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 통일신라 측 기록

698년 (효소왕 7년) – 일본 사신 내방과 국왕 접견: “三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崇禮殿 .”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와서, 왕이 숭례전에서 맞아 접견하였다). 이 기록은 신라가 삼국통일 직후 일본과 공식 외교관계를 재개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속일본기』에 따르면 이보다 앞선 697년 신라 사신 김필덕 등이 일본을 방문했고, 이듬해 일본 사신이 신라로 함께 온 것으로 추정된다 . 통일 이전 백제부흥 전쟁에서 적대하던 양국이 당(唐)의 압박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관계를 복원한 사례로 볼 수 있다 . 효소왕은 일본 사절을 궁궐 숭례전(崇禮殿)에서 직접 알현하였는데, 이는 국빈을 맞아 연회를 베풀던 전각으로, 당시 신라가 예를 갖추어 일본 사신을 접대했음을 의미한다 .
703년 (성덕왕 2년) – 대규모 일본 사절단 파견: “秋七月, 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 (가을 7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총 204명이었다). 이 기록에서 드러나듯 성덕왕대에는 200명이 넘는 대규모 일본 사절단이 신라에 왔다. 이는 양국 간 교류가 활발했으며, 특히 무역 목적이 컸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이 시기 신라는 일본 사신을 경주까지 입경시키는 대신 당항성(唐項城) 방면 *태재부(大宰府, 규슈 지방 행정기관)*에서 교역을 하고 돌려보내는 형식을 택했는데 , 사행의 주목적이 상업 거래가 되면서 신라가 1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고 일본도 이에 대응하는 대규모 사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 8세기 중엽인 752년(경덕왕 11년)에는 신라가 700여 명에 이르는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어, 양국이 물자 교류에 열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
722년 (성덕왕 21년) – 왜구 대비 성곽 축조: “冬十月,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 (겨울 10월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 도적의 길을 막았다). 8세기 들어 신라와 일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신라는 동해 남부 연안에 방어 거점을 축조하였다. 모벌군성은 오늘날 울산 방면으로 추정되는 성곽으로, 일본 측 왜구(倭寇)의 침입로를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 이 조치는 당시 일본이 신라를 자기보다 아랫국으로 대우하려 한 데 대한 신라의 강경 대응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727년 일본이 북방의 발해와 수교하고, 신라도 일본을 하대하는 외교의식을 거부하면서 양국 관계가 냉각되었고, 737년에는 일본 조정에서 “신라 정토(征討)”, 즉 신라를 정벌하는 방안까지 논의될 정도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
732년경 (성덕왕 31년 추정) – 왜구의 습격과 격퇴: 성덕왕 말년에는 일본 측 해적 또는 군사가 신라 해안을 직접 침범한 기록이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라 하여, 일본국의 군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의 동쪽 변방을 습격하였으므로 왕이 장수에게 명령해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 이는 일본 측 일부 세력이 신라 해안을 노략질하려다 신라군에 의해 격퇴된 사건으로, 8세기 경 해상에서의 무력 충돌을 보여준다. 이 승전으로 신라는 해상 주도권을 지키고 자국 영토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도 섣불리 대규모 군사를 보내지 않게 되었다.
742년 (경덕왕 원년) – 일본 사신의 거부: 통일신라 전성기 이후 신라의 국력이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게 되면서, 대일(對日) 외교 자세도 이전과 달라졌다. 742년 겨울, 삼국사기는 간략히 “冬十月, 日本國使至, 不受 .”라고 기록하고 있어,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지 않았다.” 즉 신라 조정이 일본에서 온 국서를 받지 않고 사신 접견을 거부한 사건이 있었다. 이는 당시 외교 의례 문제로 빚어진 마찰의 정점이었다. 앞서 일본 측이 7세기 이래 신라 사신을 번국(蕃國) 사신으로 격하하여 예우하려 하자 신라가 반발하였고 , 743년경 신라 사신이 공식 조공의 의미를 띤 “조(調)”라는 표현 대신 “토모(土毛)”와 같은 표현을 써서 사절 파견 목적을 낮추어 표기하는 등 서로 격식을 둘러싼 신경전이 지속되었다 . 그 결과 신라는 일본 사신단의 태도가 오만하다고 보고 접견 자체를 거부하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사건은 이후 약 10여 년간 양국 공식 사신 교환의 중단으로 이어졌으며, 일본은 한때 (753년경) 신라 정벌 계획까지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828년 (흥덕왕 3년) –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張保皐建置淸海鎭…以討盜賊 .” (장보고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였다). 장보고(張保皐)는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으로 복무한 해상 무역가 출신으로, 귀국 후 흥덕왕에게 해적 소탕과 무역로 확보를 건의하여 승인받았다  . 신라는 군사 1만 명을 지원하여 완도(莞島)에 청해진을 세우고 장보고를 대사(大使)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신라 해안을 약탈하던 해적(일부 일본계 왜구 포함)을 근절하고 중국·신라·일본을 잇는 국제 해상교역망을 장악하려는 조치였다  . 장보고는 청해진 설치 이후 해적을 모두 평정하고 당의 산둥반도 적산촌(積善村)과 일본 하카타(博多) 등지에 무역 거점을 구축하여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를 주도하였다 . 그의 해상 세력은 막대한 부와 군사력을 갖춰 신라 말기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으며, 일본과의 해상 교류도 장보고의 통제를 거쳐 이루어졌을 정도로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
864년 (경문왕 4년) – 일본 사신 도래: 경문왕 시기 한동안 끊겼던 일본과의 공식 왕래가 재개된 기록이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여름 4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다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어, 9세기 중엽 일본 측 사절이 신라에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 이는 779년 이후 중단되었던 양국 공식 외교가 오랜 공백 끝에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사연은 전하지 않으나, 이 시기 일본은 사서 편찬 등 내부 정비를 거치며 신라와의 관계를 다시 모색하려 했고, 신라도 당과의 관계 변화 속에서 일본과 친선을 도모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추측된다.
882년 (헌강왕 8년) – 일본국의 선물 제공: 통일신라 말기에도 산발적인 교류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헌강왕조에는 “8년 여름 4월,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야명주(夜明珠) 10개를 바쳤다.”고 한다 . 이는 일본 천황이 신라 왕실에 금과 보석 등을 선물한 것으로, 공식 조공이라기보다 우호의 표시로 여겨진다. 9세기 후반 일본이 사서 『일본삼대실록』 등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동일한 시기 일본 조정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전달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헌강왕이 국왕 친히 이들을 조원전(朝元殿)에서 접견했다는 언급도 있어 , 한동안 끊겼던 양국 왕실 간 친교를 복원하려 한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교류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고, 935년 신라 멸망을 전후하여 고대 한일 간 공식 외교 관계는 막을 내리게 된다.
해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통일신라 시기 일본과의 외교 사안을 비교적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일본과의 사신 왕래, 무역 및 군사 충돌에 관한 사항이 왕별 연대기에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신라 측 기록은 당나라와의 관계를 주로 중시하는 경향 때문에 일본과의 접촉 기록이 소략하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몇 가지 핵심 사례를 통해 7세기 후반 국교 재개, 8세기 전반 우호 교류와 그 후의 외교 의례 갈등, 8세기 후반~9세기 해적 대두와 교역 단절, 9세기 후반 잠깐의 친선 시도 등 한일 관계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다. 신라는 초기에는 일본에 조공 형식의 사신을 보내고 선진 문물을 전수하였으나  , 일본이 국력 신장과 함께 외교 격을 문제삼자 강경 대응으로 전환하였다. 이후 해상 무역을 둘러싼 경쟁 국면에서 장보고와 같은 해상 세력이 활약하였고, 말기에는 왕실 차원의 친선 선물 교환이 이루어지는 등 복잡한 양상이 삼국사기에 단편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 신라 설화와 대일(對日) 교류 일화
787년 경 (원성왕 3~4년) – 만파식적 설화: 일본의 침공 기도와 신라의 대응: 삼국유사는 신라의 전설적인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에 얽힌 한일 관계 일화를 전한다. 원성왕대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정원(貞元) 2년에 일본 왕 “문경(文慶)”이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치려 했으나, 신라에 국보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렸다고 한다 . 이에 일본 왕은 금 50냥을 보내어 사람을 시켜 그 피리를 요구하였다. 원성왕이 “듣건대 옛날 진평왕 때 그 피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소재를 알지 못한다.”고 거짓 응답하며 요청을 거절하자 , 이듬해(787년) 7월 일본은 금 1,000냥을 다시 보내 “피리를 한 번 보기만 하고 돌려주겠다.”고 청하였다 . 왕은 전과 같은 답변으로 거부하고, 오히려 일본 사신에게 은 3,000냥을 하사하며 돌려보내었다. 일본 사신이 돌아가자 그 만파식적을 궁중 내황전(內黃殿)에 봉안해 두었다고 한다 .
• 원문: “日本王文慶…興兵將討新羅…聞新羅有萬波息笛, 回軍止攻。…遣使求之, 王辭以無知。翌年…復遣使以金千兩來請, 曰: ‘寡人但願一見此神物, 更當奉還。’ 王辭如初, 厚賜其使銀三千兩, 所齎金亦却之  .”
• 번역: “일본 왕 문경(文慶)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였으나 신라에 만파식적이라는 피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렸다. 금 50냥을 신라에 보내와 그 피리를 달라고 거듭 요구하였으나, 원성왕이 ‘옛날 진평왕 때 있었다고 들었을 뿐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며 거절하였다. 이듬해 7월 다시 사신을 보내 금 1,000냥을 내밀며 ‘우리 임금이 그 신물을 보기만 하고 돌려주겠다.’고 청하였으나, 왕은 전과 같은 답으로 사양하고 도리어 은 3,000냥을 그 사신에게 주어 돌려보냈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문경이 두려워할까 염려되어) 그 피리를 궁중 내황전에 보관하였다.”  
이 설화는 신라의 만파식적이 국가 안녕의 상징으로, 외적의 침략마저 물리치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내용이다. 삼국유사는 일본측 군주 이름을 잘못 전하고 있으나(“문경”은 아마도 9세기 문덕왕=일본 황실 제55대 문덕천황의 와전으로 추정됨), 전체 줄거리는 일본의 신라 침공 기도 – 신라의 신물(神物)로 위기 극복 – 일본의 보물 요구와 신라의 거절로 전개된다. 이 일화는 실제 역사라기보다 전설적인 과장을 담고 있지만, 통일신라 말 일본의 해적 침입과 신라 왕실의 불안, 그리고 신라가 국보로 국위를 세우고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일본 왕이 두 차례나 값비싼 대가를 제시하며 신라의 보물을 탐냈다는 설정을 통해, 문화적으로 신라를 동경하는 일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삼국유사의 이러한 기록은 신라인들이 당시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그리고 자국의 문화적 우위와 자존의식을 설화 형태로 표현했음을 보여준다.
(참고: 삼국유사에는 이 밖에도 신라 시대 일본과 관련된 설화나 인물이 일부 등장하지만, 다수가 통일신라 이전의 일이나 전설적 성격이다. 통일신라 시기 대일 교류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설화로는 만파식적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 일본 측 기록 (720년 편찬)
668년 (천지천황 7년, 문무왕 8년) – 신라 사신 파견과 일본의 회례: 『일본서기』는 통일신라가 백제 멸망 후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낸 사실을 전하며, 이를 다소 조공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김동엄(金東嚴)이라는 신라 사신이 668년에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조정이 그를 통해 신라 왕과 장군에게 선물을 전달한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해에 신라 급찬 김동엄이 왜국에 오자, 일본 측은 신라 문무왕에게 비단 50필, 면포 500근, 가죽 100장을 보내고, 또 신라의 영웅 장군 김유신에게 배 1척을 하사하였으며, 함께 간 신라인 사신들에게도 신분에 따라 물품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 김동엄 일행은 일본의 국서(國書)와 예물을 가지고 귀국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백촌강 전투(663년) 이후 끊어졌던 양국 국교가 5년 만에 재개되었음을 뜻한다. 다만 이러한 묘사는 일본 측 사서에만 나오고 신라 측 삼국사기에는 언급이 없는데 , 이는 아마 신라가 대외적으로 일본에 조공을 바친 것처럼 비칠 내용을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서는 이 시기 신라를 자국에 조공하는 번국(藩國)으로 간주하여, 신라 사신의 방문을 “내조(來朝)”에 준하는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 이는 이후 일본측 외교관념의 기초가 되었다. 요컨대 일본서기의 시각에서 신라가 먼저 사절을 보내 와서 항복하고 조공했다는 뉘앙스를 주려 한 것으로 보이며, 한일 양국 사서의 기술에는 이러한 미묘한 온도 차가 존재한다.
예시 – 일본서기 해당 기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요약): “668년(문무왕 8)에 김동엄이 급찬(신라 17관등 중 5등) 자격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은 그를 통해 신라 김유신에게 배 한 척, 문무왕에게 비단 50필·면 500근·가죽 100매를 보내고, 사신으로 간 김동엄 등에게도 차등 있게 물건을 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국서(國書)와 함께 귀국하였다고 한다 .” 이처럼 일본서기는 신라가 물품을 “바쳤다”기보다 일본이 하사했다는 어조로 기술함으로써, 백제 멸망 후 새 질서 속에 일본이 신라를 회유하며 체면을 세워준 양상을 그리고 있다. 이는 실제로는 상호 선물 교환에 가까운 행위였겠으나, 일본측 사관은 자국의 외교적 우위를 강조하는 편찬 방향을 취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신라 관련 서술 특징: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정사로서, 7세기 말까지의 일을 다룬다. 이 책에서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함께 왜국에 조공을 바치는 “蕃國”(번국)으로 종종 묘사되며, 천황의 “내관가”(內官家) 즉 속국 취급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 이러한 기술은 일본서기 편찬 당시 일본 조정이 중국식 천하관을 본떠 주변국을 기술한 결과로, 실제 역사적 관계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가령 왜국이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의 이야기(임나일본부 설 등)를 서기에서는 신라를 속민으로 거느렸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일신라 시기에 이르러서는 현실적으로 일본이 신라에 군림할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668년 이후의 기록들에서는 위에서 본 것처럼 선물 교환이나 사신 왕래를 기술하면서도 체면상 우위를 주장하는 정도에 그친다. 요컨대, 일본서기의 신라 관련 기록은 일본 중심의 화이질서관을 반영하고 있어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며, 신라 측 기록과 대조함으로써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속일본기(續日本紀) – 나라 시대 한일 교류 (697~791년 기록)
나라 시대에 해당하는 『속일본기』에는 통일신라와 일본의 외교 마찰과 협상의 모습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8세기 전반 양국의 외교 의전 갈등과 이에 따른 군사적 긴장, 무역 교섭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다음은 속일본기에 나타난 주요 사례들이다.
• 737년 – 신라 정벌 논의: 8세기 초 신라와 일본은 외교격식을 둘러싸고 반목하였고, 천평 9년(737년) 일본 조정에서는 급기야 “정토신라(征討新羅)”, 즉 신라를 정벌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 이는 같은 해에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견제하는 등 국제정세 변화로 일본이 위기감을 느낀 상황에서 나온 발상으로, 속일본기는 이 회의 내용을 통해 당시 일본 측의 불만과 공격 의도를 생생히 전한다. 비록 실제 정벌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이로 인해 양국 사이는 크게 악화되었다.
• 742년 – 일본의 신라 사신 응대 거부: 앞서 삼국사기 부분에서 본 742년 사건의 일본측 배경은 속일본기에 잘 나타나 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742년 2월에 신라 사신 사찬 김흠영(金欽英) 등 총 187명의 대규모 사절단이 일본 규슈 태재부(太宰府)에 도착하였다 . 그러나 일본 중앙정부는 “새 수도를 창건하여 궁실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을 수도로 들이지 않고, 태재부에서 연회만 베푼 뒤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 즉 일본이 신라 사신을 정식 국빈으로 대우하지 않고 지방 관청에서 응접만 한 채 돌려보낸 것이다. 속일본기는 이어, 같은 해 가을 신라가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 일본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부연하고 있다 . 이 두 사건은 서로 연관되어, 일본은 신라를 하대하고 신라는 이에 항의한 외교적 충돌로 해석된다. 속일본기의 이 기록은 양국의 체면 싸움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며, 특히 일본 측이 신라 사신의 입경(入京) 문제를 빌미로 외교적 압박을 가했음을 알 수 있다.
• 752년 – 무역을 위한 신라 사신 파견: 속일본기에는 8세기 중반 신라 사신들의 주요 활동도 기록되어 있다. 천평승보 4년(752년) 신라에서 파견된 사절단의 규모가 매우 컸으며, 일본 조정이 이를 상인 집단처럼 취급하여 교역에만 종사하도록 한 내용이 대표적이다. 신라 사신 일행은 일본 중앙에 나아가지 않고 규슈에서 물물교환을 마친 후 귀국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 조정은 만족하지 못해 759년부터 신라 정토계획을 또다시 거론하게 된다  . 그러나 신라 역시 764년 이후로는 일본의 형식 요구를 무시하고 대신 당나라와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 역할을 자처하며 실리를 챙겼다 . 예를 들어 764년 신라는 당나라 측 부탁을 핑계 삼아 사절을 일본에 보내거나, 769년과 774년에는 일본 견당사(遣唐使) 후지와라노 카와카와(藤原河清)의 서한을 전달해주겠다며 사신을 보내는 등 명목을 내세운 교섭을 지속했다 . 이러한 속일본기의 기록들은, 8세기 중후반 한일 교섭이 공식 조공 관계에서 상호 실리 추구형 교역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끝내 신라 국왕의 국서를 받아내지 못한 채 779년을 마지막으로 공식 사신 파견을 중단하였고, 신라도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속일본기는 전하고 있다 .
해설: 『속일본기』는 일본 측 입장에서 신라와의 관계 악화를 비교적 솔직히 드러낸다. 특히 신라를 독립된 하나의 “외국으로 대해야 한다는 현실과, 형식적으로는 천황의 번국으로 격하시켜 위계를 지키고자 하는 이상 사이에서 일본 조정이 고민했던 흔적이 생생하다. 신라 사신을 도성에 들여 황제에게 조배시키려는 일본과, 그럴 수 없다고 보고 격식을 깨려는 신라 사이에 수차례 갈등이 기록되며, 그때마다 일본 조정 내부 논의와 대응 조치가 속일본기에 상세히 나타난다. 이를 통해 8세기 한때 일본이 신라 정벌까지 검토할 정도로 불만이 누적되었고, 반대로 신라가 일본을 멸시하며 실리만 취하는 외교를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8세기 말 양국 관계는 극도로 냉각되어, 속일본기는 779년 이후 신라에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고 서술함으로써 한 시대 교류의 종언을 명확히 하고 있다  .
일본후기(日本後紀) – 헤이안 시대 초기의 기록 (792~833년 및 그 이후)
『일본후기』는 9세기 전반 헤이안 조 초기의 역사를 다루며, 통일신라와의 마지막 공식 교류 상황이 담겨 있다. 8세기 후반 이후로 끊어진 외교를 재개하려는 시도와 그 좌절, 그리고 당(唐)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한일 간 협력이 주요 내용으로 나타난다.
• 799년 ~ 804년 – 국교 재개 시도의 실패와 협력: 삼국사기와 일본후기를 종합하면, 799년 신라 소성왕이 일본에 고애사(告哀使)를 보내 원성왕(헌덕왕)의 국상 소식을 알리며 국교 재개의 의사를 타진하였다 . 일본 조정은 이에 호응해 799년 4월에 견신라사(遣新羅使) 파견을 결정했으나, 신라 사신이 신라 국왕의 국서 없이 구두로만 사신 파견 목적을 설명한 것을 문제삼아 같은 해 5월 파견을 중지하였다 . 이는 8세기 중반 이래 일본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신라 국왕 명의 국서를 신라가 여전히 보내지 않았기 때문으로, 양측의 체면 다툼이 재현된 것이다. 이어 802년에는 신라 애장왕이 김균정(金均貞)을 가왕자(假王子) 신분으로 일본에 사신 보내려 하였으나, 김균정이 이를 거절하여 무산되었다고 전한다 . 애장왕은 국왕 직접 외교를 통해 일본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김균정 등 신라 귀족들은 여전히 대재부(對宰府) 무역 위주의 실무 접촉을 선호하여 반대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 이러한 내분으로 국교 재개의 첫걸음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803년과 804년, 일본 측에서 오히려 두 차례 공식 사절을 신라에 보냈다. 이는 일본이 당나라에 파견할 견당사(遣唐使)의 안전과 협조를 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804년 일본 견당사 선단이 항해 도중 일부가 풍랑을 만나 탐라(제주)에 표류하자, 일본 조정은 신라에 구조 협력을 요청하는 한편 견당사 일행을 신라 경유로 귀국시키고자 하였다  . 일본후기에는 803년 9월과 804년 9월에 일본이 신라에 공식 사절단을 보낸 기록이 있으며, 신라도 이에 응하여 표류한 당・일본 사신을 송환하는 등 인도적 협력을 제공하였다 . 이 과정에서 신라는 오랜만에 일본과 우호적인 접촉을 가졌고, 일본후기는 이러한 협조를 통해 일본이 무사히 당 사행을 마칠 수 있었다고 전한다.
• 806년 이후의 비공식 접촉: 804년 견당사 사건 이후 신라와 일본 사이에 공식 외교 사절 파견은 다시 드물어졌다. 그러나 『속일본후기』, 『일본문덕실록』, 『일본삼대실록』 등 후속 사서들을 보면 지방 관청 또는 사찰 차원의 비공식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806년(헌덕왕 2년)과 808년(애장왕 9년) 등에 일본의 대재부(太宰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으나, 이는 중앙 조정 파견이 아니라 규슈 당국의 자체 교섭이라 일본후기 본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 이러한 사절은 주로 무역 교섭이나 승려 왕래, 표류민 송환 등을 위한 실무적 성격이었다. 일본 중앙 정부 입장에서는 신라와의 관계를 굳이 격상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하여 공식 채널을 열지 않았으나, 필요에 따라 지방선에서 신라와 접촉을 유지한 것이다.
• 882년 (헌강왕 8년) – 선물 교환 기록: 일본의 육국사 중 마지막인 『일본삼대실록』에는 9세기 후반 신라와의 간헐적 접촉이 언급된다. 그 중 하나가 882년 일본 조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보낸 기록으로, 이는 앞서 삼국사기 헌강왕조의 동일한 대목과 일치한다 .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이 선물은 신라 왕에게 바쳐진 것이며, 특별한 사례(謝禮)로 간주되었다. 헌강왕은 일본 사신을 경주 조원전으로 불러 접견하고 답례를 베풀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서로 오랜 갈등을 뒤로 하고 최소한의 선의 표시를 교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에도 일본은 신라를 정식 외교 상대국으로 대하기보다는 예전의 번국 인식에 따라 행차를 시켜 보낸 정도였으며, 지속적인 외교 관계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0세기 초엽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들어서면서, 고대 한일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일본후기에 포착되는 통일신라와의 교류 기록은 여기까지가 거의 마지막이다.
해설: 『일본후기』와 그 이후 육국사 사서는 통일신라 말멸망 시기의 한일 관계를 보여준다. 9세기 전반 신라는 국내 정치혼란과 후반기 외교전략 변화로 당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는 소극적으로 전환하고, 대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탐색하였다 . 한편 일본은 8세기 후반 국력 신장에 따라 신라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자 관심이 줄었으나, 당나라와의 교류를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필요함을 깨닫고 제한적으로 교섭을 재개했다. 일본후기의 기록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799년과 802년의 사건으로, 형식에 얽힌 의견 차이 때문에 국교 정상화가 좌초된 대목이다 . 이는 양국 모두 실리보다 예법과 체면을 중시한 결과였다. 그러나 803804년의 사례처럼 실질적 필요(표류 선단 구조 등)가 있을 때는 다시 협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 양국 관계는 형식 문제를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신라 멸망으로 마감되지만, 일본후기를 비롯한 일본 사서들은 이러한 복잡한 말기를 비교적 솔직히 담아내고 있다. 이를 통해 통일신라 시대 한일 교류의 종언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일본 측 사료의 관점과 한계를 읽어낼 수 있다. 특히 일본후기는 신라 왕명의 국서 문제가 끝내 풀리지 않아 “신라로의 사신 파견을 정지하였다.”고 명기함으로써 , 일본이 끝내 얻고자 했던 외교적 우월성의 인정을 받지 못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통일신라 260년간의 한일 관계가 자주적 신라와 자존적 일본 사이의 미묘한 균형 위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역사적 교훈이라 하겠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원문 및 국역본  ;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 일본측 사서의 신라 관련 기사    ; 국사편찬위 일본육국사 한국관계기사 데이터베이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우리역사넷 등 온라인 자료   . (각주 괄호 안에 표시된 원문 출전은 해당 사료의 권수와 연도, 행번호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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