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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백제본기 내용 추정 및 재구성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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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百濟本記)는 고대 한국 삼국 중 하나인 백제의 역사 기록으로, 현재 전하지 않는 실전 사서입니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참고한 백제삼서(百濟三書)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며, 백제 왕실 후손들이 일본에서 편찬한 사서로 추정됩니다  . 백제본기의 내용을 후대 문헌과 현대 연구를 토대로 추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백제 왕조 연표 (왕명・재위기간・계보)

• 온조왕 (재위 BC 18~AD 28) – 백제의 시조로 고구려 동명성왕(주몽)의 아들이라고 전합니다 . BC 18년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여 백제를 건국하였고, 초기 국호는 십제(十濟)였습니다 . 온조왕 이후 백제 왕위는 왕족 내에서 세습되기 시작합니다.
• 다루왕개루왕 (28166) – 온조왕의 직계 후손들이 계승하였으며, 이 기간에 백제는 주변 마한 소국들을 통합하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 초기 왕실 계보에는 온조계와 비류계 등 다양한 설화적 전승도 존재합니다 .
• 초고왕 (166~214) – 백제 제5대 왕으로, 영토 확장과 부여계 왕실의 권위를 강화했습니다 . 백제 왕실 계보상 초기 고이왕계와 초고왕계 두 계통이 교대로 왕위를 이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초고왕은 그 중 한 계열입니다 .
• 고이왕 (234~286) – 백제 제8대 왕으로, 중앙 통치체제를 정비한 왕입니다 . 6좌평과 16관등제를 정비하여 백제가 부족 연맹에서 국가 체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 고이왕 이후 책계왕→분서왕으로 이어지는 고이계 왕족과, 비류왕→근초고왕으로 이어지는 초고계 왕족 사이에 왕위 계승이 교차되었습니다 .
• 근초고왕 (346~375) – 백제 제13대 왕으로, 백제의 전성기를 이룩한 정복 군주입니다  . 남으로 마한 완전 통합과 가야 진출, 북으로 고구려 평양성 공격(371년 고국원왕 전사) 등의 업적을 세웠고, 요서 및 왜(일본)와도 교류했습니다  . 근초고왕대에 왕실 주도로 박사 고흥이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여 왕계와 역사를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 근초고왕 이후부터는 그의 직계 후손들이 연속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왕권이 더욱 안정되었습니다 .
• 근구수왕 (375~384) – 근초고왕의 아들로 부왕의 영토를 계승했으나 재위 9년 만에 사망했습니다 . 이 시기에 백제는 중국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며 외교를 개시하였고(372년) , 불교도 처음 받아들이게 됩니다 (384년 침류왕 때).
• 침류왕 (384~385) – 근구수왕의 장남으로 재위 2년 짧게 다스렸습니다 . 즉위년(384)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와서 불법을 전하자 불교를 공인하여 백제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파되었습니다 . 백제는 이때부터 불교를 국가 발전에 적극 수용합니다.
• 아신왕 (392~405) – 침류왕의 동생으로 즉위하여 고구려의 압박에 대응했습니다.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신왕 17년(408년경) 2월에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칙령을 내렸다”**고 전해져, 불교 진흥을 통한 국력 회복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397년 아신왕은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내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
• 전지왕 (405~420) – 아신왕의 태자 전지로, 일본에서 인질로 지내다 부왕의 서거 후 귀국하여 즉위했습니다 . 귀국 직전 아신왕의 다른 아들이 왕위를 노렸으나, 전지가 왕위를 이음으로써 왕통을 유지했습니다 .
• 비유왕・개로왕 (각 427455, 455475) – 5세기 전반 비유왕 때 신라와 나제동맹(433년)이 맺어져 고구려에 대항하는 남방 연합전선을 형성했습니다. 개로왕은 한성 시대 마지막 왕으로,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한성 함락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이로써 약 493년간 이어진 백제 한성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 문주왕・동성왕 (475477, 479501) – 고구려에 수도를 빼앗긴 후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신라의 원조로 목숨을 건져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주왕은 477년 귀족 해구의 반란으로 피살되었고, 왕손이 어리던 탓에 왕위가 잠시 혼란을 겪었습니다. 479년 왕족 동성왕이 추대되어 안정을 찾았습니다. 동성왕은 왕실 혼인으로 신라와 교류하고 국정을 재정비했으나, 501년 귀족 백가의 난으로 시해당했습니다 (백가는 왕에게 사위를 청했다 거절당하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전함).
• 무령왕 (501~523) – 동성왕 피살 후 즉위한 무령왕(=사마 왕)은 백제를 중흥기로 이끈 명군입니다. 중국 남조 양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며 국위를 선양했고, 내정을 안정시켰습니다. 그의 무덤이 공주 송산리에서 발굴되어 금제관식 등 많은 부장품과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는데, 지석에는 무령왕이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 백제왕” 등의 작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이는 무령왕 때 백제가 중국에 조공하고 우리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깨뜨려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자부할 정도로 국력이 강성했음을 보여줍니다 .
• 성왕 (523~554) – 무령왕의 아들로 즉위하여 백제 사비 시대를 연 군주입니다. 538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를 잠시 남부여(南夫餘)로 변경하였는데 , 이는 부여의 계승국임을 천명하여 왕실 권위를 높이고자 한 조치로 해석됩니다. 성왕은 중앙관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시켜 백제 문화를 황금기로 발전시켰습니다. 552년에는 일본 킨메이 천황에게 불상과 불경을 보내 불교를 전함으로써 동아시아 불교사의 획을 그었습니다(일본서기 기록) . 한편 고구려로부터 되찾은 한강 유역을 두고 동맹국 신라와 갈등이 발생, 관산성 전투(554)에서 성왕은 신라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고 맙니다 .
• 위덕왕 (554~598) – 성왕의 아들로 즉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백제를 수습했습니다. 위덕왕은 즉위 초에 일어난 관산성 패전의 충격 속에서 국력을 재건하며,  백제의 체제 정비를 완성했습니다. 중국 북방의 수나라 건국 후 598년 수에 사신을 보내고 고구려 정벌 협조를 타진하는 등 외교적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 위덕왕 말년에 이르러 백제의 국내 정치 주도권은 왕실이 장악하였고 국세가 한때 회복되었습니다.
• 혜왕・법왕 (598~600, 600) –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은 재위 2년 만에 붕어하고, 이어 법왕이 즉위하였으나 몇 달 만에 급서하여 왕위가 다시 교체됩니다. 이들은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아 백제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법왕은 즉위 전에 불교 경전 연구와 왕실 불교 보호에 힘썼다고 전합니다.
• 무왕 (600~641) – 법왕의 아우로 즉위한 무왕(=장왕)은 백제 말기의 패기 넘치는 군주입니다. 그는 왕비가 신라 출신 선화공주라는 설화(《삼국유사》의 서동요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무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 세력을 누르고, 익산 미륵사 등 대규모 사찰을 창건하여 불교 진흥과 왕실 위엄을 과시했습니다. 또한 신라에 빼앗긴 한강 상류 회복을 꿈꾸며 630년대 수차례 신라를 공격했고, 한때 신라의 대야성 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무왕대에는 당나라가 등장하고 신라와 당의 접근이 시작되자, 백제도 왜국과의 유대 강화를 통해 대응하는 외교 전략을 펴게 됩니다  .
• 의자왕 (641~660) – 백제 최후의 왕으로, 즉위 초에는 개혁정치를 펼치고 신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40여 성을 빼앗는 등 유능함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귀족 내분과 고립된 외교로 국세가 급속히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660년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당나라 소정방의 연합군이 백제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키면서 백제는 멸망했습니다 . 의자왕은 당에 압송되었고 700년 역사를 가진 백제 왕조는 막을 내렸습니다.
• *(참고: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豊)은 멸망 직전 일본에 체류 중이었는데, 후에 귀국하여 660~663년 복신・도침 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배함으로써 부흥군의 풍왕 정권도 끝났습니다 .)

※ 국호 변천: 백제 건국 당시 국호는 앞서 언급한 십제(十濟)였으나 곧 백제(百濟)로 바뀌었다고 전합니다 . ‘백제’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하나는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百姓樂從)”는 의미에서 나왔다는 설이며, 중국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백 가문이 바다를 건넜다(百家濟海)”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전합니다 . 또한 성왕이 538년 사비로 천도하며 일시적으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고, 고려 후기 《제왕운기》에는 이를 응준(鷹準)이라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 이러한 국호 변천은 백제가 부여계 왕통임을 내세우고 주변에 위신을 세우려는 시도로 풀이됩니다.

2. 주요 정치 사건 (왕위 계승, 내란, 국호・제도 변천 등)


● 왕위 계승과 내란: 백제는 건국 초기 온조왕의 직계로 왕위가 이어졌으나, 왕족 분파 간 경쟁 흔적도 나타납니다. 3세기 후반 고이왕 이후 왕위는 두 계통(고이왕계 vs. 초고왕계)이 번갈아 올랐는데, 이러한 경쟁은 근초고왕 즉위 후 왕통이 하나로 정리되면서 끝났습니다 . 백제사는 비교적 평온한 왕위 계승이 많았지만, 간혹 내란과 왕위 쟁탈도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침류왕 사후 왕위는 동생 아신왕이 이었는데, 일설에는 침류왕의 어린 아들이 배제되었다는 주장도 있어 왕위 다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아신왕이 죽었을 때는 인질로 있던 태자 전지 대신 막내아들 설례가 왕위를 노렸으나, 전지 태자가 귀환하여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안정되었습니다 . 한편 5세기 중엽 개로왕은 고구려의 공격으로 전사하여 계승이 중단되었고,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는 477년 귀족 해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 왕실의 먼 일가 동성왕이 추대되어 왕실을 재정비했고, 이후 백가의 난(501)으로 동성왕이 피살되자 왕족 무령왕이 즉위하여 반란 세력을 평정했습니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대규모 내란은 기록에 드물지만, 대신 세력의 배신으로 의자왕이 신라에 투항하는 등 왕실 권위가 실추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 제도의 정비: 백제는 3세기 후반부터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고이왕 재위 시기인 260년경에 6좌평(佐平)과 16관등 제도를 마련하여 관료 조직과 공복(公服) 제도를 확립하였습니다 . 이를 통해 왕명을 집행할 중앙관료 체계가 생겼고, 귀족 연합적 성격에서 왕권 중심의 관료국가로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 또한 법령을 정비하여 귀족들의 사치 금지, 형벌과 풍속 교화를 도모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납니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왕실 족보와 각 부족의 전승을 집대성한 역사서 《서기》를 편찬하여 왕통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유교 이념으로 왕권을 신성화하려 하였습니다  . 5~6세기 무령왕과 성왕 시대에는 지방 22담로에 왕족 파견, 수도 천도와 국호 변경(남부여) 같은 체제 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사비 천도 후에는 중앙관청을 재편하고 지방 행정구역을 정비했으며, 5부 5방 체제로 지방통치를 강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성왕은 예식진 등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율령 반포를 통해 백제의 법제도를 완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제도 정비를 통해 백제는 전성기에는 귀족 합의체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왕실 주도의 통치 기반을 확보하였고, 말기에는 왕권이 다소 약화되었지만 16관등과 22담로 등의 틀은 유지된 채 나당전쟁을 맞이했습니다.

● 국호와 국적 변경: 국호 변천은 앞서 연표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건국 당시 십제에서 곧 백제로 변경되었고 , 538년에는 한때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했습니다 . 이처럼 국호를 바꾼 일은 백제가 부여의 후계 국가임을 내외에 강조하여 위신을 높이려는 정책적 결정으로 이해됩니다. 한편 백제 왕실은 국호뿐 아니라 도읍지 이전도 두 차례 단행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475년 고구려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것이고, 두 번째는 538년 성왕 때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 일입니다. 사비 천도 시에는 국가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고 국호를 바꾸었으며, 왕성이 있던 한성 일대를 한산주로 삼아 옛 도읍 세력도 통제했습니다. 이처럼 국호와 도읍의 변화는 당시 백제의 정국 변화와 대외전략에 따라 이루어진 중요한 정치 사건입니다.

3. 대외 관계와 전쟁 기록 (고구려・신라・중국과의 관계)


● 고구려와의 관계: 백제와 고구려는 모두 부여 계통 국가로 초기에는 우호 혼인 관계 전승도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한반도 패권을 두고 지속적으로 충돌했습니다. 4세기 이전까지는 기록이 드문 편이나, 4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인 전쟁이 나타납니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북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371년 고구려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만큼 강력했습니다 . 이 승전으로 한때 고구려의 남진이 저지되었고 백제는 대동강 이남까지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그러나 곧 고구려가 반격하여 4세기 말 광개토왕의 남하로 백제가 상당한 영토를 잃습니다. 광개토왕비문에는 ④375~396년 사이 고구려가 “백잔(백제)을 공격해 성 58개, 마을 700여 곳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 고구려의 공세로 백제가 큰 타격을 입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5세기 중반 장수왕 때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펼쳐 475년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백제 왕도와 한강 유역을 상실하는 국난을 겪고, 수도를 남쪽 웅진으로 옮겨 재기하게 됩니다.

웅진천도 후 백제는 고구려와 직접 대결을 피하면서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고구려에 맞섰습니다. 5세기 후반부터 지속된 나·제 동맹으로 두 나라는 551년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 일부를 탈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그 영토를 독차지하자, 백제 성왕은 분노하여 신라를 공격하다 전사합니다(554년). 이후로 백제는 고구려와 관계를 재정립하여, 6세기 말 위덕왕~무왕 때는 고구려와 연대하여 신라를 협공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642년 의자왕과 고구려 연개소문은 군사동맹을 맺고, 백제가 신라의 40여 개 성을 공략할 때 고구려도 신라 북쪽을 동시에 압박했습니다. 이러한 백제-고구려 공조는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 요청을 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당(羅唐) 연합군이 강력히 대응하면서, 백제와 고구려 모두 660년대에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 신라와의 관계: 백제와 신라는 처음엔 경쟁 관계였으나, 5세기에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하였고 6세기 중엽부터는 적대 관계로 돌아섰습니다. 초기 백제 건국 전설에는 신라의 전신 사로국과 관계가 거의 없지만, 근구수왕 때 신라 내물왕에게 사신을 보내 교류한 기록이 전합니다. 5세기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이 나제동맹(433년)을 체결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공동 견제하였고, 이 동맹은 성왕 대까지 약 12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동맹 기간 중 백제와 신라는 서로 사신 교환과 혼인 등 우호를 다졌으며, 함께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551년 한강 유역 탈환 후 신라 진흥왕이 백제를 배신해 점령지를 독차지하자 양국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습니다. 백제 성왕은 이에 신라를 응징하려다 전사하였고 , 이후 백제는 신라에 대한 복수전을 여러 차례 전개합니다. 백제 무왕은 630년대 신라 서쪽 변경을 공략하여 대야성 등을 함락시켰고, 의자왕도 즉위 초 신라 40여 성을 빼앗으며 한때 우위를 점했습니다. 하지만 신라가 당과 손잡고 반격하자 백제는 열세에 놓였고, 마침내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신라는 백제 멸망 후 옛 백제 땅을 점령하여 소부리주 등의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는 등 한반도 통일 전쟁을 이어갔습니다.

● 중국과의 외교: 백제는 중국 왕조들과도 일찍부터 교류하였습니다. 최초의 공식 교류는 근초고왕 27년(372) 백제가 동진(東晋)에 사신을 보낸 기록으로, 이에 대해 동진은 그해 6월 근초고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이는 백제가 이때부터 중국의 조공책봉 관계에 편입되어 외교를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백제는 중국의 남북조 왕조와 꾸준히 교류했습니다. 5세기 남조의 송(宋)・제(齊)・양(梁)과 사신 왕래가 있었고, 북조의 북위(魏)에도 국서를 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무령왕 대에는 중국 양나라 무제와 긴밀히 교류하여, 521년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누차 고구려를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累破句麗 更爲強國)고 자부하는 등 백제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 양나라 황제는 무령왕을 영동대장군 백제왕 등에 책봉하며 우호를 다졌고, 양 직공도에는 백제 사신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6세기 후반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도 백제는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위덕왕 45년(598) 백제는 수에 사신 왕변나를 파견하여 조공하고, 동시에 수 문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부추기는 등 적극적 외교를 펼쳤습니다 . 이는 백제가 숙적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새로운 패권국 수와 손잡으려 한 것으로, 한때 수 조정도 백제의 정보를 참고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나라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618년 당나라가 새롭게 들어서자 국제 정세가 바뀌었습니다. 초기에는 백제도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우호를 도모했으나, 당이 신라와 연합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백제는 당과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 .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645) 시에는 백제가 배후를 노리기도 했고, 당 고종 때 신라와 당의 군대가 직접 백제를 공격하자 끝까지 항전했습니다. 백제 멸망 후에는 왕자 부여융이 당에 투항하여 당의 웅진도독부 도독으로 임명되고 백제 땅은 당의 군정 지배를 받았으나, 곧 신라에 의해 축출되었습니다. 이처럼 백제의 중국 외교는 초기에는 문화 교류와 국제 무역, 후기로 갈수록 군사 동맹과 세력 균형 외교의 양상을 띠었으며, 중국 정세 변화에 따라 흥망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4. 일본(왜)과의 관계 (외교・인질・기술 전수・혼인 동맹)


백제와 왜국(일본)의 관계는 오래되고 특별했습니다. 백제 건국설화에서 온조의 형 비류가 죽은 뒤 그 무리가 왜로 건너가 일본 천황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승이 일본 자료에 있을 만큼, 양국 관계는 신화적 수준에서 언급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양국 교류는 근초고왕 시대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근초고왕은 요서 진출과 함께 왜와도 친선을 도모하여, 367년경 왜왕에게 칠지도(七支刀)라는 강철제 칼을 선물로 보냈다고 합니다.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현존하는 칠지도 명문에 “백제왕이 태양(太)이 되는[태후?] 왕에게 이 칼을 헌상한다”는 글이 있어, 백제-왜간 군사동맹의 증표로 여겨집니다 . 실제로 369년(근초고왕 24년) 백제군과 왜군이 함께 가야 지역을 공격해 비자발 등 7국을 평정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이는 4세기 후반 백제와 왜가 군사 협력을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인질 교환: 백제는 우호 증진과 원군 확보를 위해 왕족이나 왕자를 왜국에 인질로 보내는 외교 관행을 가졌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397년 아신왕은 태자 전지를 직접 왜국에 보내 맹약을 굳혔습니다 . 전지태자는 훗날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으나(전지왕), 백제왕자가 일본에서 성장한 최초 사례를 남겼습니다. 461년에는 개로왕의 형제 곤지가 왜에 건너갔는데, 곤지는 현지에 정착하여 왜왕의 외척이 되었고 그 자손이 훗날 일본 귀족 곤지 가문(아치계)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 또한 무령왕의 아버지로 알려진 여린(율리)도 곤지와 함께 일본에 머물렀다가, 그의 아내가 일본 규슈에서 왕자를 출산하였는데 그 아이가 바로 훗날 백제에 돌아와 왕이 된 무령왕입니다 . 《백제신찬》에 따르면 “개로왕이 455년경 동생 곤지를 일본에 보냈는데, 곤지의 부인이 도중에 섬에서 아들을 낳아 돌려보냈고, 그 아이가 무령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 이처럼 백제 왕족의 일부는 일본에서 성장하거나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러한 인연이 양국 왕실 교류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513년 무령왕이 태자 순타를,  sixth century mid성왕이 왕자 임성을 왜에 보낸 일, 7세기 초 무왕이 아들 부여 풍(풍장)을 왜국에 보낸 일 등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 특히 부여풍은 훗날 백제 멸망 후 귀국하여 부흥운동을 이끈 인물로, 일본 망명 시절의 인맥을 통해 지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외교와 혼인 동맹: 백제와 왜는 필요에 따라 혼인 관계를 맺어 동맹을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서기 흥륜기(雄略紀)에 의하면, 5세기말 일본 유랴쿠(웅략) 천황이 백제에 여인을 요구하여 백제 개로왕이 미녀를 보냈다고 합니다 . 그러나 이 지진원(池津媛)이라는 여인이 황제의 행차를 거역하고 다른 남자와 통정하자, 분노한 천황이 그들을 화형시켰습니다 . 이 사건을 백제측 기록인 《백제신찬》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개로왕 6년(458년) 일본 천황이 사자를 보내 여자를 구하니, 백제는 모니부인의 딸을 꾸며 적계여랑이라 부르고 천황에게 바쳤다” . 이어서 그 여랑(지진원)이 처형되자 개로왕은 옛부터 여자를 공물로 바쳤는데 예우가 없으니 앞으로는 보내지 말라며 노하여, 대신 자신의 아우 곤지를 보내 일본과의 관계를 잇도록 했다고 합니다 . 이 서술은 백제가 왕실 여성의 혼인을 통해 일본과 결속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에도 백제 공주들이 일본 황실에 시집갔다는 기록이 일부 전합니다. 6세기에는 일본 킨메이 천황의 비(妃)로 백제 성왕의 딸이 들어갔다는 설이 일본 측 genealogies에 나타나고, 7세기에는 백제 멸망 후 왕족 부여덕왕의 딸이 일본 왕족과 혼인하여 일본 천황가의 외손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일본 후손 중에는 백제 왕실의 후예가 많아, 간무 천황(재위 781~806)은 모계로 백제 무령왕의 5세손이라는 것이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혼인 관계와 혈연적 연결은 양국이 형제국가적 유대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고, 문화・기술 전파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기술・문화 전수: 백제는 한반도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적극 전파하여 일본 고대 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4~5세기 경 일본에 한자가 전해지고 유학이 보급되는데, 이는 백제 학자들의 공헌 덕분이었습니다.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왕인 박사라는 백제 학자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건너가 일본 황태자의 스승이 되어 글자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 (국내 사서에는 언급이 없으나 일본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며, 일본에서는 왕인을 “학문의 시조”로 추앙합니다.) 그보다 앞서 아직기라는 백제 사람이 한자를 전했다는 설도 있으며, 이를 계기로 일본 조정이 백제에 유학사를 요청하여 왕인이 파견되었다는 식으로 전해집니다 . 이렇듯 백제는 문자와 유교 경전을 일본에 전하여 일본 왕실과 귀족 사회의 학문 발전을 도왔습니다.

또한 불교 역시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파되었습니다. 538년(또는 552년) 백제 성왕은 일본 킨메이 천황에게 불상과 불경, 승려 등을 보냈는데, 이는 일본에 최초로 불교를 공식 소개한 사건으로 일본 불교사의 기원이 됩니다 . 이 사신으로 파견된 노리사치계(노리사치신)라는 백제 승려는 일본 궁정에서 불교 의식을 거행하고 불경을 번역해주며 불교를 퍼뜨렸습니다 . 이후에도 관륵(백제 승려로 천문지리 전문가) 등 많은 백제 승려와 기술자가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관륵은 7세기 초 일본에 불교 천문, 역법, 지리서를 전하여 일본이 독자적 역법을 갖게 했습니다 . 백제의 혜총・혜편 등의 고승들은 일본에서 불교 교단 형성에 참여했고, 미마지라는 백제 출신 예인은 일본에 기악(백제가면극)을 전하여 일본 궁중 예능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공예 및 건축에서도 백제 장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6~7세기 백제가 일본에 보낸 공예 기술자와 석공, 목수, 화가 등은 일본 아스카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 주역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본 최초의 본격 사원인 아스카데라(飛鳥寺)와 세계문화유산 호류지(법륭사) 건축에 백제 출신 공장(工匠)들이 참여하여, 백제 양식의 미를 전수했습니다. 호류지 금당의 불상 조각도 백제계 도래인 도리(止利) 사인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귀족 사회에서 유행한 칠기, 금속공예, 직물, 와당 제작 기술 등에도 백제 기술자들이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백제에서 온 다수의 도래인(渡來人)들이 각기 한자교육, 불교, 의약, 음악, 공예 등의 전문기술을 일본에 퍼뜨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제의 문화 전수로 인해 일본 학계에서는 “백제 없이 일본 아스카문화도 없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백제는 고대 일본 문명의 스승 역할을 했습니다.

5. 백제본기의 후대 인용과 기록 (삼국사기・일본서기 등 속 백제본기 자료)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 후대 문헌에는 《백제본기》의 일부 내용이나 전거가 인용되어 전해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실전된 백제본기의 일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삼국사기 속 백제 기록: 고려 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백제사 서술에 백제본기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백제 계통의 고기(古記)나 옛 전승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 예컨대 《삼국사기》 온조왕 즉위년조에는 “또 어떤 설에 따르면…”이라는 문장이 등장하는데, 주석에 “(이 내용은 출전을 밝히지 않았으나 백제본기 1 온조왕조의 기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이는 온조 건국 신화의 다른 전승을 소개한 것으로, 삼국사기가 백제 측 기록을 참조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삼국사기》 근초고왕 34년조 주석에는 “古記에 이르기를: ‘백제가 나라를 세운 이래 문자로 사무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때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가지게 되었다’”는 구절이 실려 있습니다 . 이는 백제본기의 원전으로 추정되는 고대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근초고왕대 고흥이 역사서 《서기》를 편찬했다는 내용을 전해줍니다 . 이처럼 삼국사기는 곳곳에 “〜라고 전한다” 형식으로 백제 국내사료를 인용했고, 이러한 사료들은 백제본기나 그 모체인 《서기》 등에 기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 다만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백제인의 사서를 직접 보지 못해, 신라를 거쳐 전해진 단편 자료와 중국 사서 기록을 결합하여 백제본기를 편찬했습니다 . 그 과정에서 일부 연대 오류나 모순이 수정되지 못하고 남기도 했는데, 이는 삼국사기가 편년 작업시 한계 자료로 고심했음을 뜻합니다 .
• 일본서기 속 백제본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의 정사 《일본서기》에는 백제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기록들이 나오는데, 편찬자들이 참고했다고 명시한 백제삼서(백제기・백제신찬・백제본기) 가운데 특히 백제본기를 많이 인용했습니다 . 일본서기 게이타이 천황기와 킨메이 천황기에는 “百濟本記云(백제본기에 이르기를) …” 형태로 인용표시가 달린 기사가 18곳 등장하며, 그 외에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백제본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다수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일본서기 게이타이기에는  531년 게이타이 천황의 사망 연도를 놓고 하나는 재위 25년(531) 설, 다른 전승은 재위 28년(534) 설을 적은 뒤, “여기서는 백제본기의 기록을 채택했다”고 주를 달았습니다 . 그리고 그 백제본기의 기록으로 “태세 신해년(531) 3월에 백제가 안라(가야의 안라국)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그달에 고구려에서 왕 안(安, 안장왕)을 시해했으며, 또 일본 천황과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 하더라”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 이 기사는 백제 입장에서 연대를 적은 것인데, 고구려 안장왕이 피살되고 일본 왕실에 변고가 있었음을 백제가 파악한 정황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 연구자들은 이 기록을 토대로 안장왕의 죽음이 고구려 내란에 의한 비정상적 최후임을 추론하고, 백제본기 기사가 신빙성 높다고 평가합니다  .
또 다른 예로, 일본서기 **킨메이기(欽明紀)**에는 554년 백제 성왕의 최후를 다르게 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려다 복병에 피살되었다고만 간략히 적었으나, 일본서기는 백제본기에 근거한 듯 성왕이 소규모 수행원을 데리고 간 이유를 설명합니다. 즉 “성왕이 먼저 전선에 나가 있던 아들 위덕태자를 위로하러 50기를 거느리고 갔다”, 이를 신라군이 알아채고 매복 공격하여 성왕을 죽였다는 식으로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 심지어 성왕을 죽인 신라 병사의 이름과, “천한 종이 명군을 죽이면 그 악명이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이다”라며 망설이는 대사를 넣고, 성왕이 스스로 칼을 풀어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일화까지 전합니다  . 이처럼 일본서기의 백제 관련 기사는 삼국사기에 비해 인물·지명·관직명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이야기 전개도 세밀한데, 이는 백제본기 등의 백제 사서를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 실제로 일본서기에 나온 백제 관직명 중 좌평・달솔 등 고위 관등은 삼국사기에도 보이지만, “덕(德)”자가 들어가는 중하위 관직명과 다수의 실명 인물들은 오직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를 통해 당시 백제본기에는 백제 관료 명단과 관직체계, 왕실과 왜국의 소통 내용 등이 상세히 실려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기타 문헌: 《삼국유사》나 일본의 《고사기》 등에서도 백제본기의 전승으로 보이는 내용이 일부 보입니다. 삼국유사는 주로 설화를 모은 책이라 공식 사서 인용은 적지만,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서동요 설화 맥락)를 암시하거나, 백제 불교 전래설화 등을 전합니다. 《고사기》에는 백제에 소재한 한인(중국인) 왕인(和邇吉師)이 일본에 논어를 전한 일화가 간략히 언급되고 , 《일본서기》에는 왕인을 비롯한 수많은 “한인(漢人)” 계통 도래인들의 백제 출신 배경과 전래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일본서기 오진기(応神紀)에는 “백제국 박사 아직기(阿直岐)가 와서 한자를 가르쳤고, 이어 왕인을 보내왔다”는 식으로 백제와 문화교류 사실을 기술합니다 . 또한 일본서기는 곳곳에서 “백제본기/백제기/신찬에 이르기를…”이라며 세 가지 백제 사서를 번갈아 인용합니다 . 이를 비교하면 《백제기》는 주로 45세기 자료, 《백제신찬》은 백제 왕족 곤지 계통 집안 전승으로 5세기 후반무령왕 이전 자료, 《백제본기》는 무령왕위덕왕 시기(501557년) 중심의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중국 측 사서에서도 백제본기의 내용 편린이 확인됩니다. 양나라 때 편찬된 《양서(梁書)》 백제전에는 521년 백제가 보낸 국서 내용이 반영되었고 , 《수서(隋書)》 백제전에도 백제말기 사신 연문의 활약 등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동서양 사료들을 종합하면 백제본기는 연월일까지 명확히 쓰인 편년체 역사서로서 백제 국내사와 대외관계를 풍부하게 담고 있었고 , 후세 여러 문헌에 그 일부가 인용·전승되어 백제사의 빈틈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6. 백제본기 내용 복원에 대한 학술적 연구


백제본기가 현존하지 않음에도, 이를 복원하려는 학술적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학자들은 삼국사기・일본서기 등의 관련 기록과 고고학적 발견 등을 통해 백제본기의 원모습을 추정합니다.
• 편찬 시기와 주체: 백제본기의 원사료는 백제 본국에서 편찬되었으며, 편찬 시기는 대개 6세기 중엽으로 비정됩니다 . 일부 연구자는 위덕왕 즉위 전후(6세기 중반)에 백제 왕실 주도로 편년체 사서를 편찬했을 것으로 보고, 이것이 훗날 일본에 전해져 백제본기의 모체가 되었다고 봅니다 . 실제 《백제본기》로 전하는 내용이 위덕왕대를 크게 넘지 않는 점, 또 월·일 간지까지 명기된 정확한 연대 기록을 담고 있는 점은 당시 백제 조정의 공식 역사서였음을 시사합니다 . 백제본기는 편찬 후에도 백제 멸망 때까지 계속 보완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660년 백제가 망하면서 원본은 유실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행히 백제 왕실 후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가전(家傳) 기록으로 보존한 덕에 자료가 전승되었습니다 .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본기는 바로 이 일본 내 백제계 후손(예: 일본 귀화 후 백제왕씨로 봉해진 귀족)이 가문 전승으로 펴낸 책으로 추정되며, 실제 편찬 실무에는 일본 조정 학자들도 참여하여 일본 천황 중심 시각으로 일부 개찬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예컨대 백제삼서에는 일본 군주를 “천황”이라 칭하고 일본을 “일본”이라는 당시 백제에서는 쓰지 않던 용어로 표기한 점 등은 편찬 과정의 왜국화 흔적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 역사 내용과 고유 명사들은 백제 원사료가 비교적 온전히 반영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
• 복원 연구 사례: 현대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흩어진 백제삼서 인용문들을 모아 분석함으로써 백제본기의 대략적 구성과 서술범위를 재현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 1970년대 정중환의 연구나 1990년대 이근우의 박사논문 등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응신기 등 왜국 기사 중 백제계 기록을 선별하고, 삼국사기와 대조하여 백제본기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였습니다. 최근에는 백제 멸망 직전 백제 유민이 편찬했다는 설을 중심으로 연구가 활발하며, 백제본기 자체도 통일된 체제 없이 시기에 따라 기술 양식의 차이가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 2020년대 박재용 등의 연구에서는, 근초고왕대 편찬된 《서기》 이후 백제에서 꾸준히 사서 편찬이 이뤄졌고, 무령왕~성왕대에 왕실 주도로 대대적인 역사 편찬 사업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 이 시기 수도 천도와 국호 변경, 대외 팽창 등을 계기로 새로운 사서가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사서는 왕실 족보(王曆)는 물론 백제의 제도 정비 상황, 가야 및 왜와의 외교까지 포괄했을 것으로 봅니다  . 일본서기에 중요하게 인용된 백제삼서는 바로 이러한 백제 후기 편찬 사서의 후손으로, 백제 무령왕~성왕대에 작성된 사료들이 원자료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 실제로 백제삼서의 기사는 한국과 중국 자료에 없는 백제의 생생한 역사를 전하고 있어, 가야사나 한반도 남부 정세까지 풍부하게 담겨 있습니다  . 특히 백제 왕계, 인명, 관직, 사건 전개 등의 측면에서 백제본기의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원형에 가까운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평가입니다 . 예컨대 고구려 안원왕 시해나 성왕 최후의 정황 등은 앞서 본 대로 백제본기계 사서에만 나오는 내용으로, 이를 통해 그간 미흡했던 백제사의 일부 공백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
• 사료적 의의: 백제본기는 비록 사라졌지만,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이 일본서기 등으로 전해져 백제사 연구의 귀중한 1차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 삼국사기의 백제본기가 신라측 자료와 중국 자료의 혼합으로 다소 간략하고 왜곡된 데 비해, 백제 자체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백제본기는 백제의 자체 역사인식과 관점을 반영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 물론 일본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왜국 중심관에 따라 윤색되었겠지만, 그럼에도 원천 자료가 백제에서 작성된 것이므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 오늘날 학계에서는 일본서기의 해당 기사들을 면밀히 분석하여 백제본기의 원문을 추증하고, 나아가 백제가 남긴 다른 사서들(《서기》, 《백제기》, 《백제신찬》 등)과의 관계도 규명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연구는 백제사가 가진 7세기 이전 공백을 메우고, 삼국사의 비교 연구 및 한일 고대관계사를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백제본기 관련 중국・일본 사료의 지속적인 발굴과 교차 검토를 통해, 잃어버린 백제 역사의 퍼즐 조각들이 더욱 선명히 드러나리라 기대됩니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백제본기, 일본서기(게이타이기・킨메이기 등), 삼국유사, 고사기, 양서・수서 등 중국 정사, 한국고대사 관련 현대 논문   . (이상에서 인용된 원전 표기는 괄호 안 출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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