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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실전된 일본 고대 사서 《구사(舊辭)》의 내용과 연구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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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사기》 서문에 나타난 구사의 성격과 역사적 맥락


구사(舊辭)는 8세기 초 편찬된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의 서문에 등장하는 자료로, 고사기의 주요 편찬 원천 중 하나였다. 고사기 서문에 따르면, 덴무 천황(天武天皇)(재위 673–686)은 각 유력 가문들이 보관해온 옛 제기(帝紀)(황실 계보)와 구사(옛 이야기 전승)에 오류와 가필이 많음을 우려하였다 . 그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히에다노 아레(稗田阿禮)라는 기억력이 비상한 궁정 시종에게 제기와 구사의 내용을 구술로 암기하도록 명하였다 . 그러나 천황의 갑작스러운 붕어로 편찬 사업이 중단되었고, 이후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재위 707–715)이 즉위한 뒤 와도(和銅) 4년 9월 18일(71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레가 외워 전한 구사 내용을 오노 야스마로(太安万侶)에게 받아 적게 하여 책으로 편찬하게 하였다 . 그 결과 이듬해 와도 5년 1월 28일(712년)에 완성된 책이 바로 《고사기》이다 . 고사기 서문은 이러한 편찬 경위를 밝히며, 당시 제왕의 계보와 옛 전승(帝紀及び先代旧辞)를 올바르게 정리하여 후세에 전하려 한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

이러한 맥락에서 구사의 성격은 일본 왕실과 귀족 사회에 전해오던 옛 이야기와 전통으로서, 구전이나 문헌 형태로 축적된 역사의 사실(정사)과 허구(가공)가 혼재된 자료였다 . 덴무 천황은 나라의 기초 기록인 제기와 구사가 국가 통치의 근간(邦家之經緯)임을 강조하며, 그것들이 잘못 전해져 후대에 사라질 위험을 우려하였다  . 따라서 구사의 편찬 목적은 단순히 옛 이야기를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곡된 계보와 전승을 바로잡아 왕실의 정통성과 국가 기원의 진실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 이는 동시대 일본이 당나라 등 외국 문명을 받아들이며 자국의 고유한 역사와 신화 체계를 체계화하려던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7세기 초에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와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주도하여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国記)》 및 여러 본기(本記, 홍기; 각 부족의 기본 기록)를 편찬하려 한 적이 있었으나, 645년 이시 사건으로 자료들이 소실되어 좌절된 바 있다 . 이러한 선행 시도의 실패 이후, 덴무 천황이 제기와 구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정리하도록 지시한 것은 일본 왕실의 권위 확립과 역사 편찬의 필요성이 절박했음을 보여준다  .

구사 관련 역사 연표:
• 620년 – 쇼토쿠 태자와 소가노 우마코가 《천황기》, 《국기》 등 역사서를 편찬(※645년 이시Incident로 소실) .
• 681년 (덴무 천황 10년) – 덴무 천황, 제기(帝紀)와 “상고의 제사(上古諸事)” 편찬을 명령 (구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 .
• 712년 – 《고사기》 상권 서문 완성: 히에다노 아레가 외운 제기와 구사의 내용을 오노 야스마로가 책으로 편찬하여 헌정 .
• 720년 – 《일본서기(日本書紀)》 완성: 왕명에 따라 편찬된 공식 역사서로, 제기와 구사 등 다양한 사료를 집대성.
• 807년 – 《고어습유(古語拾遺)》 편찬: 궁중 제사 담당 가문 이미베(忌部) 씨의 **히로나리(広成)**가 고사기・일본서기에 누락된 옛 전승을 보완하기 위해 집필(‘옛말의 줍어모음’이라는 의미의 신화전승집).
• 9세기 초(806–812년경) –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 성립: 일찍이 쇼토쿠 태자 저술로 위장된 사서가 출현하여 고사기・일본서기보다 오래된 역사로 중시되었으나, 에도 시대에 **위서(僞書)**로 판명됨 . (전10권, 천지 개벽부터 스이코 천황까지 기록하였으며,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짜맞춘 것으로 밝혀짐. 다만 일부 권은 다른 문헌에 없는 내용과 특정 씨족 전승이 실려 있어, 상실된 고문헌 조각을 반영한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함 .)
• (이후에도 에도 시대 국학자들의 고사기 재평가와 20세기 이후의 학계 연구가 이어짐 — 아래 현대 학설 참조.)

2. 《구사》에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요 내용


《구사(舊辭)》는 현존하지 않아 직접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반영된 서술을 통해 그 주요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고사기 자체가 “신화, 전설, 노래, 계보, 구술 전통 및 고대사의 줄거리”를 망라한 고대 기록으로서 일본 열도와 신(神)들, 황실 기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이러한 고사기의 신화·전승 부분이 바로 구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 요컨대 구사는 상고 시대부터 전해온 각종 신화와 설화, 왕실 및 유력 씨족들의 전설적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파악된다 . 또한 그 내용은 궁중 의례나 풍습, 국가 기원의 신성한 사건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 아래에 구사의 주요 내용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누어 정리한다.
• 신화 전승: 일본 신들의 창세 신화와 천지 개벽, 국토 창조, 신대(神代)의 신족 계보 등이 구사의 핵심을 이룬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편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이자나기·이자나미, 스사노오 등의 이야기가 그러한 전승이다. 예컨대 천손강림이나 이자나기의 미소기(禊) 등의 신화는 구사에 전해지던 것을 기록한 것으로, 후대 신토(神道) 의례의 기원을 설명해준다. 실제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들은 후대에 미소기 정화 의식 등 여러 신토 관행의 영감이 되었으며, 신토 신학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활용되었다 . 구사는 이처럼 신화적 서사를 통해 제사의 근거를 제공하고, 황실이 천손(天孫)의 후예임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 제례・의례 절차: 구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 형식의 전승집이었지만, 고대 제례(祭禮)와 의식 절차의 유래나 중요성도 이야기 속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아마테라스가 천암석(天岩石) 동굴에 숨었다가 다시 나오는 일화는 일본 신토의 가구라(神楽) 의 기원담이고, 니니기 노 미코토의 강림 설화는 황실 제사의 근거 신화로 여겨진다. 이러한 의례 기원담을 통해 구사는 제사의 전범(典範)을 전승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의식 절차를 조목별로 기록했다기보다는, 의례의 기원과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신화와 사건을 전하는 서사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후대에 편찬된 《연기식(延喜式)》의 신토 기도문(노리토祝詞) 등에서도 고사기・서기의 신화를 인용하여 제사의 정통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구사의 내용이 제례와 신앙의 맥락에서 이해되었음을 보여준다.
• 왕족・신족의 계보: 구사는 일본 천황가와 신들의 족보와 계도(系圖)를 스토리와 함께 전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기(帝紀)》가 엄밀히는 천황들의 정통 계보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었다면, 구사는 그러한 계보에 얽힌 신화적 사건과 일화를 부연한 것으로 이해된다 . 가령 초대 진무 천황의 동정(東征) 설화나 황실과 신족의 혼인담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구사는 이러한 황실의 시조신과 역대 임금들의 위업을 이야기로 엮어 서술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천황 계보를 보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력 씨족들을 황실 계보에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 실제로 고사기 후반부에는 여러 황족・호족의 가계가 신화적 조상과 연결되어 기록되는데, 이는 구사의 계보 전승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 한편 津田左右吉(쓰다 소우키치) 등의 연구에 따르면, 구사의 이러한 서사 부분은 대략 5세기 말~6세기 초 무렵(즉, 무레츠 천황 시기)까지의 왕실과 씨족 전승을 다루고 있으며, 그 이후로는 구전 소재가 줄고 황실 실록 위주로 변한다고 한다 . 실제로 고사기에서 무레츠 천황(武烈天皇)까지는 신화와 설화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그 이후 계보 위주의 서술로 급격히 성격이 바뀌는데, 이는 구사에 담긴 옛 이야기 전승이 무레츠 천황 대까지였음을 시사한다는 분석이다 .
• 구술 전통과 설화: 구사라는 이름 자체가 예로부터 구전되어 온 옛 말(옛 이야기)를 뜻하므로, 그 내용은 문자로 쓰이기 이전에 오랜 구술 전통으로 전해 내려온 설화의 집대성이었다. 따라서 구사에는 단순한 역사 기록과는 다른 구어체적인 표현, 노래와 시가(歌), 화자(語り部)의 관점 등이 담겼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고사기》에는 100여 수의 일본 고대가요(歌謠)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구사가 구술될 때 함께 전해지던 노래나 축사(祝詞)였을 수 있다. 또한 지방 또는 특정 씨족마다 전해오던 토착 전설들도 구사의 일부를 구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러 지방의 영웅담, 지명 설화, 신사 연혁담 등이 그 예로, 이러한 요소들은 후대에 편찬된 《풍토기(風土記)》나 씨족의 가전(家傳)에 일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를 통해 구사는 단순히 황실 이야기뿐만 아니라 각 지역과 가문의 고유한 구비 설화까지 포괄하는 다원적 성격의 전승 모음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구사는 일본 고대 사회의 신화적 역사와 전통을 망라한 설화집으로서, 신들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에 이르는 이야기, 그 속에 담긴 제의(祭儀)와 관습의 기원, 황실과 씨족의 계보 전승, 구비문학적 요소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다양한 내용은 훗날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찬의 밑거름이 되었고, 일본 문화의 뿌리인 신토 신화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제기》 및 《고사기》와의 관계 – 구사의 편찬과 고사기 구성


《제기(帝紀)》와 《구사(舊辭)》는 본래 덴무 천황이 동시에 정리하고자 했던 쌍축(雙軸) 역사 자료였다. 앞서 고사기 서문에서 보았듯이, 덴무 천황은 황실 계보(帝皇日継)와 선대의 옛 이야기(先代旧辞)를 함께 암송・정리하도록 명하였다  . 여기서 제기는 역대 천황의 **계보와 치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정사(正史)에 해당하고, 구사는 각 시대에 전해 내려온 전설과 설화 등의 집록(集錄)에 해당한다 . 즉 제기=왕실 족보, 구사=고대 설화 기록으로 이해된다. 두 자료 모두 원래는 구전(口傳)으로 전승되던 것을 문헌으로 筆録(필록)한 것이며, 세월이 흐르며 여러 이설(異說)이 생겨 체계가 어지럽게 된 터였다 . 덴무 천황은 이들을 종합 정리하여 정확한 역사서로 편찬하고자 했고, 그 미완의 사업을 계승한 것이 겐메이 천황 치세의 고사기 편찬이었다 .

고사기는 바로 이 제기와 구사의 내용을 종합 편찬한 책이다. 엄밀히 보면 고사기의 신화 및 전설 부분(上卷)은 구사의 설화 전승에 크게 의존하였고, 중・하권의 천황기 부분은 제기의 계보 기록을 바탕으로 하였다 . 그러나 하나의 책 안에서 설화와 계보가 섞여 있기 때문에, 구사 = 설화만, 제기 = 계보만이라고 완벽히 분리하기는 어렵다 . 실제 고사기는 신대(神代)부터 오진・닌토쿠 천황기까지는 신화와 전설이 서술되다가, 게이타이・긴메이 천황 이후로는 비교적 사실적인 연표와 계보 중심으로 내용이 진행된다. 이는 고사기 편찬 시 구사의 설화 부분과 제기의 계보 부분을 결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Tsuda Soukichi의 연구에 따르면, 고사기의 이야기 부분(구사에 연원한 부분)은 무레츠 천황 시대까지로 끝나고 그 이후는 거의 계보만 기록되는 점, 《일본서기》에서도 같은 시기(무레츠 천황 무렵)를 경계로 서술 성격이 전설에서 연대기로 급변하는 점을 지적한다 . 이러한 공통 현상은 구사의 전승 내용이 무레츠 천황 대까지였고, 그 이후의 기록은 제기(실록)에 의존했음을 시사한다 . 다시 말해 구사는 신화와 옛 이야기의 부분에서 고사기의 전반부를 형성하고, 제기는 황실 계보 부분에서 고사기의 후반부를 형성한 셈이다.

구사가 고사기 편찬에 미친 영향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예를 들어, 고사기에는 특정 표현이나 고어(古語), 노래 등이 나오는데, 이는 옛 구술전승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사기의 서술 방식은 중국 한문체로 쓰이되 일본어 고유명사는 음(音)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구사의 구전 내용을 한자로 옮겨적은 기법으로 볼 수 있다. 즉, 구사의 이야기를 최대한 원형대로 담아내려 했기 때문에 한문의 문장 구조 속에 일본어식 고유 표현과 시가를 삽입한 것이다. 이는 고사기 편찬자가 구사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노력했음을 보여주며, 구사가 고사기의 서술 어투와 구조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고사기》 서문 자체에 구사(舊辭)의 잘못을 한탄하고 제기(先紀)의 오류를 바로잡는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로 미루어 고사기 편찬의 직접적인 동기가 구사의 전승을 올바르게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실제 편찬 과정에서도 야스마로는 히에다노 아레가 암송한 구사를 충실히 받아적되, 불필요한 중복이나 황당무계한 부분은 걸러내고 사실로서 납득되는 이야기와 정통 계보만을 취사선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고대의 역사 편찬이 본디 두 갈래(제기와 구사)를 한 쌍으로 엮는 형태를 띠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 이는 중국 정사의 편년체나 기전체와 달리, 일본에서는 한쪽에는 연표와 계도(帝紀)를 기록하고 다른 한쪽에는 설화와 전승(旧辞)을 기록하여 쌍둥이 역사서로 편찬하는 독자적 전통이 있었다는 견해이다 . 고사기의 편찬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고, 훗날 《일본서기》 편찬에도 유사한 접근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구사는 제기와 더불어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기본 사료가 되었으며, 고사기의 구성(계보+설화) 자체가 구사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 구사가 없었다면 고사기의 신화·전설 파트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구사는 고사기의 혼(魂)**이라고도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4. 《일본서기》와의 비교 – 구사의 반영과 차이점


《일본서기(日本書紀)》는 720년에 완성된 관찬 정사로, 고사기와 거의 동시대에 편찬되었지만 성격과 편찬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일본서기는 당대의 중국 정사(正史)를 본뜬 기전체(紀傳體) 양식의 한문서이며, 외국 사신에게도 내보일 수 있는 공적인 국가 편년사를 지향했다 . 반면 고사기는 일본 왕실과 토착 신화를 중심으로 한 일본어식 전승을 담아 국내(특히 궁정)용으로 편찬된 성향이 강하다 . 이러한 차이는 구사의 반영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우선, 일본서기는 편찬에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였다. 편찬 책임자였던 도네리 친왕(舎人親王)과 학자들은 구사와 제기뿐만 아니라, 각 유력 씨족들이 바친 가전(家傳), 고사기 편찬 자료, 심지어 중국과 백제 등의 외국 사서까지 폭넓게 참고하였다 . 이 때문에 일본서기의 신화·전설 부분에서는 **동일 사건에 대해 복수의 이설(異說)**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일본서기에는 일설에 의하면(一書曰)…이라며 다른 전승을 병기하는 대목들이 나오는데, 이는 편찬자가 여러 계통의 구사 전승을 모두 수합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고사기가 하나의 계통(히에다노 아레가 전수한 구사)만을 충실히 적은 것과 대비된다. 따라서 일본서기는 보다 포괄적이고 비교비판적인 관점에서 구사 내용을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 자체에는 “구사”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그 편찬 기록과 내용 곳곳에 구사에 해당하는 전승을 활용한 흔적이 있다. 우선 덴무 천황 10년(서기 681년) 3월조 일본서기 기사를 보면, 천황이 히에구리(平群) 신하와 오오시마(大島) 등을 시켜 제기를 기록하게 하고 상고의 제사(上古諸事)를 편찬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 여기서 말하는 “상고(上古)의 제사(諸事)”란 글자 그대로 옛날의 여러 사물/사건, 즉 구사에 해당하는 옛 전승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 이는 고사기 서문에 나타난 덴무 천황의 조치와 같은 사안을 전하는 것으로, 일본서기 편찬자들도 구사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일본서기의 신화 및 황실 초기 역사 기술은 고사기와 대동소이한 부분이 많지만, 세부 내용이나 서술 방향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사기에만 나오고 일본서기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있는데, 이는 편찬자가 어느 구사 전승을 채택했는지의 차이일 수 있다. 일본서기는 보다 정치적으로 객관화된 톤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황실 권위에 불리하거나 이교적인 색채가 짙은 설화는 생략하거나 완곡히 서술하고, 대신 중국 고전에서 모티프를 딴 합리적인 표현을 가미한 경우도 있었다. 반면 고사기는 비교적 토착 신화의 감성을 그대로 반영하였는데, 이는 구사의 전승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津田左右吉(쓰다 소우키치)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서기에서도 고사기와 마찬가지로 무레츠 천황 이전까지는 구사의 전설에 의존하고 그 이후로는 날짜까지 명기된 연대기적 기록이 두드러진다 . 일본서기 서술이 6세기 무렵부터 급격히 “역사적” 성격으로 바뀌는 것은, 그 이전 시대의 내용은 구사 등의 구전설화에 의존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 실제로 일본서기는 스이코 천황기까지도 비교적 설화적 기술(예: 예언, 신비한 일화)이 나오다가, 쇼토쿠 태자 이후로는 중국식 연호와 정확한 연월일을 사용하며 사실주의적으로 변모한다. 이는 일본서기가 구사로 대변되는 옛 구전사료를 토대로 하면서도, 그것이 미치지 못하는 시기부터는 보다 공식적인 기록(실록)에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정리하면, 일본서기는 고사기와 같은 구사 전통을 공유하면서도 편찬 목적과 방식의 차이 때문에 구사를 다루는 접근이 달랐다. 일본서기는 다양한 출처의 전승을 아우르고 교차 검토하면서 국가 주도의 정사를 만들었고, 고사기는 단일 구사 계보를 충실히 옮겨적어 황실 내부 전승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 그러나 두 책 모두 구사의 신화와 옛 이야기를 핵심 뼈대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흥미롭게도, 뒷날 헤이안 시대 초에 등장한 위서 《선대구사본기》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절충한 형태를 띤 것도, 이 두 공식 사서가 공통의 구사 원형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결국 《일본서기》는 구사의 내용을 보다 체계적이고 다원적으로 편집한 것이며, 《고사기》는 구사의 핵심 전승을 정리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5. 현대 일본 학계에서의 구사 연구와 복원 시도


《구사》는 현존하지 않기에, 현대 학계에서는 문헌 분석과 비교 연구를 통해 그 실체를 복원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져 왔다.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학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편찬 시기에 대한 학설: 전통적으로 구사는 덴무 천황 시기(7세기 후반)에 정리되었으나 미완성으로 끝났고, 그 내용이 8세기 초 고사기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구사의 내용이 6세기 경 이미 문헌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 쓰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모두 6세기 말 무렵을 기점으로 서술 양상이 변하는 점에 주목하여, 그 이전 시대의 전승들은 이미 6세기경 하나의 사서(옛 구사)로 체계화되었고, 이후로는 일상 연대 기록(실록)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고 추론했다 . 이 설은 한때 유력한 통설이 되어, 구사는 6세기 무렵 성립된 일종의 “고대사 서사시”로 인식되기도 했다. 반면 최근에는 덴무 천황이 지시한 7세기 말 편찬 작업이 처음으로 구사 전승을 문자화한 시도였고, 그 이전까지는 순전히 구전(口傳)에 의지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구사는 덴무 조(朝)~겐메이 조에 걸쳐 편찬된 단일 문헌으로 보아야 하며, 6세기설은 과도한 추정이라는 것이다.
• 내용 구성과 범위 추정: 구사의 내용 범위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를 다루었는지 여러 논의가 있다. 앞서 언급한 쓰다 소우키치는 구사의 서사 범위는 무레츠 천황(6세기 초)까지로 보고, 그 이후 내용은 없었을 것으로 보았다 . 이는 구사가 신대부터 25대 무레츠 천황 시기까지의 신화·전설을 다룬 일종의 고대 일본 창세기였다는 의미이다. 실제 《고사기》도 무레츠 이후 계보만 기술되기에 이 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노우에 미츠사다(井上光貞) 등 일부 연구자는, 고사기에 무레츠 이후 계보만 나오는 것은 당시 덴무 조정의 정치적 고려 (예컨대 수백년 전의 폭군 무레츠까지는 전설화하고, 그 이후는 실재 역사로 다루려는 의도)일 수 있어 구사의 범위와 단정짓기 어렵다고 보았다. 한편 구사의 구성에 대해서는, 천황들의 족보(제기)와 신화적 사실(구사)이 분리되지 않고 혼재된 한 덩어리 서사였다는 설과, 두 부분이 명확히 나뉘어 별책처럼 존재했다는 설이 공존한다. 전자는 구사가 계보와 설화가 교차하는 통합 역사서였다고 보며, 후자는 구사와 제기가 편찬 당시부터 별개의 문헌이었다고 본다. 고사기 서문에는 제기와 구사를 모두 撰錄(선록)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둘로 나뉜 책을 각각 편찬했다는 뜻으로 해석할지, 아니면 하나의 편찬 작업으로 이해할지에 따라 학설이 갈린다. 대체로 오늘날은 구사와 제기가 한 쌍으로 편찬되었으나 내용적으로는 구분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 명칭과 개념에 대한 이해: 역사학자 토야마 미쓰오(遠山美都男)는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았는데, “구사”라는 말이 때에 따라 보통명사 또는 고유명사로 쓰였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 즉 구사는 원래 각지에 산재한 많은 옛 전승 기록들의 총칭(총체적 개념)으로 쓰일 수 있으며, 덴무 천황이 말한 선대의 구사(先代旧辞)나 칙명으로 편찬된 구사는 특정 시점에 편찬된 개별 서적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 이 견해에 따르면, 구사란 말은 넓게는 여러 전승군(群)을 통칭하지만, 좁게는 덕분에 편집된 한 권의 책을 가리키므로 맥락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상의 고찰은 우리가 구사를 단일한 책으로 상정할 때 생길 수 있는 착오를 경계하는 것으로, 구사가 꼭 하나의 책이라기보다 고대 전승의 집합체 개념임을 시사한다.
• 서술 방식과 문자 기록에 관한 연구: 구사가 실제 어떤 형태로 기록되었는지도 논의 대상이다. 《고사기》는 한문으로 쓰였지만 일본어 고유명사를 음사(音寫)하는 독특한 기법을 썼는데, 구사도 이와 비슷하게 한문 문장 속에 일본어 구술 내용을 섞어 적는 서술 방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두고 구사의 원문이 한문이었는가, 아니면 일본 고유 문자(예컨대 万葉仮名 식) 표기가 섞였는가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는 구사가 고사기처럼 한자로 표기된 일본어 서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다른 이는 아예 구사는 문자가 아닌 구술로만 전해졌고 고사기 편찬 시 처음 문자화되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구사 전승의 운문(歌謠)이나 축문(祝詞)이 고사기에 상당수 실린 점을 들어, 구사는 서술 중간중간 노래와 축사의 형식을 띠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일본 고대문학과도 맞닿아 있어, 국문학계에서도 구사의 서술 양식을 복원하려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고사기전(古事記傳)》에서 고사기의 한자 표기된 내용을 일본어 음으로 읽는 현토(訓読) 작업을 통해, 구사의 언어적 리듬과 구술체를 되살리려 했다. 현대 연구자들은 이처럼 고사기의 문헌언어를 분석함으로써 구사의 구술 언어를 추체험하기도 한다.
• 다른 문헌을 통한 복원 시도: 구사의 내용은 비록 원전이 없으나, 관련된 다른 문헌들을 통해 일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고어습유(古語拾遺)》는 807년 편찬된 책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리지 않은 이미베(忌部) 씨족의 전승과 제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고사기 편찬에서 탈락한 다른 계통의 구사 일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앞서 언급한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는 비록 에도 시대에 위서로 판명되었으나, 그 3권, 5권, 10권 등 일부 내용은 기존 사서에서 확인할 수 없는 고유의 설화를 포함하고 있다 . 특히 모노노베(物部) 씨족에 관한 독자적인 기사들이 많은데, 이는 현존하지 않는 모노노베 씨의 고전(古傳)을 인용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 이 때문에 현대 일부 연구자는 선대구사본기의 해당 부분이 구사의 일부 전승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 다만 그 진위가 확실치 않은 만큼 신중한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 이밖에 8세기 초 지방지(地誌)인 《풍토기(風土記)》, 9세기 초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씨족 신화 기록, 《연기식(延喜式)》 신토 의식조의 오래된 축문 등도 구사의 편린을 담고 있을 자료로써 연구되고 있다. 종합하면, 현대 학계의 복원 작업은 고사기・일본서기 등의 비교연구, 관련 문헌의 참조, 언어학적 분석 등을 통해 구사의 본모습을 최대한 그려보려는 시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6. 참고 문헌 및 자료

• 주요 고전 문헌: 《고사기(古事記)》 (712년 편찬, 일본 신화 및 황실 초기사 기록),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편찬, 정사 30권으로 구성된 일본 통사), 《제기(帝紀)》 (왕실 계보서, 산실됨), 《구사(旧辞)》 (고대 전승 기록, 산실됨), 《풍토기(風土記)》 (713년~ 편찬된 지방 지리지와 전설집), 《고어습유(古語拾遺)》 (807년, 이미베씨 전승 중심의 신화기록),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년, 귀족 가문의 계보와 신화적 기원 정리),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 (헤이안 초 편찬 추정의 위서로, 고사기・서기 내용을 혼합한 신화전서 ). 이 밖에 일본 신토의 제사에 사용된 축문 모음인 《연기식(延喜式)》 속 **노리토(祝詞)**들도 참고될 수 있다.
• 현대 연구서 및 논문: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저 《일본고전의 연구》 – 구사 및 고사기에 대한 선구적 연구 . 가와조에 타케타네(川副武胤) 「제기・구사」(《국사대사전》) – 구사에 관한 종합 해설 . 토야마 미쓰오(遠山美都男) 「근거에乏しい ‘제기’ ‘구사’의 성립연대」(《일본서기는 무엇을 감추어왔는가》 수록) – 구사 개념의 재검토와 복원 시도 . 구라니시 유uko(倉西裕子) 《기기는 어떻게 성립했는가》 중 「일본식 기전체는 존재했는가」 – 제기와 구사의 편찬 형태에 대한 새로운 설 . 이 외에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고사기전(古事記傳)》, 스가노 야쓰카(菅野矢旨)의 논문 등에서 구사의 언어와 내용 복원을 다룬 바 있다. 현대에도 일본 고대문학・역사 분야 연구자들이 학술지를 통해 구사의 서사구조, 신화 비교, 자료비판 등을 활발히 논의하고 있으므로, 관련 전문 논문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참고) 구사는 비록 실전되었지만, 그 정신과 내용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에 면면히 살아있다. 현대 연구자들은 이러한 계통 자료들을 연결하여 퍼즐을 맞추듯 구사의 모습을 복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 상고사의 신화적 풍경과 역사 인식을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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