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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 천도 구상과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논의 비교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6.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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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조 시기 화성 천도 구상의 배경


조선 후기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화성 천도 구상은 그의 즉위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가 1762년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으면서 조선 조정에는 노론 벽파와 시파로 당파 구도가 재편되었다 .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를 “역적”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 세력이었고, 정조는 그들의 견제를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무너진 왕실의 정통성 회복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였다. 실제로 정조는 즉위 후에도 “역적의 아들”이라는 공격을 받았는데, 아버지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정조는 왕권을 회복하고자 새로운 정치 구상을 모색하게 된다.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강력한 기득권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즉위 원년(1776년)에는 일부 노론 세력이 자객과 금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시도하는 등 왕위에 대한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아버지를 해친 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을 안고 있었으며, 즉위 후에도 여러 차례 역모 사건과 주변 인물들의 의문사를 겪었다 . 이러한 경험은 정조로 하여금 왕권 강화와 개혁 추진을 위한 새로운 기반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특히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정조의 친부가 아닌 양부(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복잡한 계보 때문에, 정조는 왕위 정통성을 공고히 하고자 부친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에 집착하였다 . 결국 그는 기존 권력 핵심이 자리잡은 한양을 벗어나 새로운 권력 중심지를 구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수원 화성에서의 새로운 도약이었다.

2. 정조의 천도 추진 동기와 실행 시도


정조가 화성(수원) 천도를 구상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 이전과 수호였다. 즉위 13년째인 1789년, 정조는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풍수지리상 길지로 알려진 수원府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주변에 성곽 도시를 건설하기로 한다 . 정조는 새로 축조한 수원 화성에 부친의 묘와 함께 임시 행궁(행차 시 머무는 별궁)을 세워 능침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처럼 지극한 효심이 화성 건설의 1차적인 명분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보다 정치적인 고려가 숨어 있었다. 정조는 직접 밝히길 “화성을 만든 첫째 이유는 현륭원을 보호하고 화성행궁을 호위하기 위함”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역모가 일어날지 모르기에 나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고 토로했다 . 실제로 정조는 화성에 성곽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켜,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의 도전을 대비하려 한 것이다 . 요컨대 화성 천도 구상의 저변에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함께, 자신을 시해하려 들었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려는 현실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었다.

정조가 건설한 수원 화성의 행궁 정문인 신풍루(新豊樓) 전경. 정조는 화성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이자 개혁의 무대로 삼고자 했다  .
정조는 이러한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1794년부터 1796년에 걸쳐 그는 최신 토목 기술을 동원해 수원 화성 성곽을 축성하였다.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등의 신기술을 활용하여 단기간에 견고한 성곽을 완공하고, 그 과정에서 공사 인부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등 개혁적인 방식을 도입하였다 . 또한 정조는 화성에 유수부라는 지방 행정관청을 설치하고,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의 일부를 화성에 주둔시켰다 . 이는 화성을 단순한 행차용 별도가 아닌 행정·군사 거점으로 삼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장용영 화성 주둔 부대는 한성의 기존 중앙군영들이 노론 세력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과 달리 국왕 직속 통제가 이루어졌다 . 정조는 화성에 행궁과 군영을 갖추고 신흥 상인층을 육성하는 등, 이곳을 정치·경제 실험지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 나아가 1795년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을 기념한 대규모 원행(園幸)을 통해 1,700여 명에 이르는 신하와 군대를 이끌고 화성을 방문함으로써, 국왕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기도 했다 .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정조의 장기적 천도 구상이다. 정조는 일찍이 자신의 아들 문효세자가 요절하자 차기 왕위 계승자로 서자(庶子)인 순조를 세웠는데, 순조가 15세 성년이 되는 1804년에 왕위를 물려줄 계획을 세웠다. 정조는 조선 왕조 최초로 조기 왕위 양위를 구상하며, 자신은 상왕(上王)으로서 화성에 거처를 옮겨 대리청정을 하려 했다 . 그는 “서울은 주상의 수도로 두고, 수원은 상왕의 수도로 만들려 했다”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가지고 있었다 . 이렇게 하면 어린 순조가 즉위한 직후 할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직접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 다만 정조 스스로는 조부 영조와의 약속 때문에 생전에 사도세자 추존을 할 수 없었기에 이러한 우회 전략을 택한 것이었다 . 요컨대 정조의 화성 천도 구상은 이중 수도 체제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는 치밀한 계획이었다.

3. 화성 천도가 실패하게 된 원인


정조의 화성 천도 구상은 궁극적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지적된다. 첫째는 재정적 부담이다. 수원 화성 신도시 건설에는 막대한 국고가 투입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성곽 축조에 들어간 총 경비만 약 87만 3천 냥에 달했다 . 이는 성역에 동원된 인건비와 자재비 등을 모두 합한 금액으로, 당시 국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준 액수였다. 실제로 1790년대에는 연이은 자연재해 등으로 재정 사정이 어려워졌는데, 화성 축성 사업까지 겹치며 중앙 재정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재정 압박은 정조 사후 화성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관리가 이어지지 못하는 배경이 되었다.

둘째, 기득권 세력의 반대와 관료층의 소극적 태도도 중요한 장애 요인이었다. 조선 조정의 핵심이었던 노론 벽파 등 서울 기반의 양반 관료들은 수도를 옮기는 구상에 부정적이었다. 오랫동안 권력과 부를 누린 한양 기득권층 입장에서는 수도 기능의 분산이나 이전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정조 생전에도 화성 천도는 공식 의제로 공론화되지 못했는데, 이는 반대 세력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한다. 후일의 연구에 따르면 정조 당시의 공식 기록(『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모두 뒤져봐도 화성 천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 또한 정조가 화성에 지은 행궁은 본궁인 창덕궁 등에 비해 규모가 작고, 수도의 필수 요소인 종묘나 사직 등의 시설도 갖추지 못했다 . 성곽의 크기도 서울 도성에 비해 훨씬 작았으며, 도시 기반 시설 역시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의 구상이 제한적 범위에서 추진되었으며, 조정 내 광범위한 지지나 제도적 뒷받침을 얻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정조 생전에 화성 천도는 공식 정책이라기보다 구상 단계에 머물렀고, 강력한 관료 기득권의 반발 속에 전면 추진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셋째, 결정적으로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急死)는 화성 천도 구상의 좌절을 가져왔다. 정조는 1800년 6월 49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급서하였는데,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는 독살설이 나올 정도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 정조가 뜻을 펼치기도 전에 세상을 뜨자, 미처 완성되지 못한 개혁들과 화성 중심 구상은 힘을 잃고 말았다.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섭정을 맡으면서 정국은 급변하였다. 정순왕후를 필두로 한 노론 벽파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여, 정조 시대의 개혁 인사들과 시파 계열은 밀려나게 되었다 . 정순왕후 치세에 벽파는 남은 개혁 시도를 무산시키고 수구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화성에 대한 투자나 천도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결국 정조의 급서와 그 후 이어진 보수 세력의 재집권으로 인해, 화성 천도 계획은 실질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순조 연간에는 안동 김씨 등 새로운 세도가 부상하며 중앙권력은 다시 서울에 집중되었고, 화성은 특별한 관리 없이 지방 도시로 남게 되었다.

4. 화성 천도론의 역사적 평가와 의미


정조의 화성 천도 구상은 비록 미완에 그쳤지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개혁 실험으로 평가된다. 정조는 자신이 꿈꾸던 새로운 조선의 비전을 화성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말년에 신하 서유린을 불러 “내가 화성을 만든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은 뒤, 직접 그 뜻을 밝혔다고 전한다. 정조가 밝힌 바에 따르면: 화성을 만든 목적은 실제 따로 있다. 농업 활성화 같은 다양한 정책들을 화성에서 만들어서 실험하고 성공시켜, 전국 팔도에 보급해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 이 일화는 화성이 단순한 효심의 산물이 아니라 개혁정치의 시험장으로 구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며 신해통공(市廛 규제 철폐)과 같은 경제 개혁, 장용영 설치를 통한 군제 개혁, 규장각을 통한 인재 등용 등 여러 혁신 정책을 추진했고, 일부 정책들은 수원 지역에서 시범 운영되기도 했다. 이러한 정조의 시도는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을 동시에 추구한 개혁군주로서 그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사례로 후대에 높이 평가된다 . 화성 천도론은 전제 군주제가 당파 정치로 흔들리던 조선 후기에 왕이 주도한 통치 구조 개혁의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한편, 화성 천도에 대한 역사학계의 해석은 다양하며 논쟁도 존재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정조의 화성 천도설은 사실무근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 앞서 언급한 대로 정조 당시 공식 문헌에 천도 계획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화성의 규모나 입지가 수도로서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어, 정조가 애초에 본격적인 수도 이전까지는 의도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 예컨대 왕도가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종묘와 사직이 화성에 조성되지 않은 사실, 그리고 수원이 한강 같은 대하(大河)가 없어 조운(漕運) 등 수도 입지로 부족했다는 지적은, 화성이 어디까지나 제2의 도시였음을 시사한다 . 이 관점에서는 화성 천도론을 후대에 와서 미화된 전설로 보거나, 정조의 구상이 상징적 차원에 그쳤다고 본다.

그러나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정조가 현실적 제약으로 공식화하지 못했을 뿐, 화성을 통해 사실상의 천도 효과를 노렸다고 해석한다. 정조가 화성에 행정·군사 기능을 갖추고 친위 세력을 심은 것은, 서울의 노론 세력과 거리를 두고 왕권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 실제로 정조는 화성을 일종의 신도시로 육성하여 새로운 경제 세력(시전상인의 금난전권 폐지로 성장한 상인층)을 키우고, 기존 양반 관료 사회에 균열을 내는 실험을 했다 . 이러한 움직임은 왕도 정치 부흥과 탕평 개혁 완수라는 정조의 치열한 의지 표현으로 평가된다. 결국 화성 천도론은 정조의 이상과 현실 정치가 충돌하는 가운데 탄생한 미완의 개혁 구상이었으며, 비록 그의 생전에 결실을 보지 못했으나 조선 후기 개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조의 통치가 더 이어졌더라면 조선의 권력 지도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역사적 가정도 존재하며, 이는 화성 천도 구상이 가진 잠재적 파급력에 대한 후대의 평가라 할 수 있다.

5.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논의와의 비교


정조의 화성 천도 구상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논의된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과 여러 측면에서 비견된다. 우선 두 사례 모두 수도 기능 분산을 통한 권력 구조의 변화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조는 서울 한양에 집중된 정치 권력을 수원 화성으로 일부 이전함으로써, 한양 기득권 세력(당시 노론)을 견제하려 했다 . 이는 참여정부 시기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를 세종시로 옮겨 서울 중심의 기득권 구조를 완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도모하려 한 발상과 상통한다는 평가가 있다 . 실제로 정조가 당대에 “서울을 다 쥐고 있던 노론 세력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화성을 키우려 한 것처럼, 노무현 정부의 신행정수도 건설 추진에도 수도권 과밀 해소와 새로운 권력·경제 중심의 창출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과거 조선시대든 현대든, 정치와 경제의 중심을 이동시켜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는 기득권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두 사례는 유사하다.

그러나 현대의 세종시 수도 이전 추진은 민주주의 체제 아래 제도적 장벽과 타협을 거치며 진행되었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신행정수도 건설은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제동이 걸렸다. 헌재는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을 들어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위헌으로 판단하였고, 이로 인해 애초의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 취소되었다 . 그 대안으로 동일 지역에 행정중심복합도시를 건설하는 특별법이 제정되어 현재의 세종시로 이어졌다 . 이 과정에서 행정수도 이전 구상은 헌법 개정이라는 높은 문턱에 가로막혀 미완의 제도화로 남게 되었다. 당초 청와대와 국회를 모두 이전하는 완전한 신수도 구상이었지만, 위헌 결정 이후 타협안으로 대부분의 중앙행정기관만 옮긴 부분 이전에 머물렀다. 그 결과 세종시는 공식적으로는 행정중심지일 뿐 헌법상 수도는 아니며, 입법·사법부와 대통령의 주 활동 무대는 여전히 서울에 남게 되었다. 이러한 불완전한 위상 때문에 세종시 행정수도 완성 논의는 그 후로도 현재진행형이다. 예컨대 2020년대에 들어와 국회 세종의사당 설치와 대통령 세종 집무실 마련 등이 본격화되어, 비로소 세종시가 정치·행정수도로서 기능 완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 이러한 움직임은 행정수도 이전 구상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도적 숙제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두 사례의 정치적 파급 효과를 비교할 수 있다. 정조의 화성 천도 구상은 비록 실행되진 않았으나 당대 정치에 미묘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정조가 화성에 쏟은 관심과 자원은 한양 조정의 보수 세력을 자극했고, 이는 정조 치세 내내 개혁파와 수구파의 갈등 구도로 나타났다. 한편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정치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으로 시작된 행정수도 논의는 2000년대 중반 헌재 판결과 정치권 공방을 거치며 지역 간, 세대 간 논쟁을 촉발시켰다. 충청권의 민심은 행정수도 공약 이행 여부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이후 이명박 정부 시절 세종시 수정안 논란, 박근혜 정부 시절 일부 기능 추가 이전 등 정권교체마다 정책 변동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수도 이전 구상은 완전히 폐기되지 않고 문재인 정부를 거쳐 현재까지 추진력을 얻어가고 있는데, 이는 수도권 집중 완화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조의 화성 천도와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은 각기 다른 시대의 산물이지만, 중앙집권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권력 지형을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동시에 실행 과정에서 기득권 저항과 제도적 한계로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는 점도 유사하다. 이러한 역사적 비교는 과거의 왕조 시대부터 현대 민주국가에 이르기까지 수도 이전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도전인지를 시사해 준다 . 정조의 이상과 세종시의 현실을 함께 살펴보면, 권력의 공간적 재편이 가져올 기회와 난관을 거울삼아 앞으로의 행정수도 완성 논의에도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및 출처: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 사료 및 김준혁, 박광용 등의 역사학 연구        ; 헌법재판소 결정문 및 정부 정책 브리핑 자료  ; 기타 오마이뉴스, 동아일보 등의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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