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개요 표
인물 이름 소속 주요 역할 역사적 설명
문무왕 (김법민) 신라 (제30대 왕) 신라 국왕, 삼국 통일전쟁 최고지도자 태종 무열왕의 장남으로 즉위 전에 외교·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즉위 후 백제 부흥세력 격퇴와 고구려 멸망(668)을 이끌었다 .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하여 역사상 통일대왕으로 평가된다 .
김유신 신라 (장군, 상대등) 신라 최고 명장, 삼국통일 주역 진골 귀족 출신 화랑으로 성장하여 신라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 백제 멸망(660)과 고구려 정복(668)에 중추적 기여를 했으며, 훗날 신라의 수호신으로 추앙받았다  .
유인궤 (류인궤, Liu Rengui) 당 (무장, 군공) 당나라 장수, 백강 전투 당군 지휘 당 고종시대 무장으로 백강 전투(663)에서 당 수군을 지휘, 왜의 함선을 400척 불태우며 대승을 거두었다 . 이후 당 조정에서 재상급으로 승진했고, 나당전쟁 등에서 활약하여 출장입상(出將入相)을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부여풍 (풍왕, 부여풍장) 백제 부흥군 (왕자, “풍왕”) 백제 부흥운동 지도자, 왕위 추대자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 일본에서 귀국하여 백제 부흥군의 왕(풍왕, 661~663)으로 옹립되었다 . 그러나 복신 등과 내분 끝에 백강 전투 패배 후 고구려로 망명했고, 고구려 멸망 후 당에 압송되어 유배되었다 .
부여충승 백제 부흥군 (왕자) 백제 왕족, 부흥군 거점 수비 의자왕의 아들로 부여충지와 함께 주류성을 지키며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 663년 백강 전투 패전 후 충지 및 왜군과 함께 항복하여 부흥운동은 막을 내렸다 .
부여충지 백제 부흥군 (왕자) 백제 왕족, 부흥군 거점 수비 의자왕의 아들이자 부여충승의 동생으로, 형과 같이 주류성 항전을 이끌었다 . 663년 신라·당군에 참패한 뒤 충승 등과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
나카노오에 황자 (덴지 천황) 왜 (일본 조정 황자/천황) 일본 섭정·천황, 백제 구원군 파견 결정 645년 태합 개신 주도자이자 일본의 실권자로, 백제와 혼인관계 등으로 긴밀했다 .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 사후 즉위를 미루고 대규모 백제 구원군 파병(663)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 백강 전투 패배 이후 일본의 중앙집권 개혁(오미령·율령제) 가속화에 영향을 주었다 .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 왜 (일본 장군) 일본 파병군 총사령관 (전장군) 663년 3월, 일본 본대 약 2만7천 명을 이끌고 백제로 출병한 총지휘관이다 . 백강 입구에서 당군과 교전했으나 패배하였고, 전투 후 기록에 더 나타나지 않아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코세노카무사키노오미 오사 왜 (일본 장군) 일본 파병군 지휘관 (중장군) 663년 일본군 주력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거세氏 계열 장군이다 . 백강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기록에 보이지 않아 전사 가능성이 높다 .
아베노히케타노오미 히라부 왜 (일본 장군) 일본 파병군 지휘관 (후군장군) 신라 원정에 참가한 아베氏 장군으로, 일부 사서에서 아베노 히라후로도 불린다 .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군 패배로 전사한 것으로 전해지며 , 이후 일본의 북방 원정으로 유명한 동명이인 아베노 히라후와는 구별된다.
아즈미노 히라부노 무라지 왜 (일본 장군) 일본 선발대 지휘관 661년 5월 1만여 명의 1차 백제구원 선발대 지휘관으로 파견되어 부여풍을 호송했다 . 663년 본대와 합류해 싸웠으며, 백강 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궤멸당하며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사이노무라지 아지마 왜 (일본 장군) 일본 선발대 지휘관 661년 파견된 일본 선발부대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백제 원병 요청에 응한 왜군을 지휘했다 . ‘아치마사’로도 기록되며, 백강 전투 후 생사가 전하지 않는다.
에치노하타노미 야츠쿠 타쿠츠 왜 (일본 장군) 일본 선발대 지휘관 일본 에치(越) 지역 하타씨 출신 장군으로 선발대에 참여했다. 백강 전투에서 하늘에 맹세하며 분전, 수십 명을 베고 장열히 전사하여 일본측 기록에 용맹이 전해진다 .
하시히토노무라지 오후타 왜 (일본 장군) 일본 파병군 지휘관 663년 백제 원정에 참여한 장군으로, 間人連 大蓋(하시히토노 오호후타)라 불린다. 전투 후에도 일본서기에 이름이 나타나 670년대까지 생존한 것으로 보여, 패잔병을 이끌고 귀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
미와노키미 네마로 왜 (일본 장군) 일본 파병군 지휘관 야마토의 미와 씨 출신 지휘관으로 백제 지원군에 참가했다. 백강 전투에 참전했으며 그 이후 기록에서 사라져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오야케노오미 카마츠카 왜 (일본 장군) 일본 파병군 지휘관 오야케氏 출신 장군으로 백제 원정 후군(後軍) 지휘를 맡았다 . 백강 전투에서 패하여 다른 장수들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
이오하라노키미 오미 왜 (일본 장군) 일본 3차 파병군 지휘관 663년 8월 3차 지원군 약 1만 명을 이끌고 출발한 지휘관이다 . 그러나 본대 패배로 합류 전에 철군한 것으로 추정되며,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두상 (杜爽) 당 (※신라 동맹군) 당나라 장군, 신라 해군 협력 당나라 수군 행군총관으로서 신라와 함께 백강 해전의 당 함대를 지휘했다. 당의 두상과 부여융이 이끄는 함선 170척이 주류성으로 진격하여 왜선을 격파했고 , 그의 활약은 신라의 해상 승리에 기여했다. (※신라측에서는 동맹 당군으로 참여)
김인문 신라 (왕자, 장군) 신라 왕족 외교관, 당 협상가 태종무열왕의 차남이자 문무왕의 동생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교·군사적으로 지원하였다 . 백제·고구려 정벌에 김춘추·김유신을 도와 공헌했고, 통일 직후 당나라에 파견되어 나당 관계 조정에 기여한 외교장군이다 .
천존 신라 (장군, 화랑 출신) 신라 장군, 대당(對唐) 전쟁 공훈 김유신 휘하 화랑 출신 장수로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670년에는 화랑 죽지와 함께 당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7성을 탈환하고 2천명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우는 등 , 백제와 당에 대한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죽지랑 (죽지) 신라 (장군, 재상) 신라 화랑명장, 백제·고구려 전쟁 공신 화랑 출신 명장으로 김유신과 함께 백제군을 격파하고 나당연합의 고구려 정벌에도 참가했다 . 통일 후에는 신라 재상(중시, 이찬)을 지내며 국정을 안정시켰으며, 훗날 그의 덕망을 기린 향가 모죽지랑가가 전해진다 .
1. 신라 지휘관: 문무왕과 김유신
문무왕 (文武王, 김법민) – 신라의 통일대왕
출신과 가계: 문무왕은 신라 제30대 왕으로 휘는 김법민이다.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장남으로,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였다 . 이러한 왕실과 명문 무장의 혈연을 바탕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전부터 태자 신분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백제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 능력을 인정받았다 .
주요 활동: 661년 즉위 후 문무왕은 나당연합군의 일원으로 백제 부흥세력 진압에 주력하였고, 이어 666년에는 당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략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 그러나 고구려 멸망 직후 당이 한반도 점령 야욕을 드러내자 문무왕은 670~676년 나당전쟁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매소성 전투, 기벌포 해전의 승리를 거두어 당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 그는 통일 후 5소경 설치와 9서당 10정 군제 등 통일 국가의 통치 기반을 정비하였다 .
전쟁·외교 업적: 문무왕의 가장 큰 업적은 신라 중심의 삼국통일 완수다. 백제·고구려 정복과 더불어 외세 당나라까지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을 자주적으로 통합했다. 특히 676년 당군 격퇴는 자주적 통일의 쐐기를 박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또한 문무왕은 통일 전쟁 중 당나라와의 외교에서도 유연한 책략을 펼쳐, 필요할 때는 군사를 동원하고 때로는 김인문 등을 당에 보내 담판을 지었다.
역사적 평가: 문무왕은 한국사에서 첫 통일 국가의 군주로 높이 평가된다. 그의 리더십으로 신라는 전란을 이겨내고 삼국을 통합했으며, 이후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사후에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으로 유명하며, 장례를 바다에 모신 대왕암 전설이 전해진다. 문무왕은 탁월한 군사·외교 역량으로 당대에 “문무(文武)를 겸비한 성군”이라 불렸고, 통일 위업으로 통일대왕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
김유신 (金庾信) – 신라의 최강 명장
출신과 가계: 김유신은 신라의 대표적 명장으로, 진골 귀족 출신이다. 증조부는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 왕족이며, 부친 김서현은 진흥왕의 외손으로 신라에 동화된 가야계 귀족이었다  . 이러한 가야 왕실 후손이면서도 신라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져 진골 신분을 얻었고, 김유신 자신도 김춘추(훗날 무열왕)와 누이동생 문희의 혼인으로 왕실과 사돈 관계를 형성하였다  .
주요 활동: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무예와 인격을 수련하였고, 일찍이 전장에서 공을 세웠다 . 629년 고구려 낭비성 전투에서 적장을 베어 승리를 이끈 일화로 이름을 떨쳤다 . 선덕여왕진덕여왕 때 왕실 핵심세력으로 떠올랐으며, 김춘추를 도와 백제와 고구려 정벌 계획을 주도했다. 660년 백제 정벌 시에는 신라군 총사령관으로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을 물리치고 사비성 함락을 이끌었고, 백제 멸망 후 상대등(귀족회의 수장)에 올라 삼국통일 전쟁의 신라측 최고 지휘관 역할을 했다  . 661668년 고구려 원정에서도 신라군을 지휘하여 평양성 함락에 기여했고, 통일 후에도 군권을 장악하여 나당전쟁 대비를 했다.
전쟁·외교 업적: 김유신의 최대 업적은 삼국 통일의 군공이다. 백제 정복과 고구려 정복 두 전역에서 신라 육군을 승리로 이끌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백제와의 결전이었던 황산벌 전투 승리(660)는 김유신의 지휘력이 돋보인 사례로, 신라가 당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했다 . 고구려전에서도 김유신은 신라군을 거느리고 평양성 공격에 참여했으며, 고구려 멸망 직후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맞서 군사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외교적으로도 그는 사위 관계인 무열왕을 도와 당과 동맹을 맺는 친당 정책에 협조하였고, 통일 후 당의 간섭을 배격하는 데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역사적 평가: 김유신은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명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삼국통일에 대한 그의 공훈으로 훗날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으며 , 민간에서는 국가를 구한 충신이자 무신으로 신격화되기도 했다 . 문학과 설화에 김유신의 일화가 다수 전하며, 그의 청년기 일화(말머리를 벤 맹세담 등)는 용맹과 절제의 상징으로 전해진다 . 총론적으로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신라의 최고 장군”으로 평가받으며, 충성과 지략을 겸비한 완벽한 무장의 전형으로 역사에 남았다 .
2. 당 지휘관: 유인궤
유인궤 (劉仁軌, 602~685년) – 백강 전투의 당나라 명장
출신과 경력: 유인궤는 중국 당나라의 무장(장군)이다. 자는 정칙(正則)이며, 하남도 변주 울지현 출신으로 비교적 미천한 집안이었다 . 수말당초 군공을 세워 당 태종의 인정을 받았으나 일시적으로 실각하기도 했다 . 660년 백제 정벌 당시에는 조운 담당관으로 있다가 부하 유인원이 백제 의자왕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고, 백제 멸망 후 당의 청주자사로 재직 중 백제 부흥군의 저항 소식을 듣고 지원군 지휘를 맡게 되었다 .
주요 활동: 663년 당나라 증원 함대 총지휘관으로 발탁된 유인궤는, 손인사(孫仁師) 장군과 함께 백강으로 진군하여 신라군과 합류했다. 그는 당 수군 7천 명을 이끌고 백제 부흥세력과 그를 지원한 왜국 함대를 맞아 싸웠다 . 백강 어귀에서 벌어진 네 차례 해전에서 노련한 유인궤는 화공 전술과 조수 간만 차를 이용한 전략으로 우세한 왜군 함대를 격파하였다 . 이 싸움에서 당군은 왜군 함선 400척을 불태우는 대승을 거두었고, 유인궤는 백제부흥군을 무너뜨리고 주류성을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 이후 부여풍은 도주하고 부여충승·충지 등은 항복하였으며, 유인궤는 승전을 보고하고 당으로 개선하였다 .
유인궤는 백강 전투 승리 후 당 조정에서 공을 인정받아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후 한반도에서 나당전쟁(670년대)이 벌어지자 일시적으로 안동도호부 도호로 파견되어 신라와 싸웠으나, 매소성 전투 등에서 패하고 당군이 철수하는 과정을 지휘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당 중앙에서 재상 반열에 올라 행정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전쟁·외교 업적: 유인궤의 최대 업적은 백강 전투의 대승이다. 그는 풍랑과 조류를 고려한 전술 운용으로 일본이 파견한 대규모 수군을 섬멸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당의 군사적 우위를 각인시켰다 . 이 승전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좌절되어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속화되었다. 또한 유인궤는 훗날 신라와 당의 갈등 국면에서도 군사 경험을 발휘해 대책을 건의하는 등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 평가: 중국에서는 유인궤를 출중한 무장으로 평가하며, 항왜(抗倭) 영웅으로 부르기도 한다 .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무장으로 공을 세우고 당대에 출장입상 (전장에 나가 장수가 되고 돌아와 재상이 됨)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다. 한국사에서는 백강 전투 승리로 신라의 우군이 되어준 장수로 언급되며, 한편으로 나당전쟁에서는 신라의 적장으로도 등장한 복잡한 역사적 인물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의 전략적 승리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재편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기에, 동아시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명장으로 평가된다.
3. 백제 부흥군: 부여풍과 세 항전 인물
부여풍 (扶餘豊, 풍왕) – 백제 부흥운동의 왕
출신과 즉위: 부여풍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아들이다. 백제 멸망 직전 일본에 인질 겸 체류하고 있었는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자 백제 유민 지도자 복신 등이 일본에 있는 부여풍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자 불러들였다 . 일본의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도 이를 지원하여 군사를 보내주었다 . 661년 9월 부여풍은 귀국하여 백제의 ‘풍왕(豊王)’으로 추대되었는데, 이는 백제가 멸망 1년 만에 다시 왕을 세워 부활한 셈이었다 . 이로써 백제 부흥군은 명목상 새 왕조를 세우고 정통성을 주장하게 된다.
주요 활동: 풍왕으로서 부여풍은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부흥군의 실력자 귀실복신·도침과 권력 다툼이 있었다 . 661년 말~662년 사이 복신이 경쟁자 도침을 제거하고 부흥군을 장악하자, 부여풍과 복신의 불화가 깊어졌다 . 663년 6월 복신이 자신을 없애려 한다는 의심을 품은 부여풍은 선제 공격을 결행하여 복신을 주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 이 내분으로 부흥군 지휘부는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외교적으로 부여풍은 왜국과 고구려에 원병 요청을 보냈고, 왜가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함에 따라 663년 8월 나당연합군과 최후 결전을 치르게 된다 .
백강 전투와 최후: 663년 8월 부여풍은 왜군의 지원을 받아 나당연합군과 백강 하구에서 해전을 벌였다 . 그러나 연이은 교전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대패하고 결국 궤멸되었다  . 부여풍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게 되자 주변 측근 몇 명과 함께 배 한 척으로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 이로써 풍왕이 이끌던 부흥 백제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부여풍은 망명 생활을 고구려에서 이어갔으나,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하자 당나라군에게 붙잡혀 당 본토로 압송되었다 . 그는 당에서 유배지로 보내졌고, 그 이후의 삶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역사적 평가: 부여풍은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실제로 조선 후기 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백제 32대 왕으로 풍왕을 인정하여, 백제의 종언을 663년으로 보았다  . 그는 비록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지만 망한 백제를 부흥시키려 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다만 지도자로서는 복신 등 신하와의 내분을 조정하지 못해 스스로 부흥운동 실패를 자초한 측면도 있다. 결국 부여풍은 실패한 왕으로 끝났으나,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로서 백제 유민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안겨주었던 존재로 역사에 기록된다.
부여충승 (扶餘忠勝) – 끝까지 항전한 왕자
출신과 역할: 부여충승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 부여풍에게는 숙부뻘 혹은 형제뻘 되는 왕족이다 . 백제 멸망 전부터 일본에 체류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부여풍을 모시고 귀국하여 부흥군에 합류한 것으로 전한다 . 그는 동생 부여충지와 함께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周留城)에 입거하여 항전을 지휘하였다 . 주류성은 충남 서천 혹은 전북 부안 일대로 비정되는 곳으로, 백제 부흥군의 임시 도읍 격이었다.
항전과 최후: 660년 백제가 망한 후 충승·충지 형제는 주류성에서 성을 지키며 3년간 완강히 버텼다 . 663년 8월 백강 전투에서 왜국 지원군마저 패퇴하자 백제 부흥세력은 사기가 꺾였다 . 그해 음력 9월 초순, 부여충승과 충지가 지키던 주류성은 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당나라 유인궤 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 충승은 병사들과 주민들을 이끌고 투항하였고, 그의 항복으로 백제의 마지막 거점마저 무너졌다 . 이후 부여충승은 당군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측 기록에는 충승을 “위(僞) 왕자”로 칭하며 그의 항복 사실을 전한다 .)
역사적 평가: 부여충승은 백제 왕족으로서 최후까지 저항한 인물이다. 그의 항복은 곧 백제 부흥운동의 공식적인 종말을 의미했기에, 사서에서는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이 피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 충승은 끝내 부흥에 실패하고 항복했지만, 망국의 왕자가 백성들과 함께 최후의 성을 지키다 항복한 모습은 비극적 충절로 평가되기도 한다. 특히 일본서기는 그의 투항을 두고 ‘백제의 나라 이름이 끊어졌다’며 애통해한 백제 유민들의 심정을 기록하고 있어, 충승의 항복이 갖는 역사적 무게를 보여준다 .
부여충지 (扶餘忠志) – 백제 최후의 항전 세력
출신과 역할: 부여충지는 의자왕의 아들로, 부여충승의 아우 또는 조카뻘이다. 백제 패망 후 형 충승과 함께 주류성에서 부흥운동을 지속하였다 . 왕족의 위상을 내세워 백제 유민을 규합하고, 신라·당의 공격에 맞서 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충승과 충지는 함께 행동하며 백제 왕실의 투지를 상징하는 존재들이었다.
항전과 최후: 663년 8월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절망적인 패배를 당하자, 주류성의 충지에게도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 연합군 패전 직후 나당연합의 육해협공이 본격화되자, 충지는 결국 형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 《구당서》 등 중국 사서에 따르면 백제의 “위왕자 충승, 충지 등이 군사와 백성, 왜인들과 함께 항복하였다”고 한다 .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사실상 궤멸되었고, 충지는 당군의 포로가 되어 형 충승과 함께 당으로 압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기록에는 충지의 이름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적 평가: 부여충지는 백제의 마지막 저항을 함께 한 왕자로서, 충승과 더불어 논해진다. 두 왕자가 주류성에서 굳건히 항거한 결과 약 3년 간 백제 유민들의 투쟁이 지속될 수 있었다. 충지가 항복한 시점에 백제 부흥의 꿈은 완전히 좌절되었으므로, 그의 생애는 망국의 운명과 겹쳐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다만 끝까지 성을 지키다 항복한 그의 행위는 상황의 불가피함으로 여겨지며, 마지막까지 노력한 백제 왕실의 투혼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충지 형제를 두고 “마지막 왕자들”로 인식하며, 패망한 나라의 왕족으로서 역할을 다하다 사라진 비운의 존재로 기억한다.
4. 왜 지휘관 및 참여자: 일본측 인물들
나카노오에 황자 (中大兄皇子, 덴지 천황) – 백제 구원의 결단을 내린 일본 황자
출신과 위상: 나카노오에 황자는 일본 아스카 시대의 황족으로, 후일 제38대 덴지 천황(재위 668~671)이 된다. 그는 소가 씨를 무너뜨린 645년 ‘대화 개신’ 쿠데타의 주역으로,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제37대) 치세 동안 사실상 국정을 총괄한 인물이다. 백제와는 오랫동안 우호 관계였는데, 이는 그가 소가 씨 등 백제계 가문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 649년부터 황태자로서 일본의 실권을 잡은 그는 친백제 세력을 중용하였고, 신라보다 백제를 중시하는 외교 노선을 취했다 .
백제 지원 결정: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자, 나카노오에는 큰 충격을 받고 즉각 대응에 나섰다.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은 직접 규슈로 내려가 백제 유민을 격려하며 지원을 결정했고,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는 이러한 백제 부흥 지원 정책의 설계자였다. 661년 사이메이 천황이 급서하자 나카노오에는 즉위를 미룬 채로 “백제 구원”에 모든 힘을 쏟았다 . 그는 새 황제로 옹립되는 것조차 뒤로 한 채 군량 10만 석과 병력 동원을 지시하는 등, 백제 부흥군에 대한 전폭적인 원조를 진행했다  . 그의 결단으로 일본 조정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전쟁과 여파: 나카노오에는 66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총 4만여 명, 1,000척 함선에 달하는 구원군을 백제로 파견했다  . 이는 당시 왜국(일본) 인구 500만 명 대비 매우 과감한 국력 투입이었다 . 그러나 663년 8월 백강 전투에서 일본군은 당나라-신라군에게 참패를 당했고, 파병한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다  . 이 소식을 들은 나카노오에는 더 이상의 증원 포기를 결정하고 철군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패전 이후 그는 668년 덴지 천황으로 즉위하였고, 백제 부흥 실패를 계기로 일본의 대외정책을 전면 수정하였다.
역사적 평가: 나카노오에 황자는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한 최초이자 마지막 고대 군주로 평가된다. 백제 부흥에 사활을 걸고 대규모 파병을 단행했으나, 그 패배는 일본 내부에 큰 충격을 주어 이후 쇄국적 자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일본에서는 그의 치세에 오오미령 제정 등 율령국가 개혁이 가속화되고,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는 등 중앙집권이 확립된 것으로 유명한데 , 이러한 개혁의 배경에는 백강 전투 패배로 인한 위기의식이 있었다는 시각이 있다. 요컨대 나카노오에는 한반도에서 백제 부흥이라는 외교전에 패했지만, 그 실패를 바탕으로 국내 개혁을 추진하여 일본을 한층 강한 국가로 변모시켰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가미쓰케노노키미 와카코 (上毛野君稚子) – 663년 일본 본군 총지휘관
출신과 지위: 가미쓰케노노키미 와카코는 7세기 일본 야마토 조정의 유력 가문인 上毛野氏(카미쓰케노 씨) 출신 장군이다. 그의 이름 ‘君稚子(기미 와카코)’에서 ‘기미’는 지방 호족 칭호로, 가미쓰케노 지방(上毛野, 지금의 군마현 부근)을 본관으로 하는 국조(國造) 세력을 나타낸다 . 663년 백제 구원군 파견 시 일본 조정은 그를 전장군(前將軍)으로 삼아 파병군의 최고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
백제 원정: 663년 3월, 와카코는 군사 27,000명과 800여 척 함선으로 편성된 일본 본대의 총사령관으로 한반도에 건너왔다  . 이는 일본군의 주력부대였으며, 와카코는 이끌고 온 병력을 거느려 백제 부흥군과 합류했다. 이후 8월 백강 구강 어귀에서 당나라 유인궤가 이끄는 수군과 일대 해전을 벌이게 되었다. 와카코는 과감히 전투를 지휘했으나, 일본 수군은 4차례 싸움에서 연달아 패하고 말았다 . 당군의 화공으로 배 다수가 불타고 전세가 기울자, 그는 패잔병과 함께 퇴각을 시도했으나 제대로 철수하지 못했다.
최후와 영향: 《일본서기》 등에는 와카코의 최후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일본 측 지휘관들의 이름이 전투 이후 사서에 더는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와카코 자신도 백강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 그의 죽음은 일본군 본대의 괴멸을 상징하며, 야마토 조정은 이 참패로 인해 큰 손실을 입었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일부 병력과 백제인들은 가까스로 귀국했지만, 와카코처럼 주력 지휘관들을 잃은 일본은 한동안 대외 원정에 소극적으로 변모했다 .
역사적 평가: 가미쓰케노노키미 와카코는 일본 고대사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해외원정을 지휘한 장군이다. 비록 패장이 되었지만, 그가 이끌었던 백강 전투는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으로 손꼽히며, 그의 이름도 그 맥락에서 거론된다. 일본 학계에서는 와카코를 비롯한 참전 장수들의 몰락을 일본 고대 외교의 분기점으로 본다. 와카코의 패배는 일본으로 하여금 대외 진출을 자제하고 국내 행정 개혁에 주력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덴지·덴무 천황 시기의 율령체제 정비로 이어졌다 . 그런 의미에서 와카코는 일본이 “잃은 것과 얻은 것” 모두에 영향을 준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고세노카무사키노오미 오사 (巨勢神前臣訳語) – 참전한 고세씨 장군
출신과 지위: 고세노 카무사키노오미 오사는 일본 고세씨(巨勢氏) 일족의 무장이다. ‘神前臣’이라는 칭호에서 보듯, 오미 계급으로 오미국(近江國) 신전군(神前郡)을 본거지로 하는 고세씨 지지파에 속했다 . 663년 백제 부흥군 지원 시에는 중장군(中將軍) 지위로 파견군의 지휘부에 참여하였다 . 그는 가미쓰케노노키미 와카코 휘하에서 일본군 주력의 한 축을 맡았다.
백강 전투와 최후: 오사는 백강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 육군 및 수군을 이끌고 싸웠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어 왜군이 대패함에 따라 그의 부대도 궤멸적인 손실을 입었다. 《일본서기》 등에는 오사의 이름이 백강 전투 이후 더는 나타나지 않는데, 일본 사서 주석에는 “이후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적고 있다 . 실제로 많은 일본 장수들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으므로, 오사 역시 그 운명을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 평가: 고세노오미 오사는 백제구원에 참전한 일본 장군들 중 한 명으로, 개인적 활약상은 상세히 전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는 백강 전투의 일본 측 지휘 구조를 보여준다. 고세씨는 덴지 천황 시기 외교정책에 조언을 할 정도로 영향력 있던 가문으로, 오사의 출정은 그러한 백제 지원 노선에 고세씨 일족이 적극 가담했음을 시사한다 . 비록 그는 전장에서 전사하여 가문에도 타격을 입혔겠지만, 그의 참전은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백제와 운명을 함께하려 했던 증거로서 역사에 의미를 남긴다.
아베노히케타노오미 히라부 (阿倍引田臣比羅夫) – 백강에 산화한 아베 씨 무장
출신과 경력: 아베노 히케타노오미 히라부는 일본 아베씨(阿倍氏) 가문의 장군이다. 동일 시기 북방 정벌로 유명한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와 이름이 비슷하여 혼동되나, ‘히케타노오미’라는 칭호로 구별된다. 그는 덴지 천황기 아베 일족의 무인으로서 663년 백제 원정군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히라부는 3월에 출발한 본대 혹은 8월에 출발한 후속군을 거느린 후군장군(後軍將軍)이었다고 한다 .
백강 전투와 최후: 히라부는 백강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결국 일본군의 패주와 함께 생애를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는 구체적인 그의 전공을 언급하지 않지만, 《속일본기》 등에는 백강 전투 후 그의 행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전투 중 전사하여 귀환하지 못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 백제 멸망 후 일본에 귀환한 아베노 히라부는 없었고, 대신 동시기 북방 원정을 지휘한 아베노 히라후만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 한편 중국 사서 《자치통감》 등에서는 백강 전투 상황을 묘사하며 “왜병 장수 ○○가 끝까지 분전했으나 전사했다”는 식의 기술이 있는데, 이는 히라부나 다른 참전 장수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
역사적 평가: 아베노 히케타노오미 히라부는 백제 지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본 무장의 한 사람이다. 후대에 아베 가문은 계속 번성하여 헤이안 시대의 유력 귀족으로 남았지만, 히라부 개인은 나라를 떠나 먼 타국에서 전사한 탓에 국내 기록이 드물다.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근 연구에서 백강 전투에 참전한 여러 장수들의 존재가 재조명되면서 히라부도 언급되고 있다 . 이는 백강 전투가 단순히 패배한 병사들만이 아니라, 유력 가문의 장군들까지 잃은 커다란 국란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즈미노 히라부노 무라지 (安曇比羅夫連) – 맹렬히 싸우다 쓰러진 선발대 장수
출신과 경력: 아즈미노 히라부는 규슈 지방 해양세력인 아즈미(安曇) 씨 계통의 장군으로 추정된다. ‘무라지(連)’ 칭호를 가진 것으로 보아, 지방 호족이면서도 중앙에서 무관직을 받았던 인물로 보인다. 그는 661년 5월 백제 왕자 부여풍을 호위하기 위해 먼저 건너간 일본 선발대 1만여 명의 지휘관 중 하나였다 . 아즈미 씨는 전통적으로 해상 활동에 능한 가문이어서, 백제로 건너가는 임무에 적임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백강 전투와 전사: 663년 본대까지 합류한 뒤 벌어진 백강 전투에서, 아즈미노 히라부는 일본군 장수로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삼국사기》나 《자치통감》에는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일본 측 장수들의 분전을 전하는 대목이 있다. 특히 “왜병의 장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바라보고 맹세한 뒤 이를 갈며 수십인을 베었지만 끝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 여기서 언급된 용맹한 장수가 아즈미노 히라부 또는 그의 동료 에치노 다쿠쓰로 여겨진다. 아즈미노 히라부 역시 백강에서 용맹히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전사는 일본군의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역사적 평가: 아즈미노 히라부노 무라지는 백제 부흥군을 도와 싸운 일본 해병세력의 대표격 인물로 볼 수 있다. 그의 활약은 패배로 빛을 잃었지만, 사료에 묘사된 “결사분투” 모습은 당시 왜군 장수들의 충의를 드러낸다 . 아즈미 씨는 후대에 일본 해군의 시조로도 거론되는 전통있는 가문으로, 히라부의 전사는 가문의 무예 전통을 보여주는 동시에, 백강 전투의 희생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오늘날 역사재현이나 소설 등에서 종종 그의 용맹한 최후가 그려지며, 비운의 무장으로서 재조명되고 있다.
사이노무라지 아지마 (采巢連阿知麻, 사이노 아치마사) – 일본 선봉 부대 지휘관
출신과 경력: 사이노무라지 아지마는 사이(采) 씨 또는 사에키(佐伯) 씨 계통의 무장으로 추측된다. ‘무라지(連)’ 칭호를 지닌 것으로 보아 중앙에 예속된 토착 호족 출신이다. 그는 661년 일본이 첫 번째로 보낸 선발대의 공동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 일본서기는 그를 아치마사(阿致麻佐) 또는 아지마(阿知麻)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같은 인물의 다른 음역으로 보인다. 그의 임무는 부여풍을 백제로 호송하고, 현지 부흥군과 초기 합류하는 것이었다.
전투 참여: 아지마는 661~663년 백제 부흥군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662년까지는 주로 전라도 일대에서 부흥군 거점을 방어하거나, 신라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663년 백강 전투 시에는 왜 본진과 합류하여 해전에 임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패퇴함에 따라 아지마 자신의 운명도 풍전등화가 되었다. 패전 후 그의 이름은 더 이상 사서에 나타나지 않으며, 일본 기록 주해는 그가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적고 있다 .
역사적 평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는 일본측 백제 구원군 선봉을 이끈 장수로서, 첫 파병의 상징적 인물이다. 비록 세부 전공은 뚜렷이 남지 않았으나, 그가 이끈 1만 병력의 선발부대는 백제 부흥운동의 초석을 놓았다. 그의 최후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백강의 패배와 함께 허망히 사라진 것으로 보아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무장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이름은 일본서기에 분명히 남아 있어, 백제 부흥 지원에 참여한 일본 열혈 장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이는 고대 일본이 외국 전쟁에 투입한 장수들의 존재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에치노하타노미 야츠쿠 타쿠츠 (壹伎薄刀大利, 에치노 다쿠쓰) – 끝까지 싸운 일본 장수
출신과 경력: ‘에치노하타노미 야츠쿠 다쿠츠’는 이름이 길지만, 간단히 줄여 에치노 다쿠쓰로 불린다. 그는 일본 열도 중앙정부에 소속된 越国(에치, 현재의 호쿠리쿠 지방) 출신 하타씨(秦氏) 계열의 장군으로 보인다 . 하타씨는 이주한 백제계 도래인 가문이기에, 백제 부흥 지원에 열성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쿠츠는 661년 첫 파병군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662년 2차 본진 혹은 663년 증원군에 속해 백제로 건너간 것으로 추측된다 .
백강 전투와 장렬한 최후: 에치노 다쿠쓰는 백강 전투에서 눈부신 최후의 분전을 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자치통감》과 《삼국사기》는 당군이 화공을 펼쳐 왜선 400척을 태우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면서, 일본군 측 상황을 전한다. 이때 “왜병의 장수 에치노 다쿠츠(壹伎一족의 다쿠츠)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악물며 싸웠다. 그는 수십 명의 적을 베었으나 끝내 전사했다. (戰死)”는 묘사가 남아 있다 . 이로 볼 때 다쿠츠는 패색이 짙은 가운데서도 퇴각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쓰러진 것이다. 그의 시신은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백강에 가라앉거나 당군에 의해 수습되었을 터이며,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역사적 평가: 에치노 다쿠츠는 백강 전투에서 일본군 무장의 용기와 비극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그가 최후까지 항전한 일화는 패배한 측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 실려 전해질 정도로 극적이었다 . 일본 측에서도 다쿠츠의 존재를 나중에 인식하게 되었고, 근현대에 이르러 백강 전투를 재조명하는 연구나 드라마 등에서 그의 최후가 흔히 다루어진다. 다쿠츠는 패장(敗將)이지만 무사의 혼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되며, 당시 백제에 파견된 일본 장수들이 싸운 이유(우호국에 대한 의리)와 그들의 비참한 운명을 생각하게 하는 인물로 언급된다.
하시히토노무라지 오후타 (間人連大蓋) – 살아 돌아간 귀환 장군
출신과 경력: 하시히토노무라지 오후타는 일본 하시히토(間人) 씨 출신의 무장이다. ‘오후타(大蓋)’는 이름 또는 관직명 일부로 추정된다. 그는 663년 백제 파병군 편성 시 부장급 지휘관으로 참가하였다 . 일본서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덴무 천황 4년(675년)에도 조정의 의식 집행 사자로 파견된 적이 있어 백강 전투 이후에도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 이는 백강 참전 장수 중 드물게 귀환에 성공한 사례로 보인다.
백강 전투와 이후: 오후타는 백강 전투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상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장수들이 전사하거나 행방을 감춘 가운데, 이후 연호 (덴무 4년) 기록에 이름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 전투에서 목숨을 건지면서 철군한 것으로 판단된다 . 실제로 백강 패배 후 일본의 잔존 병력 수천 명이 겨우 귀환에 성공했는데 , 오후타는 그 지휘관 중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낮은 관위이지만 계속 복무하며 나중에 조정 행사에 파견될 정도로 경력을 이어갔다.
역사적 평가: 하시히토노무라지 오후타는 백강 전투 생존자이자 귀환 장군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대부분의 장수들이 현장에서 산화하거나 포로가 된 상황에서 돌아온 그는, 패전의 참상을 본 산증인이기도 했다. 오후타 본인의 공적은 크지 않지만, 그의 생존은 일본이 전투에서 완전히 전멸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역사 속에서 오후타는 크게 부각되진 않으나, 백강 패전 후 일본 조정이 어떤 인적 자원을 건졌는지 알려주는 사례로 의미가 있다. 또한 이후 덴무 천황 치하에서 직무를 수행한 기록은, 백강 전투 패배의 경험이 일본의 중앙집권 강화 (덴무 천황의 개혁)에 활용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미와노키미 네마로 (三輪君根麻呂) – 이름만 남은 참전 무장
출신과 지위: 미와노키미 네마로는 일본 나라(奈良) 지방의 유력 가문인 미와(三輪) 씨의 인물이다. ‘네마로(根麻呂)’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7세기 중엽 야마토 조정에서 지방 호족 연합군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그는 663년 백제 지원군에 합류하여, 다른 국조 출신 장군들과 함께 종군하였다 . 미와 씨는 일본 왕실의 원류 격으로 꼽히는 가문으로, 네마로의 파병은 일본 조정이 백제 원군 편성에 광범위한 인재를 동원했음을 보여준다.
백강 전투와 최후: 네마로는 백강에서 신라·당 연합군과 교전하였으나, 일본군 패퇴로 다른 장수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전투 이후 그의 이름은 역사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서기》 등에는 전사자 명단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네마로의 구체적 최후는 알 수 없으나, 일본 주석 자료는 이후 나타나지 않으므로 전사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 이는 그가 백강의 물길 혹은 불길 속에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함께 참전한 미와 씨 일족 다른 인물의 기록도 보이지 않아, 미와노키미 네마로는 백강에서 생명을 잃은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적 평가: 미와노키미 네마로는 백강 전투에 참여한 일본 귀족 장군으로서 이름이 전해진다. 비록 활약상은 상세하지 않으나, 나라 시대 초기 왕실 계보와 깊은 미와 씨 가문의 사람이 참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의 참전은 일본 조정이 단순 무인 집단 뿐 아니라 왕실 연고 귀족까지 동원할 만큼 백제 구원을 중대 사안으로 여겼음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네마로는 전장에서 산화하여, 미와 가문에는 큰 희생이 되었다. 일본서는 네마로의 죽음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나, 그의 이후 행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름만 역사에 남은 비운의 장수라 할 수 있다.
오야케노오미 카마츠카 (大宅臣鎌柄) – 후군 이끌다 최후를 맞은 장군
출신과 경력: 오야케노오미 카마츠카는 일본 오오야케(大宅) 씨 가문의 무장이다. ‘오미(臣)’ 칭호를 가진 것으로 보아 중급 귀족계급으로, 덴지 천황 시기 군사적 역할을 맡았다. 663년 백제 파병군 편제 시 그는 후군장군(後軍將軍), 즉 후속 지원부대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 오오야케 씨는 야마토 조정의 문무 양면에서 활약한 집안으로, 카마츠카의 출정도 그러한 전통의 일환이었다.
백강 전투와 최후: 카마츠카는 백강 전투에서 일본군의 후방을 담당하며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전황이 급변하여 일본군이 붕괴함에 따라, 그도 물러날 겨를 없이 패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일본 사서에는 그의 전사 여부가 직접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름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연구자들의 언급으로 미루어 보면 전사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 실제로 일본군 후방 부대 상당수는 당군의 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귀환하지 못했다 . 카마츠카도 이러한 희생자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 평가: 오야케노오미 카마츠카는 일본 파병군의 한 축을 맡았던 장군으로, 그의 존재는 당시 파병군이 선·중·후 3군 체제로 치밀하게 편제되었음을 보여준다 . 그는 후군을 지휘하며 전황을 보좌했으나, 패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사에서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최근 발굴되는 일본 고대 목간 등에서 오오야케 씨 인명이 확인되며 관심을 끌고 있다. 카마츠카는 그 오오야케 씨 출신 장군으로 백강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학술적 흥미를 더하는 인물이며, 동시에 패전의 희생양이 된 수많은 무장들 중 하나로 기억된다.
이오하라노키미 오미 (廬原君臣, 이오하라 군) – 끝내 싸우지 못한 3차 지원군 장수
출신과 경력: 이오하라노키미, 혹은 廬原君(O하라 no Kimi)로 불리는 인물은 663년 제3차 일본 증원군의 지휘관이었다 . ‘이오하라(廬原)’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지명/씨명으로, 정확한 가문은 불명확하다. 다만 ‘君’ 칭호로 보아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가진 지방 수장급 인물로 보인다. 그는 663년 8월, 백제에 마지막으로 파견된 약 1만 명 규모의 제3진 지원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
출정과 철수: 이오하라노키미가 이끄는 병력은 일본의 최후 노력으로 파견된 부대였지만, 안타깝게도 백강 전투의 패배 소식과 거의 동시에 한반도에 도착하거나 혹은 도착 전에 회군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서기》에는 663년 8월 이오하라군이 파견되었으나, 곧 배를 돌려 일본으로 향했다는 기술이 있어 , 이는 백강 패전 소식을 접하고 철군한 정황으로 해석된다. 실제 싸움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설령 한반도 해역에 도달했더라도 당군이 해상을 장악한 후여서 교전 없이 퇴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 평가: 이오하라노키미 오미는 싸우지 못하고 돌아간 장수로서, 백제 부흥 최후의 희망이 무너진 현실을 상징한다. 그의 파병은 일본 조정이 끝까지 백제를 도우려 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패전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도 드러낸다. 역사에 이오하라노키미의 이름은 등장하지만 전공은 없으며, 이는 그가 분투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나갔다가 허망하게 돌아온 지휘관으로 남았고, 백제 부흥운동 지원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된다.
5. 신라 참여자: 두상, 김인문, 천존, 죽지랑
두상 (杜爽, 당나라 장수 두쐉) – 신라를 도운 당 수군 지휘관
정체와 배경: ‘두상’은 당나라 장수 두쐉(杜爽)의 한자식 발음으로, 신라 측 기록에 등장한다. 본래 당나라 장군이지만, 나당연합군의 일원으로 신라 진영에 참여했기에 신라 편에서 함께 언급된다. 663년 당 고종은 백제 부흥군 토벌을 위해 유인궤 휘하에 수군을 파견했는데, 두상은 그 부장(副將) 가운데 한 명으로 배속되었다.
백강 전투에서의 역할: 두상은 유인궤와 함께 당 수군의 주요 지휘를 맡았다.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등에 따르면, 육지에서는 당 장수 손인사·유인원과 신라 문무왕이 진격하고, 바다에서는 당 장수 두상과 백제왕자 부여융이 이끄는 170척 함대가 합류했다고 한다 . 여기서 두상이 당 수군 함대의 지휘관으로서 배 170여 척을 통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부여융(당에 투항한 백제 왕자, 웅진도독)과 함께 해상에서 신라-당 연합 함대를 이끌고 백강 하구로 진격, 왜(일본) 함대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왜의 함선 다수가 불타 격침되었고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하였다 .
전투 이후: 백강 전투 승리 후 두상의 이름은 당측 기록에선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그의 활약으로 당나라 조정에 전과가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후 두상은 당나라로 귀환했을 것으로 보이며, 신라에서는 그를 직접 언급하는 사례는 드물다. 다만 그의 지휘 하에 신라군이 해전에서 큰 도움이 받았음은 틀림없다.
역사적 평가: 두상은 신라가 맺은 나당동맹의 성과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이지만 신라 편에서 활약하여, 신라로서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의 이름이 신라 사서에 기록된 것은, 그만큼 백강 전투가 신라에도 중대한 일이었고 두상의 역할이 기억되었다는 뜻이다. 나당전쟁이 발발하면 두상과 같은 당 장수들은 신라의 적으로 돌아서지만, 백제 부흥전쟁 기간만큼은 공동의 적을 상대한 전우로서 역사에 남았다. 두상 개인에 대한 평가는 중국 측 기록이 미흡하여 상세하지 않으나, 백강 전투의 맥락에서 그는 협력의 상징으로 언급될 가치가 있다.
김인문 (金仁問, 629~694년) – 신라의 왕자이자 외교 장군
출신과 가계: 김인문은 신라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아우이다 . 왕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 그는 진골 귀족으로서, 형 문무왕을 도와 통일 전쟁과 외교에서 중책을 맡았다.
주요 활동: 김인문은 문무왕대의 장군 겸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 660년대 삼국통일 전쟁 기간 동안에는 김유신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 정복에 기여하였다 . 구체적으로 668년 고구려 공격 시 평양성 함락전에서 신라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또한 외교관으로서 능력이 탁월하여 여러 차례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665년 무렵에는 신라왕자 신분으로 당에 입조하였고, 이후 나당전쟁이 일어나자 당에 억류되기도 했으나 오히려 당황제를 설득하여 신라편을 들게 하는 등 분규 해결과 중재에 역할을 했다 . 673년 귀국한 뒤로는 문무왕을 도와 당과 강화 협상을 주도하였다.
전쟁·외교 업적: 김인문의 가장 큰 업적은 탁월한 외교 역량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뒷받침한 것이다 . 그는 당에 체류하며 당조와 신라의 오해를 풀고 우호를 지속시키려 애썼으며, 심지어 당이 문무왕을 폐위하고 자신을 신라왕으로 세우려는 계획까지 꾸몄을 때 지혜롭게 대처하여 사태를 수습했다는 일화가 있다. 군사적으로도 그는 여러 전투에 참가했지만, 특히 빛나는 것은 평화적 해결사로서의 면모이다. 나당전쟁 후 당나라와의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김인문은 당에 머무르며 신라 사신단을 이끄는 등 협상을 주관하여 674년 양국이 강화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역사적 평가: 김인문은 문무왕을 도와 통일을 완성한 책사형 장군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전쟁영웅이 김유신이라면, 김인문은 전후 외교까지 아우른 지략가로서 높이 인정받는다. 당나라에서는 그를 김춘추의 아들 중 가장 총명하다 평했으며, 당 현종은 훗날 그를 기려 “영은공”이라는 작위를 추증하기도 했다. 한국사에서도 김인문은 통일신라의 개국 공신 반열에 들며, 특히 외교분야 1인자로서 국가 이익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 그의 묘에서 출토된 지석에는 “대당총관 신라국공 김인문지묘”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그가 당으로부터도 공을 인정받은 국제적 인물임을 보여준다.
천존 (天存, ?~?) – 죽지랑과 짝을 이룬 신라의 맹장
출신과 지위: 천존은 신라 중기에 활약한 무장으로, 화랑 출신 장군이다. 정확한 가계는 전하지 않으나, 김유신 휘하에서 군공을 세운 것으로 보아 진골 혹은 육두품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화랑 죽지랑의 동료로 자주 언급되며, 두 사람은 함께 전투에 참가한 기록이 남아 있다 .
주요 활동: 천존은 649년 선덕여왕 시기 백제 장군 은상(恩上)이 신라를 침공했을 때 죽지, 진춘 등과 함께 김유신 휘하로 출전하여 백제를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다 . 이후 백제 멸망 후에도 부흥군 토벌전에 참전하였는데, 661년 문무왕 원년 부흥군과의 첫 교전에서는 불운하게 패배를 겪기도 했다 . 그러나 곧이어 그는 관직 귀당총관에 임명되어 전열을 정비했고, 계속되는 전투에서 활약했다 . 특히 670년(문무왕 10년)에는 유명한 공적으로서, 장군 죽지와 함께 당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7성(城)을 탈취하고 2천여 명을 전사시켰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 이는 나당전쟁 중 신라가 거둔 결정적 성과 중 하나였다. 이듬해 671년에도 백제 부흥세력의 마지막 거점 가림성 일대를 초토화하고 당군과 교전하여 5천여 급을 베는 등 맹활약하였다.
전쟁·외교 업적: 천존의 업적은 주로 백제 부흥군 및 당군 격퇴와 관련된다. 그는 백제 부흥운동이 한창이던 시기부터 종결, 그리고 이어진 나당전쟁까지 계속된 전장의 선봉장이었다. 그의 공적으로 문무왕은 웅진도독부를 일시 붕괴시킬 수 있었고, 신라군 사기를 드높였다. 천존은 외교 분야보다는 철저히 군사 전문 장수로, 국내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지만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두각을 나타냈다.
역사적 평가: 천존은 김유신이나 이문공(김인문)에 비해 덜 알려졌으나, 죽지랑과 함께 신라 중대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평가된다. 《삼국유사》 등에 전하는 향가 〈모죽지랑가〉에서 죽지랑을 흠모한 화랑 득오의 이야기 속에 천존도 등장하여, 죽지랑과 더불어 그 인망이 드러난다 . 이는 천존이 덕망 높은 장군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기록이 산발적이라 저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연구에서 삼국통일전쟁의 숨은 주역으로 재평가되고 있으며, 신라 화랑 출신 무장의 용맹함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죽지랑 (竹旨郞, 죽지, ?~?) – 삼국통일의 숨은 공신 화랑
출신과 가계: 죽지랑은 신라 진골 귀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김술종(述宗)이라 전한다 . 어릴 적부터 품성이 뛰어나 화랑도의 일원이 되었으며, 죽지랑이라는 이름은 화랑으로서의 명칭이다. 본명은 죽지(竹旨) 또는 죽만(竹曼)으로 불렸고, 김유신 등과 동시대에 활약하였다 .
주요 활동: 죽지랑은 화랑으로서 15세 가량에 입도하여 낭도를 거느렸고, 일찍이 국가 방위에 투입되었다. 649년 백제 침공 때 김유신 휘하 장군으로 참전하여, 진춘·천존과 함께 백제군을 도살성에서 대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 이후 진덕여왕 5년(651) 신라 중앙 관부인 집사부의 초대 중시(中侍), 즉 시중 격직에 발탁되어 655년까지 재임하며 젊은 나이에 국정을 보좌했다 . 문무왕 즉위 후인 661년 백제 부흥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패배를 맛보았으나, 곧 귀당총관으로 재기하여 계속 싸웠다 . 668년 고구려 정복 때는 이찬(2등위)에 올라 김유신의 북진군에 합류, 평양성 공격에 공헌하고 각간(爵干)으로 승진하였다. 통일 후 670년대 나당전쟁 시기에도 장군으로 활약했고, 문무왕 후반신문왕 초에 여러 관직을 지내며 신라 조정의 원로가 되었다. 《삼국유사》는 효소왕대(서기 692702년)까지 죽지랑의 일화를 전하는데, 이를 보면 죽지랑이 4대에 걸쳐 재상을 역임하며 국가에 공훈을 세웠다고 평가한다 .
전쟁·외교 업적: 죽지랑의 군공은 백제·고구려 정벌전부터 나당전쟁까지 두루 걸쳐 있다. 특히 백제 정벌전의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 휘하 주요 장수로 참전했고, 고구려전에서도 중앙군 경책총관 등 지위로 지원군을 지휘했다 . 또한 나당전쟁 발발 후 670년 웅진도독부 공격(천존과 7성 함락)이라든가, 671년 임존성 탈환전(지수신 투항)을 지원하는 등 통일 완수와 대당 항전에 모두 관여했다  . 외교적으로 직접 협상을 맡은 일은 없으나, 내정 면에서 김유신 사후 왕권 안정을 돕고 귀족 세력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 평가: 죽지랑은 신라 삼국통일의 숨은 공신으로 높이 평가된다. 삼국통일 1등 공신은 김유신, 2등 공신은 죽지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통일 전쟁과 통일 후 정비에 기여한 바가 크다  . 그는 덕망 높은 화랑으로서 낭도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낀 인품으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모죽지랑가 설화에서 그의 따뜻하고 의로운 성품이 잘 드러나며, 이는 죽지랑이 단순 무장이 아닌 도덕적 리더였음을 보여준다 . 역사적으로 죽지랑은 통일신라 초중기의 정치 안정에도 기여하여, 문무왕~신문왕 사이 과도기에 여러 차례 재상직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 이런 점들을 종합하면 죽지랑은 문무왕을 보좌한 2인자급 인물이자, 신라 화랑정신을 체현한 이상적 장군으로 평가된다. 그의 활약과 덕행은 후대에까지 귀감이 되어,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충신의 대명사로 종종 거론되었다.
참고 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구당서, 신당서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물 항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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