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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조선 양반·선비 복식과 송나라 명나라 복식의 유사성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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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 계층의 복식은 송나라 시대의 사대부 복식과 놀라울 만큼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유사성이 형성된 배경에는 성리학(性理學)을 국시로 삼은 조선의 이념과 유교적 예법에 기반한 복식 규범, 중화(中華) 문화에 대한 존중과 계승 의식 등이 자리한다. 본 보고서에서는 조선시대 양반·선비 복식의 종류와 구조를 살펴보고, 송나라 사대부 복식의 특징을 비교한다. 이어서 두 시대 복식의 유사성이 나타난 철학적·문화적·정치적 배경과 유교(儒敎) 질서 및 성리학의 복식 관념을 고찰한다. 아울러 복식이 사회적 신분과 사상적 정체성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분석하고, 관련 유물·도상 자료와 문헌 근거를 제시한다.

1. 조선시대 양반 및 선비 복식의 종류와 구조


조선의 양반과 선비들은 포(袍) 형태의 웃옷을 기본으로 삼아 다양한 복식을 착용하였다. 저고리와 바지를 기본 내의로 하고 그 위에 포 형태의 겉옷을 걸치는 이중 구조를 유지하였다 . 대표적인 예로 심의(深衣), 유생복(儒生服), 철릭(帖裏), 단령(團領), 도포(道袍) 등이 있다. 각 복식의 형태와 용도는 다음과 같다.
• 유생복(儒生服): 성균관이나 향교의 유생(儒生)들이 입던 학생 복장으로, 청금복(靑衿服)이라고도 불렸다 . ‘청금(靑衿)’이란 “푸른 옷깃”이라는 뜻으로, 시경 구절에서 유래한 표현이며 학자를 상징한다. 조선 태종 때부터 유생들은 청색 깃이 달린 옷을 입도록 정해졌고, 성종~중종 연간에는 유생복 제도를 정비하여 학교 안팎에서 청금단령(푸른 깃 달린 둥근깃 포)를 입게 하였다 . 다만 유생들은 붉은 포에 푸른 깃을 다는 방식을 두고 불편함을 호소하며 순수한 청색 옷을 입기를 원했고, 경국대전에 유생은 청금을 입는다는 규정을 근거로 주장하기도 했다 . 결국 조선 후기에는 유생복으로 직령포(直領袍, 깃이 곧게 내려오는 포)를 청색 또는 홍색으로 입게 되었는데, ‘청금복’이라는 이름과 달리 붉은 동정에 푸른 깃을 단 형태도 나타났다  . 유생복에는 가슴에 세조대(細紬帶)라는 예장용 허리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유건(儒巾)**이나 복건(幅巾) 등의 건帽를 썼다  . 유생복 제도의 도입은 원나라 시기 호복(胡服)을 버리고 명나라식 한복(漢服)을 채택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고 평가된다 .
• 심의(深衣): 상하의가 분리되지 않고 한 벌로 이어진 전통 유학자 예복이다. 저고리 윗부분과 치마 모양의 아랫부분을 하나로 연결하여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이며, 깃은 여밈선이 일자로 곧게 내려오는 직령(直領)과 네모지게 접힌 방령(方領) 두 종류로 발전하였다 . 심의는 주자(朱子, 주희)가 고증하여 복원한 고대 심의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에서도 성리학 발달과 함께 학자들 사이에 가장 숭상된 예복이었다  . 재질은 무늬가 없는 소박한 명주나 모시 등이며 흰색을 주로 사용하여 백색 심의가 학자의 청렴함을 상징했다  . 심의의 구조에는 유교적인 상징이 담겨 있는데, 하의의 치마폭을 12폭으로 만들어 12달을 상징하고, 둥근 소매는 예의를 나타내며, 곧은 깃과 선은 바른 정치와 의리를 의미한다고 해석되었다 . 심의와 함께 착용한 대표적 관모는 복건(幅巾)으로, 검은 비단 한 폭으로 만든 두건이다. 복건은 주자가례에 관례(成年禮) 시 초가례 복식으로 심의와 함께 쓰도록 규정된 이래 조선의 유학자들이 예모(禮帽)로 애용하였다  . 다만 퇴계 이황 등 일부 학자는 복건이 승려의 두건과 비슷하다고 배척하여 남인 계열 학자들은 복건 대신 방건 등을 쓰기도 하였다  . 조선 후기에는 심의의 깃 형태를 둘러싸고 학파별로 차이가 생겼는데, 노론 계열은 주희 설계의 직령 심의를 고수한 반면 남인 계열은 경전을 독자 해석하여 방령 심의를 만들어 입었다 . 이는 복식에까지 학파의 예학(禮學)적 견해 차이가 반영된 사례이다.

송시열


송시열 초상(국보) 속 모습. 조선 후기의 대학자 송시열(1607~1689)은 전형적인 백색 심의 차림에 검은 복건을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 심의의 좌우 섶을 교차하여 여민 형태와 간소한 흰색 허리띠, 그리고 검은 두건은 조선 선비들의 전형적인 유교적 복색(服色)이었다.
• 철릭(帖裏): 조선시대 남성들이 평상시 즐겨 입던 겉옷 가운데 하나로, 상의와 하의를 따로 재단한 뒤 허리 부분에 주름을 잡아 연결한 포이다  . 고려 말 문헌에 이미 ‘텰릭’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며, 원나라로부터 전래된 몽골계 기마복식의 하나였다 . 철릭은 허리를 둘러 잡은 잔잔한 주름과 트임이 있어 활동성이 뛰어나 군복(戎服) 및 무관(武官)의 복장으로 도입되었으나, 점차 문무 관료와 양반의 **편복(便服)**으로까지 폭넓게 쓰였다  . 조선 초에는 철릭이 문관의 일상 예복, 무관의 공복(公服), 하급 관리나 악공의 정례복 등으로 다양한 계층에서 착용되었으며 , 그 형태도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 초기 철릭은 상의와 하의의 비율이 1:1 정도로 상하 길이가 비슷했으나, 임진왜란 전후를 거치며 하의 치마 부분이 점점 길어져 후기에 이르면 상:하 비율이 1:3 가까이 길어졌다 . 또한 초기에는 소매폭이 좁고 허리 주름이 매우 촘촘했으나, 후대로 갈수록 소매가 넓어지고 주름 간격이 커져 우아한 실루엣을 강조하였다  . 철릭은 좌우 앞섶을 트고 매듭단추로 여미거나 소매를 떼었다 붙일 수 있게 만들어 입고 벗기 편하게 고안된 실용적 옷이었다 . 16세기 중엽 이후 도포(道袍)나 창의(氅衣) 같은 넓은 겉옷이 선비층에서 유행하면서, 철릭은 차츰 무관의 평상복이나 국왕의 교외 활동복 등에 한정되어 쓰이게 되었다 . 조선 후기에는 철릭의 위상이 낮아져, 정조 17년(1793) 임금이 “철릭 소매가 너무 넓어 비단 낭비가 심하니 줄이라”는 명을 내리고, 순조 34년(1834)에도 철릭 길이가 발등까지 끌린다고 지적하는 등 비판을 받았다 . 끝내 고종 20년(1883)에 공식적으로 융복(戎服) 제도를 폐지하고 서양식 군복을 채용하면서 전통 복식으로서의 철릭은 사라지게 되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구름과 보배무늬 철릭”(16세기 조선 전기) . 황색 비단에 구름문(雲紋)과 일곱 가지 보배문양이 짜여진 화려한 철릭으로, 허리 부분에 잡힌 촘촘한 주름과 방형의 무가 특징이다. 철릭은 원래 몽골풍 외래복식이었으나 조선에서 관복, 평상복 등으로 폭넓게 토착화되었다  .
• 단령(團領)과 기타 겉옷: 단령은 둥근 깃을 가진 포로서 조선 왕조의 관복(官服) 및 예복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 전기의 관원들은 명나라 제도를 따라 흑단령(검은 단령)이나 홍단령(붉은 단령)을 착용하였고, 품계에 따라 가슴에 **흉배(胸背)**를 달았다  . 예컨대 정응두(1품 관료)의 무덤에서 출토된 단령은 푸른 운보문단(雲寶紋緞)으로 만들어지고 공작 흉배가 부착되어 있었는데, 원래는 선명한 아청색이었으나 현재 바랬다 한다 . 한편 도포(道袍)는 조선 중후기 선비들이 즐겨 입은 헐겁고 긴 겉옷으로, 양반 남성의 외출복 및 평상복의 상징이 되었다. 도포는 넓은 깃과 큰 소매를 가져 몸을 푹 싸는 형태였으며, 흔히 흰색이나 연한 청색으로 만들어졌다. 도포와 유사한 겉옷으로 **창의(氅衣)**가 있는데, 둘 다 심의 위에 덧입는 **표의(表衣)**로서 예장을 겸하였다 . 이처럼 조선 양반·선비들은 심의를 기본 예복으로 하면서, 실용성과 예법을 조화한 다양한 겉옷들을 상황에 맞게 활용하였다.

2. 송나라 사대부 복식과 주요 특징

중국 송나라 주희의 선의
주희


송나라(960~1279) 시기 사대부 계층의 복식은 검소함과 예법을 중시한 것이 특징이다. 송대의 복식제도는 검소함을 숭상하여 색채도 수수하고 자연스러운 경향을 띠었으며, 일상복은 가능하면 간단하고 소박하게 갖추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 대신 궁중의 제례나 의식용 예복은 화려함을 갖추되 지나친 사치를 경계하였다. 대표적인 송대 사대부 복식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 일상복: 송의 사대부들은 일상 생활에서 품위 있으면서도 간편한 포(袍)를 입었다. 문헌에는 사대부들이 모삼”(수건삼, 모직 혹은 베로 만든 홑겹의 포)이라는 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 이는 특별한 문양 없이 베나 무명으로 만든 담박한 포로, 학자들이 실내에서나 평상시에 애용한 의복으로 보인다. 송대 유학자들은 지나치게 채색된 복장이나 사치를 피하고 소박한 소재와 색상의 의복을 입는 것을 덕목으로 삼았다 . 이러한 간결한 복식은 성리학적 청빈(淸貧) 이념과 부합하여 조선 선비들의 이상적 복장 모델이 되었다.
• 예복과 관복: 송나라의 공식 예복은 당대 제도를 이어받아 원령포(圓領袍, 둥근 깃의 포)를 기반으로 하였다. 송 황제는 대례복으로 원령 난삼(襴衫)을 입었는데, 이는 당 이래로 이어져 온 긴 소매의 예복으로 송대에 특히 유행하여 상급 관리에서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채택되었다 . 관리들의 조복(朝服)·공복(公服)도 색과 문양에 따라 품계를 구별하였으며, 허리에는 각 관원 신분에 맞는 옥으로 장식된 허리띠와 물고기 모양의 장식(어부, 魚符)을 달았다 . 한편 심의(深衣)도 송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예복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남송의 주희(朱熹)는 고례(古禮)에 따라 심의를 유학자의 법복(法服)으로 격상시켰는데, 실제 송대 문인 관료들도 집안 의례나 관례(成年禮) 때 심의를 착용한 기록이 있다 . 즉 송나라 사대부들은 국가의 제도상 정해진 관복 외에, 유교적 이상에 따른 고풍(古風)의 심의를 예복으로 병용하였다.
• 관모(冠帽): 송대 사대부 복식의 또 하나의 상징은 관모(모자)이다. 관리들은 공적 장소에서 흑색 복두(幞頭)를 썼는데, 복두란 머리에 쓰는 검은 천 모자로 뒤쪽에 두 개의 날개 모양의 뻗침이 특징인 관모이다 . 복두는 당말~송대에 널리 퍼져, 송나라 관리나 황제가 초상화 등에 항상 쓰고 있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한편 일반 문인이나 유생들은 복두 대신 복건(幅巾)을 즐겨 썼다 . 복건은 말 그대로 폭이 넓은 천으로 만든 두건 형태의 모자로, 송의 대학자 사마광(司馬光)이 평상시에 복건과 심의를 갖춰 입음으로써 유행시켰고, 이어 주희가 주자가례에서 복건 착용을 권장함에 따라 유학자의 표지가 되었다  . 송나라 평민층은 주로 두건 없이 생활하였으나, 지식인 계층에서는 유건(儒巾)이나 복건 같은 모자를 예의상 갖추는 것이 권장되었다 . 이처럼 머리쓰개에서도 신분과 예법을 구별한 것이 송대 복식의 특징이었다.
• 색상과 문양: 송나라 복식의 색채는 전반적으로 담박한 경향이었지만, 관복의 경우 신분에 따른 색상의 차별이 있었다. 예컨대 관복의 공복색은 품계별로 청색, 홍색, 자색 등을 사용하여 등급을 나타냈다 . 그러나 평상시 사대부들은 과도한 색채를 피하고 백색, 담청색, 갈색 등 은은한 색의 옷감을 선호하였다 . 복식의 문양에 있어서도 송은 당대에 비해 절제된 양식을 따랐다. 당나라의 화려한 당초무늬, 보색 대비와 달리, 송대에는 은은한 운문(雲紋)이나 전통적인 길상문(吉祥紋)이 사용되었고, 문양의 크기도 작고 섬세하여 겸양의 미덕을 반영하였다. 이러한 미적 경향은 훗날 명나라와 조선이 전통 한족문화를 부흥시킬 때 본받은 요소였다 .

요약하면, 송나라 사대부의 복식은 유교적 검소함을 바탕으로 한 일상복과, 전통 예제를 계승한 관복·예복으로 이중적인 특징을 보였다. 이는 조선 양반들의 복식과 여러모로 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실제로 조선 개국 이후 새 왕조의 지배층은 송의 문물제도를 이상적으로 여겨 복식에서도 송의 풍을 본떴다. 다음 표는 송나라와 조선의 사대부 복식을 비교한 것이다.

3. 복식 유사성이 나타난 철학적·문화적·정치적 배경


조선 양반·선비 복식과 송나라 복식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라, 철학적·문화적·정치적 연속성의 산물이었다. 그 배경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성리학 전래와 주자학의 영향: 중국 송나라에서 발생한 성리학(性理學)은 고려말~조선초에 한반도로 전래되어 조선왕조 통치이념의 근간이 되었다. 송대 주희(朱熹)는 『주자가례』를 지어 가정의례와 유교 윤리를 체계화하며 복식 규범까지 제시하였다. 주희는 특히 고대 제도를 참조해 심의와 복건 같은 전통 복장을 유학자의 이상적 예복으로 재정립하였는데, 이로 인해 조선 사대부들은 송대 복식을 명나라를 통해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 고려 말에 원(몽골) 왕조가 멸망하자, 그동안 널리 퍼졌던 몽골풍 호복(胡服)을 버리고 중국 한족의 복식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 새 왕조를 연 조선의 개국 공신들과 사대부들은 주자학에 심취하여 주희가 부활시킨 복식 이상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 결과 심의, 복건 등 송대 유교 복식이 조선 선비층에 정착하였고, 송나라 사대부 복식을 계승함으로써 문화적 정통성을 표방할 수 있다고 여겼다.
• 명나라와의 교류 및 사대(事大) 의식: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나라를 섬기는 외교정책(사대교린)을 취하면서, 명의 제도와 문물을 본받았다. 명나라는 주원장이 건국 후 “한·당·송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표방하며 전통 한족 복식의 부흥을 선언하였다 . 원대(元代)에 문란해진 복식 제도를 바로잡고 당·송대 복식제도의 기틀을 되살렸던 것이다 . 조선도 이러한 명의 복식 질서를 받아들여, 관복 제도는 명나라식을 채택하고 예복과 예장의 형식도 중국에 맞췄다. 하지만 명의 복식 제도가 바로 송대 유교 복식의 연장선에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조선의 복식문화는 송과 닮은 꼴이 되었다. 예를 들어 조선 초기 관료들의 공복인 단령, 조복인 홍포 등은 명 제도를 따른 것이지만 그 뿌리는 송대 복식에 있었다 . 또 주자가례에 따른 관례·상례 복식(심의, 복건 등)을 조선에서 국가 차원에서 권장한 것도 명 황실과 조선 조정이 공통으로 주자학 예제(禮制)를 존중한 결과였다. 이러한 대중화(帶中華) 정책 속에서 송나라=문명의 원류라는 인식이 퍼졌고, 조선 사대부들은 송의 의관제도를 재현·계승하는 데 자부심을 가졌다.
• 반(反)몽골·반불교 문화운동: 고려 후기 원 간섭기 동안 몽골 복식과 티베트식 모자, 그리고 불교 의식에 영향받은 화려한 복장이 상류층에 유행하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새 왕조 조선의 유학자들은 “오랑캐 옷”(胡服)과 불교식 사치 복장 배격을 주창했다. 정도전 등의 개국 공신들은 궁중 예복부터 서민의 의복까지 유교 예악 정신에 맞게 정돈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태조~세종 연간에 여러 차례 복식 개선령이 내려져, 원나라풍의 의복과 장신구를 없애고 고려 전통과 송 명례에 맞는 복색을 채용하였다 . 이러한 문화적 정화운동은 복식 분야에서도 송나라 사대부의 소박하고 예법에 맞는 옷차림을 이상향으로 삼게 만들었다. 불교 승려들이 입던 홍색 장삼이나 목탁모자가 아니라, 유학자들이 입던 백심의와 흑건을 숭상하게 된 것이다. 결국 조선의 양반·선비 복식은 몽골-불교적 요소를 제거하고 유교-한족적 요소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확립되었는데, 그 모델이 바로 송나라 복식 문화였다.
• 소중화(小中華) 의식과 전통 계승: 특히 임진왜란(16세기 말)과 병자호란(17세기 중엽)의 국난 이후,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자주 “소중화” 의식이 대두되었다 . 이는 명나라가 망하고 중국이 이적(夷狄, 만주족 청나라)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조선이야말로 유교 문화의 적통을 계승한 작은 중국이다라는 자부심이었다. 이러한 소중화 사상은 복식 면에서도 나타났는데, 청나라의 변발과 호복을 끝까지 거부하고 명·송의 복식제도를 끝까지 고수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도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복·심의를 입었으며, 여성들은 전통 한복을 입어 한족의 의관(衣冠)을 지킨다고 여겼다. 심지어 청조의 의복을 따른 일부를 변발환복(辮髮換服)의 죄인으로 규탄할 정도로, 복식 문제는 정체성 수호의 상징이 되었다. 이렇듯 조선은 송나라의 예의와 명나라의 제도를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전통 복식을 유지하였고, 이는 자연스레 송대 사대부 복식과 높은 유사성을 보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4. 유교적 질서 및 성리학의 복식 관념이 조선 복식에 미친 영향


유교 사회에서 의복은 단순한 생활필수품이 아니라 예절과 신분 질서를 구현하는 도구였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으므로 복식을 통해 사회적 위계와 도덕 규범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는 성리학적 복식 관념에 기초한 것으로, 조선의 복식 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먼저, 유교의 예법 사상은 의복은 예의의 기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공자 이래로 관혼상제 등 각종 의례에 맞는 복식이 규정되었고, 조선의 지배층은 이를 엄격히 준수하였다. 주자가례가 조선 사대부들의 가정 의례 지침서가 되면서, 혼례복, 상례복, 제례복의 형태와 색상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졌다. 이를테면 남자의 관례(冠禮)에는 심의와 복건을 입고, 상례(喪禮)에는 소렴 시 시신에 심의와 복건을 착용시키는 등 모든 단계에서 의복이 예식의 일부가 되었다  . 이처럼 예복(禮服)의 개념이 확립되면서 조선의 양반들은 항상 예법에 맞는 옷차림을 함으로써 자신의 교양과 도덕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둘째, 성리학은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엄격한 수양을 강조하였고, 복식은 몸을 단정히 가꾸는 외재적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대학과 예기의 가르침에 따라 조선 선비들은 의관정제(衣冠整齊)를 일상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옷을 함부로 풀어 헤치거나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방종으로 보고 경계했으며, 언제나 숙일 때 옷깃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속하였다.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형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옷을 천박하게 여겨, 넉넉하고 긴 옷자락으로 몸을 가리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겼다  . 예를 들어 조선 초기 복식은 옷이 매우 크고 넓고 길었다”고 하며, 이는 주나라 예제의 영향을 받아 통이 큰 포를 입음으로써 겸양과 단정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 여성 복식에서도 성리학적 규범이 작용하여, 치마 폭을 넓히고 여러 겹 속치마(선군, 무지기 등)를 입어 몸매 노출을 최소화하도록 했다. 결국 성리학적 몸에 대한 인식은 복식의 형태(와이드 실루엣)와 착장 방식(겹쳐 입기)에 반영되어, 조선 복식의 단아함을 낳았다.

셋째, 유교적 신분 질서는 복식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조선왕조는 수많은 복식금제(服飾禁制)를 공포하여 신분별 의복·장신구 사용을 엄격히 구분지었다. 이를 시행한 근본 목적은 “복식의 사치를 막고, 복식에 따른 신분 구별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 가령, 평민 남성은 청색 이상의 고운 비단 옷을 입지 못하고, 여성은 금은으로 수놓은 비단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 또 서얼이나 죄인 신분에게는 특정 색상의 옷(예컨대 황색)은 금지되었고, 오직 왕족과 고관만이 밝은 홍색·보라색 등을 착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관모와 신발도 계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갓끈의 색깔, 신발 코의 높이 등 세부 요소까지 규정하였다  . 이러한 복식 질서는 법제화되어 경국대전과 대전회통 등에 명시되었고, 위반시 장형(태형)·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다  . 결과적으로, 옷차림만 보면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복식이 곧 신분의 언어가 되었다.

넷째, 성리학은 복식을 인격 수양과 정치 교화의 수단으로도 간주했다. 조선시대 문신들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사치 풍조를 개탄하며 복색의 검약을 누누이 강조했다. 왕 또한 친히 솔선수범하여 소박한 복장을 보이곤 했다. 예컨대 영조는 입재례 시 유생들의 청금단령 착용 문제를 두고 “학생의 옷은 마땅히 푸른 깃이어야 한다”는 유자들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는 등, 복식에 담긴 유교 이념을 존중하였다  . 국왕의 이러한 태도는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곧은 옷차림은 충신, 헤픈 옷차림은 간신이라는 도식이 생겨났다. 실제로 연산군 시절 가극을 즐기며 기이한 복장을 한 악인들이 등장했던 반면, 중종반정 이후 정견을 지닌 신하들은 심의를 입고 청렴 결백을 표방했다는 식의 묘사가 전한다. 이는 복식이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도덕적 정체성의 표현 수단임을 보여준다.

요컨대, 성리학적 복식 관념은 조선의 의생활을 지배하여 의복은 예이자 법”이라는 인식을 확립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양반·선비들은 송나라 유교 선현들의 의관제도를 구현하고 스스로의 정신적 정체성을 다졌다.

5. 복식에 담긴 사회적 신분과 사상 정체성


조선시대 복식은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 사회 신분과 사상적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특히 양반 계층과 지식인들은 자신의 옷차림을 통해 소속 계층과 정치·철학적 입장을 드러내곤 했다.

우선, 사회적 신분 표지로서의 복식을 들 수 있다. 조선의 신분제는 양반, 중인, 상민, 천인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법과 관습이 이들 계층별 복장을 뚜렷이 달리 규정하였다. 양반 남성은 관복으로는 품계에 맞는 단령과 사모, 또는 조복과 익선관 등을 착용했고, 평상시에도 남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고급 모시나 무명을 사용한 도포, 창의 등을 걸쳤다. 상민 남성은 쾌자를 겸한 직령 저고리나 평범한 두루마기를 입어, 옷의 재질과 폭부터 차이가 났다. 갓의 경우에도, 양반은 말총으로 짠 통갓(흑립)을 썼지만 상민은 탕건 위에 거친 삿갓을 쓰는 정도였다. 여성도 마찬가지여서, 양반 부녀는 원삼·당의 같은 예복을 입을 수 있었으나 평민 여성은 색동저고리 외엔 화려한 장식을 못했다. 이러한 복식의 위계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의 신분을 한눈에 식별하게 했고, 복식이 곧 신분증 구실을 하였다 .

다음으로, 사상적·정치적 정체성의 표출 수단으로서 복식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당파가 갈라지고 예송(禮訟) 논쟁 등이 격화되면서, 성리학의 해석 차이가 복식 형태의 차이로 나타난 사례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심의의 형태를 둘러싼 남인과 노론의 대립이다. 앞서 언급했듯 노론 계열(대표 학자: 송시열 등)은 주자의 가례해석을 철저히 따라 직령 심의를 표준으로 삼았지만, 남인 계열(대표 학자: 허목, 윤휴 등)은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심지어 심의의 깃을 네모나게 하는 사의(四衣) 제도를 도입하였다  . 남인의 거두였던 허목은 사의집의(四衣輯疑)에서 심의의 새로운 제도를 주장했고, 허전 등 후학들은 방령 심의와 치포관을 갖추어 남인만의 예복 스타일을 고수하였다 . 이처럼 같은 유학자 집단 내에서도 복식에 차이를 두어 자신들의 학문적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복건 착용 여부도 정파적 색채를 띠었다. 복건은 애초에 주자학자들이 애용한 모자인데, 퇴계 이황이 복건을 비판한 후로 영남 남인계 학자들은 복건을 멀리하고 정자관(程子冠) 등을 썼다 . 반면 기호 노론계 학자들은 송시열 초상에서 보이듯 흑색 복건을 쓴 모습이 많다 . 결국 복식 요소 하나하나가 그 사람의 **학맥(學脈)**과 철학적 성향을 암시하게 된 셈이다.

복식은 또한 충의(忠義)와 절의(節義) 등 이념적 가치의 표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병자호란 후 삼학사 등 척화파 유생들은 소복(素服) 차림으로 반청 의리를 지켰고, 단발령에 항거한 유생들은 상투를 자르느니 차라리 **상복(喪服)**을 입고 통곡하였다. 이처럼 극단적 상황에서 의복은 정치적 항거와 신념 표현의 도구가 되었다. 또한 서양 문물 수용기에 유생들은 전통 복장을 고수하는 것이 곧 위정척사(衛正斥邪)의 표시라고 여겨, 끝끝내 두루마기와 갓을 쓰고 다녔다. 반대로 개화파 관료들은 양복을 입어 구습을 타파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결국 복식은 사람들의 가치관, 개혁 성향까지 반영하는 정체성의 표현물이었다.

정리하면, 조선시대 복식은 그 사회에서 신분의 언어이자 **사상의 기표(記標)**였다. 양반과 선비 계층은 복식을 통해 자신이 어느 계층에 속하며 어떤 이념을 지지하는지를 드러냈고, 사회 구성원들 역시 타인의 복식을 해석함으로써 상대의 지위와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었다.

6. 관련 유물·도상 자료와 기록 문헌의 근거

조선의 양반·선비 복식과 송나라 복식의 유사성 및 그 배경은 여러 유물과 도상(圖像) 자료, 문헌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 초상화와 회화 자료: 조선시대 선현들의 초상화는 복식 연구의 일급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송시열 초상(국보 제239호)과 김장생 초상, 경기박물관 소장의 허준·허임 초상 등 수많은 인물화에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은 유학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이들 그림에서 인물들은 희고 넓은 도포나 심의에 **흰색 대대(허리끈)**를 두르고, 머리에는 검은 복건이나 방건을 쓴 채 묘사된다  . 이러한 도상은 조선의 선비 복장이 주희가 묘사한 심의·복건의 전형을 충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특히 송시열 초상은 “모든 그림에서 송시열은 복건이나 방건을 쓰고 심의를 입은 모습”으로 일관되며, 이는 송시열을 **“동방 주자”**로 추앙한 조선 지식인들이 그의 복식마저 주자(송나라)의 그것과 같게 묘사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 한편 송나라 인물을 그린 중국의 남송~원대 회화(예: 주희 초상, 여러 학자들의 모임도)에서도 유사한 복식이 확인된다. 거기 등장하는 학자들은 두건을 쓰고 옅은 색의 포를 입고 있는데, 이는 조선 선비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처럼 동서양 박물관에 소장된 그림들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유교 복식의 공통 요소를 시각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 유물(실물 의복) 자료: 최근의 고고학·복식사 연구로 조선시대 의복 실물이 여러 점 발굴·전시되어 있다. 특히 무덤 출토복식들은 양반 계층 의복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16세기 중엽 무관 정응두의 묘에서 출토된 청색 운문 철릭은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조선전기 철릭의 실체를 드러냈다  . 이 철릭에는 운문과 보문이 화려하게 짜인 비단이 쓰였고 허리 부분에 촘촘한 주름이 잡혀 있어 앞서 문헌 기록과 부합한다 . 또한 17세기 무관 이응해 장군 묘 출토 황색 비단 철릭, 박신용 장군 의대에 전해진 홍색 철릭 등 여러 유물이 발견되어 현재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 이들 유물을 통해 철릭의 시대별 형태 변화(길이, 주름 폭, 여밈 방식 등)까지 파악 가능하며, 철릭이 초기엔 문무관 복식으로 시작하여 후기엔 무당(巫堂) 복장으로까지 남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 한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등에는 심의와 직령포, 방령포 복원품과 출토품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 18세기 유생 이재의 묘에서 나온 복건과 심의도 전해지는데, 이는 기록에만 있던 “관례 때 쓰는 복건을 그대로 수의에 사용한다”는 예서의 규정이 현실에서도 실행되었음을 입증한다 . 나아가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대한제국기 왕실 유물이지만 조선 전통을 잇는 예복 예장들이 있다. 고종 황제의 면복(冕服), 순종 황제의 익선관 및 곤룡포 등이 그것으로, 송·명 이래 황제 예복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실제 남아있는 옷들은 문헌상의 이상이 현실에서 구현된 모습과 그 변천을 밝혀준다.
• 문헌 기록: 복식에 관한 방대한 기록 문헌도 양 시대 복식의 유사성과 그 이유를 전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경국대전, 의궤류에는 복식 관련 기사가 빈번하다. 이를테면 성종실록에는 성균관 유생의 청금단령 착용 의무에 대한 논의와 “학교 문을 나서면 벗었다”는 풍속까지 기록하여 유생복 제도의 운영 실태를 알 수 있다 . 중종실록에도 학교 진흥책의 하나로 “길을 다닐 때 쓰는 유관(儒冠)은 중국과 같을 필요까지는 없어도, 청금은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언급이 있어 당시 복식의 자주성 vs 중국식 추종 논쟁을 엿볼 수 있다 . 예학서인 사례편람이나 상례비요 등에는 관례, 상례시 심의와 복건의 착용법, 색상, 심지어 바느질 방식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복식에 내재된 예법을 확인시켜 준다  . 또한 실학자 이덕무의 앙엽기, 유득공의 경도잡지 등에는 1819세기 남성 복식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요즘 선비들은 도포 자락을 끌고 다녀 예전에 비해 사치스러워졌다”는 등의 비판이 실려 있어 성리학적 검소관이 복식 평론에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송나라 쪽 기록으로는 남송대 주희의 편지나 가례 주석에 심의 제작법, 복건 폭 등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송사(宋史) 예지(禮志)에 송대 관복 제도가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중국측 문헌과 조선측 문헌을 대조하면, 조선이 얼마나 송의 제도를 충실히 모방·계승했는지가 문헌상으로 입증된다. 예컨대 송사에 나타난 관복 색제도(文官 1품3품 자홍색, 무관 1품~3품 사녹색 등)와 조선 경국대전의 공복색 규정이 거의 동일함이 확인된다. 이는 조선 복식 제도가 송의 것을 명나라 통해 수용했음을 뒷받침한다.
• 박물관 전시와 연구 성과: 현대에 들어 국내외 박물관과 연구자들이 조선 복식과 송 복식의 관련성을 조명한 전시·논문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국립경기도박물관의 특별전 「의(衣)·문(紋)의 조선」(2016)에서는 조선 문무관료 복식과 더불어 **“유학자의 예복, 백색 심의”**라는 코너를 두어 심의와 복건, 유생복을 집중 조명하였다  . 이 전시 도록에는 심의의 구조와 상징, 노론·남인의 심의 깃 형태 비교, 송시열과 허전의 초상 분석 등이 상세히 실려 있어 조선 선비 복식의 사상적 의미까지 전달되었다  . 또한 한국전통복식학회, 복식문화학회 등에서는 성리학과 조선 복식에 관한 연구 논문들이 발표되었는데, 이를 통해 “조선시대 남성복식에 발현된 성리학적 몸 인식”, “예제 속 복식규범의 변천” 등이 체계적으로 분석되었다. 이러한 학술 성과들은 조선 양반 복식의 형성이 단순한 모방이 아닌, 주체적 이념 선택의 결과였음을 밝혀주고 있다. 가령 고윤정·임은혁(2023)의 연구는 심의가 남성의 신체 윤곽을 은폐함으로써 심신 수양의 상징적 역할을 했다고 설명하고, 복건을 둘러싼 당파간 논쟁이 예학 논쟁의 일부였음을 지적한다  . 이는 복식이 사회사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학술적 근거라 할 수 있다.

결론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들의 복식은 송나라 사대부 복식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었다. 유교적 예법을 구현한 심의와 복건, 일상의 검소함을 나타낸 담박한 포, 신분 질서를 표상한 관복 제도 등에서 두 시대는 맞닿아 있었다. 이러한 유사성은 주자학이라는 공통 이념의 영향과 문화적 계승 의지, 그리고 정치적 사대-교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조선은 스스로 **작은 중국(小中華)**을 자처하며 송 명 시대의 복식 전통을 부활시켰고, 이는 곧 자국의 정통성과 문치(文治)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복식을 통해 본 조선 양반 사회는 옷의 나라라 일컬어진 송나라의 이상을 현실에 펼쳐낸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의관은 문화의 표징”*이라는 말처럼, 조선 양반들의 의관에는 그들의 사상과 삶의 지향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심의의 곧은 옷깃은 곧은 심지를 의미했고, 백색 포의 소박함은 청렴결백한 처신을 의미했으며, 복식의 엄격한 격식은 사회 질서와 예의를 지탱하는 장치였다. 나아가 복식의 세부 차이마저 학문적 입장의 표현이 될 정도로, 복식과 사상은 일체를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전해지는 유물과 기록들은 이러한 역사를 생생히 전해준다. 남아있는 옷 한 벌, 초상화 한 폭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조선 선비들이 왜 송나라 선현들의 옷차림을 본받고자 했는지, 그 철학적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의 복식사는 곧 사상사와 맞닿아 있으며, 그 뿌리를 거슬러 오르면 송나라 복식문화와의 만남에 닿는다. 조선 양반과 선비들의 복식이 송나라와 유사한 것은 단순한 형태상의 공통점이 아니라, 유교 문명권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 결과였다. 그러한 통시적 연대가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 전통복식 속에 담긴 의미는 더욱 풍부해진다. 앞으로도 복식이라는 창을 통해 역사의 깊은 흐름과 교류를 조망하는 연구가 지속되길 기대한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해설, 국립경기도박물관 특별전 도록, 관련 학술 논문 등. (각주 및 인용은 본문에 표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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