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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당 황실 혈통과 민족적 기원: 한족인가 선비계인가?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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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황실 이씨 왕조의 출신 배경은 전통적으로 한족 명문으로 서술되지만, 현대 연구에서는 선비(鮮卑) 등 북방계와의 혼혈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구당서』에 따르면 당 고조 이연(李淵)은 “본래 농서 지역 사람으로, 서량 무조왕 이暠(李暠)의 7세손” 이라 하여 한족 명문인 융서 이씨(隴西李氏)의 후예로 기록됩니다. 이는 노자(老子) 이이(李耳)의 자손이라는 주장까지 더해져 당 황실이 한족 도통(道統)을 이었음을 천명한 계보입니다 . 그러나 당대에도 이러한 계보에 이의를 제기한 이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당 고종 시기 승려 법琳(法琳)은 당 황실이 노자의 후손이 아니라 북방 선비족인 탁발씨(拓跋氏)의 후예라고 논쟁을 벌였고, 결국 당 태宗에 의해 유배되었지요 . 이는 당 조정이 자신들을 전통 한족 왕실로 정통화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연 가문의 실제 출신을 둘러싸고 다각적인 검증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 사료와 고고자료를 종합하면, 이연의 조상 계보에는 한족과 “호인(胡人)” 혈통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특히 당 고조의 조부 이호(李虎)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데, 그는 서위(西魏) 팔柱국의 한 사람으로 Xianbei식 성씨 “대야씨(大野氏)”를 하사받았고  , 형제의 이름도 기두(乞豆)・*기두(起头)*처럼 한족답지 않은 이질적 이름이었습니다 . 이 점에 착안하여 冯承钧 등의 학자는 이연 일가에 호인 출신 가능성을 제기했고 , 일본의 金井之忠 등은 심지어 이연 가문이 북방 유목계 高车(고거)족의 한 갈래일 수 있다는 설까지 제안했습니다 . 미국의 陈三平, 卓鸿泽 등 역시 이연 조상이 알타이계 유목민 출신이며 탁발 선비부(拓跋部)와 밀접한 관계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지요 . 이러한 설들에 따르면 당 황실의 부계 혈통에도 북방계 피가 상당 부분 섞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진인각(陳寅恪) 역시 당 황실 가계에 관한 치밀한 고증을 남겼습니다. 진인각은 당 황실이 융서 이씨나 관롱 귀족 출신이 아니라, 북위(拓跋魏) 지배하의 하북(河北) 조군(趙郡) 지역 출신 작은 한족 집안이라고 보았습니다 . 그는 이 집안의 선조 중 이초고발(李初古拔), 이매득(李買得)이라는 인물이 언급되는데, “성은 이(李)지만 이름은 선비식”인 것으로 미루어 , 한인(漢人)이면서 선비 이름을 하사받은 몰락 군호(軍戶) 출신이 당 조상의 실체라고 주장했습니다 . 한마디로, 부계는 한족이지만 북방 선비 체제 속에 편입되어 선비식 성명과 문화를 수용한 집안이었다는 해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다른 사학자 주희조(朱希祖)의 반론도 있었는데, 주희조는 진인각이 동일시한 인물들이 실제로는 다른 인물이며, 당 황실은 여전히 융서 이씨 한족 가문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이처럼 당 황실의 민족 기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여러 설이 나왔으나, 전반적으로 “한족 혈통에 북방 유목계 혈통이 혼합된 호한(胡漢) 혼혈” 가문이라는 견해가 강합니다  .

특히 당 황실의 모계 방면은 선비족과의 밀접한 연관을 잘 보여줍니다. 당 고조 이연 본인의 어머니가 북주 팔柱국 중 하나인 독고신(独孤信)의 딸(元贞太后)로서 선비족 독고씨이며 , 이연의 부인 두씨(窦氏) — 즉 당 태宗 이세민의 생모 — 는 북주 선비족 권세가 우문태(宇文泰)의 외손녀였습니다 . 따라서 이연은 혈통적으로 절반가량이 선비족이고, 그의 아들 이세민은 적어도 1/4 이상 선비족 피를 물려받았음이 계통적으로 추정됩니다 . (일부 계산에 따르면 이세민의 선비계 혈통은 3/8 정도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 더 나아가, 이세민의 정비인 장손황후(長孫皇后) 역시 북위 시기 한화(漢化)된 선비 귀족 장손씨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이러한 사실들은 당나라 황실이 혼인과 계보를 통해 북방 유목 귀족들과 깊이 연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요컨대 이씨 당 황실은 순수 한족이라기보다는 선대에 걸쳐 “호(胡)의 피와 한(漢)의 피”가 뒤섞인 대표적인 호한 혼혈 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흥미로운 것은, 당 황실 자신은 공식적으로 한족 정통성을 강조하면서도 현실 속에서는 이러한 혼혈적 배경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진인각은 “李唐一族之所以崛興,盖取塞外野蛮精悍之血,注入中原文化頽废之躯…遂能别創空前之世局” 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중원 한족의 나약해진 몸에 변외(塞外)의 야만적이고 정력적인 피를 수혈하여 전무후무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당 제국의 건설과 발전에는 이러한 이중적 유산, 즉 한족 문명에 북방 민족의 기백을 결합한 배경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당 황실은 부계로서 한족 왕조의 정통을 자임하면서 , 모계 및 혼인관계로 연결된 북방 세력의 협력을 얻어 통일 왕조를 일구어낸 것입니다  . 이처럼 혈통적・문화적 “호한융합”의 산물이 바로 당 왕실이었습니다.

당의 정치체제와 문화: 한족 중심 vs. 다민족 제국


당나라는 통치 구조상 전통 한족 왕조의 계승자였지만, 운영 방식과 사회 문화 면에서는 전례 없이 다민족적인 제국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우선 정치 체제를 보면, 당은 수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삼성육부(三省六部) 체제, 과거(科擧) 실시, 율령(律令) 등 한족 왕조의 전통적 관료 시스템을 확립했습니다 . 통치 이념도 유교를 기본으로 하고 도교를 숭상하여, 중화(中華) 왕조의 정통성을 자임하였지요 . 당 태종은 “진정한 군주는 중국인(漢人)과 이민족(夷)을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한족 황제 중 하나임을 자처했습니다 . 실제로 태종은 한족 고전을 통치 지침으로 삼고 유교적 덕치를 구현하여, 정관之治라는 태평성대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당 제국은 정치 이념과 제도 면에서 한화(漢化)된 국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당 황실 스스로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한인(漢人)이며, 중화 문명을 정통으로 삼는다”라고 인식했으니 ,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은 한족 중심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문화와 대외 정책은 기존 왕조와 달리 매우 개방적이고 다원적이었습니다. 초기 당 조정의 권력층부터가 이미 선비계 귀족과 한족 귀족의 연합(關隴集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귀족 문화에도 북방 유목 전통의 영향이 짙었습니다  . 당 태종은 돌궐(突厥) 등의 이민족을 물리친 후 “천가한(天可汗)”, 즉 하늘이 추대한 대칸”으로 추앙받으며 중국 황제이자 유목 세계의 대칸 지위를 겸했습니다 . 그는 정복한 동突厥의 아사나씨(阿史那氏)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서역 고창국 공주를 아들(고종)에게 혼인시키는 등 이민족 통합 통치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또한 토번에 문성공주를 시집보내고, 돌궐, 거란 등 주변 제족과 화친・통혼 정책을 펼쳐 다민족 제국의 연합체를 지향했습니다 . 이는 국초에 강제 동화보다는 회유와 자치를 허용한 당의 통치 전략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태종은 투항한 돌궐, 거란, 철륵 등의 부족을 중국 영내에 이주시키면서도 조세나 동화교육을 강제하지 않고 상당한 자치를 부여하였는데  , 이런 유화책 덕분에 당은 광대한 영토의 여러 민족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거느릴 수 있었습니다. 당대 문헌에도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납니다. 『신당서』는 천하 사람들이 하북(河朔)을 오랑캐 보듯 하였다”고 평했는데 , 이는 황하 이북에 유입된 돌궐・거란 등이 한화되지 않은 채 부락 단위로 자치하면서 지역 풍속이 크게 호화(胡化)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태종은 이를 문제 삼기보다 “화이일가(華夷一家)”, *화이여일(華夷如一)이라는 기치 아래 중화와 이민족의 구분을 넘어서 하나로 포용하고자 했습니다 . 이러한 포용적 다문화 정책은 당 왕조 초중기의 사회 통합에 기여하여, 만국이 조공하고 상인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세계제국적 번영을 가능케 했습니다  .

당대의 국제적 도시인 장안과 뤄양은 이러한 다민족 문화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번성기 장안은 인구 백만이 넘는 국제도시로 발전하여, 서역 상인, 중앙아시아 사절, 한반도와 일본의 유학생 등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인 대도시였습니다  . 비단길을 통해 소그드 상인, 페르시아인(Zoroastrian교도), 아랍인, 인도・천축僧 등이 장안에 집단거주하며 자치적인 “방(坊)”을 이뤘고,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대진경교)와 조로아스터교(祆教) 사원까지 들어섰습니다. 남방의 광저우(廣州) 같은 항구도시에도 아랍・페르시아 상인이 대거 정착하여 7세기 초 인구의 4분의 1, 8세기 중반에는 절반 가까이가 외국인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 이러한 대외 개방 속에 당 귀족사회는 외래 문화에 열광하였는데, 호풍(胡風)이라 불린 이국적 풍습이 귀족층에서 유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산 포도주와 후추가 애용되고, 여성들은 고선율(高鮮卑履) 같은 호인식 가죽 장화와 비단 바지 차림으로 다녔으며, 남성들은 터키식 수렵복장을 즐겨 입었습니다 . 비파, 공후, 피리 등 중앙아시아 음악과 호무(胡舞)라 불린 서역 춤은 황실 잔치의 흥을 돋웠고, 포로(polo) 같은 스포츠도 사랑받았지요. 이처럼 당 제국은 문화적으로 동서융합의 용광로였으며, 다양한 민족의 기예와 지식이 공유되는 세계적 코스모폴리탄 시대였습니다 . 당 귀족들은 “외래의 재능과 문화가 중화에 활력을 더해준다”며 다원적 문화의 풍요로움을 긍정적으로 인식했습니다  . 실제로 당대 문헌에는 각 이민족의 특기를 평하면서 오랑캐도 재주가 있다(胡也有才)는 식의 언급이 빈번한데, 이는 외국인이라 해서 배척하기보다는 그 장점을 제국에 활용하고자 한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

그러나 다민족 제국의 이면에는 긴장과 위험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이민족에 대한 관용 정책은 초기에는 안정에 기여했으나, 장기적으로 변수가 되었습니다. 당 정부가 화북의 투항 부족들에게 지나치게 자치를 허용하고 한화 교육을 등한시한 결과, 8세기 중엽에는 하북 절도사 세력이 중앙과 유리되어 반독립적 권력을 형성했습니다  . 대표적인 인물이 안녹산(安祿山)인데, 그는 사그드계와 돌궐계의 혼혈로서 당 조정의 총애를 받아 절도사로 발탁되었지만, 결국 번주의 힘을 바탕으로 반란(安史之亂)**을 일으켰습니다. 『신당서』가 지적하듯 하북의 호화(胡化)가 안사의 난의 화근이 된 것이지요  .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국력이 쇠퇴하고 사실상 영토가 양분되었는데, 하북・하동 등 북방은 절도사들이 통치하는 호풍문화권으로 남고, 관중 및 강남 등 남쪽은 황실을 옹위하는 한문화권으로 대비되었습니다 . 이후 당 후기에는 안록산의 난 충격으로 외래 문화에 대한 경계심과 배척 움직임이 강해졌습니다. 9세기 무종 때 회창 폐불(會昌廢佛) 정책으로 외국에서 전래된 불교・조로아스터교・경교 등을 일시 금압한 것이 그 예입니다. 또한 환관들이 호인 황후를 들이지 말 것을 상소하여 황실의 혼인에서 이민족 배제가 거론되는 등, 초기와 달리 배외적 정서도 나타났습니다. 이는 이민족 포용을 통해 구축된 다민족 제국이 한계에 봉착하고, 이후 한족 중심질서가 재강조되는 조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당 제국은 다민족 융합의 유산과 그 그늘을 모두 남긴 채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였고, 뒤이은 송 왕조는 상대적으로 배외적이고 순수 한족적인 정체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당나라는 정치제도와 지배 이념 면에서 한족 왕조의 계승자였지만, 사회 문화와 대외정책 면에서는 전례 없이 다민족적인 혼종(混種) 제국이었습니다. 한족 중심의 관리 체계와 북방 유목 전통에서 유래한 군사・문화 요소가 결합하여, 당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시대를 열었습니다 . 이러한 호한 통합(胡漢統合)의 다민족 정권으로서의 건국 정신이야말로 당이 후세에 남긴 소중한 유산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

당나라에 대한 역사서와 현대 학계의 평가


중국의 전통 사서들은 당나라를 중화 정통 왕조의 하나로 분류하며 한족 왕조로 취급했습니다. 이는 당 자체가 편찬한 『구당서』, 송대에 편찬된 『신당서』 모두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들 사서는 당 황실 계보를 앞서 언급한 대로 농서 이씨 한족 가문의 후예로 서술하고 , 당 황실이 요임금과 노자로 대표되는 화하(華夏) 문명의 적통임을 부각했습니다 . 심지어 송대의 유학자 주희(朱熹)마저, 당 왕실의 가정윤리가 문란했던 점을 비판하며 “이씨 당은 본래 이적(夷狄) 출신이라 그랬다”는 취지로 말한 바 있는데 , 이는 당 황실을 도덕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한 주장일 뿐, 당을 중국 왕조 목록에서 배제하려는 견해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중국 전통의 이십사사(二十四史) 체계에서 당나라는 한(漢)・송(宋) 등과 함께 당연히 한족 왕조의 계보에 들어가고, 거란・몽골・만주족 왕조인 요(遼)・원(元)・청(淸) 등과 구분되었습니다. 즉 전통 역사인식에서 당나라는 “중화 제국”의 정통Dynasty이며, 그 황실 출신 배경의 북방 요소는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 이는 당 황실 스스로 한족 정통임을 내세우고 대내외적으로 한문화 중심 통치를 펼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근현대에 와서 당 왕조의 민족적 성격을 둘러싼 재평가와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청말민초에는 오랑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당의 북방 혼혈성을 강조하는 담론이 나타났고, 일부 일본 학자들은 수당은 선비족의 제국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 예컨대 일본의 岡田英弘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이후 중국 북방에서는 한족과 호족이 대량 혼혈하였고, 특히 산서・하북 일대에서 이호(李虎) 가문은 호한 혼혈 북족 가운데 출현했다”고 보았습니다 . 이는 앞서 살핀 진인각 등의 견해와도 상통하는데, 요컨대 당 왕조는 단일 민족 왕조가 아니라 북방 유목민과 한인 집단의 융합 산물이라는 인식입니다. 이런 시각에서는 당을 전통적 한족 왕조로 보기보다 다민족 연합왕조로 분류하며, 나아가 중국史상 가장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왕조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 특히 서구 학계에서는 20세기 후반부터 당을 “중국의 코스모폴리탄 황금시대”로 묘사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 서구 역사서들은 당대 장안의 외국인 공동체, 당 귀족들의 서역 음악・호인 복식 애호 등을 강조하며, 당을 후대의 명・청 시대와 대비되는 관용적이고 다문화적인 제국으로 이상화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예컨대 “당나라는 이전이나 이후의 어느 시대보다도 세계적(코스모폴리탄)였다” , “당의 엘리트 문화는 전례 없는 포용성과 다양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등 찬사가 흔하지요. 이러한 평가는 당 왕조의 혼혈적 기반과 개방 정책을 긍정적으로 조명한 것이며, 동서 문명의 교류를 꽃피운 시대로서 당의 가치를 부각하는 서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한편, 현대 중국 학계에서도 당의 다민족성을 인정하면서 그 중화 역사상의 위상을 함께 강조하는 시각이 주류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은 다민족 통일국가”라는 관점을 채택하기에, 당의 성취를 한족과 소수민족이 함께 이룬 영광으로 해석합니다. 즉 당나라는 한민족이 주체가 되어 여러 민족이 융합한 제국으로 평가되며 , 전통 한족 문화의 그릇에 북방 문화의 내용물을 담아 거대한 통일을 이룬 사례로 긍정됩니다  . 예를 들어 중국 역사저술에서 “수・당은 오랜 분열 후 한족이 재통일을 이룬 왕조”라고 명기하면서도, 동시에 “당 제국의 번영은 호한 융합의 산물”이라고 설명하지요  . 한족 중심과 다민족 융합이라는 두 측면을 모두 중국사의 유산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만, 중국 내 일부 민족주의적 견해에서는 “이연 가문도 어디까지나 한족”이라며 혈통 논쟁을 경계하기도 합니다 . 이는 당 왕조의 한족적 연속성을 지키려는 입장인데, 그러한 견해도 당 황실 부계의 한족 기원을 중시하는 전통관념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현대 중국의 주류 역사인식은 당나라는 전형적인 한족 왕조이자, 가장 개방적인 다민족 융합 왕조라는 두 면모를 모두 인정하는 쪽으로 정리됩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평가가 있는데, “唐朝并非纯粹的汉人王朝,而是胡汉统合的多民族政权” 즉 “당나라는 순수 한족 왕조가 아니며, 호(胡)와 한(漢)이 통합된 다민족 정권”이었다는 진단입니다 . 바로 이러한 차별을 포용한 건국 정신이 당이 후세에 남긴 값진 유산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

물론 최근 서구 학계에서는 당의 국제성과 포용성을 과장되게 이상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비판적 성찰도 나오고 있습니다  . 예컨대 탕 시대 엘리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한인(漢人)으로 규정하고 이민족을 “우리와 종족이 다르다(異類)”고 구별했으며 , 안사의 난 이후에는 대외 경계심이 강화되는 등 내재된 한족 중심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지적입니다 .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접근도 당 제국이 다민족 사회 속에서 한족 정체성과 이민족 요소를 어떻게 균형있게 조율했는지를 해명하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애브람슨(Marc Abramson) 등의 연구가 보여주듯, 당대 한인 지배층은 민족적 구분을 인식하면서도 능력과 공헌에 따라 외인도 과감히 수용하였고  , 이민족 출신이라 해도 출세와 권력 획득에 큰 장벽이 없는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 이러한 점에서 당나라는 혈통적으로는 호한 혼혈이고 문화적으로는 다원통합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중화 제국 질서의 계승자로서 민족들의 융합을 제국의 강력함으로 승화시킨 독특한 시대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당나라는 전통 한족 왕조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그렇다, 그러나…로 요약될 것입니다. 당 황실의 부계는 한족 계보를 이었고 스스로도 한족 정통 왕조임을 표방했기에, 중국 역사상 한족 왕조 계열에 확고히 자리합니다 . 그러나 그 통치 엘리트의 혈연과 문화는 다민족적 융합의 산물이었고, 국가 운영 또한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라 광범한 다민족 제국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 동양과 서양의 학계는 이 두 측면을 모두 주목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입체적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학자들은 당의 혼혈적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중화 문명사적 연속성을 강조하고, 서양의 역사서는 당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찬미하면서도 그 한족적 뿌리와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런 다양한 시각 속에서도 공통적인 견해는: 당나라는 한족과 북방민족의 융합을 통해 탄생한 제국으로서, 중국사의 새로운 장을 연 위대한 왕조라는 점입니다. 한족 왕조냐 이민족 왕조냐 하는 이분법을 넘어서, 당나라는 바로 “호(胡)와 한(漢)이 한 몸이 된” 독특한 제국이었던 것입니다 . 이는 당대를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으로 이끈 동력이자, 훗날 다민족 중국이 형성되는 데 밑거름이 된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당나라는 전통적인 한족 왕조로 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대표적인 호한혼혈 왕조였으며, 이러한 복합적 성격이 당 제국 성공의 비결이자 몰락의 원인으로 모두 작용한 것이 역사적 현실입니다   .

참고 자료: 『구당서』・『신당서』 당 고조본기, 陳寅恪 「唐代政治史述論稿」・「隋唐制度淵源略論稿」, 朱熹 「駁李唐爲胡姓說」, 陈三平 “Turko-Mongol lineage of Tang Imperial Clan” (Journal of Asian History), Marc S. Abramson Ethnic Identity in Tang China, Shao-yun Yang “Tang ‘cosmopolitanism’: a critical approach” 등. (본문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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