성들이 먼 전쟁터로 끌려간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얼마 전부터 남쪽 해안에서는 원나라의 일본 정벌 준비가 한창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려 조정은 원 황제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전선을 만들고 병력을 모집하고 있었다. 올해 들어 고려 각지에서 연인원 3만여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900척에 가까운 군선(軍船)을 건조하고 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 “지금도 농사 지을 사람도 모자란 판에, 그 많은 사람을 끌고 가 배를 만든다니….” 저잣거리의 상인들은 고개를 저었고, 밭을 일구던 농부들은 탄식했다. 백성들 사이에는 일본 원정 징병령이 곧 내려질 거라는 두려움이 번졌다. 군역을 피해 야산에 숨는 자들까지 생겨났다는 풍문이 돌았다. 몽골의 끝없는 요구에 시달린 지 오래, 더 이상 싸울 여력도 없는 백성들에게 바다 건너 외국과의 전쟁 소식은 아득한 재앙처럼 느껴졌다. 가마로 역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죽은 아버지의 얼굴이, 눈물마르게 통곡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가마로는 애써 담담한 척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는 아직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고, 집을 떠나 전쟁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설마 나까지 징집되겠는가. 나 같은 미천한 서민은 그냥 두겠지.’ 마음 한편에 불안이 피어오를 때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지워버렸다. 어린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늘 다짐해온 약속이 있었다. 절대로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 가마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징집을 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징병령이 돌다
어느새 봄이 무르익어, 개경의 거리에는 살구나무 꽃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장터에서 짐을 나르던 가마로는,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장터 한복판에 관청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종사관으로 보이는 한 관리가 방(坊) 사람들을 불러 모아 포고문을 펴들었다. 행색 초라한 백성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관리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장터를 가득 채웠다.
“임금님의 명을 전한다! 원나라 대공의 뜻을 받들어 왜국 정벌에 나설 **정병(精兵)**을 뽑는다. 각 도 각 군에서 장정을 엄선하여, 오는 달 보름까지 개경에 집결토록 하라!…”
웅웅 울리는 목소리는 한음 한음 뚜렷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관리의 낭독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탄식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차라리 나를 데려가지!” 아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젊은 어머니,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노인, 공포에 질린 장정들… 순식간에 장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징병의 포고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가마로는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주변의 소리가 먼 바다처럼 아득하게 들리고, 사람들의 동작은 둔하게만 보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와 어린 누이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나까지 떠나면 이들은 어떻게 살라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패이도록 쥐어뜬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관리들은 징집 대상자의 이름이 적힌 방(榜)을 내걸었다. 모여 있던 장정들이 너나없이 앞으로 몰려들었다. 혹시나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이 있을까 봐, 모두 떨리는 손으로 명단을 훑었다. 가마로는 한 발짝 한 발짝 그쪽으로 다가섰다. 가슴이 터질 듯 요동쳤지만,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발을 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는 명단의 한 구석에서 **“개경 남부 반민(班民) 가마로(伽馬魯)”**라는 글귀를 발견했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순간 세상이 멎는 듯했다. 주변의 웅성임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야에는 자신의 이름 석 자만 선명하게 남았다.
가마로는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간신히 몸을 버티고 있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마로야… 네 이름이 있어?” 뒤늦게 따라온 이웃 형이 조심스레 물었다. 가마로는 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형은 울상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런 운수가… 어쩌냐. 네 동생도 어린데….” 형의 입에서 연민 어린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가마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울분과 공포를 꾹 삼킬 뿐이었다. 그 순간 그의 내면에서는 말로 할 수 없는 격랑의 감정이 일었다. 두려움, 억울함, 분노,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체념까지… 가마로는 그저 하늘만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높고 맑은 봄 하늘이 원망스러울 만큼 평화로웠다.
징집 통보, 운명의 문턱
해 질 녘, 가마로는 기진맥진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주머니 속에는 관청에서 받은 징집 통보서가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종이 쪽지 하나지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무거운 명령이었다. 문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어린 누이의 웃음소리에 가마로는 가슴이 저려왔다. 해진 치마를 입은 일곱 살배기 동생이 마당에서 돌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어머니는 저녁나절 빨래를 짜며 중얼중얼 기도하듯 입술을 떨고 있었다. 아들이 혹여 징집될까 노심초사해 온 어머니였다. 가마로의 얼굴을 본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마로야…?”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그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무 말도 듣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모든 것을 알아챈 듯했다.
가마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춤에서 통보서를 꺼내 들자, 어머니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린 동생은 오빠 손에 쥔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그게 뭐야?” 맑은 목소리로 묻는 아이를 향해 가마로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미안해.” 그의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꼈다. 남편을 잃고 이제 아들마저 전쟁터로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저물어 가는 햇살 속에 세 모자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날 밤, 가마로는 뜬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린 동생은 옆에서 곤히 잠들었고,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거두지 못한 채 겨우 잠이 들었다. 쳇바퀴 돌 듯 이어져 온 가난하고 평범한 일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일본으로 가라니… 저 바다 건너 어디쯤일까. 가서 무얼 하게 될까. 내가 살아 돌아올 수는 있을까….’ 숱한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답을 아는 이는 없었다. 가마로는 마당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하늘엔 달도 별도 숨은 채, 싸늘한 봄밤의 공기만 가득했다.
가마로는 한 줄기 눈물을 훔치고 나서,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칠 수밖에…’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썼다. 아버지가 전장으로 나서던 그날, 등을 토닥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뜻을 세우면 헤아릴 수 없는 힘을 얻는 법이다.”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지만, 가마로는 그 말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두었었다. 지금이 바로 그 힘이 필요할 때라고 그는 생각했다. 두렵고 막막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리라 속으로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가마로의 이름은 징집 명부에 올랐고, 그의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개경의 밤은 깊어갔다. 어디선가 바람이 일어 싸늘한 공기가 스치자, 마당에 핀 살구꽃 몇 송이가 흔들리며 떨어졌다. 달빛 없이도 흐드러진 꽃잎들은 희미하게 빛나며 땅 위에 흩날렸다. 훗날 가마로는 그 밤을 떠올릴 때면, 살구꽃 향기와 함께 가슴 한켠이 저릿해옴을 느끼곤 했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이 순간이 거대한 역사 이야기의 서막이 될 줄이야 – 가마로의 가슴속엔 알 수 없는 슬픔과 결의가 뒤섞여 차오를 뿐이었다.
제2부: 남쪽으로 가는 길
가족과의 이별
개경 남쪽 교외의 황톳길에 해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징집된 가마로는 쇠사슬로 죄어진 듯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오열을 삼키며 아들의 양 어깨를 움켜쥐었다. “네가 왜 가야 하니… 차라리 내가….” 어린 여동생은 어머니 뒤에서 눈물만 글썽였다. 가마로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두 사람을 마주 보았다. 군포(軍布)라 불리는 거친 베 군복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아 어색하게 팔이 떨렸다.
가마로의 집은 본래 가난했지만 세 식구가 서로 의지하며 지내왔다. 아버지는 몽골과의 전쟁통에 몇 해 전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홀로 남매를 키워냈다. 그런 가족을 두고 떠나야 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워 가마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의 눈에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나라에서 정한 일이에요. 제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갔을 거예요….” 가마로는 이렇게 말하며 어머니의 손을 떼어 냈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누구도 대신 가 줄 리 없고, 결국 그는 가야만 했다.
이별의 순간, 어머니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꼭 살아서 돌아오너라. 네가 없으면 우린…” 남겨질 가족의 삶이 막막하여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가마로는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가슴에 새기며 어린 여동생의 머리를 다독였다. “금이야, 잘 있어. 울지 마. 내가 반드시 돌아올게.” 여동생의 고사리손을 꼭 잡고 다짐하듯 말했다. 소녀는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마로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드렸다. 그러고는 뒤돌아섰다. 가족에게 등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마음과 달리, 결국 등을 지고 말았다. 등 뒤로는 어머니의 흐느낌과 여동생의 흐릿한 울음소리만이 따라왔다. 가마로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내디뎠다. 뒤돌아보면 다시 품으로 달려들 것만 같아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진포로 향하는 행군
개경 남문 밖에는 이미 수백의 징집병들이 모여 있었다. 남쪽 진포로 향하는 원정군 보충대라 했다. 해마다 곡식과 땔감을 실어나르던 잿빛 소달구지들이 이날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가마로는 같은 구역에서 징집된 청년들과 한 줄로 묶여 행군 대열에 합류했다. 며칠 전 관아 앞에 모였을 때 떼로 몰려온 병졸들이 군역을 통보하고 곧바로 그들을 데려갔다. 남쪽으로 보낼 고려군 8천 명의 징집이었다 . 십일조 세금처럼 사람마저 바쳐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저 이름과 나이만 적힌 관문(關文)을 받아든 순간부터, 가마로는 더 이상 한 가정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군에 동원된 수많은 고려 병졸 중 하나에 불과했다.
행군 첫날부터 병사들은 이미 녹초가 되었다. 말이나 수레를 배정받은 인원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보병은 나무 지팡이에 의지해 먼지를 뒤집어쓴 채 걷고 또 걸었다. 떠날 때부터 하루 칠십 리를 행군한다는 엄명이 떨어졌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쉴 틈이 없었다. 바닥난 체력만큼이나 병사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허탈감이 서려 있었다. 개경을 벗어나 논밭 사이로 길이 이어지자, 다들 집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말수도 줄었다. 어떤 이는 애써 장난스런 투로 “일본 섬에 가면 황금이 널렸댄다”라고 말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메마른 웃음뿐이었다. 현실을 부정하려는 농담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남은 건 짙은 불안이었다.
길가 마을의 백성들이 행군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저들이 일본으로 가는 군사들이란 말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부러움이나 응원은커녕 동정 어린 시선들이었다. 부녀자들은 어린 자식을 꼭 끌어안았고, 노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징집병들의 몰골은 초라했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행렬 마지막에 따라붙은 보급 마차에는 볏짚 위에 던져진 채 움직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열병이나 이질로 쓰러진 병사였다. 미처 출정도 전에 죽거나 탈영하는 이들이 속출했지만, 남은 이들은 애써 못 본 척했다. 징병을 피해 달아났다가 붙잡힌 자들이 모진 곤장 끝에 즉결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했다. 모두가 침묵한 채 발만 움직였다. 가마로는 발바닥이 터질 듯 아팠지만 이를 악물었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작정이었다. “기필코 살아 돌아가리라.” 가족과 한 약속이 떠올랐고, 그 약속이 그의 버팀목이 되었다.
길 위의 만남
며칠째 행군이 이어지던 어느 날, 가마로는 행렬 중간에서 자신 또래의 사내 하나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장정이었다. 거친 군복 소매 사이로 단단한 팔뚝 근육이 보였다. 그는 먼지투성이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가마로를 흘끗 보았다.
“힘들지 않은가, 친구?” 낯선 장정이 느닷없이 말을 걸어왔다. 가마로는 잠시 놀랐다. 행군 중에 병사들끼리 대화하는 것이 금지된 건 아니었지만, 다들 지쳐 말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마로는 목이 쉬어 갈라진 소리로 답했다.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견뎌야지요….”
사내는 히쭉 웃으며 자신의 이름은 마산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라도 내륙의 농부 출신으로,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둔 처지까지 가마로와 닮았다. 우연한 공통점에 가마로는 적이 반가웠다. 둘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산은 소문에 밝았다. 행군 도중 이따금 말을 타고 지나가는 원나라 장교들의 대화를 엿들은 듯했다. 그는 가마로에게 귀띔해 주었다. “듣자 하니, 우리 여몽 연합군이 배 900척에 병사 4만 명 가까이 태워 일본으로 건너간다더군 . 우리 고려에서는 8천 명의 군사와 6천7백 명의 뱃사공까지 내어줬고….” 이 어마어마한 숫자를 듣자 가마로는 목이 턱 막혔다. 만인지상(萬人之上) 대원 세조의 명령이라지만, 그 준비를 위해 고려 땅에 어마어마한 짐이 지워졌을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곡식이며 인부며 다 쥐어짜고 있는 거요. 인적·물적으로 크게 수탈당하고 있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오 .” 마산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는 징집되기 전 고향 마을에서 관아에 보낼 군량미를 마련하느라 봄내 고생했다고 했다. “죽어라 바쳐도 위에서는 모자라다고 닦달이니…. 대체 일본 정벌이 뭔지, 원나라 사람들 싸움에 우리만 피를 흘리는 거 아니겠소.” 마산의 푸념에 가마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행군이 길어지면서 가마로와 마산은 서로에게 조금씩 의지하게 되었다. 발에 물집이 잡혀 절뚝거리던 가마로를 마산이 부축해주기도 했고, 마산이 굶주려 쓰러질 뻔하면 가마로가 자신의 마른떡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둘은 머잖아 **전우(戰友)**라 부를 만한 사이가 되어갔다. 간밤에 헤어졌던 가족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기도 했다. 마산은 여동생이 시를 좋아하는 아이라고 했다. 그 말에 가마로도 자기 여동생이 그림 그리기를 잘한다고 자랑했다. 둘은 잠깐이나마 미소를 지으며 **“반드시 살아남아 집에 돌아가자”**고 굳게 약속했다. 그 약속은 머나먼 여정을 견디게 해 주는 작은 불씨가 되었다. 칼바람처럼 몰아치는 불안 속에서도 그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진포 조선소
진포에 가까워질수록 바닷바람에 소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머나먼 길을 걸어온 징집병들은 서해의 거친 갯내음에도 마음이 뛰었다. 진포는 넓은 갯벌과 강물이 만나 이루는 포구였다. 도착한 병사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거대한 배들의 뼈대가 마치 숲처럼 서 있었다. 배를 만드는 인부들은 맹렬히 연장을 두드리고 톱질을 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수 개월 전부터 동원된 수천의 목수와 노동자들이 단 5개월 만에 900척에 달하는 전선을 건조하고 있었다 . 이미 완성되어 바다에 띄워진 전선도 보였고, 아직 골격만 세운 채 가마니가 덮인 선체도 보였다. 곳곳에서 망치질 소리와 톱질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가마로는 생전 처음 보는 대규모 조선장(造船場)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함께 선발되어 온 병사들 또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닷물에 퉁퉁 불은 통나무 냄새, 송진과 타르를 끓이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가 자욱한 육지 행군과는 전혀 딴 세상의 풍경이었다. 커다란 노를 끼울 구멍이 줄지어 뚫린 선체가 보였다. 군데군데 쇠못과 쇠띠로 보강한 흔적도 있었다. 배 옆구리에는 나중에 군사들이 몸을 숨길 방패판들을 달 공간이 보였다. 가마로는 그제야 실감했다. 머지않아 저 거대한 함선에 올라 바다 건너 대마도와 이키 섬, 규슈로 쳐들어갈 날이 올 터였다 .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가슴 속부터 서늘한 기운이 차올랐다.
진포의 조선소 주변 마을에는 이미 임시 병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관청에서는 진포 일대의 백성들을 강제로 불러 모아 나무를 베고 배를 만드는 노역에 투입했다. 심지어 관아 문서에는 이 고장 **신월리(新月里)**를 아예 조선장(배 만드는 곳)이란 이름으로 부를 정도였다 . 그만큼 큰 규모의 조선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근의 산에는 배 만들 재목을 구하기 위해 벌목된 나무 그루터기가 수두룩했고, 길가에는 수레에 실려 온 목재 더미가 쌓여 있었다. 조선소 부두에는 갓 깎아 만든 노와 삿대, 돛대들이 산처럼 쌓였고, 대장간에선 연합군의 무기를 보수하거나 새로 만드는 불꽃이 이글거렸다. 수백 명의 뱃사공과 선부들도 속속 진포에 집결하고 있었다. 부두 끝에는 노를 젓는 훈련을 하는 뱃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하나, 둘! 하나, 둘!” 군율에 맞춰 노를 당기는 장단이 파도소리에 실려왔다.
마산은 거대한 판옥선 같은 고려 함선의 선수를 어루만지며 감탄했다. “이 많은 배에 정말 우릴 다 태우고 건너간단 말이오….” 감정이 반쯤 놀람이고 반은 두려움인 말투였다. 가마로는 말없이 목재로 짜인 바닥을 밟아보았다. 튼튼했다. 배마다 삼베 천막이 덮인 갑판 아래에는 수십 명의 병사와 말이 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저기 말들 봐.” 누군가가 손가락질했다. 해변 한켠에 임시로 가축 우리를 지어 놓고 전투에 쓸 **군마(軍馬)**들을 싣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었다. 둔중한 체구의 몽골 말과 왜소한 고려 토종마가 뒤섞여 울부짖고 있었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이 역동적인 현장에서 가마로의 온 감각은 마치 포구의 소용돌이처럼 어지러웠다.
낯선 상관들
진포 병영에는 원나라 장교들과 고려군 지휘관들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연합군이지만 주도권은 원 장교들이 쥐고 있었다. 몽골어와 한족의 언어(漢語)가 난무하여 고려 병사들에게는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다국적 병영이었다. 명령계통도 복잡했다.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은 원나라 측에서 파견된 **홍다구(洪茶丘)**와 홀돈 등의 몽골 장수들이었다 . 이들은 황실의 권위를 등에 업고 거칠 것 없이 행동했다. 고려인 신분인 김방경 장군이 고려군 지휘를 맡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도 원 장수들의 휘하에 있었다. 가마로 같은 말단 병졸은 지휘관의 얼굴을 직접 대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병참이나 작업 지시를 내리는 다루가치(원나라 파견 관리)들이 진포 곳곳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위압적이었고, 조금이라도 태만한 기색이 보이면 모질게 꾸짖거나 군율에 따라 매질을 가했다.
가마로는 한 번 몽골 장교의 노여움이 어떤 것인지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어느 저녁, 함께 작업하던 고려 인부 하나가 탈진해 쓰러졌다. 그는 연일 과로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었다. 원나라의 장교는 채찍을 손에 들고 달려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분명 욕설임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그는 쓰러진 인부의 등을 가차 없이 채찍질했다. 퍼걱! 소리가 날 때마다 주위의 병사들이 몸서리쳤다. 쓰러진 인부는 비명을 질렀으나 장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몇 차례를 더 내리쳤다. 보다 못한 고려의 한 관리가 다가와 몽골어로 변명했지만, 장교는 그 관리까지 밀쳐 넘어뜨렸다. 적막 속에 매질 소리와 신음 소리만이 이어졌다. 가마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숨이 가쁘게 몰려왔다. 옆에 있던 마산이 그의 팔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덤비지 말게… 우린 죽어.” 마산의 속삭임에 가마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울분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쓰러진 인부는 질질 끌려 갔다. “이제 제발 일본에나 빨리 가서 끝장나면 좋겠군….” 주위 병사들 사이에서 이런 냉소적인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고려 병사들 사이에는 원나라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매일같이 부려먹고 구타하며, 일 처리는 자기들 멋대로였다. 역병으로 쓰러지는 병사가 늘어도 휴식을 명하지 않았다. “고려의 목숨 따위 파리만도 못하단 것이지.” 마산이 씁쓰레 웃으며 말했다. 원 장교들은 고려군을 못미더워하여 군량미도 꼭 쥐고 배급했다. 흰쌀밥은커녕 좁쌀죽 한 사발로 하루를 연명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반면 원나라 군 출신 병사들이나 몽골 기병들은 양과 염소를 통째로 구워 먹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가마로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원나라 군마를 맨손으로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그저 이 굴욕적인 동거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낯선 문화 차이도 병사들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고려군에는 향찰로 쓰인 명령서가 내려오지만, 원 장교들은 알아보지 못하니 항상 통역관을 통해 지시해야 했다. 어떤 몽골 병사는 고려군 막사에 들어와 느닷없이 말을 시켰다가 대답을 못 알아듣자 가마로의 동료 뺨을 때리기도 했다. “오랑캐 놈!” 맞은 병사가 소리 없는 입모양으로 욕을 해 보았지만 통역 없는 분노는 허공에 사라졌다. 언어 뿐 아니라 싸움 방식도 달랐다. 몽골군 진영에서는 밤마다 북과 징을 두드리며 군사 훈련을 했다. 가마로는 그 리듬이 몽환적으로 느껴지다가도, 이질적인 전쟁 문화에 묘한 긴장감을 떨칠 수 없었다. 칼과 창만 알고 자란 고려 병졸들에게 **화통(火筒)**이라는 시커먼 폭약 무기는 상상 속 도깨비 같은 것이었다. 마산은 소곤대었다. “몽골 군은 싸울 때 대나무 통에 화약을 넣어 던진다더군. 천둥 같은 폭발음에 일본 말들이 놀라 날뛴다지 .” 이런 소문은 병사들의 등에 식은땀을 흐르게 했다.
병사들의 나날
진포 병영에서의 하루하루는 길고 지루하면서도 공포로 점철되어 있었다. 날마다 새로운 명령과 반복되는 고된 작업으로 정신이 없었다. 병사들은 아침 해 뜨기 전부터 기상나팔 소리에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자마자 운동장 크기의 공터에 집합해 인원 점검을 받아야 했다. 혹독한 훈련이 곧바로 이어졌다. 방패와 창을 들고 바닷가 모래사장을 달리는 연습, 노 젓는 시늉을 하며 구령에 맞추어 움직이는 훈련 등이 반복되었다. 아직 일본 땅에 닿지도 않았지만, 병사들의 다리는 이미 후들거리고 어깨는 뻐근했다. 훈련 뒤에는 곧장 조선소 작업에 동원되었다. 병사들은 전투에 쓰일 화살 깎기, *성냥(纏火)**이라 불리는 화공무기 준비까지 도왔다. 땀범벅이 된 채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긴장과 피로 속에서도 병사들은 틈틈이 일상의 모습을 이어갔다. 해가 지면 모닥불 주변에 삼삼오오 몰려 앉아 오늘 들은 소식들을 나누었다. 어떤 이는 “남송(南宋)의 병사들도 합류한다더라”, “일본엔 무시무시한 무사가 버티고 있대” 같은 풍문을 전했다. 그럴 때마다 모닥불 빛에 비친 병사들의 눈빛은 불안으로 흔들렸다. 누군가는 가족 생각에 몰래 눈물을 훔쳤고, 또 누군가는 **치상(馳祥)**이라고 불리는 부적을 꺼내 쳐다보았다. 부적에는 집에서 어머니가 쓴 글귀나 혹은 “必勝”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사들은 그런 것에 의지했다.
밤이 깊으면 대부분의 병사들은 녹초가 되어 쓰러져 잠들었다. 그러나 가마로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막사 천장 너머로 파도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부두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야근 인부들의 망치질 소리도 그의 귀에 박혔다. 이곳 진포에서 보낸 나날은 꿈인 듯 현실인 듯 아득했다. 고향에서 밭을 매고 나무하러 다니던 자신의 모습과, 지금 이 거대한 전쟁 준비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자신이 겹쳐지지 않았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다 사라지고 집으로 돌아가 있으면….” 가마로는 수없이 속으로 되뇌었지만, 눈을 뜰 때마다 펼쳐지는 건 끝이 보이지 않는 전선(戰船)들과 북적거리는 병영 풍경뿐이었다. 현실은 꿈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병사들 사이에 웃음꽃도 피었다. 며칠 전 배급된 마른 오징어를 굽다가 불태워버린 일을 두고 모두 한바탕 웃었다. 연기가 펄펄 올라 진포 하늘에 **봉화(烽火)**를 올린 줄 알고 수비대가 소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런 소소한 해프닝이 병사들에게 잠시나마 웃음을 주었다. 또 가마로와 마산은 틈날 때마다 서로의 집안 이야기를 하며 희망을 다졌다. 마산은 자신이 돌아가면 동생을 시인으로 키우겠다고 했다. 가마로도 누이가 그리 그리던 청해(靑海)의 달을 꼭 구경시켜 주겠노라 말했다. 바닷가에서 본 달빛은 어쩐지 애달프고 아름다워서, 누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둘은 파도에 비친 달을 함께 바라보며 오래도록 말 없이 앉아 있곤 했다. “꼭 살아서 돌아가야지….” 가마로가 읊조리면, 마산도 “반드시.” 하고 짧게 답하곤 했다.
하지만 병사들 모두가 이렇듯 의지를 불태운 것은 아니었다. 도망치려다 붙잡히는 이들도 가끔 생겨났다. 어떤 병사는 자다가 말없이 일어나 바다 쪽으로 걸어 들어가다 익사하기도 했다. 너무나 먼 집 생각에 실성한 것이었다. 운 좋게 발각되어 구출된 자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병영에 적막한 충격을 주었다. 모두가 자신이 과연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밤낮으로 마음 한켠에 묻어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편할지도 모르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대는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때마다 어김없이 호통치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마산이었다. 그는 공동 취사장 구석에 웅크린 병사들에게 쓴웃음 지으며 말했다. “죽기는 왜 죽어. 한번 나가서 해보는 거지. 죽으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진짜 죽어.” 모두가 말없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단호했다. 가마로는 조용히 마산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덩달아 맞장구쳤다. “그래. 우리 살아서 돌아가자.” 그 말에 움츠렸던 병사들의 어깨가 한층 펴지는 듯했다.
가마로의 각오
가마로는 어느새 열흘 넘게 진포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틈날 때마다 바닷가에 홀로 나가 파도를 바라보았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며 바다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수평선은 아련히 아름다웠지만, 가마로의 마음은 무거웠다. ‘저 너머 어디엔가 일본이라는 땅이 있겠지.’ 그는 구름 걸린 남쪽 하늘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평생 농사짓고 가족과 오순도순 살 줄 알았던 자신이, 이제는 황제가 꿈꾸는 대사업에 던져진 하나의 말이 되었다. 원망과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몽골의 칼날 아래 굴복한 고려의 운명이 자신을 이곳까지 떠밀었다고 그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고 피할 길도 없었다.
밤낮으로 커다란 함선들이 바닷물에 내려져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가마로의 눈에 익어 갔다. 이제 곧 이 배들이 출정의 나팔 소리와 함께 돛을 올릴 터였다. 그날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그는 알 수 있었다. 바다 너머 풍광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다. “내 운명이 어디까지 나를 데려갈 것인가….” 가마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두려움보다도 더 강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살아서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한 맹세가 있었다. 그 맹세를 지키지 않고서는 그는 차라리 바다에 몸을 던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마로는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닷물을 한 줌 떠 올렸다. 차디찬 소금기가 손금 사이로 흘러내렸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는 붉은 석양이 불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다짐했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이 싸움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가족과의 약속, 전우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버텨내리라 마음먹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거센 역사적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끝끝내 숨만은 붙여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는 결의했다. 마치 훗날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려움에 지지 말고 나아가라.’ 마음 속 어딘가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마로는 천천히 일어섰다. 거칠게 밀려왔다가 이내 조용히 썰물져가는 파도를 바라보며, 그는 눈을 굳게 감았다 뜨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후로 붉은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긴 밤이 오고 있지만, 머지않아 동쪽 바다 위로 새로운 해가 떠오르리라. 가마로는 저 수평선 너머의 내일을 향해 자신을 다잡고 있었다.
진포의 여명은 싸늘했다. 바닷바람에 안개가 흩날리는 가운데, 수천의 고려 병사들이 해변에 늘어서 있었다. 물살에 흔들리는 전선(戰船)들은 마치 숲처럼 빽빽하게 진포 앞바다를 메우고 있었다 . 고려군을 지휘하는 김방경 장군과 몽골 원나라 장교들이 나란히 선 채 출정식을 거행했다. 장군은 칼을 빼들어 하늘로 치켜들고 호령했다. “적을 무찔러 고려의 충의를 보이라!” 굵은 음성이 바다 위로 퍼지자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이어 원 장교도 나서서 몽골어로 몇 마디 외쳤다. 통역관이 “황제폐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싸우라”는 뜻이라고 전하자, 일부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마로도 함성과 함께 칼을 들어 올렸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장군의 훈시가 용맹을 강조할수록, 그는 가슴 한구석에 맺힌 불안과 예감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곧 북소리가 울리고 연합군의 출정식이 끝났다. 고려군과 몽골군 장교들이 잇따라 배에 올랐다. 가마로는 거친 숨을 내쉬고 동료들과 함께 자기 부대의 배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수만 대군이 함선에 승선하여 전투 대형을 갖춘 뒤였다 . 갑옷 사이로 들어오는 해풍은 차가웠고, 병사들의 얼굴에는 결연함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함대는 마침내 돛을 올리고 진포를 떠났다 . 가마로가 탄 전선은 크고 튼튼했지만, 바다 위에 떠나자 육지에서 느끼던 안도감은 사라지고 끝없는 물결뿐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 병사들은 육상에서의 패기와 달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좁은 선창 안에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다닥다닥 몸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 구토를 하기 시작하면 금세 몇 명이 따라 토악질을 했다. 바닷물이 스며든 마른 바닥에는 멀미로 토한 흔적과 썩은 냄새가 가득했다. 가마로 역시 처음 이틀간은 창백한 얼굴로 선실 구석에 웅크린 채 들썩이는 배와 싸워야 했다. 파도가 높지 않은 날에도 갑판은 끊임없이 흔들렸고, 뱃전에 기대 잠을 청하던 병사들은 번번이 울컥 치미는 속을 부여잡고 신음을 뱉었다. 식사는 쌀을 꼬들하게 지은 찬 밥에 말린 생선쪼가리를 씹어 넘기는 정도였고 물은 금세 쉬어 시큼했다. 선실 구석에는 임시로 만든 나무통이 화장실 노릇을 했지만 파도에 자꾸 엎어져 악취를 풍겼다. 밤이면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병사는 고향의 가족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짖었고, 다른 이는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낮 동안 닻을 올리고 항해를 계속할 때면 모두가 지쳐 말수가 줄었다. 가마로는 좁은 갑판 위에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다 어린 시절 즐겨 걷던 들판의 고요한 땅을 떠올렸다. ‘내가 왜 이 먼 바다에 떠 있는가….’ 그는 먹먹한 가슴을 안고 수평선만 응시했다.
며칠을 나아가자, 함대는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들에 가까워졌다. 연합군은 먼저 대마도와 이키섬에 상륙하여 거점을 확보하라는 명을 받았다 . 가마로의 배도 동틀 무렵에 대마도 해안에 접근했다. 곧 몽골 장수의 지휘북 소리가 울리고, 여러 척의 함선에서 일제히 작은 정박선이 내려졌다. “상륙하라!” 고려 지휘관의 외침에 가마로와 병사들은 칼과 방패를 움켜쥐고 출정식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긴박함 속에서 해변으로 내달렸다. 마른 모래사장을 밟는 순간, 적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대마도에 주둔한 일본 사무라이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압도적인 연합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단 몇 시간 만에 해안가 취락은 불길에 휩싸였고, 사무라이들의 시신이 쓰러졌다 . 일부 주민들은 산 속으로 달아났지만 몽골 기병들이 말 등을 타고 추격해 섬 깊숙한 곳까지 쫓았다. 전투가 끝난 뒤 가마로는 처음으로 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처참했다. 해변 모래에는 피가 흥건했고, 동료 병사 몇은 화살을 맞아 쓰러져 있었다. 승리에 취한 원나라 병사들은 항복한 섬 주민들을 포로로 모아 세워 두고 있었다. 곧이어 울부짖는 비명이 곳곳에서 터졌다. 주민들이 하나둘 처형되어 쓰러졌고, 시신이 바다에 던져졌다. “이것이 원의 방식이다…” 옆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가마로는 차마 그 참상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전우들 몇은 웃으며 전리품을 뒤적이고 있었지만, 가마로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먼 바다 너머로 섬짓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연합군은 대마도에서 며칠간 머물며 섬을 완전히 제압한 후, 다시 배에 올라 이키섬으로 향했다 . 연합군의 함대가 이키섬에 닿자 이번에도 완강한 저항이 있었지만 섬의 성채는 불과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 푸른 섬에 불길이 치솟고, 항복을 거부한 일본 무사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칼을 안고 쓰러졌다. 가마로는 이키섬 해변에서 어린 아이를 안고 통곡하는 한 일본 부녀자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고려에 침입했던 왜구의 섬이다. 인명을 사정 볼 것 없다.” 몽골 장교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 날 밤 가마로는 적장이 베어져 꽂힌 창불 옆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 원정에 차출된 고려군 상당수는 본디 바다 싸움에 익숙지 않았다. 삭풍 부는 가을 바다에서 병사들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 이키섬 점령 후 다시 배를 타고 출항할 즈음, 바다 날씨가 심상치 않게 변하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수평선 끝에서 몰려오더니 바람결이 한층 거세졌다.
처음에는 굵은 빗방울 몇 방울이 돛을 적실 뿐이었지만 이내 하늘 전체가 먹빛으로 물들고 폭풍우가 함대를 덮쳤다. 순식간에 파도가 산처럼 일어 전선을 집어삼킬 듯 출렁였다 . “노를 고정하라! 밧줄을 잡아!” 뱃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렸다. 돛줄이 삽시간에 찢겨 나가고 마스트가 비명처럼 끼익대며 휘어졌다. 우박마저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얼음 알갱이들이 하늘에서 퍼부으며 갑판을 마구 두드렸다. 병사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비틀거리다가 미끄러져 나뒹굴었다. 가마로는 간신히 선수 갑판의 난간을 붙잡았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비와 바닷물이 마구 얼굴을 때렸다. 번갯불이 난데없이 바다를 하얗게 밝히더니, 곧 천지를 울리는 뇌성이 뒤따랐다. 그 섬광 속에서 가마로는 자기 배 옆을 지나치던 작은 함선 하나가 기우뚱 허리를 꺾는 모습을 목격했다. “저 배가 위험하다!” 누군가 외쳤지만, 다음 순간 거대한 검은 파도가 그 배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선체는 보이지 않고 파도 위로 부서진 목재 조각들과 허우적거리는 병사들만 떠올랐다. 비명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가 곧 우레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가마로의 눈이 절망으로 휘둥그레졌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악몽 같았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폭력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폭풍은 가까스로 물러갔다. 새벽이 오자 거짓말처럼 하늘은 다시 맑아졌지만, 바다에는 밤사이 희생된 이들의 흔적이 떠다녔다. 부서진 돛대, 깨진 노판, 그리고 시신 몇 구가 출렁이는 파도 위에 떠올랐다. 군함 여러 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가까스로 버틴 배들도 선체가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가마로의 배에서는 밤새 휩쓸려간 병사가 둘이었다. 전우들은 그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명은 친구의 손을 붙잡고 있다가 물속으로 끌려갔다고 했다. 구조할 새도 없었다. 다른 한 명은 쓰러진 돛대에 깔려 즉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선장은 싸늘한 시신을 하얀 보자기에 싸서 바다에 띄워 보냈다. “모두 명복을 빌어주자.”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병사들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굳어 있을 뿐이었다. 전날까지 살아 숨쉬던 전우를 차가운 바다에 내려보내야 하는 참담함에 모두 목이 메었다. 가마로는 두 손을 모아 조용히 기원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정신이 아찔하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불경을 외웠고, 어떤 이들은 제 갈길을 가버린 혼령이 되지 않도록 망자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모두가 느꼈다.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거대한 힘이 바다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폭풍우가 휩쓸고 간 바다는 거짓말처럼 다시 고요했지만, 병사들의 마음에는 이미 깊은 균열이 생겨 있었다.
다행히 함대의 주력은 아직 건재했고, 살아남은 배들은 다시금 뭉쳐서 남쪽으로 침로를 잡았다. 며칠을 더 항해하자,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 새로운 육지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육지다!”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마침내 일본 본토인 규슈 해안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일본의 풍경은 낯설고도 낭만적으로 보였다. 가을빛에 짙푸른 해안 산자락이 연무越霧 사이로 펼쳐졌고,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 위로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이 아스라이 보였다. 해안 가까이에는 작은 어촌 마을인지 자그마한 초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연기 기둥 몇 줄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몇몇 병사들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남의 땅에 다다랐다는 실감이 가슴 깊이 밀려왔다. 연합군 함대는 1274년 10월 하순, 북규슈의 관문인 하카타만 인근까지 이르렀다 . 이윽고 해안선이 눈앞으로 뚜렷해지자, 군선들은 속도를 줄이고 상륙 지점을 향해 진형을 가다듬었다. 가마로는 갑판 위에서 일본 땅을 응시했다. 초가 지붕 사이로 작게 보이는 사람 그림자들이 황급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조개의 비릿한 내음과 함께 숯 연기 냄새가 바람을 타고 실려왔다. 순간 가마로는 가슴 언저리가 먹먹해졌다. 그 연기 냄새가 문득 고향 마을의 저녁 연기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저 뭍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운명을 생각하며 침을 삼켰다. 멀리 푸른 산등성이에 노을이 걸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건만, 그곳에서 곧 펼쳐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생각하니 가마로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해가 지자, 연합군은 규슈 해안 인근의 얕은 만에 닻을 내렸다. 상륙은 다음날 동틀 무렵으로 예정되었다. 바다 위의 밤은 적막했다. 검게 칠해진 수면 위로 수백 척 함선들의 등이 불을 끄고 잠행하듯 떠 있었다. 병사들은 종일 전투 준비에 분주했으므로 저마다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쉽게 잠이 드는 이는 없었다. 가마로는 갑판 구석에 몸을 기대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 사이로 달이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홀로 빛나는 달을 보며 가마로는 가족들이 있는 고려의 밤하늘도 이 달빛 아래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옆으로 마산이 다가와 말없이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군복을 덮고 누운 병사들이 뒤척이며 신음소리를 내거나, 근처 기둥에 기대 활시위를 조이는 이도 있었다. 몇몇은 손을 모아 고향의 신과 부처에게 기도를 드렸다. 웅웅거리는 파도 소리가 심장을 두드리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마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일…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마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저 고개를 돌려 동료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마다 불안에 질려 있었다. 칼자루를 쥔 손에는 힘이 없고, 옆구리에 맨 전대에는 고향에서 가져온 부적과 가족의 손때 묻은 유품들이 만져졌다. 가마로도 품에서 낡은 헝겊을 꺼냈다. 아내가 떠날 때 손수 지어준 부적천이었다. 그는 내일의 전투에서 과연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산이 몸을 떨며 말했다. “이대로 밤에 도망쳐버릴 수 있다면…” 가마로는 흠칫하여 친구를 바라보았다. 마산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둠 속 다른 배 쪽에서 갑자기 싸늘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탈영병이다! 붙잡아라!” 곧이어 처절한 비명이 바다 위로 퍼졌다가 사그라들었다. 화들짝 놀란 병사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횃불들이 부산하게 흔들리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오래지 않아, 본때를 보이려는 듯 잘려나간 머리통 하나가 장대 끝에 꿰인 채 높은 돛대 위로 매달렸다. 달빛 아래 그것이 뱃전에 걸리자 여기저기서 눌린 신음과 흐느낌이 터졌다. 가마로는 마산의 어깨를 그러잡았다. 둘은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순간 가마로는 절감했다. 자신들이 이미 돌아갈 길이 없는 운명 속으로 들어왔음을. 두려움에 휩싸인 채 도망치고 싶어 하는 이는 비단 마산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바다 위에서 어디로 달아날 것인가. 날이 밝으면 피로 물들 전장을 앞두고, 병사들은 밤새 이어지는 공포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폭풍 같은 시간들을 지나 맞이한 전투 전야의 정적 속에서, 가마로는 하늘에 뜬 쓸쓸한 달을 끝내 놓지 못했다. 머지않아 동쪽 지평선 너머로 새벽빛이 밀려오면, 또다시 칼과 창이 부딪힐 것이다. 파도는 밤새 철썩이며 배를 두드렸고, 병사들의 숨죽인 탄식은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부서진 갑옷 조각과 상한 돛이 여기저기 널린 갑판 위에서, 가마로는 검집을 끌어안은 채 떨리는 눈을 감아보았다. 귓가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고향의 파도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련히 맴돌았다. 그러나 곧 북소리가 울리고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올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가마로의 눈가에 뜨거운 이슬이 맺혔다. 이윽고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일본의 해안에는 옅은 물안개가 피어올라 신비로운 장막을 치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막이 오르기 직전인데도, 바다는 어젯밤의 참상을 숨긴 채 어제와 다름없이 출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가마로와 전우들은 저마다 가슴에 불안을 안은 채 묵묵히 칼자루를 쥐어보았다. 맞이하는 새벽빛 속에서, 파란 바다와 낯선 해안은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요 출전: 『고려사』 「충렬왕세가」, 『원사』 「일본전」 등 ; 『몽고습래회사』 및 관련 연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본원정」 .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된 내용임.
제4부 하카타만 상륙
나는 1274년 늦가을, 동틀 무렵의 하카타만 앞바다에서 두 손에 땀을 쥔 채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평선 너머로 밤의 어스름이 걷히자, 바다 위에 떠있는 900여 척의 함선들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윤곽을 드러냈다.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 수만 명이 이 함선들에 몸을 싣고 먼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 그 웅장한 함대의 일부로서, 나는 지금 이 낯선 섬 나라의 해안에 상륙하기 직전이었다.
주변에는 숨죽인 병사들의 긴장 어린 숨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렸다. 검은 바다 위로 배들이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들뜬 말들이 갑판 위에서 거칠게 울부짖었다. “곧 상륙이다. 모두 대비하라.” 갑판 위를 분주히 오가는 지휘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전쟁의 기운, 피비린내의 예감이 차가운 해무처럼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쓰시마와 이키 섬에서 이미 승전을 거두었지만, 본토에서의 대규모 전투는 우리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나와 내 전우들은 저마다 갑옷 끈을 다시 조여 매며 결의를 다졌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옆에 웅크린 전우의 떨리는 숨결로 그 역시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가슴이 미친 듯 뛰었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 정신을 다잡았다. 전운(戰雲)이 짙게 감도는 새벽 공기 속에서, 우리는 운명의 땅을 응시하고 있었다.
배들이 얕은 만으로 들어서자, 곧 뱃고동 소리와 함께 상륙을 명하는 깃발 신호가 올랐다. 나는 거친 밧줄 사다리를 타고 선창을 내려와 작은 상륙정에 몸을 실었다. 노를 젓는 수병들의 고함과 함께 배가 모래톱을 향해 나아갔다. 이윽고 앞줄에 탄 병사들이 물 속으로 뛰어내리며 상륙을 개시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내 무릎까지 차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께까지 젖은 채 해변을 향해 전진했다. 희끄무레한 모래와 자갈로 이뤄진 해안에는 아직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해안 상륙에 성공했다 . 곧장 고려군과 몽골군 혼성 부대가 해안을 따라 세 갈래로 퍼져 진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내가 속한 부대는 중앙 상륙지점인 토리카이 해안 방면으로 몰려 모래사장에 장사진을 치고 상륙 거점을 확보했다 . 몽골 지휘관들이 외쳐대는 명령과 북소리가 해변에 울려 퍼졌고, 우리는 훈련받은 대로 방패를 앞세우고 창을 겨눈 채 일사불란하게 전열을 갖추었다.
바닷바람 속에서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던 해안은, 곧 지축을 울리는 함성과 함께 요란해졌다. 숲과 언덕 너머에서 울려 퍼진 나팔 소리와 북소리에 응답하듯,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먼지 구름과 함께 나타난 그들은 각기 다른 문양의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수백의 무사들이었다. 수는 우리 연합군에 비해 훨씬 적어 보였으나, 말을 탄 자들도 눈에 띄었다. 적의 선봉 몇이 앞으로 튀어나와 무엇인가 고함을 질렀지만, 우리는 개별 결투에 응하지 않고 이미 활을 당겨놓은 상태였다.
“활 쏘아!” 지휘관의 명령과 함께 일제히 우리의 활시위가 떨렸다. 수많은 화살이 일순 공중을 새까맣게 수놓으며 날아가 적진에 비처럼 꽂혔다. 비명 소리가 들리고 말이 쓰러지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일본의 무사들은 생전 처음 겪는 집중 화살 세례에 크게 당황한 듯 좌우로 흩어지며 몸을 숨기려 했다. 그들은 기다란 장궁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말 위에서는 오로지 왼쪽으로만 쏠 수 있는 크고 둔한 활인지라 우리처럼 자유롭게 난사하지는 못했다 . 반면 연합군의 몽골식 반곡궁과 고려 궁수들의 활솜씨는 민첩하고도 위력적이어서, 근거리와 원거리에서 쉴 새 없이 연속 사격을 퍼부었다 . 몇몇 일본 무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함성을 지르며 우리 진영을 향해 단독 돌격해왔다. 그들은 일대일 승부를 기대한 듯 보였으나, 우리는 그런 적들을 중앙으로 유인한 뒤 사방에서 포위하여 쓰러뜨렸다. 개인의 용맹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우리의 조직적인 포위 전술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순식간에 해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양측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고, 곳곳에서 칼날과 창끝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나는 왼팔에 든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오른손에 창을 굳게 움켜쥐고 전열을 유지했다. 곧이어 “돌격!”이라는 함성과 함께 우리 보병대가 일제히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 역시 옆의 전우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모래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눈앞에 처음 마주한 일본 무사는 기다란 창을 비스듬히 세워들고 버티고 있었다. 그는 두꺼운 갑옷 틈새로 격앙된 눈빛을 번뜩이며,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 칼을 뽑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방패를 치켜들어 그가 내려치는 격렬한 일격을 받아내고, 틈을 노려 내 창끝을 그의 가슴팍을 향해 힘껏 내질렀다. 갑옷에 막혀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으나, 충격을 받은 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바로 그 순간 옆에서 달려든 내 전우 필성이 번뜩이는 칼날로 적의 옆구리를 깊숙이 베어 버렸다. 무사는 짧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고, 필성이 나를 향해 거칠게 외쳤다. “가마로, 해냈다!” 잠깐의 승리에 고무된 우리는 다시 앞으로 돌진했다.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한 적을 밀어붙이며 해변 쪽으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 순간, 주변에서 폭풍 같은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쾅! 쾅!” 귀청이 터질 듯한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연신 피어올랐다. 원나라 군이 쏘아 올린 화약 폭탄들이 일본군 진영 한복판에 떨어져 폭발한 것이었다 . 귓가를 찢는 폭발과 함께 수십 조각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여러 명의 일본 병사가 순식간에 피를 쏟으며 나뒹굴었다. 말들이 놀라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날뛰었고, 가까이에서 폭탄이 터진 일본 기사의 말 한 필은 화살과 파편을 맞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 나 또한 엄청난 굉음에 순간 귀가 먹먹해졌고, 귓속에서 날카로운 삐 소리가 울렸다 . 일대가 연기로 자욱해진 가운데, 일본군은 이처럼 생소한 무기에 크게 혼란에 빠진 눈치였다. 연기가 걷히자 몇몇 적들이 겁에 질린 채 우왕좌왕 흩어졌고, 그 틈을 우리 기병대가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달아나는 자들을 쓰러뜨렸다.
나는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한 적 병사의 창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던 찰나, 바로 옆에서 필성이 갑자기 크게 신음하며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그의 어깨에 일본 편전의 날카로운 촉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필성!” 내가 절규하는 순간, 이어 날아온 또 다른 화살이 그의 목 언저리를 관통했다. 필성의 눈이 크게 뜨인 채 허공을 향해 흔들렸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힘이 풀려 축 처져 버렸다. 전우의 따뜻했던 피가 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에 눈앞이 붉게 물렸지만, 싸움이 한창인 와중에 오래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곧바로 또 다른 무사가 칼을 치켜들고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필성의 몸을 모래바닥에 내려놓으며 간신히 그 칼날을 피했다. 번쩍이는 칼끝이 내 투구 옆을 스치며 지나갔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창을 휘둘러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적무사가 크게 휘청이는 찰나, 옆에 있던 우리 병사 한 명이 달려들어 그 무사의 가슴에 창을 꽂았다. 적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바닥에 쓰러진 필성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듯 보였다. 초점 잃은 두 눈은 흐릿한 하늘을 향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모래밭 위로 피가 서서히 퍼져 나갔다.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전장의 혼돈 속에서, 나 역시 곧 치명상을 입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등에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누군가의 칼날이 내 등을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나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시야가 뿌옇게 흔들리며 얼굴이 모래바닥에 처박혔다.
“여기 부상이야!” 어딘가에서 우리말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쓰러진 나를 곧 두 명의 고려 병사가 겨우 부축해 전열 뒤쪽으로 질질 끌어내었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나는 흐릿한 눈으로 전황을 살피려 애썼다. 일본군은 우리의 맹렬한 화살과 폭탄 세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크게 휘청이고 있었다. 그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들이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부하들을 수습하려 했지만 역부족인 듯했다. 급기야 일본군 주력은 전장을 이탈해 산쪽으로 퇴각을 시작했고, 곳곳에서 무리가 흩어진 채 달아나거나 쓰러져 있었다. 결국 우리 연합군이 해안 교두보 확보에 성공한 것이었다. 귀는 아직도 멍했고 상처 부위에서는 불에 덴 듯 한기가 흘렀지만, 나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여기서 끝나지 않게 해 달라. 내가 살아남을 수 있게…’ 그렇게 정신의 끈을 붙잡고 버티는 사이, 전투의 함성은 점차 잦아들었다. 해변에는 짙은 피비린내와 혼란스러운 승전의 기운만이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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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도 모르게 간이 들것에 실려 해변 근처의 한 마을로 옮겨지고 있었다. 해가 기울 즈음이었던 듯, 주위는 노을 진 빛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이 마을은 하카타만 인근의 작은 어촌 같았는데, 이미 우리 연합군의 점령 하에 놓여 있었다. 민가들은 대부분 주민들이 대피했는지 텅 비어 있었고, 일부 집들은 격전의 여파로 불타거나 부서진 상태였다. 나를 옮겨 온 전우들은 빈 집 부엌에서 데운 물로 내 상처를 씻어주고 약간의 천으로 상처를 질끈 동여매 주었다. 등에 입은 베인 상처는 다행히 깊지 않았지만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숨을 돌린 후 주위를 둘러보니, 마을 한켠에 부상자들이 모여 신음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 공터에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모아 놓고 있었다. 나는 휘청이는 다리로 그쪽에 다가갔다. “필성… 필성을 찾고 싶다.” 나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시신 더미를 헤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낯익은 투구 하나와 부러진 창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필성의 것이었다. 숨을 삼키며 다가간 나는 흰 천이 덮인 시신의 얼굴 쪽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젖혔다. 예상대로, 그 아래에는 내 오랜 친구 필성의 싸늘해진 얼굴이 드러났다. 함께 훈련을 받고 바다를 건너며 살아 돌아가자고 다짐했던 전우였건만, 이제 그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미안하다… 끝내 고향에 같이 돌아가지 못해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며, 떨리는 손으로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러나 오래 애도할 겨를도 없었다. 곧 지휘관의 명령이 전해져 해가 지기 전 가능한 한 시신을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군의 전사자들은 최대한 수습하여 땅에 묻거나 임시로 장작을 모아 화장하려 했지만, 인력과 시간이 부족하여 급히 말뚝을 박고 얕은 구덩이에 매장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일본 무사들의 시신도 사방에 널려 있었는데, 일부는 적이 퇴각하면서 수습해 간 듯했다. 마을 주변과 해변에 남겨진 적병들의 시신은 우리 병사들이 옷과 갑옷, 무기를 벗겨내 하나둘 전리품으로 챙겼다. 시신들은 전염병을 막기 위해 한곳에 쌓아 두고 불태울 준비를 했다. 이미 썩어가는 살 냄새가 코를 찔렀고, 파리 떼가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군졸 몇이 짚단과 나뭇가지를 급히 모아 시신 더미 위에 덮어 씌우며 연신 코를 틀어막았다.
필성의 시신 역시 내가 직접 운구하여 마을 뒤편 언덕 아래에 묻어 주었다. 마지막 가는 길이 너무 쓸쓸하지 않게, 함께 싸웠던 몇몇 전우들이 곁을 지켜 주었다. 나는 필성의 유품으로 그의 짧은 칼과 허리띠를 챙겼다. 혹여 살아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의 가족에게 이걸 전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얕게나마 무덤을 만들어 주고 나서,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붉은 석양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타는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고, 까마귀들이 낮게 울며 원을 그렸다. 짧은 승리의 기쁨은 이미 빗물에 씻겨 내려간 지 오래,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먹먹함만이 적막하게 남았다.
저녁 무렵, 우리 연합군은 점령한 이 일본 마을을 임시 병영으로 삼았다. 김방경 장군의 지휘 아래 고려군과 몽골군은 혼성 진영을 이루어 각자 경계를 세우고 숙영 준비를 시작했다. 나도 가까운 허름한 초가 하나에 몇몇 전우들과 함께 몸을 부렸다. 비록 부상병이라 해도 크게 특별한 대우는 없었지만, 적어도 머리 위로 비를 피할 지붕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몇몇 병사들은 일본 가옥에서 찾아낸 식량 보따리와 술독, 마른 생선 따위를 들고 모여들었다. 상륙 후 이미 상당 시간이 흘렀건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제대로 된 한 끼 식사조차 못한 상태였다. 함선에 실었던 군량미와 식수 중 일부는 상륙 과정에서 파손되거나 여전히 배에 남아 있었고, 파도가 거칠어 작은 보급선들이 해안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 게다가 예상보다 일본 측의 저항이 완강해 일부 부대가 일시 물러났다가 재정비하느라 시간이 지체되면서, 배에서 식량을 운반할 틈도 없었다. 그 결과 병사들 사이에는 벌써 허기와 피로가 급속히 퍼지고 있었다.
우리 조는 가까스로 확보한 쌀과 말린 생선으로 급히 죽을 쑤었다. 남의 집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솥을 걸어 끓인 죽이었지만, 모두들 게 눈 감추듯 허겁지겁 그릇째 들이켰다. 바닷바람에 식은 몸을 녹여주는 듯한 뜨거운 죽을 넘기면서도, 손끝은 여전히 떨렸다. 몇 모금 삼킬 때마다 등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목구멍으로 뜨거운 죽을 밀어 넣었다.
허기를 채우고 나니 비로소 주위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한 마을에는 군데군데 횃불과 모닥불 불빛이 어른거렸다. 집집마다 부상병들이 신음을 토해내고, 임시로 뽑힌 군의들이 분주히 들락거리며 상처를 꿰매거나 약초를 갈아 찧고 있었다. 몇몇 병사는 노획한 술을 돌려마시며 하루의 긴장을 풀어보려 했지만, 진영 전체의 분위기는 어딘가 침울하고 불안해 보였다. 처음 겪은 대규모 전투의 충격, 그리고 언제 닥칠지 모를 일본군의 역습에 대한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날씨까지 심상치 않았다. 바다 쪽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와 초가 지붕을 덮은 이엉이 덜컹이고 횃불 불꽃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머리 위 하늘에는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어 별빛마저 가려 버렸다. “곧 폭풍우가 들이닥칠 것 같군…” 모닥불 근처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가을철 이 해역은 폭풍이 잦아 보급이나 지원군의 투입이 쉽지 않은 곳이라 했다 . 며칠 전부터 지평선 너머로 비구름이 심상치 않더니, 오늘 밤 마침내 한바탕 기상이변이 우리를 덮칠 모양이었다.
한창 어둠이 짙어갈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 험악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몽골군 병사 몇이 우리 고려군 한 명을 에워싸고 거칠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빼돌린 군량 문제로 시비가 붙은 듯했다. “네 이놈, 감히 군량을 혼자 더 챙기려 들어?” 몽골 병사 하나가 서툴지만 위협적인 고려말 발음으로 으르렁거렸다. 그 앞에 주눅 든 채 선 고려 병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손사래치며 변명했지만, 이내 뺨을 한 대 얻어맞고 모래 위에 나뒹굴었다. 이를 본 주위의 다른 고려군 몇이 벌떡 일어나 항의하자, 몽골 병사 둘이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위협적으로 눈을 번뜩였다. 금세 양측 병사 수명이 험악하게 대치하며 일촉즉발의 살벌한 기운이 흘렀다. 다행히 곧 장교들이 달려와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고 양측을 떼어 놓았지만, 방금 일어난 소동은 연합군 내 서로 다른 집단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엄연히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비단 방금 싸운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전투의 충격과 누적된 피로, 그리고 이국땅에 와 있다는 막막함 탓인지 벌써부터 패배의 공포와 향수병에 빠진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몸을 뉘고 있는 초가 뒤편에서도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약 일본군이 곧 대거 들이닥치면 우린 어쩌지? 오늘처럼 쉽게 이기진 못할 텐데…” 다른 이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우리 함대도 절반은 태풍에 휩쓸려 가라앉았다던데, 그게 사실이래. 보급선이 못 들어오면 우린 굶어 죽고 말 거야.”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비관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번져나갔다. 심지어 어떤 병사는 주저앉아 포기한 듯 흐느끼기까지 했다. 이를 지켜보던 몽골 장교 하나가 그 병사를 채찍으로 후려치며 끌고 가 군율을 세웠지만, 내일에 대한 불안과 오늘 겪은 참상의 후유증은 이미 많은 병사의 눈빛을 어둡게 짓누르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몸을 의지한 초가의 지붕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어 빗물이 방안으로 방울져 떨어졌다.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빗물을 피해 보려 했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등에 난 상처가 욱신거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식은땀이 났고,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낮의 끔찍한 전투 장면들이 떠올랐다. 눈앞엔 아까 묻어 준 수많은 시체들과, 끝내 싸늘히 식어버린 필성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아침 출정 때만 해도 분명 전의를 불태우며 싸울 각오를 다졌건만, 지금 내 가슴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허망함과 슬픔이 밀려들고 있었다. 전쟁에 대한 환멸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나라를 위해 싸워 공을 세우겠노라던 당초의 포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과 전우를 잃은 죄책감만이 남았다. 잠결 사이로, 내가 아까 쓰러뜨린 한 일본 병사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최후의 순간 고통에 일그러진 채 입술을 달싹였는데, 아마도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가족의 이름이라도 부른 것이 아니었을까. 필성이 숨을 거두며 내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방금 전까지 싸웠던 적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자 남편이었을 터였다. 전쟁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순식간에 이처럼 수많은 목숨과 인연들을 앗아 가 버리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혼자 눈물을 떨구며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 끝없는 죽음과 파괴에 과연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일 아침이 밝으면 또다시 칼을 뽑아야 할 텐데, 그때 과연 내게 싸울 의지가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빗소리가 거세지자, 멀리서 들려오던 동료 병사들의 술 취한 실없는 웃음소리나 흐느끼는 소리도 모두 빗속에 파묻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축축한 지붕 너머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어린 딸아이까지… 원정길에 오르기 전, 남쪽 고려의 바닷가 항구에서 배에 오르던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네던 이들의 모습이었다. 필성도 바로 그날 자신의 세 살 난 아들을 내게 자랑하며, 전쟁이 끝나고 함께 무사히 돌아가면 이 원정에서 얻은 포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리라 웃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국의 땅에 차디찬 시신으로 누워 있고, 나 자신조차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무릎에 말라붙은 그의 피와 스며든 빗물을 느끼며, 나는 비로소 하나의 결심에 이르게 되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가리라고, 마음 속 깊이 굳게 맹세했다. 전우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참상을 훗날 내 눈으로 증언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니, 아까까지 한기처럼 번져 있던 공포가 한결 가라앉는 듯했다. 비바람은 점점 거세져 머리 위로 천둥소리가 멀리서 둔탁하게 울려 왔다. 폭풍우는 이미 우리 머리 위에 닥친 상태였다. 나는 남은 붕대 자락을 힘주어 한 번 더 동여매고, 칼자루를 부여잡은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살을 에는 빗속에서도 내 눈빛은 다시 뜨겁게 타올랐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모진 원정의 한복판에서, 나 가마로는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나로 스스로를 버티게 했다. 먼 하늘에서 번쩍 강렬한 번갯불이 어둠을 갈랐다. 순간 초가의 갈라진 문틈으로 새어든 번개빛에 내 손아귀의 칼날이 번득였다. 그 칼날에 비친 내 얼굴은 피투성이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반드시 살아 돌아가리라는 결연한 불꽃이 두 눈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빛나고 있었다. 나는 긴 밤의 폭풍우를 그렇게 온몸으로 버텨 내고 있었다.
제5부
바다는 어둠 속에서 낮게 신음하고 있었다. 하카타 앞바다를 향해 밀려오는 파도 소리는 전장의 혼탁을 씻어내듯 해안으로 부서졌다. 그러나 가마로의 귓가에는 아직도 낮의 함성 소리와 쇳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전우들의 울부짖음과 말들의 비명, 화포가 터질 때 땅이 흔들리던 감각이 환청처럼 따라붙었다. 짧은 휴식의 틈에도 가슴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싹트고 있었다. 밤공기는 싸늘했지만 피비린내와 땀내가 가시지 않아 숨 쉴 때마다 속이 메스꺼웠다.
가마로는 모닥불 옆 모래밭에 웅크린 채 부러진 창끝을 만지작거렸다. 멀찍이서 파도에 흔들리는 원나라 함선들의 희미한 등불이 별빛처럼 떠 있었다. 몸은 한껏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잠들지 못했다. 바로 몇 시간 전, 그는 죽음의 코앞까지 다녀왔다. 해가 저물 무렵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의 맹렬한 저항을 이겨냈지만, 그 대가로 셀 수 없이 많은 동료들이 해변에 쓰러졌다. 전투가 끝난 뒤에도 패주하는 적의 패잔병을 쫓고 부상자를 수습하느라 혼란이 이어졌다. 가마로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불 너머로 함께 싸운 고려 병사 석주가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석주는 팔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 손으로 물통을 들어 거칠게 목을 축였다. “간신히 끝난 줄 알았는데…” 석주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마로는 말없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석주의 눈엔 피로와 허탈감이 서려 있었다. 둘은 말없이 파도 소리를 들으며 살아남은 것에 대한 안도와 막막함을 공유했다. 오늘 하루 동안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얼굴이 불빛 속에 겹쳐 보이는 듯하여, 가마로는 눈을 감았다. 전쟁이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안겨 주는가 — 그런 회의가 가슴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 때였다. 멀지 않은 흑암 속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가마로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뭔가… 들리지 않아?” 석주도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순찰을 돌던 원나라 병사 한 명이 낮게 경고음을 내질렀지만, 곧바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 순간 불길이 일렁이며 바람이 확 몰아쳤다. “적이다! 일본군이다!” 어딘가에서 외치는 소리가 번개처럼 진영을 갈랐다. 칠흑 같은 밤속에서 날카로운 함성과 함께 수십의 검은 그림자가 모래밭으로 들이닥쳤다. 일본군의 야습이었다.
가마로는 얼른 부러진 창 대신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었다. 눈앞에 번뜩이는 칼날이 나타나자 그는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막았다. 짧은 금속성 충격음과 함께 팔이 저려 왔다. 어둠 속에서 그는 일본 무사의 얼굴과 마주쳤다. 상대의 눈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가마로는 악착같이 칼을 잡고 버텼지만, 무사의 힘이 예상보다 거셌다. 모닥불 불빛에 언뜻 비친 일본군의 갑옷에는 아까 낮 전투 때 묻은 듯한 피자국이 선연했다. 가마로는 자신도 모르게 목에서 쇳소리가 나는 비명을 질렀다. 무사가 내리찍는 검을 겨우 몸을 틀어 피했지만, 어깨에 뜨거운 통증이 훑고 지나갔다. 그가 뒤로 넘어지며 모래를 움켜쥐는 순간, 등 뒤에서 석주의 함성이 들렸다. 석주는 부상당한 팔로도 기세 좋게 달려들어 자신의 창을 무사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무사가 괴성을 지르며 휘두른 칼에 석주가 쓰러졌고, 가마로는 비틀거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힘껏 내리쳐 간신히 적의 목숨을 끊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사방에서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다른 병사들도 각자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온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비명이 어둠을 갈랐고, 불빛 사이로 날아든 화살들이 모래밭에 꽂혔다. 일본군의 기습은 순식간에 연합군 진영을 휘저으며 혼란을 퍼뜨렸다. 가마로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주위를 둘러봤다. 쓰러진 아군과 적군의 실루엣들이 불빛에 겹쳐 일그러져 보였다. 귀에는 무슨 말이 들리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가마로를 움직였다. 그는 근처의 함성 소리를 따라 달려가 다른 고려 병사 둘과 함께 일본군 한 명을 협공했다. 가까스로 그 적을 쓰러뜨렸을 때, 남은 일본 병사들은 이미 야습의 목적을 이룬 듯 어둠 속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싸움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 피해는 처참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살아남은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와 신음이 어둠 속에 가득했다. 가마로는 어지러운 정신을 붙들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석주의 이름을 불렀다. “석주야!” 허둥지둥 모닥불 곁으로 돌아온 그의 눈에 친구의 쓰러진 모습이 들어왔다. 석주는 모래밭에 드러누워 있었고, 옆구리에는 아까 그 무사의 칼에 베인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가마로는 피투성이가 된 석주의 몸을 부여잡았다. 친구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정신 차려! 석주야!” 가마로는 다급히 그의 뺨을 때리며 이름을 불렀지만, 석주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함께 목숨을 부지했다고 안도하던 전우가 순식간에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가마로는 말문이 막혀 모래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석주의 손을 붙잡았다. 차디찬 손끝의 감촉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그렇게 또 하나의 목숨이 눈앞에서 스러졌다. 그러나 가마로에게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다. 주변에는 아직도 신음하는 부상자들과 어둠 속에 쓰러진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몇몇 병사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횃불을 밝혔다. “여기 살아있는 자 있느냐!” “동생, 어디 있느냐!”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지휘관의 호각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질서를 세우려 했지만, 혼란에 빠진 병사들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가마로는 흐릿해지는 의식을 붙들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석주의 손을 놓는 순간, 가슴 한복판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친구의 눈을 감겨 주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가마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석주의 가슴 위에 자신의 낡은 목도리를 살며시 덮어 주었다. 깊은 밤, 횃불빛 아래 나뒹구는 수많은 주검들 사이에서 그는 한없이 작고 무력한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몽골 병사 몇은 숨이 붙어 있던 일본 병사들을 발견하고는 가차없이 목을 베었다. 피투성이가 된 일본 병사의 마지막 비명이 가마로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아군의 한 병사는 포로로 잡힌 일본인의 숨이 끊어졌는데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시신을 거칠게 걷어찼다. 잔혹한 광경에 일부 고려 병사들은 얼굴을 돌렸지만 말릴 겨를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그들 역시 분노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놈들이 또 올지도 몰라! 모두 죽여 버려!” 누군가 홧김에 내뱉은 고함이 어둠 속에 퍼지자, 곳곳에서 분노와 불안이 뒤섞인 술렁임이 일었다.
혼란은 아군 내의 불화로까지 번졌다. 한 몽골 병사가 방금 전 경계를 소홀히 했다고 생각한 고려 병사를 거칠게 밀쳐붙였다. 상대방은 언어도 통하지 않는 채 욕설과 손짓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홧김에 서로 멱살을 잡고 뒤엉키려 하자, 곁에 있던 다른 병사들이 황급히 그들을 떼어놓았다. 모두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어 작은 다툼도 크게 번지는 형국이었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누군가 절망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두운 바다 쪽을 바라보던 다른 병사는 기약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남았다 한들 이 이국땅에서 언제 또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절망감이 병사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일부 병사들은 아예 이 틈을 타 도망쳐버리려는 듯 몰래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그 사이 밤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바람은 점점 거세어졌다. 이미 전투 전부터 불던 강풍은 폭풍으로 변해 연합군을 덮쳤다. 파도 소리는 한층 높아져 해안엔 거센 물보라가 쉬지 않고 일었다. 가마로는 비에 젖은 채 부상자들을 옮기는 일을 도왔다. 비탄에 잠길 새도 없이, 그는 가장 가까이 쓰러진 한 부상병의 겨드랑이를 부축했다. 다리에 화살을 맞은 고려 병사였다. “버텨! 곧 배로 데려가 줄게.” 가마로는 다급히 소리치며, 다른 한쪽에서 몽골 병사 하나가 함께 부축하게 손짓했다. 국적과 말을 초월하여, 눈앞의 전우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만이 통했다. 아비규환의 밤 속에서도 가마로는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들을 지켜내리라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한참 후 동이 틀 무렵, 지친 병사들은 해변가에 몰려들었다. 끝내 퇴각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모두 철수하라! 퇴각하라!” 군관들은 다급하게 외쳐댔다. 순간 여기저기에서 웅성임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안도의 한숨, 분노에 찬 탄식이 뒤섞였다. “퇴각이라니… 우리더러 도망치란 말이냐?” 절망 어린 목소리로 되묻는 병사도 있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노련한 병사가 이를 악물고 말하였다. “식량도 바닥났고, 배들도 부서졌으니 더 버티긴 틀렸다. 이런 폭풍 속에 남아 있어봐야 다 죽는다.” 실제로 여명 속에 드러난 광경은 절망적이었다.
구름 사이로 새벽빛이 비추자 해안 여기저기에 처참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밤사이 불어닥친 폭풍으로 여러 척의 함선이 산산조각나 모래톱에 처박혀 있었다. 간신히 떠 있는 배들조차 돛대가 부러지거나 선체가 크게 파손된 상태였다. 보급로는 이미 끊겼고, 남은 병력도 크게 소모되었다. 이대로 머물렀다가는 굶주림과 폭풍에 고립되어 몰살당할 게 뻔했다. 게다가 일본군이 재정비해 곧 총공세를 펼친다면 지친 연합군은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물러나 다시 기회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두가 굳은 침묵 속에 명령을 받아들였다. 피투성이가 된 병사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서로 부축하며 물가로 향했다. 가마로도 탈진한 몸을 이끌고 해변으로 나아갔다. 그는 휘청이는 다리로 걸음을 옮기며 마지막으로 석주의 시신이 놓인 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막 새벽빛이 스며드는 모래밭 위에 친구의 몸이 작은 언덕처럼 보였다. 차마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미안하다… 반드시 살아 돌아갈게.” 가마로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작별을 고하고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렸다. 등에 멘 보따리에는 석주가 전날 맡겼던 고향 집으로 전할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약속을 지킬 사람은 이제 가마로 자신뿐이었다.
해변가에는 이미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급히 배로 몰려가는 병사들과 부상자들로 혼란이 극에 달했다. “부상자부터 옮겨!” 한 장교가 목청껏 소리쳤다. “밀지 마라, 모두 탈 수 있어!” 다른 장교도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사는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저마다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통에 장교들의 호통은 빗소리에 묻혔다. 몇몇은 아예 무기를 내팽개치고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치기까지 했다. 가마로는 가까스로 작은 나무배 하나를 찾아내 올라탔다. 그를 따르던 고려 병사 몇이 함께 몸을 실었다. 노를 잡은 사공의 얼굴에는 공포와 안도가 교차했다. 거센 빗줄기 속에서 작은 배는 크게 출렁이며 함선 쪽을 향해 나아갔다. 가마로는 긴장이 풀리자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목숨을 건 전투와 폭풍의 밤을 견뎌 낸 끝에, 마침내 이 지옥 같은 땅을 떠나게 되리라는 현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커다란 원나라 함선에 옮겨 탄 뒤에도 가마로의 가슴은 먹먹했다. 선창에는 이미 부상병들이 가득 실려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가마로는 갑판 난간에 몸을 기대고 몰아치는 빗속에서 해안을 바라보았다. 먼 하카타 해변 쪽으로 아직도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군이 불태운 마을의 잔해였다. 그 불꽃은 곧 빗물에 꺾여 검은 연기 기둥만을 남겼다. 가마로는 그 연기가 허공에 흩어져가는 광경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마치 이번 원정의 끝이 저 연기처럼 허망하게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위의 동료 병사들은 하나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몇몇은 고개를 떨군 채 흐느꼈고, 몇몇은 살아 돌아가지 못한 친구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모두가 텅 빈 눈으로 각자의 절망과 안도, 회한과 상실감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가마로는 젖은 옷깃을 여미며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회색 구름 사이로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가슴 한켠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 머나먼 곳까지 와서 이토록 많은 피를 흘렸단 말인가.’ 고려 땅도 아닌 이 이국의 섬에서 수많은 목숨을 바쳐 얻은 것이 결국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전쟁이 남긴 것은 처절한 상흔과 가슴을 에는 허무함뿐이었다. 가마로는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 비에 씻긴 손바닥 사이로 선혈이 섞여 흘러내렸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까지 끝내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의무가 주어졌음을 깨달았다. 석주를 비롯해 이 땅에 쓰러져 간 수많은 넋들을 가슴에 안고 끝내 고려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라면 기필코 해내리라. 전쟁은 무익하게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가마로는 자신의 삶마저 앗기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파도가 선체를 세차게 때리며 배는 점차 일본의 해안을 멀어져 갔다. 가마로는 마지막으로 희미해져 가는 육지를 눈에 담았다. 싸늘한 바람 속에 일본의 산야가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악물었던 이를 천천히 풀며 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반드시 살아서 고려로 돌아가겠다.’ 이 모든 고통과 상실이 헛되지 않도록, 남은 삶을 다해 버텨 내리라 다짐했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그의 가슴속 맹세만은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가마로는 눈을 감은 채 묵묵히 그 다짐을 되새겼다. 머지않아 동쪽 먼 하늘이 완연히 밝아오르면, 저 빛이 그의 고향 땅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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