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성시도의 개요와 중국적 영향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후기의 8폭 병풍 회화로, 성곽 도시의 번화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 각 폭 세로 약 114cm, 가로 49cm의 비단 위에 채색한 대형 그림으로, 약 2,100여 명에 달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상업, 공예, 건설, 농경, 군사 등 도시 생활의 여러 장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 화면에는 수레로 가득한 도로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 시장, 화려한 건물과 정비된 도로와 하천까지 이상적인 도읍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조선 후기 사회가 염원한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이상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 작품 제목에서 태평은 그림 속 간판에 적힌 글자에서 유래하며, 성시’는 성곽 도시(狀如城)의 번화한 시장을 뜻한다 .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화풍과 소재에서 중국 회화의 영향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사 연구에 따르면 태평성시도는 중국 송대(宋代)와 명대(明代) 풍속화의 도상(圖像)을 차용한 사례로 꼽힌다. 특히 *ㅣ북송의 명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비롯한 중국의 유사 작품들이 태평성시도의 직접적 연원으로 지목된다  . <청명상하도>는 12세기 송나라 화원(畵員) 장택단(張擇端)이 청명절 시기 도시 풍경을 그린 유명한 두루마리 그림으로, 이후 명·청대에 수많은 모사본이 제작되어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실제로 조선의 연행사(燕行使)들이 북경 등지에서 청명상하도의 모사본을 여러 차례 접했으며, 이들이 돌아와 기록한 견문과 자료가 태평성시도의 창작에 참고되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견해이다 . 그밖에 명대에 간행된 농경·양잠 도해집인 <패문재경직도> 등의 도상, 그리고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서 보고 들은 당대 중국의 생활상이 태평성시도의 배경과 소재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
화풍·복식·건축 양식에 나타난 중국적 요소
태평성시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화면 구성과 인물·건축 표현에서 중국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림 속 도시는 높은 성벽과 다수의 누각, 거리 곳곳에 세워진 패루(牌樓)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러한 패루는 중국에서 통로나 중요한 건물 앞에 세우던 장식 아치로서 전형적인 중국식 건축물이다 . 작품에는 무려 6개의 패루가 그려져 있으며, 7번째 패루는 건축 공사가 한창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 성문과 패루를 잇는 도로, 하천의 배치 등 도시 경관의 짜임새도 전통적인 한국 풍경화와는 사뭇 다르다. 건물 표현 기법 역시 눈에 띄는데, 자를 대고 그은 듯한 반듯한 직선 위주의 건축 묘사(계화, 界畵 기법)가 사용되어 중국 화원의 도시 풍속화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 건물들의 외형은 기와지붕이나 창문의 형태까지 당시 조선의 건축이라기보다 중국 도시의 건축양식에 가깝게 그려져 있으며, 거리 양측으로 2층 목조 건물들이 죽 늘어서 내부 상점까지 들여다보이게 그린 수법은 중국 화풍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
인물들의 복식과 외모 또한 중국 풍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작품 속 수천 명의 인물들 중 남녀노소의 의복과 머리 모양 등을 보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복식과는 다른 모습이 여러 군데 포착된다. 예를 들어 그림 속 어린 아이들은 두 갈래로 땋아 올린 쪽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 남자아이의 상투 틀기 이전 머리 형태와 다르며 오히려 중국 전통의 동자(童子) 머리형을 연상시킨다 . 실제로 한 평론에서는 “동자는 우리 조선시대 사내아이의 땋은 머리가 아니라 머리 위로 좌우 대칭의 쪽을 얹어 마치 미키마우스의 귀를 연상시키는 중국의 동자상”이라고 지적되었다 . 성인 남성들의 복장도 마찬가지로, 거리의 인물들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한눈에 봐도 중국 사람들과 똑같이 표현되었음을 여러 분석자들이 언급하고 있다  . 동아일보의 리뷰 기사에서도 “건축물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옷차림 등이 중국식이다”라고 분명히 전하고 있다 . 요컨대 태평성시도의 겉모습만 보면 중국 도시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실제로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를 두고 “등장인물과 건축물에 중국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이기 때문에…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할 정도로, 당시 조선 회화로서는 특이한 사례였다 .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이 단순히 중국 그림을 베낀 모사품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밀히 들여다보면 중국과 구별되는 조선적 요소들도 곳곳에 섞여있다는 분석이 있다. 예컨대 시장 거리 한쪽에 그려진 개다리소반이나 전통 디딜방아, 한옥식 내부 구조, 밥상 차림새 등은 분명 조선 고유의 생활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 실제 그림 속 물건 상당수가 박지원 등의 연행록에 기록된 중국 관찰 기록과 흡사하지만, 건물 내부 구조나 공사 방법, 음식상 차림, 농기구 사용 방식 등은 철저히 조선식으로 묘사되었다고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 다시 말해 외형적으로 볼 때 이 그림은 중국의 도시 풍속화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조선 사회의 실제 생활양식과 전통 요소가 명확히 담겨 있어 단순한 중국 풍속의 모방이 아니라 이를 조선적 풍속화로 재창조·승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이러한 혼재 양상을 들어, “조선적인 건축물과 등장인물이 중국식 도상에 연원을 두고 있지만, 개다리소반, 조선식 상차림, 양다리 디딜방아 등 조선식 기물과 풍습이 등장하기 때문에 조선 화가가 그린 조선 풍속도”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 또한 인물 표현이나 나무 그리는 필치에서 김홍도식의 한국적 화풍도 엿볼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며 작품의 조선적 귀속을 설명하기도 했다 .
요약하면, 태평성시도는 중국의 도시풍속화 양식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이상사회에 대한 상상을 가미하여 그려진 독특한 회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질적 결합 때문에 중국적인 것과 조선적인 것이 화면 속에 뒤섞여 있는 양상을 보이며,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예술사적 의의이자 동시에 논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 .
전시 현장에서의 소개 부족과 관람객 혼란
태평성시도에 내재한 중국적 요소들은 학계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으나, 전시 현장에서 일반 관람객들에게 얼마나 명확히 전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과 기타 기관 전시에서 해당 작품의 중국적 배경이 충분히 고지되지 않아 발생한 혼란에 대한 지적이 존재한다.
이미 200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시대 풍속화 특별전에서는 태평성시도를 접한 일부 관람객들이 그림 속 이질적인 양상에 당황한 바 있다 . 동아일보에 실린 당시 전시 리뷰에 따르면, 관람객들은 태평성시도 속 거리 풍경이 조선이 아닌 중국의 도시 모습인 점에 어리둥절해했고, “작품 속의 중국 건축물을 조선의 것으로 잘못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전시 내용에 대한 이해에 혼선을 빚는 모습을 보였다 . 예컨대 패루와 같은 중국식 구조물이 왜 조선 풍속화에 등장하는지 설명이 부족하여, 이를 조선의 건축문화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이 관람객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작품 속 풍경이 중국 도시이기 때문”이며 “건축물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옷차림 등이 중국식”이어서 관람객이 배경 지식 없이 볼 경우 혼동할 소지가 크다고 기사에서는 지적했다 .
이러한 혼란이 생긴 데 대해, 전시 기획 측의 배려 부족을 지적하는 비판도 나왔다. 앞선 리뷰 기사에서는 관람객 이해를 돕기 위한 충분한 안내가 없었던 점을 꼬집으며, 관람객의 눈높이를 외면한 전시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 즉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왜 조선 그림에 중국 요소가 등장하는지를 쉽게 풀어 설명하거나 사전에 고지하는 노력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이는 전시 패널이나 도록 등에서 태평성시도의 도상적 연원(중국 청명상하도와 연행사 견문 등)을 보다 명확히 밝혔더라면 방지할 수 있었을 혼란이라는 함의로 읽힌다. 박물관 측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품을 “조선 화가의 작품”으로 분류하면서도 중국식 도상 차용에 대해 내부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지만 , 정작 관람객들에게 그 점을 강조하여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다. 결국 일부 관람객들은 태평성시도를 곧이곧대로 조선 시대 실제 한양 혹은 어느 도시의 풍경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한국 그림에 웬 중국인?” 하는 의문을 품으며 돌아가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2010년대 이후에도 이러한 문제의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에서 태평성시도가 공개되었을 때에도, 학계 전문가의 비판적 논평이 눈에 띈다. 미술사학자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는 해당 작품 전시를 본 소감을 기고하며, 태평성시도가 “18세기 조선시대 도시의 다양한 삶이 적극적으로 부각되었다고 관련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라며 강한 아쉬움을 표했다 . 그는 거리에는 패루(牌樓)가 우뚝 솟아 있고, 건축물은 자를 사용해 반듯하게 그린 계화법이며, 화면에 등장한 수많은 사람들의 옷과 머리 모양은 더도 덜도 없이 그대로 중국 사람들이라고 언급하면서, 겉보기에는 북송~명대의 중국 도시를 정밀하게 묘사한 <청명상하도>의 모사판(模寫版)이나 다름없다고 혹평하였다  . 이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태평성시도도 그런 점에서 매우 실망스럽다며, 관람객들이 이를 보고 조선의 전통문화라고 착각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 . 실제 그의 글에서는 “우리는 조선의 복식과 머리 스타일 그리고 가옥이 완전히 중국과 같아서 우리가 중국과 같은 나라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을 뻔했다”고까지 언급되어, 역사 인식의 혼동에 대한 경고를 내놓았다 . 이렇듯 전문가의 시각에서는 태평성시도가 가진 중국적 차용을 관람객에게 분명히 설명하지 않을 경우, 조선 시대 생활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소지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문화 정체성 쟁점과 역사 왜곡 논란의 우려
태평성시도를 둘러싼 이러한 논란의 이면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정체성 인식과 역사 왜곡에 대한 민감성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가 그렸다고는 하지만 내용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그림을 충분한 맥락 설명 없이 전시할 때, 관람자들로 하여금 “조선의 전통회화도 중국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주체성의 흐림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앞서 박정자 교수는 “우리의 전통 회화가 중국 그림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가 된 듯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한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까지 언급했다 . 이는 곧 우리 그림 속에 내재한 중국적 영향들을 숨기거나 애매하게 두지 말고 정직하게 드러내고 인식하자는 제안이며, 그러한 태도만이 자긍심에 기반한 진정한 문화 정체성을 세우는 길이라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뿌리를 정확히 직시하고 타문화의 영향까지 포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며, 그렇지 않고 어설프게 넘길 경우 자칫 우리의 문화유산이 중국 것과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날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역사·문화 공정(工程)에 대한 경계심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중국은 지난 수십 년간 고구려·발해사나 김치·한복 등 주변국의 역사와 문화를 자국의 범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보여와 국제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스스로 역사 유산이나 전통문화의 맥락을 명확히 규명하고 알리는 작업이 부족할 경우 의도치 않은 왜곡이나 오해를 야기하여 남에게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태평성시도처럼 겉보기에는 중국의 모습과 구분이 어려운 작품일수록 그러한 위험성이 지적된다. 실제로 한 언론 평론에서 “김홍도, 신윤복의 풍속화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조선의 복식과 집이 중국과 같아서 중국과 같은 나라인 줄 알 뻔했다”는 언급은, 자칫하면 우리의 역사문화가 중국과 동일시될 뻔한 아찔한 가능성을 꼬집은 말이라 할 수 있다 . 이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경각심으로 읽힌다. 결국 태평성시도의 사례는 우리 문화유산 전시에 있어서 자문화 중심의 자긍심과 함께 타문화 영향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병행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균형 잡힌 인식 없이 일방적 자부심만 내세울 경우, 오히려 객관적 사실을 소홀히 하여 역사논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학계와 전시 현장에서는 시간이 흐르며 이러한 점을 점차 보완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태평성시도에 대한 연구 논문들과 전시 해설들은 이제 대체로 중국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중국적인 요소와 조선적인 것이 혼재되어 있는 작품”ㅣ임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이후 중화적 세계관과 북경의 첨단 문물, 조선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고루 들어있고, 중국 문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한 그림이라는 식으로 태평성시도를 다층적으로 해석하여 소개하고 있다 . 또한 2010년대 들어 박물관 상설전시관에 태평성시도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실감 영상관 콘텐츠(“태평한 하루 속으로”)를 운영할 때에도, 관람객들이 작품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청명상하도와의 관계나 작품의 이상향적 성격을 설명하는 자료를 함께 제공하였다. 이는 앞선 비판들을 수용하여 맥락 정보를 강화함으로써 관람객의 역사적 이해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평가된다.
유물 전시에서 출처 및 양식 표기의 중요성
태평성시도 사례가 보여주듯, 박물관이나 전시기관에서 유물의 원 출처나 차용된 양식을 명확히 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문화재가 자국의 것이라 할지라도 타문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소재를 빌려왔다면, 그 배경을 투명하게 밝혀주는 것이 관람객의 올바른 이해를 돕고 불필요한 오해를 방지하는 기본 원칙이다. 특히 역사교육적 측면에서도, 이러한 맥락 설명은 자문화와 타문화의 교류 관계를 인식시켜주는 긍정적 효과를 지닌다. 태평성시도처럼 중국적 모티프를 대거 활용한 유물을 아무 설명 없이 “조선 시대 도시 풍경”이라고만 전시한다면 관람자는 조선이 곧 중국과 흡사한 문화권이었나? 하는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청명상하도> 등에서 착상을 얻어 조선 화가가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부연한다면, 관람자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중국 문물을 수용하며 이상적인 사회상을 꿈꾸었다는 맥락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는 문화 교류사의 한 단면도 학습하게 해주는 효과적인 전시 연출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국제적인 시각에서의 문화재 전시 윤리를 보아도, 출처와 양식에 대한 정확한 표기는 필수적이다. 근현대에 이르러 박물관계에서는 유물의 출전(provenance) 뿐만 아니라 문화적 맥락(context)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시 기획이 발전해왔다. 유럽이나 미국의 박물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물을 전시할 때 그 문화권 정보를 상세히 제공하듯이, 우리 박물관에서도 자국 유물이라 해도 타문화와의 관련성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전문성과 신뢰를 높이는 길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전시 설명 패널에 유물의 제작지, 영향받은 문화권 등을 표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정보 제공이 미흡할 경우, 앞서 본 태평성시도처럼 관람객이 잘못된 추측을 하거나 심지어 전시 기획 의도를 오해하여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 전문가들은 이처럼 관람객의 눈높이에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시 연출이 중요하며, 유물의 역사·문화적 맥락을 솔직하고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태평성시도의 경우, 다행히 초기의 비판 이후로 학예 연구와 전시 설명이 개선되어 현재는 해당 작품이 중국 풍속화의 영향 아래 탄생한 조선 후기의 이상향도(理想鄕圖)라는 점을 비교적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례는 문화재 전시에 있어 맥락의 투명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유사한 사례로, 가령 조선시대의 공예품이나 복식 중에도 중국이나 서양의 양식이 차용된 것이 적지 않은데, 이러한 경우에도 원형 문화에 대한 언급과 출처 표기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관람객에게 해당 유물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전달하는 길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왜곡된 역사 인식이나 문화적 분쟁을 예방하는 길이기도 하다.
결론
태평성시도는 조선인이 그렸지만 중국 송·명대 회화의 요소를 다분히 받아들인 독특한 작품으로서, 그 예술사적 가치와 함께 전시 해석상의 쟁점을 함께 지닌 사례라 할 수 있다. 화려하고 이상화된 도시 풍경 속에는 중국적 건축과 복식, 회화 기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는 조선 후기 소중화 사상과 국제 감각을 반영한 미술품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나 초기 전시에서는 이러한 중국적 차용 사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관람객의 혼란과 비판을 야기했고, 나아가 우리 문화 정체성에 대한 논의와 역사 인식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다행히 이후 박물관 전시에선 맥락 정보를 보완함으로써 관람객 이해를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태평성시도 논란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박물관 전시는 단순한 유물 진열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이며 교육이라는 점, 그리고 그 스토리텔링은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관람객의 입장에서 명료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한 문화권의 유물이 다른 문화의 영향권에서 만들어졌을 경우, 그 상호작용의 흔적을 숨기지 말고 투명하게 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해당 유물의 역사적 진실을 존중하는 길이며, 관람객에게는 풍부한 이해를, 나아가서는 문화 간 교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심어주는 길이 될 것이다. 태평성시도의 경우처럼, 제대로 된 고지와 해설을 통해 우리의 것이면서도 타문화를 수용했던 역사적 맥락을 알려줄 때 비로소 관람자는 과거 조상들의 세계관과 이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을 간과하지 않는 전시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열린 시각을 가지고 왜곡 없이 역사를 이해하는 성숙한 문화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태평성시도 관련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도록 및 연구 논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언론 기사(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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