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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고려사』 상세 조사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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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고려사 편찬 배경
2. 고려사 전체 구성과 체제
3. 고려사에 수록된 주요 인물 및 사건
4. 각 권별 (부문별) 주요 내용 요약
5. 고려사 편찬자의 역사 해석과 사관
6. 『고려사』의 현대 번역본 및 해설서 현황

1. 고려사 편찬 배경


편찬 시기와 배경: 『고려사』는 조선 초기에 왕명에 따라 편찬된 고려 왕조의 정사(正史)이다. 고려 왕조 멸망 직후인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년(1392) 10월에 정도전·정총 등에게 고려 역사의 편찬을 명하여 , 1395년(조선 태조 4년) 정월 정도전과 정총이 편년체로 기술한 37권 분량의 『고려국사』를 완성하였다 . 그러나 이 책은 편찬 기간이 매우 짧고 개국공신들의 주관적 입장이 반영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태종 대에 이르러 내용상의 미흡함(조선 건국 과정 기록 부실 등)이 지적되었다 . 이후 세종은 『고려국사』의 내용 오류를 지적하며 개정을 지시했고, 1438년(세종 20)부터 1442년까지 신개·권제 등이 내용을 보완한 *『고려사전문』*을 편찬·간행하려 했으나, 편찬자의 청탁 개입과 서술 불공정 문제가 드러나 인쇄가 중지되었다 . 세종 말기에는 서술 체제를 편년체에서 새로이 기전체로 바꾸어 다시 편찬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이러한 작업은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 대에 완료되었다 .

편찬 과정과 완성: 세종의 지시에 따라 집현전 학자들이 동원되어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고, 문종 원년인 1451년 8월 마침내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등 당시 최고 관료들이 주도하여 『고려사』 편찬을 완성하였다 . 편찬에는 공식적으로 32명의 수사관(修史官)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김종서·정인지 등 정치 사건으로 실명이 삭제된 인물들을 포함해 훨씬 많은 인원이 관여하였다 . 1454년(단종 2) 10월 정인지의 이름으로 인쇄·반포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 고려 멸망 후 약 57년만에 전(前)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편찬 목적과 정치적 배경: 『고려사』 편찬에는 두 가지 큰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조선 왕조 창건의 정당성과 합리화를 뒷받침할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즉, 고려 왕조의 흥망사를 정리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합리화”*를 도모하려 한 것이다  . 둘째는 고려 말기의 폐단에 대한 반면교사 확보였다. 특히 무신정권기부터 우왕·창왕에 이르는 고려 후기의 국정 문란과 폐정을 경계하여 새 왕조에 교훈을 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 이러한 목적은 조선 개국 세력의 정치적 입장과 성리학적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지만, 동시에 편찬자들은 사료 선택의 엄격성과 서술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평가된다  . 실제 편찬 과정에서 고려 왕조의 여러 실록, 문집과 함께 『동문선』, 『용비어천가』 등 당시 입수 가능한 거의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사실 기록을 충실히 수록하고자 하였다 . 또한 고려 말 조선 개국과 입장이 달랐던 인물이라 해도, 충절과 의리가 있었다면 이를 그대로 기록하여 공정성을 지키려 하였는데, 고려 왕조의 충신 정몽주 등을 충의열전에 포함한 것이 그 예이다 .

2. 고려사 전체 구성과 체제


기전체 편찬 방식: 『고려사』는 중국의 정사 편찬 전통을 따른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역사서이다 . 본기(本紀)·세가(世家), 열전, 지, 연표 등으로 구성되는 기전체는 본래 황제의 연대기를 본기라 하고 신하들의 전기를 열전이라 하는 체제이지만, 조선 조정은 고려 왕을 황제가 아닌 제후로 격하시켜 기록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고려 국왕들의 기록을 본기가 아닌 세가(世家)**로 편찬하여 명분을 바로잡고자 했는데 , 이는 주자학적 명분론과 대명의식에 따른 결정으로 해석된다 . 다시 말해, 고려 왕들을 중국 황제와 대등한 본기 대신 세가에 둠으로써 조선 건국 세력이 고려 왕조를 하나의 제후국 격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편찬 시에는 “사실은 당시 불렸던 대로 기록하여 남긴다”는 직서 원칙에 따라, 고려 시대에 왕을 향해 사용했던 폐하나 “태후”, 연호(年號) 등의 칭호도 후대 입장에서 함부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고 한다 . 이는 세종과 젊은 사관들이 지나친 격하보다는 사료의 원형 보존과 문화적 자주성을 중시한 결과로, 고려사 편찬의 한 특징이 되었다 .

전체 구성 및 권수: 『고려사』는 전 139권(75책)으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 구성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각 부분과 권수는 다음과 같다  :
• 세가(世家) – 고려 태조부터 공양왕까지 32대 왕의 연대기. 46권으로 편찬되어 있으며, 고려 왕들의 치세를 해년(該年) 순으로 기록하였다 . (우왕·창왕 두 임금은 정통 군주로 인정되지 않아 세가에서 제외되었다.)
• 지(志) – 고려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의 제도와 사상을 주제별로 분류해 서술한 **지열(志列)**이다. 천문부터 형법까지 10개 항목으로 나뉘며, 총 39권이 편성되었다 .
• 연표(年表) – 고려와 중국 왕조의 연대를 대조한 연대표 2권으로, 고려 왕들의 즉위년, 주요 정변이나 외교 사절 파견 등을 연도별 표로 정리하였다 .
• 열전(列傳) – 왕을 제외한 각계 인물들의 전기 모음으로, 50권 분량에 달한다 . 고려 시대 1,0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이들의 생애와 업적을 분야별로 정리했다.
• 목록(目錄) – 책 말미에 붙은 2권의 목록으로, 일종의 총목차 및 색인에 해당한다 . 각권의 편목과 편찬에 사용된 사료 등이 수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와 같은 구성을 통해 『고려사』는 고려 왕조 500년의 역사를 세가(연대기)와 열전(인물 열전)으로 서술하고, 지(주제별 전문)와 연표(연대 일람)로 보완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 이 체제는 특히 원나라의 『원사』를 모델로 삼아 편찬되었는데, 고려 말의 두 왕(우왕·창왕)을 본기 대신 반역열전에 수록한 파격적인 구성 등은 『한서』 왕망전의 예를 따른 것이라고 편찬자들이 밝히고 있다 . 또한 각 *지(志)*의 항목 서두에는 편찬자가 직접 쓴 서문이 붙어 있어 해당 분야 제도의 변천과 편찬 의도를 설명하고 있으며, 열전에도 각 열전류의 범례와 서문을 실어 분류 기준과 편찬 의식을 나타내었다  .

3. 고려사에 수록된 주요 인물 및 사건


『고려사』에는 고려 왕조 474년(918~1392년) 동안의 정치·군사·문화적 주요 사건들과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다. 고려 왕조는 918년 왕건(태조)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34명의 국왕이 1392년까지 다스린 왕조로서 , 그 흥망 성쇠를 결정지은 여러 사건과 인물이 『고려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이하 고려사의 서술 범위에 포함된 대표적인 인물과 사건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다 (※ 굵은 글씨는 해당 사건의 성격).
• 918년,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정치) – 후고구려의 장군 출신이던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개국, 국호를 고려라 했다. 이어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과 936년 후백제 정벌을 통해 후삼국 통일을 완수하였다 . 왕건은 민생안정과 호족 포섭 정책으로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 훈요10조를 남겨 후대 국정의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다.
• 956~958년, 광종의 개혁 (정치/사회) – 4대 왕 광종이 즉위 후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불법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고 공신·호족 세력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켰다. 이어 과거제(科擧制)를 처음 실시하여 공신 세력 대신 능력 위주의 신진 관료를 등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 . 광종의 개혁과 뒤이은 성종의 유교 정치 이념 도입(국자감 설치, 3성6부 중앙제 확립 등)으로 고려 전기는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문치주의가 확립되어 문종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
• 993~1019년, 거란과의 전쟁 (군사) – 고려는 1011세기 세 차례에 걸쳐 북방 거란(요나라)의 대규모 침략을 받았다. 1차 침입(993년) 때는 외교관 서희의 담판으로 싸움 없이 물리치는 대신, 고려가 강동 6주(압록강 동쪽 영토)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차 침입(1010년)과 3차 침입(10181019년) 때는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가는 국난이 있었으나,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는 등 분투 끝에 침략을 격퇴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개국 후 가장 큰 외세 위협을 물리치고 북방의 평화를 얻었다.
• 1126~1135년,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정치) – 고려 중기에는 문벌귀족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이자겸의 난(1126년)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년)이 연이어 발생했다. 인종 때 외척인 이자겸이 왕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자겸의 난)과, 승려 묘청 등이 서경(평양) 천도를 주창하며 난을 일으켰다가 김부식 등 개경 세력에 진압당한 사건(묘청의 난)은 모두 고려 지배층의 분열을 드러낸 대표적 반란이다. 묘청의 난 이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등 사대부 중심의 보수화가 이루어졌고,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 1170년, 무신정변과 무신정권 수립 (정치/군사) – 의종 24년(1170) 하급 무관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문신 중심의 정치를 전복시켰다. 이 무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등을 거쳐 마침내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이 시작되었다. 무신집권기에는 왕이 실권을 잃고 최고권력자가 무신으로 교체되었으며, 이에 반발한 농민·천민 봉기(망이·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 등)도 다수 발생하여 사회 혼란이 가중되었다 . 결국 최씨 무신정권은 고려의 기존 통치 질서를 크게 흔들었고, 이후 몽골 침략기까지 국정 불안이 지속되었다.
• 1231~1259년, 몽골 침입과 항쟁 (군사/문화) – 13세기 들어 세계 최강국 몽골제국의 침략이 장기간 이어졌다. 몽골군의 1차 침입(1231년)으로 개경이 위협받자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 항전에 돌입했다. 몽골과의 전쟁은 30여 년 간 7차례에 걸쳐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백성 피해가 막심하여 국토가 황폐해졌다 . 이러한 국난 속에서 고려 조정과 불교계는 초조대장경(1087년 완성)이 몽골 침략으로 소실되자,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새로 조성하는 문화적 대응을 보였다. 강화도로 천도한 지 5년 후인 1236년부터 대장경 조판사업을 시작하여 1251년 합천 해인사에서 완성함으로써, 몽골 격퇴를 기원하는 국책 사업이자 세계적인 기록문화유산을 남겼다 . 또한 고려는 목판 인쇄술의 축적으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1234년경 상정고금예문 주조)를 이루는 등 전시(戰時) 속에서도 뛰어난 문화기술을 발달시켰다 .
• 1270년, 삼별초의 항쟁 (군사) – 고려 조정이 몽골과의 강화 조건으로 개경 환도(還都)를 결정한 직후, 이에 반대하는 삼별초(무신정권기의 군사 조직)가 반몽 자주권 수호를 내걸고 끝까지 항쟁하였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대몽 항전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 1273년 여몽 연합군에 진압되어 막을 내렸다. 삼별초의 항쟁은 무신시대의 종언과 함께 고려가 결국 원(몽골) 제국의 간섭을 받는 원간섭기로 진입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 1270~1350년대, 원 간섭기와 공민왕의 개혁 (정치) – 원나라 간섭기 동안 고려 왕실은 원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왕이 쿠빌라이의 부마국 신분이 되었고, 내정 간섭과 과도한 공물 요구로 국권이 크게 제약되었다. 이에 14세기 중엽 31대 공민왕은 반원 자주노선을 추진하여 친원 세력을 숙청(기철 등 제거), 몽골식 관제를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영토를 수복하는 등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공민왕 때는 신진사대부(신흥 유학자 관료)들이 등용되어 개혁을 뒷받침하였으며, 성리학을 수용하고 전민변정도감 설치(권문세족의 농장과 노비 정리) 등 사회 모순 해결을 꾀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1374년 권신에게 시해당하고, 이후 왕권이 약화된 가운데 외세와 왜구의 침입이 겹쳐 고려 말 혼란이 가중되었다.
• 1380년대, 왜구 격퇴와 최영·이성계 (군사) – 고려 후기에는 해적 왜구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전국이 피폐해졌다. 1380년 진포대첩(최무선의 화포 사용으로 왜선 격침)과 황산대첩(이성계의 왜구 섬멸) 등 연이은 승전으로 왜구 세력을 크게 누르고 해상 안전을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활약한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은 고려 말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왕실 권위는 추락하고, 친원파의 복귀와 실정으로 왕조는 쇠퇴일로를 걸었다.
• 1388년, 위화도 회군 (정치/군사) – 1388년 요동 정벌을 명받고 출정했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회군함으로써 정변을 일으켰다. 이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실질적 마지막 왕이던 우왕을 폐위하고 이성계 등이 권력을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어 이성계는 친명정책을 펼치며 정국을 주도하고, 1392년 마침내 공양왕을 폐위하고 조선 건국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게 되는데, 『고려사』 세가 최후권은 공양왕 4년(1392)의 실록 편찬 기록을 끝으로 역사서를 마무리하고 있어 고려 왕조의 종언을 보여준다 . 고려 왕조 500년의 흥망사는 이처럼 『고려사』에 오롯이 담겨 있어, 후대에 중요한 역사 교훈이 되고 있다.

4. 각 권별 (부문별) 주요 내용 요약


『고려사』는 앞서 언급한 세가, 지, 연표, 열전 각 부문을 통해 고려 왕조사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각 부문의 주요 내용과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세가(世家) – 고려 32대 국왕들의 치세 기록으로, 연월일에 따른 편년체 서술이 각 왕별로 이어진다. 태조 세가의 첫머리는 건국 이전 후삼국 상황과 왕건의 출생 설화, 궁예 정권 타도 과정 등을 서술하며 고려 왕조의 출발을 알리고, 이어 936년 후삼국 통일과 개국 공신들의 활약을 상세히 전한다. 이후 정종·광종 세가에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숙청과 개혁 법령 공포(노비안검법, 과거 실시 등)와 이에 따른 공신들의 반발, 외국 사신 교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광종 세가에는 956년 노비안검법 시행, 958년 과거 실시 사실이 연도별로 실려 있고 , 성종 세가에는 유교정치 실현을 위한 경학 진흥, 지방 12목 설치와 국자감 정비 등의 내치 정비 내용이 담겨 있다 . 중기 예종·인종 세가에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같은 귀족 반란과 그 진압 경과가 실려 있고, 무신정권기 세가들(명종~원종)에서는 연이은 군사 정변과 최씨 정권의 전횡, 농민 봉기, 그리고 몽골 침략에 따른 강화도 천도와 항쟁 상황을 해 년도 순으로 상세히 보여준다. 고려 후기 충렬왕 이후 세가에서는 원 간섭 하에서의 국내 정치 변화를 비롯해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 전개, 신진사대부 성장과 홍건적·왜구 침입 같은 위기 극복 노력, 그리고 우왕대의 왜구 격퇴전과 내정 문란상이 함께 기록된다. 단, 우왕과 창왕 두 왕에 대해서는 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국왕으로서 정통성이 부정되어 『고려사』에서 반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인데, 실제 편찬자들은 우왕·창왕이 *“역적 신돈의 자손”*이라며 이들의 16년 치 국정을 본기 대신 열전 말미의 반역열전에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다  . 따라서 세가 부분은 공민왕 세가(제45권) 이후 곧장 마지막 공양왕 세가(제46권)로 넘어가며 고려 왕조의 종료를 서술한다. 공양왕 세가의 말미에는 “조선 태조 3년(1394)에 고려 실록 편찬을 마쳤다”는 기사가 있고, 조선 개국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고려 왕조 기록이 끝난다. 전체적으로 세가 부분은 국가의 흥망을 임금 중심으로 풀어가되, 각 사건에 대해 *편찬자가 직접 논평한 사론(史論)*을 붙이지 않는 대신 고려 말 이제현 등이 남긴 찬평(贊)을 인용하여 서술의 여운을 남기는 방식이 특징적이다  .
• 지(志) – 천문, 지리, 예제 등 분야별 전문 사료들을 모은 것으로, 고려의 제도사와 문화사를 총망라한다. 천문지(3권)에는 고려시대 천문 현상과 역법의 변화가 기록되는데, 일식·혜성 관측 기록과 오행의 변이에 관한 상세한 기술이 눈에 띈다 . 역지(3권)는 역법과 달력 제도를 다루며, 고려가 당·원나라의 역법을 수용하여 개변한 내역을 정리하였다. 오행지(3권)는 오행 사상의 징후와 각종 재해, 천재지변 기록을 담고 있다. 예지(11권)는 제례와 의식 체계를 다룬 방대한 파트로, 유교 예제뿐 아니라 불교 행사인 연등회·팔관회, 국가 의례, 풍속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금상정예문』 등의 자료를 대거 인용해 고려의 예제 변천을 상세히 기술하였는데  , 연등회·팔관회 같은 행사는 매년 반복되지만 편찬 원칙상 “첫 시행을 기록하고, 왕이 직접 참석한 경우에만 다시 기록한다”는 식으로 서술하여 중복을 피했다 . 악지(2권)는 아악·향악 등의 음악 제도와 악곡, 악기 등을 정리하고, 여복지(輿服志, 1권)는 관복·군복 등 의복제도와 수레, 의장 등에 대해 기술한다. 선거지(選擧志, 3권)는 과거를 비롯한 관리 등용 제도를, 백관지(2권)는 관직 체계와 중앙·지방 행정조직, 병지(兵志, 3권)는 군제(2군6위, 지방 군현의 군사 조직 변화 등)와 국방 관련 사안을, 형법지(刑法志, 2권)는 형률과 노비·호적 등 법제사를 다룬다 . 각 지 첫머리에는 해당 분야에 대한 편찬자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고려사 편찬자들의 제도사 인식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 지 서문에서 편찬자는 “고려의 통치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발전해오다가 무신정변을 계기로 제도가 붕괴되어 말기에 이르렀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어 , 고려사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한편 지의 말미에는 항목별로 연월이 붙은 구체적인 사실 기록을 덧붙여 서술하였는데, 해당 분야 사안이 어느 왕대에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나타낸 것이다. 다만 이러한 기전체 편찬 방식 때문에 열전이나 지의 일부 기록은 연대가 불분명하거나 본문의 연대와 어긋나는 경우도 있어 사료 이용 시 주의가 필요하다 .
• 연표(年表) – 두 권 분량으로, 고려 태조 원년부터 공양왕 4년까지의 연도를 중국 왕조 연대와 나란히 표로 보여준다. 연표는 《삼국사기》의 예를 따라 편찬되었으며 , 각 해의 주요 사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일종의 연대표이다. 중국 연호와 우리나라(고려) 연호를 좌우에 대조하고, 우리 측 난(欄)에는 왕의 즉위와 폐위, 연호 변경, 외국 사신의 책봉 고지 도래, 반역 사건, 집권 무신 교체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이 간략히 적혀 있다 . 흥미로운 점은, 세가와 열전에서 왕으로 취급되지 않은 우왕·창왕도 연표에서는 재위 기간이 다른 임금들과 동일하게 원년부터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 다만 그 이름을 신우(辛禑), 신창(辛昌) 등으로 표기하여 정통 임금과 구별해두었다 . 이처럼 연표 편찬자는 세가·열전 편찬자와 달랐기에 편찬 원칙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연표를 통해 독자들은 고려 역사 연도를 중국사와 대응시키면서 전체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 열전(列傳) – 고려 왕조의 역사적 인물들을 종류별로 묶어 전기 형식으로 기술한 부분이다. 왕실의 친족과 외척, 공신·재상, 충신·간신, 반역자 등 다양한 부류의 인물 군상이 총망라되어 있다. 열전은 편찬 원칙상 **“특별한 업적이 없는 부자(父子)는 한 전(傳)에 합쳐 싣는다”**거나, 열전 배열 순서를 신분·분야별로 구분하고 있음을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 구체적인 분류를 보면, 후비전 2권(역대 왕후와 비빈들의 전기), 종실전 2권(왕족·종친들의 전기), 제신전 29권(역대 문무 관료와 공신들의 전기), 양리전 1권(청백리 등 어진 관료들의 전기), 충의전 1권(충신열사들의 사적, 예: 정몽주 등), 효우전 1권(효자·우애 깊은 인물), 열녀전 1권(절개를 지킨 열녀들), 방기전 1권(술법·의술 등 기술이나 방술에 능한 인물, 일종의 기술자 열전), 환자전 1권(환관들의 전기), 혹리전 1권(탐관오리 등 가혹한 관료들), 폐행전 2권(총희나 측근 총애를 입었다가 폐해를 끼친 인물들), 간신전 2권(간신배로 평가된 인물들), 반역전 11권(반역자들의 전기) 등으로 편성되었다 . 총 50권에 달하는 열전에는 770인이 주전(主傳)으로 입전되었고, 그들의 관련 인물 238인이 부전(附傳)으로 함께 언급되어, 도합 1,008명의 인물 기록을 수록한 거대한 전기집이 되었다  . 고려사 열전은 특히 원나라의 『원사』 열전 분류를 많이 참조하여 구성했는데, 은일한 처사나 승려 등은 별도로 열전을 세우지 않았다. 편찬에 필요한 자료가 없어서가 아니라, 유교 이념을 내세운 조선 왕조에서 도교·불교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으로 해석된다 . 이는 고려시대의 다양한 문화 계통 인물(예컨대 고승, 도사, 은둔형 지식인 등)이 『고려사』에 충분히 담기지 못한 한계로 지적된다 . 반면 열전에 수록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객관적 평가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편찬자는 “한 사람에 대한 칭찬과 비난 자료가 함께 있을 때는 모두 싣는다”는 원칙을 세워 , 충신열전에 고려 말 정몽주를 기록하면서도 그를 제거한 조선 개국 세력의 입장과 다른 평가를 수용하였다 . 또한 열전 각 부문 서두에는 편찬자가 직접 쓴 간략한 서문이 있어 해당 인물군의 역사적 평가 기준을 밝혔는데, 예를 들어 간신전 서문에서는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는 것은 오직 임금의 신뢰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며, 올바른 간언을 막아 나라를 위태롭게 한 자가 간신”이라는 취지의 평가를 내려 군신관계의 교훈을 덧붙였다. 이처럼 열전은 고려사의 인간 군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편찬자의 역사관도 담아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왕과 창왕을 왕실 세가에서 제외하고 반역전에 넣은 점은, 고려 말 조선 건국 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새 왕조의 정통성 주장이라는 역사 해석이 반영된 사례로 평가된다 .

5. 고려사 편찬자의 역사 해석과 사관

『고려사』 편찬자들은 고려 왕조 500년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나름의 역사철학과 가치관을 반영하였다. 이들의 사관(史觀)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째, 왕조 흥망에 대한 인식으로 왕조순환론적 관점을 보여준다. 편찬자들은 고려 왕조의 역사를 건국-번영-쇠퇴-멸망의 주기로 파악하였다. 고려 전기에 대해선 “당나라의 정치·군사·토지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된 국가체제를 성립시켰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무신정권 이후의 고려 후기는 국가제도가 무너지고 사회가 파탄에 이르러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고 서술하였다 . 특히 무신정권의 폐해를 고려 멸망의 주된 원인으로 인식하고, 우왕·창왕 등의 실정을 강하게 비판함으로써 조선 개창의 필연성을 암시하였다 . 이러한 역사 인식은 새 왕조의 정당성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후대 일부 학자들은 『고려사』가 고려 후기를 지나치게 어둡게 그리고 전기를 이상화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 문치주의 이념에 따라 무신(武臣)에 대한 부정적 서술이 두드러진 점도 이러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 즉 편찬자들이 모두 유교적 문신 관료들이다 보니, 무신 정권기를 유달리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고려 후기의 혼란을 과장했다는 지적이다 . 그러나 이런 서술 경향은 어디까지나 조선 왕조 개창 세력의 역사관을 반영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역사 발전의 동인을 군주와 신하, 그리고 통치 제도의 운영에서 찾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을 드러냈다. 편찬자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로 임금의 정치, 임금을 보필하는 신하, 국가 통치제도를 강조하였다 . 이는 단순히 왕의 개인적 도덕에만 주목하는 전통적 군주 중심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 제도의 구조적 측면에 주목한 것으로 평가된다 . 『고려사』 편찬자들에게 이상적인 역사는 현명한 군주가 훌륭한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여 선정을 베풀고, 제도가 원활히 기능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 만약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간신배에게 휘둘리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충신의 간언을 물리치면 왕조가 위태로워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열전 등에서 충신과 간신의 행적을 극명히 대비시켜 서술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교훈을 얻도록 했다. 이러한 유교적 명분론과 도덕 정치관은 고려사 전체 서술에 일관되게 흐르는 가치체계로, 결국 *“군주는 어질고 현명해야 하며, 신하는 충성되고 재능 있어야 하고, 통치 정책은 문치와 무비를 고르게 갖추어야 나라가 흥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 요컨대 『고려사』는 왕조의 흥망을 정치 도덕성의 성쇠와 관련짓는 성리학적 역사관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셋째, 편찬 태도의 객관성 및 한계 측면이다. 편찬자들은 가능하면 사료에 입각하여 객관적인 기술을 하려 애썼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동일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상반된 기록이 있을 경우 모두 싣고, 칭찬과 비난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도 빠짐없이 병기하였다 . 예컨대 열전에서 고려 말 정몽주를 다룰 때, 조선 개국 세력과 대립한 인물이지만 *“절의를 지킨 충신”*으로 기술하여 권력자의 입장과 다른 평가도 존중하였다 . 또한 세가에 고려말 이제현 등이 쓴 찬(贊)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편찬자의 주관적 논평 개입을 최소화하였다 . 이러한 면에서 『고려사』는 관찬 정사로서 엄밀한 사료 비판과 사실 기록에 충실하려 노력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가치중립적이지는 못했다. 앞서 언급한 우왕·창왕의 사례처럼, 조선 왕조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두 왕을 반역자로 격하시키고 열전에 배치한 것은 사실 기록 면에서 공정성을 해친 결정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 또한 편찬자들이 철저한 성리학적 가치관을 지녔기에 기존 역사 기록 중 자신들의 이념에 맞지 않는 부분은 가차없이 삭제하거나 축소한 부분도 있다  . 대표적으로 고려 불교의 중요 인물이나 도교 도사, 혹은 은둔형 지식인들은 분명 자료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전에서 제외되었다 . 이는 조선 초 집권 세력이 이단으로 여긴 불교·도교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기록을 축소한 결과로, 고려 문화사의 상당 부분이 『고려사』에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를 낳았다. 그리고 조선 건국 직후의 민감한 역사(예: 공양왕 폐위와 이성계 즉위 과정)는 비교적 간략히 언급되거나 생략되어, 새 왕조에 불리할 수 있는 내용은 깊이 다루지 않은 면도 있다. 끝으로, 편년체 실록과 기전체 정사의 연계 문제로 인해 연대 오기가 일부 발생하고 왕 즉위년 표기법을 달리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자들은 고려에서 관례적이던 즉위년을 원년으로 삼는 방식이 명분에 어긋난다고 보아 이듬해를 원년으로 표기) 실제 연도와 1년 차이가 나는 기술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 그럼에도 이러한 한계들은 편찬 시기의 시대적 상황과 이념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려사』는 당시로서는 가장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고려사 정리 사업의 결과물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조선 초기 사관들의 공통된 유교적 역사관이 반영되었으면서도, 최대한 많은 자료를 망라하고자 노력하였기에 이후 고려사 연구의 토대를 제공한 값진 사서라 할 것이다.

6. 『고려사』의 현대 번역본 및 해설서 현황


현대어 번역본: 『고려사』 원문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현대 독자가 직접 읽기 어려운 만큼, 여러 국역(國譯)본과 연구서가 발간되어 왔다. 이미 1970년대에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고려사』 번역 사업이 진행되어 출판된 바 있다. 남한에서는 1971년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실 주도로 국역 『고려사』 (전11책 + 색인 1책)가 간행되었고 , 북한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번역본을 출판하여 학계에서 활용해 왔다. 그러나 이 두 번역본은 지나치게 직역 위주의 한문투이거나 반대로 과도한 의역으로 원문 의미를 왜곡한 부분이 있어, 학계나 일반인으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

이러한 한계 때문에 2000년대에 들어 새롭고 정확한 번역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을 중심으로 한 연구진이 6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역 『고려사』**를 완성하였다. 2006년 도서출판 민족문화사를 통해 총 9권짜리 국역 『고려사』 세트가 발간되었는데 , 이는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고 현대어 가독성을 높인 결정판으로 평가된다. 이 국역본은 세가, 열전, 지 등의 체제별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말에 상세한 찾아보기와 주석을 달아 연구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더 나아가 동아대 석당학술원은 이 번역 작업의 성과를 전산화하여 **「한글고려사 DB」**로 구축하였고 , 현재 네이버 지식백과 등 온라인을 통해 『국역 고려사』 전문을 열람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고 있다 . 이를 통해 일반 대중도 쉽게 고려사 원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해설서 및 참고자료: 방대한 『고려사』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거나 연구한 서적들도 여럿 나와 있다. 우선 조선 후기부터 전해지는 간편한 역사 요약서로는, 김종서 등이 『고려사』 완성 직후 편년체로 간략히 정리한 『고려사절요』가 있다.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의 주요 사건을 연도순으로 추린 일종의 개론서로, 오늘날 국역본과 주석서가 출간되어 있어 입문자들이 참고하기 좋다.

전문 연구자나 사학도들을 위한 해설서로는 신석호의 1964년 저작 「고려사편찬시말」 (『한국사료해설집』 수록) 등이 있으며 , 고려사 편찬 경위를 상세히 풀어놓은 글로서 사료 편찬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밖에 박종기 교수의 『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이한우의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 등은 『고려사』의 서술을 토대로 고려 시대 역사를 흥미롭게 재구성한 교양서로서 대중에게 추천할 만하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이트에서는 「조선왕조의 고려시대 역사 편찬」 등의 해설 코너를 통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 의의와 내용을 쉽게 풀이하여 제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원문 영인본과 색인집도 연구 필수 자료로 활용된다.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1955년 『고려사』 필사본을 영인 출간하고 색인을 편찬한 이래 , 1972년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2001년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 등 여러 판본이 간행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와 연구서들을 종합적으로 활용하면, 오늘날 연구자와 독자들은 『고려사』라는 조선 초의 거대 역사서에 담긴 고려 왕조의 이모저모를 한층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고려사』 (정인지 등 편찬, 1451) 원문 및 국역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사」 항목)  ; 『고려사』 편찬 관련 기록 (『세종실록』·『문종실록』 등); 신석호, 「고려사편찬시말」, 『한국사료해설집』 ; 박종기, 『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등. (※ 본 보고서의 내용 중 인용은 각주 번호에 표시된 출처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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