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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현재의 세종 수도 이전 계획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6.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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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대한민국의 세종 이전 비교


고려 시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현대의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논의는 시기와 배경은 다르지만 수도 이전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두 사례 모두 기존 수도 중심 기득권에 도전하여 새로운 권력 중심지를 구축하려 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이하에서는 두 사례를 구조적으로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리합니다.
• 시대적 배경: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12세기 고려의 문벌귀족 사회 모순과 외세 압박 속에서 등장한 체제 개혁 운동입니다. 반면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수도권 과밀과 지역 불균형 문제에 대응한 국가 발전 전략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전자는 왕권과 귀족 권력의 균형을 둘러싼 내분에서 비롯되었고, 후자는 민주사회에서 지역민의 요구와 대선 공약으로 대두되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 추진 세력과 논리: 묘청은 승려와 일부 관료·무인 연합세력으로, 풍수지리 신앙과 자주적인 민족의식을 동원하여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 그의 논리는 새 수도 = 새 국가 번영이라는 도참 사상과 금국 정벌 등의 강경 노선이었습니다 . 한편 세종시 추진 세력은 민선 정부(노무현 대통령)와 지방 주민, 그리고 여당 정치인들이 주축이 되어, 국토균형 발전과 수도권 과밀 해소라는 합리적 정책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 전자는 상당 부분 종교적·예언적 믿음에 의존한 반면, 후자는 헌법적 가치(균등 발전)와 경제사회적 데이터에 기반한 정책 담론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 기존 수도 세력의 반응: 고려 개경의 기득권(김부식 등)은 묘청의 시도를 역모로 규정하고 유교 이념과 현실론(금과의 외교)으로 맞섰습니다  . 이들은 왕과 조정을 설득하여 개혁을 저지했고, 나아가 무력 진압으로 귀결시켰습니다  . 현대의 서울 기득권(정치·언론·경제 권력)은 세종시 이전을 노골적으로 무력으로 막지는 못하지만, 헌법소원 제기, 언론 여론전, 정치적 공세 등으로 저항했습니다  . 2004년 헌재 결정으로 수도 이전 법이 무효화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결국 전자는 군사력을, 후자는 법률과 여론을 무기로 사용해 수도 이전을 가로막았다는 점에서 방법의 차이가 있지만, 기득권 수호 본능이라는 점에서는 맥을 같이합니다.
• 전개 과정: 묘청의 운동은 처음에는 합법적 천도론 제기 -> 왕의 일시적 승인 -> 반대세력 방해 -> 왕의 철회 -> 봉기와 내전 ->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 세종시 이전은 대선 공약 -> 특별법 제정 -> 헌재 위헌 결정 -> 수정(행정복합도시) -> 정부 교체 후 수정안 시도 -> 국회 부결 -> 원안 지속 -> 이후 부분적 이전 진행의 경로를 밟았습니다  . 묘청의 경우 빠른 시간 내에 극단적 충돌로 치달았고 결과 역시 즉각적이었습니다. 반면 세종시는 법치체제 내 공방과 정권교체에 따른 정책 변화를 거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 결과와 귀결: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지도자들은 처형되었으며 개혁 세력은 몰락했습니다  . 그 결과 고려는 개경 중심 체제가 더욱 공고화되었고, 문벌귀족들이 계속 권력을 독점하여 이후 무신정변의 토양이 되었습니다 . 한편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은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완전한 수도 이전은 관습헌법 등에 막혀 좌절되었으나, 행정부의 상당 부분이 세종시로 이전하여 현재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 서울은 여전히 명목상 대한민국 수도로 남아 입법·사법 기관을 품고 있지만, 이원적 수도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묘청 사례와 달리 일정 정도 타협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정수도 완성은 미완의 과제로 남았고, 서울 기득권 구조 역시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 역사적 의의: 묘청의 난은 중세 한국사에서 사상적 투쟁의 분수령으로 평가됩니다. 신채호가 말하듯, 고려사의 방향성을 결정지은 사건으로, 이후 고려가 보수적 유교질서로 재편되는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 또한 자주 vs 사대 논쟁의 효시로서 오늘날까지 회자되며, 민족주의 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은 현대 대한민국의 국가 균형발전 노력의 상징입니다. 수도 서울 일극체제에 문제의식을 갖고 대한민국 시스템을 혁신하려 한 시도로서, 완결되지 않았으나 상당 부분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지역 균형발전, 지방분권이라는 헌법 가치 실현을 위한 담대한 시도였고, 현재진행형의 국가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 개념을 통해 정치적 쟁점을 판가름한 전례는 헌정사적으로도 중요한 판례로 거론됩니다 . 세종시 사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앙 기득권과 지방의 힘겨루기를 잘 보여주며, 동시에 지방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시험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배경: 개경 문벌귀족과 혼란한 정세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시기, 중앙 정치는 개경(開京)의 문벌 귀족 세력이 장악하여 왕권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 대표적인 문벌귀족 이자겸은 딸들을 왕실과 혼인시켜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렸으며, 국정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 1126년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불태우고 왕을 위협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내부 분열로 진압되었습니다 . 이 혼란으로 왕실 권위는 추락하고 통치 질서는 해이해졌습니다. 한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요(遼)를 멸망시키고 강성해지면서 고려에 황제를 섬기라는 요구를 해오는 등 대외 환경도 위협적이었습니다  . 금나라의 사대 요구에 대해 고려 조정 내에서는 “여진 오랑캐를 어찌 섬길 수 있느냐”는 자주 파와 “국경을 맞댄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대 파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 이자겸 등 기득권 세력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금과의 외교 마찰을 피하려는 입장이었습니다 .

이처럼 내우외환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고려 조정의 개혁 세력은 새 돌파구를 모색하게 됩니다. 국왕 인종은 이자겸 세력을 제거한 뒤 국가를 새롭게 할 방안을 고민하였고 , 특히 왕실과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국운을 다시 일으킬 계기를 찾고자 했습니다 . 이러한 배경에서, 평양 지역(당시 서경이라 불림)을 기반으로 한 인물들이 수도 천도론을 제기하게 됩니다. 서경은 과거 고구려의 옛 수도로서, 고려 건국자인 태조 왕건이 북진 정책의 전진기지로 삼고 후대 왕들에게도 중시하라고 유훈을 남긴 땅이었습니다 . 실제로 고려 태조는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사계절마다 순시하여 머물라”는 훈요를 남겼고, 제3대 정종 때 한때 서경 천도가 시도되었을 만큼 유서 깊은 지역이었습니다 . 왕건의 이러한 유훈과 풍수지리·도참사상에 의하면, 서경(평양)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나라의 왕기(王氣)가 서려 있는 땅이었습니다  . 이러한 사상적 토대 위에,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妙淸)**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서경 천도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묘청의 주장: 풍수·도참 사상과 자주론


승려 묘청은 서경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풍수지리설과 도참(圖讖)사상에 능통한 인물이었습니다 . 그는 나라가 겪는 혼란의 원인을 수도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퇴한 탓으로 설명했습니다 . 즉, 개경 땅의 기운이 다해 국가의 운세가 기울었으므로,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나라가 중흥한다는 논리였습니다 . 이러한 주장은 당대에 유행하던 풍수지리 신앙과 맞물려 상당한 호응을 얻었으며, 왕 또한 묘청을 총애하고 그의 설득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 묘청과 뜻을 같이한 서경 출신 문신 정지상, 점성가 백수한 등은 인종에게 서경 천도를 강력히 건의하였고, 인종은 실제로 1127년 이후 서경을 여러 차례 순행하며 서경 천도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 인종은 서경의 명당 자리인 임원역에 대화궁(大花宮)이라는 새 궁궐을 짓도록 하여, 천도의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

묘청 일파의 주요 주장 논리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풍수지리와 도참사상: 서경이야말로 왕기가 서린 길지로서 새로운 왕도의 터전이라는 믿음입니다 . 묘청은 개경 궁궐이 이자겸의 난 때 불에 탄 것을 두고 “개경은 이미 기운이 땅에 떨어진 곳”이라 하며, 서경만이 왕실의 부귀와 국운 융성을 보장할 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그는 서경 천도가 성사되면 “금(金)나라도 스스로 항복하고 주변 36국이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고까지 호언했는데  , 이는 도참(예언)적 확신을 실토한 것입니다. 둘째, 자주론(自主論): 묘청 세력은 대외적으로 금국 정벌론을 내걸어, 고려가 더 이상 금나라에 굴복하지 말고 황제를 칭하며 연호를 새로 정(稱帝建元)하고 북진하자고 주장했습니다 . 이는 고려가 스스로 천자의 나라임을 선언하고, 나아가 여진족의 금국을 응징하겠다는 자주적·민족적 기개의 표현이었습니다 . 실제로 묘청은 인종에게 “왕을 황제로 받들겠다”는 칭제 건원 주장을 펼치고,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사대를 청산하고 북벌을 단행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 이러한 주장은 고구려 계승 의식과 민족 자존심을 자극하여, 부패한 개경 귀족 대신 새로운 정치질서를 세우려는 혁신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 셋째, 국내 개혁 의지: 묘청 일파는 서경 천도를 통해 부패하고 무기력한 개경 문벌귀족 세력을 몰아내고 왕권을 강화하며 새 정치를 열자고 했습니다 . 그들은 서경 천도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기득권 구조를 혁파하고 내정 혁신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 실제로 묘청은 “개경 귀족을 대신해 서경인을 중심으로 새 정권을 세우자”는 정치적 목표를 내세웠으며, 천도가 이루어지면 자신들과 공모한 신하들이 공신으로 상을 받고 그 자손까지 부귀를 누릴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

이러한 논리에 힘입어, 한때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듯 보였습니다. 인종 13년(1135) 정월, 묘청과 서경 세력은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개경 대신 서경에 수도를 정할 것을 공식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묘청은 인종을 사실상 황제 대우하며 금 정벌 계획까지 공개적으로 거론했고, 인종은 서경에의 거둥(행차)을 준비하며 천도를 추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 그러나 서경으로의 천도 작업(대화궁 건설 등)이 진행되던 중, 연이은 불길한 징조들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 서경의 중흥사 탑에 화재가 발생하고, 1132년 인종이 서경으로 향하던 길에는 갑작스런 폭풍우와 한파가 닥쳐 많은 수행 인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민심은 술렁였고 “과연 서경이 좋은 땅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 사람들은 이를 두고 묘청의 잘못이라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 다급해진 묘청은 대동강에 오색영롱한 물결이 이는 기이한 현상을 연출하여 서경이 길지임을 보여주려는 술법을 썼으나, 떡에 기름을 넣어 강물에 띄운 이 속임수는 조사에 의해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 이는 묘청 일파의 도참적 술책이 민심을 현혹하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다는 인식을 주어, 오히려 신뢰를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

김부식 등 개경 세력의 반대: 유교적 사대 외교 노선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은 애초부터 개경 중심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습니다. 개경의 문신 귀족들은 풍수·도참에 기반한 묘청의 논리를 비과학적인 미신으로 치부하고, 유교적 합리주의와 외교 현실론을 내세워 맞섰습니다. 그 대표 격이 당시 대송(對宋)문물에 밝고 유교적 가치관이 투철했던 김부식(金富軾)이었습니다 . 김부식과 개경 관료들은 서경 천도론을 두고 “묘청 등이 간사한 꾀로 임금의 귀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며 왕에게 따르지 말 것을 강력히 간언했습니다 . 특히 1132년 서경 행차 도중 폭풍우로 피해가 나자, 김부식은 “서경 궁궐(대화궁)에 벼락까지 떨어졌는데 그곳으로 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며 하늘의 뜻에 배치됨을 역설했습니다 . 또한 가을 추수 전에 행차하면 논밭을 짓밟아 농사를 해치는 일이니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왕의 마음을 돌려세우려 했습니다 . 이러한 발언은 유교 통치이념상 경천애민(敬天愛民)의 논리에 호소한 것으로, 천변지이(天變地異)를 천도가 잘못된 것의 징벌로 해석하면서 동시에 백성의 안위를 이유로 들어 천도 계획을 비판한 것입니다 . 요컨대 개경파는 묘청의 주장이 하늘의 징조를 무시한 그릇된 행위이며 국가와 민생을 위태롭게 할 터무니없는 계획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아울러 김부식 세력은 대외관계 실리론을 내세워 묘청의 금국 정벌론을 반대했습니다. 금나라는 이미 강대국이 되었고, 고려는 이자겸의 난 등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황에서 섣불리 전쟁을 벌이는 것은 위험천만하다는 현실론이었습니다. 개경의 문벌귀족 다수는 애초에 송나라 등 중화 문명에 우호적이고 금과 사대교린(事大交隣)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 이들은 고려가 당면한 외교 위기를 유교적 명분론보다는 실용적 외교로 풀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굳이 금을 자극해 새로운 전란을 불러올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개경 세력은 묘청의 독립 자주 노선을 모험주의로 간주했고, 국제 현실에 어두운 허황된 주장으로 비판했습니다. 특히 김부식은 송나라의 선진 문물을 숭상하는 사대부적(事大夫的) 유교 관료층의 대표로서, 고려가 예의를 갖춰 강대국을 섬기는 것이 오히려 문명국의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 이러한 기조는 훗날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도 반영되었는데, 그는 역사서술에서도 신라 중심, 중국 중심 시각을 취하며 공맹(孔孟)의 대의를 중시하는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 결국 개경 귀족들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관습과 법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반대 논리는 왕과 조정 다수의 공감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묘청의 술책이 탄로나자 개경 조정에서는 “간사한 무리가 임금을 미혹시킨다”며 묘청 일파를 처벌해 재앙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격한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 인종은 처음에는 묘청을 신임했으나, 신하 다수가 극력 반대하고 민심마저 떠나자 점차 마음을 돌렸습니다 . 결정적으로 김부식 등이 “벼락까지 떨어진 서경으로 행차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길을 막아서자, 인종은 끝내 서경 천도 계획을 철회하고 말았습니다 . 1135년, 서경 행차 중단을 발표함으로써 천도 논의는 유야무야되었고, 묘청 일파는 더 이상 합법적 방법으로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이는 곧 정변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서경 천도 운동의 실패와 묘청의 난


서경 천도 계획이 좌절되자, 묘청 세력은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 봉기를 감행했습니다. 인종 13년(1135) 정월, 묘청을 비롯한 서경의 열성 지지자들은 임금을 모셔오겠다”며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 그들은 왕명의 가짜 교서를 꾸며 서경에 주둔하던 개경 파견 관리들을 모두 체포하고, 개경과 서경 사이의 길목(자비령 이북)을 군대로 차단하여 서경을 근거지로 한 반란 정권을 세웠습니다  . 묘청·조광 등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칭하며, 군대를 “천견충의군”으로 호칭하는 등 나름의 새 왕조 수립 의식까지 행했습니다 . 그러나 이들은 새로 왕을 옹립하지는 않고 인종의 이름은 그대로 뒀기 때문에, 이 반란은 왕권 자체를 부정한 건 아니었습니다 . 이는 서경파와 개경파의 주도권 다툼 성격이 강했음을 보여줍니다.

반란 소식에 개경 정부는 김부식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임명하여 진압군 총지휘를 맡겼습니다 . 김부식은 서경파 핵심 인물인 백수한·정지상 등을 미리 개경에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고, 3군(좌·우·중군)을 이끌고 서경으로 북진했습니다 . 관군은 진압 과정에서 각 성의 협조를 얻어 우세를 점했고, 서경 반군에 여러 차례 항복을 권고했습니다 . 반면 묘청 측은 “왕이 서경으로 오시면 전쟁을 멈추겠다”는 편지를 인종에게 보내는 등 끝까지 서경 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항전했습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정부군에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서경 일대의 백성들은 묘청군이 식량과 물자를 강제로 징발하는 데 반감을 품고 등을 돌렸고 , 반란군 내부에서도 갈등이 생겨 장군 조광이 묘청에게 등을 돌리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 조광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묘청과 주요 수괴들의 목을 베어 정부에 투항하려 했으나, 개경 조정이 투항 사자를 투옥하자 다시 결사저항을 선택했습니다 . 결국 반란 발발 1년여 만인 1136년 2월, 김부식의 관군이 총공격을 감행하여 서경성을 함락시키고 반란을 평정했습니다  . 주모자 조광은 자결하였고, 묘청 또한 난 도중 피살되어 그 수급이 저자거리에 내걸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 반란 가담자 다수도 살해되거나 유배·천민 강등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실패에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습니다. 먼저 사상적·이념적 갈등 측면에서 보면, 전통 유교 질서를 지키려는 개경 기득권에 맞서 불교·도참 신앙과 민족 자존을 내세운 서경파의 충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배층과 일반 백성들은 대체로 유교적 합리성을 존중했기에, 묘청의 신비주의적 접근은 설득력을 잃어갔습니다. 풍수 도참 논리의 약점이 드러난 것도 한몫했습니다.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하고 금국도 굴복시킬 것이라던 예언과 달리, 궁궐 준공 후 아무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벼락과 폭풍 등 재앙이 계속되자 민심이 급속히 이반했습니다  . 이는 천도론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고, 개경파는 이를 놓치지 않고 “하늘의 뜻” 프레임으로 여론을 장악했습니다. 두 번째로, 권력 구조와 지역 연고 측면입니다. 서경 세력은 정지상, 백수한 등 일부 관료와 승려, 무인에 불과했고, 행정의 중심인 개경의 주류 귀족층을 대체하기엔 기반이 취약했습니다  . 개경 문벌귀족들은 오랜 혼인 네트워크와 과거·음서 제도를 통해 권력을 세습해온 막강한 집단으로, 왕과 조정 내 인맥을 쥐고 있었습니다. 반면 서경파는 지역적 불만과 국왕의 일시적 총애에 기대었을 뿐 전국적 지지는 약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막상 무력 충돌 국면에 이르자 지방의 대부분 성과 주민들은 개경 정부 편에 가담하여 묘청을 외면했습니다  . 세 번째, 국왕의 태도 변화도 결정적이었습니다. 인종은 애초 묘청에게 호의를 보이며 천도를 검토했지만, 일련의 사태를 거치며 마음을 접고 개경 세력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 왕의 지지가 사라지자 묘청 세력은 정당성도 잃고 반란군으로 전락했으며, 왕권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던 명분마저 무색해졌습니다. 네 번째, 묘청 일파 내부의 한계입니다. 묘청의 칭제건원·금국정벌 주장은 비현실적이며 실체가 불명확한 목표였기에 대중의 호기심을 끌었을지언정 정책으로서 치명적인 한계를 지녔습니다 . 또한 묘청 자신이 저지른 대동강 기이현상 조작과 같은 얕은 술수는 지도자로서 도덕성과 신뢰를 잃게 했습니다  . 군사력과 전략의 부족도 실패 요인인데, 학자 출신 김부식이 진압군 대장을 맡을 정도로 개경 측은 체계적 진압이 가능했던 반면, 묘청 측은 처음 봉기 시점 이후 뚜렷한 전술 없이 수세에 몰렸고 내부 분열까지 일어나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 결국 이념 대립과 기득권 구조의 현실, 지도부의 역량 부족, 왕권의 지지 철회 등이 어우러지며 서경 천도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묘청의 난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해석 변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일명 묘청의 난)은 당시에는 반역 사건으로 규정되어 진압되었으나, 후대에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전근대 사서인 고려 공식기록 『고려사』나 조선 초기 편찬된 『고려사절요』 등에서는 묘청을 “간사한 무리의 수괴”로 묘사하며 김부식 주도의 진압을 정당화하였습니다. 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자신의 유교적 역사관을 반영한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 김부식은 묘청의 난이 진압된 지 10년 후인 1145년,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 편찬을 완료하였습니다 . 혼란을 수습하고 중화 사대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목적에서 편찬된 이 역사서에서, 김부식은 신라를 정통 왕조로 높이고 중국에 대한 예의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등 다분히 보수적·사대적 역사관을 보였습니다 . 이는 묘청 일파의 고구려 계승 의식이나 자주 사상이 당대 집권 엘리트들에 의해 공식 역사에서 폄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묘청의 난을 새롭게 조명했습니다. 특히 신채호(申采浩)는 1920~30년대에 발표한 논설에서 묘청의 서경 운동을 “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평가하며 파격적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 신채호는 이 난이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낭가(郎家)와 불가(佛家)의 연합세력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 곧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했습니다 . 묘청과 서경파는 고구려적 기상을 이은 자주·혁신 세력이며, 김부식 등 개경파는 신라를 잇는 사대·보수 세력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 신채호는 묘청의 난이 실패한 것을 두고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우리 민족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렸다고 탄식하였습니다 . 그의 평가에 따르면, 만약 묘청이 승리했다면 고려 이후의 역사가 달라져 민족 자존의 기백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인데, 실패로 끝나면서 사대주의 사상이 득세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 신채호의 이러한 논조는 일제 식민지 시기 민족주의 역사학의 한 흐름을 대표하며, 일제의 억압에 맞서 우리 역사 속 자주적 투쟁을 재해석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신채호를 필두로 한 근대 학자들의 재평가 이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민족 자주의식의 표현으로서 긍정적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의 역사학계도 이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남한에서는 단재 신채호의 논지를 계승한 학자들이 묘청을 반외세·자주정신의 상징으로 재조명했고, 김부식을 보수적 기득권의 상징으로 상대화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일부 전통 사학자들은 신채호의 평가가 과장되었다며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예컨대 이병도 등 해방 직후의 사학자들은 묘청의 난을 문벌귀족 사회 모순의 표출로 분석하면서, 이념 대립뿐 아니라 권력 투쟁의 성격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묘청 세력이 왕명을 받들어 새로운 왕을 세우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이것이 왕조 전복을 노린 반란이라기보다는 왕권을 둘러싼 두 파벌의 대립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 또한 묘청 일파의 북벌 주장이 당시 국제정세상 비현실적인 모험이었다는 지적도 했습니다 . 실제로 현대 학계에서는 묘청의 칭제건원·금국정벌 구호가 *“국내 개혁 의지와 민족자존의 표출”*인 것은 인정하면서도, 구체적 정책 대안이나 실현 가능성은 결여된 슬로건적 측면이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청 등이 내건 자주적 기개와 새 나라 건설 구상은 고려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이후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됩니다.

북한 역사학계 역시 묘청의 난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서술하는데, 특히 평양을 새로운 수도로 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민족사의 진취적 사건으로 강조합니다. 북한에서 평양은 현재의 수도이기도 하므로, 고려시대 평양천도 시도가 진보적 민중의 봉기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북한 교과서들은 묘청을 봉건 지배층의 사대주의에 맞선 인물로 소개하며, 그가 일으킨 서경 천도 운동이 비록 실패했으나 자주정신의 전통을 보여준 사례로 해석합니다. 다만, 남한과 북한 모두 묘청의 난을 일방적으로 미화하기보다는 그 한계와 영향을 함께 가르치고 있습니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고려 사회에 미친 영향으로, 서경 세력이 몰락하면서 개경 문벌 귀족의 일극 체제가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생긴 폐해가 훗날 1170년 무신정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 실제로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정치적 비중이 급격히 낮아졌고, 개경 문신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왕권마저 업신여길 정도로 방자해졌습니다 . 귀족 정치의 모순이 누적된 끝에, 1170년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문벌귀족 시대를 종결짓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역사학계는 묘청의 난을 중세 고려 사회의 분기점으로 평가합니다. 즉, 개혁 실패와 보수 권력 승리로 끝난 이 사건이 향후 군사정권 시대로의 이행을 촉발했으며, 동시에 고려 지배 이념의 향방을 유교 중심으로 굳혀버렸다는 것입니다  . 요컨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졌습니다. 민족주의적 해석은 이를 자주 독립 정신의 발현으로 높이 평가하는 반면, 합리주의적 해석은 권력 다툼과 사상적 충돌의 복합물로 바라보며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묘청의 난이 고려 천 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상 투쟁의 하나였고, 이후 전개될 역사의 방향에 깊은 흔적을 남긴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

대한민국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논의의 전개


노무현 정부: 행정수도 공약과 추진 배경

대한민국에서 수도 이전 논의는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수도권 과밀 문제와 맞물려 있습니다. 과거에도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여 1977년 특별법까지 통과시킨 사례가 있었고, 1980~90년대에도 지방 분산 요구가 대두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 본격적인 논의의 재점화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수도권 인구 집중 억제와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해 충청권에 새로운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청와대와 국회 등 주요 국가 기관까지 이전하겠다는 구상을 밝혔습니다 . 이 공약의 배경에는,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의 과도한 집중으로 인해 나타난 여러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수도권에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몰려 살고 있었고, 서울은 교통 체증, 주택 가격 폭등, 환경 오염 등으로 “질식할 지경”이라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 반면 지방은 인구 유출과 지역 낙후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수도권 대 비수도권, 서울 대 지방 간의 극심한 불균형이 사회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었습니다  .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노무현 정부는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지역균형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후 곧바로 신행정수도 건설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충청남도 연기·공주 일대를 새로운 수도 예정지로 선정했습니다. 2003년에는 국회에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약칭 신행정수도특별법)이 제정되어, 수도 이전 사업이 법적 근거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행정수도 후보지로 선정된 충청권 주민들은 크게 환영했고, 세종시라는 명칭도 건의되어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치적 쟁점화와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부 야당 정치인들과 서울 지역 이해관계자들은 수도 이전을 “급진적 선거 공약의 산물”이라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습니다 . 특히 한나라당 등 보수 야권과 수도권 언론들은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 충청 표심을 얻기 위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백년대계로서 필요하다며 사업 강행 의지를 거듭 표명했습니다 .

헌법재판소 판결과 행정중심복합도시로의 수정


행정수도 이전 계획에 대한 최대 분수령은 2004년 10월의 헌법재판소 결정이었습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이를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서울 등 수도권 주민 수백 명과 일부 야당 의원들은 “수도 이전은 국가의 근본을 바꾸는 일이므로 국민투표나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헌재에 소를 제기했습니다.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대1의 의견으로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을 선고하였습니다. 헌재의 논리는 이례적으로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을 들어 구성되었습니다 . 즉, 대한민국의 수도는 비록 성문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건국 이래 줄곧 서울이 수도로 기능해왔으므로, 이는 관습헌법상 불문(不文)의 헌법규범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 따라서 수도를 이전하는 것은 단순 법률이 아닌 헌법 사항에 해당하므로 국민 투표를 거친 헌법 개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 한마디로, 헌재는 행정수도 이전 = 국가의 수도 이전으로 간주하였고, 서울을 수도로 하는 관습헌법의 효력이 신행정수도법을 무효화한다고 본 것입니다 . 이 결정은 당시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수도 이전을 추진하던 노무현 정부와 충청권은 충격을 받았고, 수도는 국민 정서와 관습에 의해 결정된다는 헌재 논리에 대한 비판과 지지가 엇갈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신행정수도 건설 계획은 그대로 추진할 수 없게 되었고, 사업은 큰 전환을 맞았습니다.

헌재의 위헌 결정 이후, 노무현 정부는 절충안으로서 “행정중심복합도시” 구상을 내놓았습니다 . 이는 대한민국의 법적 수도는 여전히 서울로 두되, 행정 기능의 대부분을 분산시키는 새로운 행정중심 도시를 건설한다는 개념입니다. 곧바로 국회는 2005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을 제정하여, 이전의 신행정수도특별법을 대체하였습니다. 새로운 법에서는 행정수도라는 용어를 피하고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명명함으로써, 수도 이전이 아니라 행정부 일부 이전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로써 사업은 법적으로 계속될 수 있게 되었지만, 애초 계획에 비해 수도 기능과 위상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헌재 결정의 영향으로 대통령 집무실(청와대), 국회, 대법원 등 국가 핵심 기관은 서울에 잔류하게 되었고, 새로 건설되는 도시는 오로지 행정부 일부처의 업무 중심지로 제한되었습니다  . 예컨대 청와대와 국방부, 외교부, 법무부 등 국가 안보·외교·사법 관련 부처들은 서울 밖으로 이전할 수 없게 되었고, 15부 2처 등의 행정기관만 옮기는 것으로 조정되었습니다  . 이러한 변화로 인해 신행정수도 구상이 행정복합도시로 바뀌면서, 노무현 정부가 구상했던 완전한 행정수도 이전은 좌절되었습니다 .

행정중심복합도시는 이후 입지 선정과 도시 설계 과정을 거쳐 충남 연기·공주 지역에 건설되기 시작했고, 2006년에는 이 도시의 공식 명칭이 “세종시”(세종특별자치시)로 확정되었습니다. 세종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성군(聖君) 세종대왕에서 따온 것으로, 행정수도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 기틀을 마련하자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2007년 착공된 세종시는 2012년 7월 공식 출범하였고, 이후 현재까지 중앙행정기관들의 단계적 이전이 진행되었습니다. 다만, 행정수도의 법적 지위가 불안정해진 상황에서 반쪽짜리 수도라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세종시는 이름만 특별자치시일 뿐, 대통령과 국회가 없는 상태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기였던 2007년, 헌재 결정에 불복하는 취지로 신행정수도특별법 국민투표나 헌법 개정 논의가 잠시 있었으나 현실화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노무현 정부는 행정복합도시 건설로 방향을 선회하며, 이를 국토균형발전 정책의 핵심으로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수도 이전 논의를 장기 과제로 남긴 채, 우선은 행정기관 지방 이전을 통한 균형 발전이라는 절충 목표를 택한 것이었습니다 . 그럼에도 세종시 건설은 충청권 주민들의 기대 속에 지속되었고, 노무현 정부는 임기 내내 이 프로젝트를 국가사업으로 견인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수정 시도와 좌절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 계획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행정수도 이전에 회의적이었고, 당선 이후 세종시 계획 수정을 공언했습니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급기야 세종시 건설계획 전면 백지화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을 취소하고, 세종시의 기능을 행정중심복합도시에서 교육·과학 중심의 경제도시로 바꾸겠다는 내용의 세종시 수정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 이는 사실상 행정수도 이전 약속을 철회하고 세종시를 일반 혁신도시 수준으로 낮추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이명박 정부는 수도 이전보다는 수도권 개발과 경제 활성화에 중점을 둔 정책기조를 갖고 있어, 세종시 사업을 비효율적인 이전 비용으로 간주한 면이 있습니다. 둘째, 집권 당시 여당(한나라당) 내에서도 세종시 이전에 대한 입장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당내 일부는 세종시 원안을 지키는 것이 지역 민심과의 약속이라며 수정안에 반대했습니다. 실제로 2010년 초, 박근혜 등은 공개적으로 “세종시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명박 대통령의 수정안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셋째, 충청권 및 세종시 예정지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입니다. 이명박 정부 발표 직후 세종시(당시 연기군) 지역 주민들은 “행정도시 사수” 범군민대책위를 결성하고 촛불집회 등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 충남도지사였던 이완구는 세종시 수정 방침에 항의해 지사직을 사퇴하는 결단까지 보였습니다 .

결국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2010년 6월 부결되었습니다 . 국회 표결 결과 야당뿐 아니라 여당 내 상당수 이탈표로 수정안은 부결되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이를 수용하여 원안 추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로써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은 계획대로 지속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파장을 남겼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정 추진 동력에 손상을 입었고, 여당 내 분열 양상이 표면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충청권은 환영 분위기였고, 수도 이전 논의는 다시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세종시 특별법은 이름만 바뀐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의 형태로 존속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 다만 이명박 정부 시도의 여파로, 세종시는 당초 계획보다 행정 기능과 위상이 축소된 상태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2012년 세종시 출범 당시 이전한 중앙행정기관은 9부 2처 2청에 그쳤고, 나머지 부처들은 순차 이전이 연기되는 등 시간이 걸렸습니다. 일부 국가기관(헌법재판소, 중앙행정심판위 등)은 이전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계획 축소와 지연은 행정수도 건설 취지의 반쪽 실현이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 기간은 행정수도 이전 논의에 큰 혼선을 준 시기였지만, 국민적 합의 부족 속에 결국 세종시 원안 유지로 결론나면서 노무현 정부의 구상이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

박근혜·문재인 정부: 행정수도 완성 논의


2013년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세종시를 약속대로 완성하겠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앞서 이명박 정부의 수정안을 저지하는 데 앞장섰던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세종시에 대한 지원을 공언하고 중앙부처 이전을 차질 없이 진행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4년까지 행정안전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대부분의 중앙부처(청와대 직속 제외)가 세종시 정부청사로 이전을 완료했습니다. 이로써 세종시는 명실상부한 행정부 중심도시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정부세종청사에서 국무회의가 처음 개최되는 등 상징적인 변화도 나타났습니다. 다만, 청와대와 국회, 대법원 등은 여전히 서울에 남아 있어 완전한 행정수도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세종시 국회의사당 분원 설치 등을 시사했으나, 임기 중 구체적 진전을 보이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세종시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도시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행정수도 완성에 대한 지역 사회의 요구가 점차 높아졌습니다.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한층 적극적으로 행정수도 완성 의제를 제기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세종시를 진정한 행정수도로 완성하겠다”고 공약하며, 행정수도 이전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개헌 추진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비록 2018년 개헌이 무산되었지만, 2020년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행정수도 이전 논의를 재가동했습니다. 2020년 7월,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연설에서 “행정수도 완성을 위해 국회와 청와대의 세종시 이전을 추진하자”고 공식 제안하여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 이후 소강상태였던 수도 이전 담론을 다시 전국적 화두로 끌어올렸습니다. 이에 따라 국회에서는 국회 세종의사당 설치 논의가 구체화되었습니다. 같은 해 말, 국회법 개정을 통해 세종시에 국회의사당 분원을 설치하는 안이 본격 추진되었고, 예산이 편성되어 2021년 착공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계획에 따르면 2033년까지 세종시에 국회 의사당 일부(상임위 회의동 등)를 완공하는 것이 목표로 설정되었습니다  . 아울러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세종 집무실 설치도 검토하였습니다. 2021년 발표된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에는 대통령이 세종시에 내려와 집무할 수 있는 제2집무실 건립 구상이 포함되었습니다 . 이는 행정수도 세종의 상징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서, 실제 청와대를 옮기지는 못하더라도 정기적 대통령 업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세종시가 단순한 행정중심에서 나아가 입법·행정 기능을 모두 갖춘 사실상의 행정수도로 거듭나게 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

행정수도 완성 논의 과정에서 헌법 개정 문제도 다시 부각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2004년 관습헌법 결정으로 서울=수도가 된 상황에서, 청와대나 국회까지 이전하려면 헌법에 수도 조항 신설이 필요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일각에서는 2020년 개헌을 추진하며 수도를 명시하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정치권의 이해관계로 무산되었습니다. 대신 법률적인 우회 해법으로, 국회 세종의사당과 대통령 세종집무실은 헌법 개정 없이도 설치 가능하다는 법률 검토를 바탕으로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 예컨대 2021년 8월 국회 세종의사당 설치를 위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국회 일부의 세종 이전은 현실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이는 헌재 판결의 취지(국회와 대통령이 있는 곳이 수도)를 완전히 거스르지 않으면서, 입법부의 기능 일부를 세종에 이전하는 절충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문재인 정부 말기까지 세종시는 행정·입법 기능을 부분적으로 갖춘 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법부(대법원, 헌법재판소 등)는 여전히 서울에 남아 있고, 대통령 집무실 또한 실질적으로는 서울 청와대에 있었기에, 행정수도 완성까지는 추가 과제가 남았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입장과 과제

2022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세종을 진짜 수도 기능을 갖춘 도시로 만들겠다”는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세종시에 ‘행정’자 꼬리표를 떼고 문화·교육·의료·첨단 산업이 어우러진 완벽한 수도 기능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습니다  . 그러나 당선 후 현실적인 제약과 여소야대 정국 등을 고려하여 적극적으로 수도 이전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오히려 대통령 집무실을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는 수도 이전 담론과는 별개로 청와대 시대를 끝내고 열린 소통을 하겠다는 취지였지만 결과적으로 대통령 서울 잔류를 더욱 공고히 한 측면이 있습니다. 윤 정부는 세종시 관련 기존 계획(국회 세종의사당 건립 등)은 계속 이행하되, 헌법 개정이나 추가 이전과 같은 민감한 사안은 당분간 추진하지 않고 있습니다. 2022~2023년 사이 국회 세종의사당 건립사업은 집권 여당의 협조하에 예산이 반영되어 진행 중이며, 2032년 준공을 목표로 설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또한 2023년 행정안전부 등 남아있던 일부 부처도 세종시로 추가 이전하여 현재 세종에는 중앙행정기관 19부, 4처 등 대부분이 이전 완료된 상태입니다.

행정수도 완성에 필요한 사법부 이전 문제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2023년 말, 국회에서 대법원 지방 이전이 처음으로 본격 논의되었고, 2025년 12월에는 집권 여당(혁신당)에서 대법원을 세종시로 이전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 그러나 이에 대해 법조계와 야당을 중심으로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같은 최고 사법기관은 전국을 관할하는 만큼 서울에 있어야 접근성이 높다는 주장과, 행정·입법과 떨어져 삼권분립의 독립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있습니다. 실제로 2023년 법무부와 대법원은 내부 검토에서 “사법부 이전은 면밀한 검토가 필요”라며 사실상 부정적 입장을 내비쳤습니다(관련 공식 입장문)  .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의견들을 감안하여, 행정수도 문제를 국민적 합의로 풀어야 한다는 원론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2022년 7월 대통령 직속으로 지방시대위원회가 출범하여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총괄하게 되었는데, 이 위원회에서도 행정수도 이전보다는 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 메가시티 육성 등의 대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컨대, 윤석열 정부 시기에는 행정수도 이전이 전면에 부각되기보다는 현재 진행 중인 세종시 프로젝트의 안정적 완수와 지방분권 제도 강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모습입니다. 다만 충청권과 지방을 중심으로 행정수도 완성 요구는 계속되고 있으며, 여야 일부 정치인들도 세종시를 헌법상 수도로 명문화하는 개헌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2023년 말 집권여당 지도부는 “세종시 행정수도 완성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국가적 과제”라고 언급하며,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그러나 수도 이전은 초당적 합의와 국민투표를 동반하는 대형 이슈인 만큼, 당장 가시적 진전이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향후 수도 이전 논의는 ▲국회 세종의사당 및 대통령 집무실 건립의 차질 없는 추진, ▲사법부 이전에 대한 공론화, ▲헌법재판소의 2004년 결정 재검토 또는 헌법 개정을 통한 법적 장애 해소 등이 핵심 쟁점이 될 전망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행정수도 이전 논의를 통해, 서울 일극체제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고 지방균형 발전을 도모하려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세종시는 어느덧 인구 38만의 도시로 성장했고, 상당수 행정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아직 진정한 의미의 수도가 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남았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지방의 요구와 국가 미래 전략 측면에서 행정수도 이전은 여전히 유효한 의제로 남아 있습니다.

세종시 이전 논의와 드러나는 서울 기득권 구조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논의 과정에서, 서울 중심 기득권 구조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정치·행정·경제·문화·언론의 모든 중심이 서울에 집중되어 왔습니다 . 이러한 권력 집중 구조는 서울 및 수도권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사회적 자원을 몰아주었고, 자연스레 서울 기득권층이 형성되었습니다  . 행정수도 이전 논의는 바로 이 기득권 구조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였기에, 서울 기득권 세력의 크고 작은 저항에 부딪혀 왔습니다. 주요 측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부동산 이해관계: 수도 기능의 이전은 부동산 가치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서울의 정치·행정 기능이 이전되면 장기적으로 서울 부동산 수요 감소와 가치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서울에 기반을 둔 기득권층, 특히 서울 도심의 부동산을 다량 보유한 이들은 행정수도 이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실제로 2020년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급물살을 타자, 언론에서는 곧바로 “세종시 집값 폭등”을 집중 보도하며 시장의 불안심리를 자극했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보도 경향에 대해 “정작 현지는 조용한데 언론이 몇 억씩 올랐다 내렸다 호들갑 떤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 지역 언론인 세종포스트는 중앙언론들의 이런 태도가 행정수도 이전 = 부동산 대란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본질을 흐리는 기득권층의 반발이라고 비판했습니다 . 실제로 서울 강남 등지의 기득권은 오랫동안 부동산 불로소득을 향유해왔고, 행정수도 이전으로 서울 부동산의 독점적 지대 이익이 줄어들 가능성을 경계합니다. 행정수도 이전 이슈가 나올 때마다 세종 집값 폭등이 언론 머리기사로 오르는 현상은, 이를 통해 수도 이전론의 도덕성을 흠집내고 여론을 서울 중심으로 돌리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 그 결과 행정수도 이전의 당위성(균형 발전, 수도권 과밀 해소 등)은 뒷전으로 밀리고 부동산 투기 문제만 부각되어 논의가 소모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 이는 서울 부동산 기득권이 정책 담론 자체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행정·사법 분리의 문제: 세종시가 행정수도로 출범했지만 입법·사법부는 서울에 남은 구조는 여러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우선 행정 비효율성이 있습니다.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국회 일정이나 대법원 업무가 있을 때 여전히 서울로 출장 가야 하는 일이 잦아, 시간과 비용 낭비가 지적됩니다. 이는 행정과 입법의 물리적 분리로 인한 애로로, 세종시 이전 논의 당시부터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는 서울 기득권의 절충 산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2004년 헌재 결정과 이후 입법 과정에서 국회와 법원은 서울 잔류로 못 박힌 것은, 행정만 옮기되 핵심 권력 기관은 그대로 남겨 기존 권력 누수 최소화를 꾀한 결정이었습니다  . 그 결과 대한민국 통치 구조는 행정(세종)과 입법·사법(서울)의 이원화라는 기형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이는 결국 행정 비효율과 권력 견제 약화를 초래합니다. 예를 들어, 국무총리나 장관들이 국회 대정부질문이나 국회위원 면담을 위해 수시로 서울-세종을 왕래해야 하고, 국민들도 청와대(현재 대통령실)나 국회를 방문하려면 서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불편은 행정수도 이전 효과를 반감시켰습니다. 또한 사법부(특히 대법원)의 서울 잔류는, 사법 권력이 서울에 집중됨을 의미합니다. 많은 고위 법관, 대형 법무법인, 사법연수 시설 등이 서울에 몰려있어, 사법 엘리트들의 서울 집중 현상은 여전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수도 이전에 부정적이며, 법원의 지방 이전은 재판 접근성을 떨어뜨린다”는 논리를 펴곤 합니다. 하지만 실상 전국 각지의 당사자들이 대법원에 오려면 어차피 서울까지 와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기득권적 지역 선호에 가깝다는 반론도 나옵니다  . 최근 제기된 대법원 이전안을 둘러싼 논란에서, 서울 vs 비서울 논리가 등장한 것도 사법 권력의 지역 이기주의로 비쳐졌습니다  . 정리하면, 행정·사법의 분리는 행정수도 미완성 상태에서 비롯된 문제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서울 기득권이 완강히 유지된 데 기인합니다. 이를 해소하려면 국회와 대법원 등도 세종으로 이전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헌법 개정으로 이원화 상태를 인정하는 등 명확한 정리가 필요한데, 어느 쪽이든 서울의 기존 권한 분산을 뜻하기에 진통이 예상됩니다.
• 언론 및 정치 권력의 집중과 여론전: 서울에는 주요 전국 단위 언론사들이 대부분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방송국, 종합일간지, 통신사 등이 밀집한 서울에서 생산되는 뉴스는 서울 시각을 강하게 반영합니다. 행정수도 이전 이슈에 있어서 중앙언론은 여러 차례 편향된 보도로 논란을 빚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부동산 문제 외에도, 세종시 건설 초기에는 “행정수도 이전은 지역 이기주의”라는 식의 프레임이 일부 언론을 통해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 서울에 기반한 언론은 자신들이 누려온 정보 취재의 편의성과 권력 접근성이 약화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국회와 청와대, 각 부처가 세종으로 가면 기자들은 서울-세종을 오가야 하고, 보도 경쟁력에서 불리해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이는 언론계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수도 이전에 거부감을 갖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실제로 2020년 행정수도 재논의 때 일부 신문사 사설들은 “굳이 수도를 옮겨 혼란을 자초할 필요가 있나”라는 논조로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세종시 지역 언론은 이에 대응해 중앙언론의 태도를 “서울 기득권을 지키려는 음모적 보도”라고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 정치권에서도 서울 기득권 구조가 엿보입니다. 서울에는 국회의사당이 있고 대부분 국회의원들도 서울에 주거를 둡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사실상 서울 생활권에 익숙해져 있어, 세종시로 국회를 옮기는 문제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비수도권 출신 의원들은 찬성하더라도, 수도권 의원들은 지역구 유권자 정서나 본인의 서울 기반 등을 이유로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2004년 헌재 소송 역시 야당 서울 지역 의원들과 서울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제기되었습니다. 수도 이전으로 정치 권력이 분산되면 서울에 위치한 각종 정치 네트워크(로비, 모임, 인맥 등)도 재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권 일각의 저항이 은연중에 존재합니다.

이처럼 행정수도 이전 논의는 서울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었고, 그들의 움직임은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해왔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현재까지도 수도 = 서울이라는 관습 질서를 완전히 깨지 못한 상태입니다.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 논리로 수도 이전을 가로막은 것도, “서울에 기반을 둔 기득권 세력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관습헌법상 수도권의 권력과 부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는 비판을 불러왔습니다 . 이는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단순히 신도시 건설이나 공공기관 이전의 문제가 아닌, 사회 기득권 구조의 개편 문제로 보아야 함을 시사합니다.

결국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갈등은 중앙집권 엘리트와 지방분권 세력 간의 힘겨루기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서울 기득권은 자신들의 경제·사회적 특권이 유지되길 바라며, 여러 논리를 동원해 변화에 저항합니다. 반면 지방과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측은 수도 이전이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민주주의 심화에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예를 들어, 수도권 인구 과밀과 지방 소멸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수도 이전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 과제로 보는 시각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 “서울을 쪼개지 않으면 집값 잡기도 힘들다”, “지방이 소멸하면 국가도 위험” 등의 문제 제기는 행정수도 이전이 지역균형과 부동산 안정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 그러나 이를 실현하려면 결국 서울 중심의 기득권 구조 타파가 선행되어야 하므로, 여전히 높은 문턱이 존재합니다.


以上의 비교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35년)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논의 (2000년대~현재)
시대 배경 12세기 고려 인종 연간, 개경 문벌귀족의 전횡과 여진(금) 압박 속 내우외환 상황  . 21세기 대한민국, 수도권 인구·권력 집중과 지방 소멸 위기 등 국토 불균형 심화  .
추진 세력 & 논리 승려 묘청 및 서경 출신 관료·무인. 풍수지리·도참사상에 근거해 “평양(서경)은 왕기 깃든 길지” 주장. 자주론으로 칭제건원(황제 칭호)과 금국 정벌까지 내세움  . 부패한 개경 귀족 대신 새 정권 수립 의지. 노무현 대통령 및 집권여당, 충청권 민심. 국가균형발전 정책으로 추진. 수도권 과밀 해소와 지방 발전을 목표로 새 행정수도 건설 공약  . 합리적 행정 효율과 지역 균등을 내세운 민주적 담론.
반대 세력 & 논리 개경 문벌귀족 (김부식 등) 다수. 유교적 명분론과 사대 외교론으로 반대  . 묘청의 풍수도참을 미신으로 간주하고, 금과의 충돌은 국익 훼손이라 비판. 하늘의 징조(벼락 등)와 백성 피해(농경 훼손)를 들어 천도 반대 . 서경파를 “역적 무리”로 규정. 서울 기득권 전반 (야당 정치인, 수도권 주민 일부, 중앙언론 등). 관습헌법 논리로 법률적 저지 – 2004년 헌재 “서울이 관습상의 수도” 위헌 결정 . “수도 이전=혼란·세금낭비” 등의 여론조성. 일부는 “선거용 포퓰리즘” 비난 . 서울 부동산 가치 하락 우려 및 권력 분산 반감 등이 저류에 존재.
전개 과정 이자겸의 난 후 서경 천도론 대두 → 인종 초기 호응, 서경에 대화궁 건설 → 서경서 재해 발생, 묘청 기교(기이현상) 실패 → 개경파 반대 극심, 왕 철회 → 묘청 일파 서경서 반란(대위국 건국) → 김부식 토벌군 진압, 1년만에 서경 함락 → 묘청 처형, 난 실패  . 2002년 대선 공약 → 2003년 신행정수도특별법 제정 → 2004년 헌재 위헌 결정으로 계획 무산 → 2005년 행정중심복합도시 특별법으로 수정 추진 → 2008년 이명박 정부 수정안(행정기능 축소) 시도 → 2010년 국회서 부결, 원안 유지 → 2012년 세종시 출범, 부처 순차 이전 → 2020년 여당 행정수도 완성 재추진 (국회 분원 등) → 헌법 개정 논의 불발, 현행법 내 부분 이전 진행 중 (국회 세종의사당 건립 등).
결과 실패. 수도 천도 무산, 서경 세력 몰락. 묘청 처형 등 혁신파 제거됨 . 개경 유교 보수세력 권력 강화, 고려 왕권 상대적 약화. 이후 문벌귀족 전횡 심화되어 1170년 무신정변의 배경이 됨 . 사상적으로는 유교 사대주의 득세, 자주적 기상 위축 . 부분 성공. 수도(법적)는 여전히 서울이나, 행정부 대부분 기능 세종시로 이전 완료. 세종시는 사실상 행정중심지로 정착. 다만 입법·사법부는 잔류하여 이원화 수도 상태. 관습헌법 문제로 완전 이전 미완. 서울 집중 완화 효과 일부 있으나 수도권 인구 여전히 50%↑ 차지 . 행정 비효율(이원화로 인한) 등 과제 남음.
역사적 의의 고려 중기 개혁 vs 수구의 Ideological 전쟁. *“자주세력(고구려 계승) vs 사대세력(신라 계승)”*의 상징적 대결 . 실패함으로써 고려 지배 이념이 보수화·유교화됨. 후대 민족주의 사학에서 자주민족운동의 선구로 재평가됨 . 권력 지방분산 시도가 좌절된 사례로, 중앙집권 구조 계속 유지. 현대 대한민국 중앙집권 구조 타파 노력의 결정체. 국가균형발전 담론을 구체화한 프로젝트로, 부분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헌정사적으로 수도 개념에 대한 논쟁 촉발. 지방 분권과 민주 발전의 시금석으로 평가. 완성 시까지 헌법 개정 등 남은 과제 존재. 향후 수도 개념의 재정립 필요성을 국민에게 인식시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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