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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에 대한 실증적 해석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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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묘년 조항 원문과 중국 측 번역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중 신묘년(辛卯年) 조항의 원문과, 이를 중국 학계에서 판독·번역한 현대 중국어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문 원문 (호태왕비 한문) 중국 측 번역 (중국어 번역문)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百济(百残)、新罗原本是高句丽的属民,长期朝贡。而倭国于辛卯年(391年)渡海击破了百济,并使新罗成为臣民 .

• 원문 해설: “백잔(百殘, 백제)과 신라가 본래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예로부터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倭)가 신묘년(辛卯年)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 백잔을 격파하고, □□ 신라를 (어떻게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고구려 비문의 한문 특성상 구두점이 없어 해석에 논란이 있었으나, 중국 학계는 위와 같이 倭(왜국)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취지로 직해합니다 . 특히 百殘은 고구려가 백제를 가리켜 부른 표현이며, 臣民은 신하나 백성처럼 부리는 속국을 의미합니다. 또한 일부 탁본에서 辛卯年來의 來자가 每자로 보이는 경우가 있어 “신묘년 이래로 거듭 침입했다”는 뉘앙스로 해석하기도 하나 , 핵심 의미는 왜국이 신묘년(서기 391년)을 전후해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공격하고 신라까지 침략해 복속시켰다는 내용입니다.
• 중국 측 번역 특징: 중국 연구자들은 이 구절을 있는 그대로의 한문 구조에 따라 번역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제기된 특수한 해석(예: “而倭”를 “而後(그리고 나서)”로 읽거나, 행간을 달리 끊어 고구려가 왜를 격파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 비문에 보이는 글자를 충실히 판독하여 현대 중국어로 옮깁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일찍이 입수된 부사년(傅斯年) 탁본 등을 통해 문제 구절의 판독을 검증하였는데, 해당 탁본에서도 논란이 된 글자가 분명히 而倭로 찍혀 있어 이를 而後 등으로 달리 해석할 여지를 부정하였습니다 . 즉, 중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비문에 새겨진 대로 “왜(倭)”를 주어로 삼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비문 조작설에 대한 논파와 근거


신묘년 조항은 일찍이 일본 학계에서 자국 고대사의 근거로 활용하면서, 탁본 조작 및 비문 훼손설 등의 논란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특히 일부 한국 학자들은 일제가 비문 내용을 식민사관에 맞게 고의로 변조했다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중국 학계는 철저한 실증 검증을 통해 조작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중국 연구진의 검증 과정과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 이른 시기의 탁본 발견: 중국 사회과학원 徐建新 교수는 청나라 광서 7년(1881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비문 탁본을 2006년에 발표하였습니다 . 이 1881년자 탁본은 일본인이 이 비석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전의 것으로, 논란이 된 신묘년 구절의 글자가 현재와 동일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而倭以辛卯年來…” 부분이 이미 1881년 탁본에 뚜렷이 나타나 있어, 이후 일본에 의한 글자 조작이 없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
• 여러 계통의 탁본 비교: 중국 학자들은 현재까지 알려진 100여 종 이상의 광개토왕비 탁본들을 수집하여 제작 시기별로 분류하고 상호 비교했습니다  . 그 결과 비문 글자의 형태 변화는 대개 자연 풍화나 일제시기 일시적으로 행해진 석회 보강 등에 따른 것이며, 인위적인 내용 변경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관헌이 글자를 파냈다는 설에 대해 중국 학계는 탁본의 먹 번짐 패턴 분석과 원석 표면 관찰 등을 통해 “碑文被有意篡改的事實(비문이 고의로 개변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근거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지금까지 어떠한 직접적인 증거도 비문 조작을 입증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조작설은 학계에서 부정됩니다 .
• 현지 조사와 과학적 분석: 1980년대 초 중국 학자들은 집안 현지에서 비석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존에 판독이 불분명했던 글자 89자를 추가 식별하고, 논쟁이 있었던 62자를 확정하였으며, 탈락된 것으로 여겨졌던 부분 중 실제로는 글자가 없었던 29곳을 밝혀내는 등 총 180자의 판독 문제를 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 이러한 연구는 비문 자체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분석(고해상도 사진 촬영, 탁본 채취 및 확대 검토 등)을 동반한 것으로, 문자 획의 흔적과 새김 상태를 정밀 검토한 결과 어떠한 비정상적인 인위 개입 흔적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보는 신묘년조 항목의 글자는 비문 건립 당시의 본래 내용이며 후대에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국 학계의 결론입니다 .

3. 중국 측 해석: 문법 구조 분석과 근거 기반 해석


중국의 연구자들은 신묘년 조항을 해석함에 있어 비문의 한문 문법 구조와 역사적·고고학적 증거를 종합적으로 고려합니다. 주요 해석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문법적 구조 분석: 중국 학계는 이 구절을 정상적인 고대 한문 문법에 따라 해독합니다. 문장을 ...,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으로 끊어 而倭’의 倭를 주어로 읽고, 以辛卯年來를 시간 부사구로 처리합니다. 즉 “辛卯年에 이르러(=辰卯年来)”라는 의미로 보고, 그 뒤의 동사구 渡海破百殘(바다를 건너 백잔을 격파하였다)와 □□新羅以為臣民(□□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이 모두 주어 ‘왜(倭)’의 행위를 기술한 것으로 봅니다 . 이러한 끊어읽기는 일본 측 전통 해석과 대체로 유사하나, 중국 측은 이를 있는 사실의 기록으로 간주하고 별다른 수사적 해석을 가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북한 등에서 한때 주장했던 “倭를 목적어로 보고,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했다”는 식의 파격적인 해석은 문법에 맞지 않는 것으로 배척됩니다. 또한 ‘來’ 자와 관련하여, 일부 탁본에 보이는 ‘每’ 자 표기는 거듭” 혹은 “해마다”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중국 학자들은 이것이 오히려 왜군의 지속적인 침략을 나타내는 정황으로 보고 있습니다 . 즉 “辛卯年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널 때마다 백제를 격파…”라는 뉘앙스인데, 결국 왜의 침략이 핵심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 용어 해석: 비문에 나타나는 지명·국명을 중국 학계는 동아시아 고대사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百殘’은 백제의 자칭 국호인 百濟를 고구려가 달리 부른 명칭으로 파악하며 , ‘新羅’는 한자로 신라 그대로입니다. *倭’는 당시 일본열도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 정권 혹은 왜인 세력을 가리키며, 비문 후반부에 등장하는 ‘倭寇’(왜구)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조직적인 국가군이라기보다 해적성 습격군으로 인식되었음을 지적합니다 . 중국 학자들은 당시의 ‘왜’ 세력이 규슈 북부를 기반으로 한 해적 집단 또는 왜국의 일부 무력집단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는국내의 속국이던 신라가 외부 세력(왜+백제 연합)의 침략을 받아 위협당했다는 비문 맥락과 부합하며, ‘渡海’(바다를 건너)라는 표현도 왜의 거점이 해양 건너편(일본 열도)임을 시사한다고 해석합니다.
• 고고학적·역사적 증거와 교차 검증: 중국 학계는 이 비문의 내용을 다른 사료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교차 검증합니다. 우선,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을 전후한 한반도 정세를 볼 때, 중국 측 연구는 백제 근초고왕~근구수왕 대에 백제가 마한을 통합하고 한반도 남서부에서 강성해져 있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 백제는 371년에 고구려를 격퇴하여 한때 패권을 잡았고, 그 후 신라에 대한 동쪽 방면 공략을 강화하여 390년경까지 20년간 신라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였습니다 . 이러던 중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에 원군 요청을 하였고, 반면 백제는 왜국과 동맹을 맺어 철기 등 자원 및 군사 지원을 얻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정황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의 ‘임나(任那)•신라 정벌’ 설화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중국 학자들은 일본서기가 신뢰성 낮은 사서임을 지적하면서 , 보다 객관적인 고고학 자료를 찾습니다. 예컨대 한반도 남부 가야 및 왜의 무덤 유물로 보아, 4세기 후반에 백제-왜 연합세력이 한반도 남동부로 진출했음을 시사하는 무기와 철제 유물 교류 흔적이 발견됩니다 . 또한 신라 지역에서 이 시기 대규모 전쟁 흔적(성곽 파괴와 방어축조 흔적 등)이 확인되는 점도, 외부 침략설과 부합한다고 봅니다. 다만, 지배의 지속성에 대한 증거는 부족하여, 중국 측은 이 침략을 일시적인 전쟁 행동으로 해석합니다. 실제로 고구려군이 400년에 5만 대군을 파병해 신라를 구원하자 왜군이 퇴각하였고, 404년에도 왜가 고구려 영토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하는 등 , 왜의 한반도 내 장기 지배는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시나리오는 비문 신묘년조의 기록과 잘 들어맞는다고 중국 학계는 판단합니다. 결국 신묘년조에 언급된 사건은 백제-왜 연합군에 의한 일시적 침공과 신라의 위기”로 이해되며, 이는 이후 광개토대왕의 대응과 승전(비문 이후 부분에 고구려의 토벌 전과 기록)으로 이어지는 서사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비문 자체가 고구려 왕의 업적을 기리는 목적이므로, 왜의 공격 사실 언급은 고구려의 대규모 반격과 승리를 부각하기 위한 전제로 보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

4. 사실 기반 해석과 최종 결론


중국 학계는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 항목에 대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이나 한국의 민족주의적 재해석을 배제한 채 오로지 객관적 사료와 증거에 입각한 해석을 추구합니다. 그 최종적인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비문의 진정성: 신묘년조를 포함한 광개토대왕비 문구는 당시 그대로의 역사 기록으로서 신뢰할 만하며, 후대에 글자가 조작되거나 왜곡된 증거는 없다고 판단합니다  . 따라서 해석 역시 비문에 새겨진 원문에 충실해야 합니다.
• 해석의 핵심: 신묘년(서기 391년)을 전후하여 왜국 세력이 백제와 연계하여 한반도에 침공하여 백제를 도와 신라를 공격, 일시적으로 신라를 위협하였다는 사실을 비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 이는 고구려 입장에서 바라본 당시 국제 정세의 한 단면으로, 백제와 신라가 원래 고구려 조공국이었는데 외세(왜)의 개입으로 질서가 교란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 고구려의 대응과 맥락: 중국 학자들은 이 구절이 고구려 광개토왕의 정벌 활동 맥락에서 기술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즉 왜의 침략으로 촉발된 사태에 대해 광개토대왕이 남하하여 백제 정벌(396년)과 신라 구원(400년) 그리고 왜 격퇴(404년)를 이룩했으며, 그 전과를 드러내기 위해 서두에 해당 침략 사실을 서술했다고 해석합니다 . 비문은 왜가 쳐들어와 소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광개토왕이 평정하였다는 흐름으로 읽혀야 하며, 따라서 왜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거나 과장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비문 후반에는 왜를 “적” 혹은 왜구”(倭寇)로 칭하며, 광개토왕이 그들을 격퇴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어 전체 문맥상 고구려의 승전 기록으로 귀결됩니다 .
• 임나일본부설의 배격: 중국 학계는 신묘년조 해석을 둘러싼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비문 어디에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장기간 통치했다는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주장은 《일본서기》 신공황후설화의 과장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 중국 측 연구는 碑上不合常理”(비석에 일본의 공적을 기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한국 학자의 논지를 수용하면서도 , 이것을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고구려 중심의 역사 기록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신묘년 기사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일본의 한반도 지배론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근거 없다는 입장입니다.
• 사실에 입각한 역사상: 종합하면, 중국 학계가 그리는 신묘년조 사건의 역사상은 4세기 말 백제-왜 동맹군의 한반도 침공과 그에 대한 고구려 광개토왕의 대응입니다. 이 해석은 비문 문자 하나하나와 동시대 정황 증거들을 최대한 존중한 결과물로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해석 분쟁에서 어느 한쪽의 민족주의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이고 실증적인 견해로 평가됩니다. 중국 학자들은 앞으로도 추가 자료(새 탁본, 고고학 발굴 등)가 나오면 분석을 이어가겠지만, 현 시점에서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는 위와 같이 해석함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

참고 자료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원문 (국립중앙박물관 탁본 등)
• 徐建新, 〈高句丽好太王碑拓本的分期与编年方法〉, 古代文明 2009년 1호 (중국 사회과학원 세계사연구소)  
• 중국 위키백과 〈好太王碑〉 항목  
• 박시형, 이진희 등 한중 학자의 광개토왕비 연구내용 (중국 Northeast Asian History 자료 등) 
• 기타: 광개토왕비 탁본(부사년본 등) 판독 연구, 비문 문자학적 고찰 (동북아역사재단 자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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