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헤이안 시대의 정치 구조는 초기에는 천황 중심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권이 귀족 가문으로 이동하였다. 간무 천황은 794년 수도를 헤이안쿄(平安京, 현 교토)로 옮겨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 세력의 간섭을 줄이고자 하였는데 , 그의 치세 이후 점차 황실 외척인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권력을 장악해 갔다 . 후지와라 가문은 딸들을 천황과 혼인시켜 외척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손자인 어린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攝政, 셋쇼)으로 임명되면서 섭관 정치(攝關政治)의 시대가 열렸다 . 이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経)가 간파쿠(關白) 직을 설치하여 성년 천황도 보좌함으로써, 천황은 명목상의 군주가 되고 국정 운영은 후지와라 일족이 담당하는 체제가 굳어졌다. 한때 897930년 다이고 천황이 친정을 시도하여 후지와라 섭정을 중단시키기도 했으나, 그의 치세 후 오히려 후지와라 권세는 더 커져갔다  . 10세기 말11세기 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시대에 이르면, 후지와라 가문은 황위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절대권력을 누려 국정을 전횡하였고, 역사학자 조르주 산소姆이 “세습 독재자”라 평할 정도였다  . 이처럼 헤이안 중기 동안 천황은 존재감이 약해지고, 후지와라씨가 사실상 정치를 주도하는 천황+귀족 연합 권력 구조가 자리잡았다 .
11세기 중엽 이후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지만, 1068년 즉위한 고산조 천황(後三條天皇)은 후지와라 외척을 통하지 않은 첫 천황으로서 개혁을 시도하였다 . 그는 장원 정리를 위한 기록소를 설치하여 후지와라 등의 세력을 견제하고, 아들인 시라카와 상황(白河上皇)이 1086년 양위 후 인세이(院政, 상황 정치)를 시작함으로써 귀족 세력을 뒤에서 통제하기 시작했다  . 인세이는 퇴위한 상황이 별도의 행정기구(院庁)를 통해 국정을 조종하는 것으로,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중반까지 황실이 후지와라 가문의 섭정을 견제하며 권위를 회복하려 한 방식이었다 . 그러나 여전히 군사력은 부족했던 왕권은, 점차 대두하는 무사 집단에 의존하게 되었다. 1156년 궁정 내 왕위계승 다툼에서 벌어진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1159년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을 거치며, 황실과 후지와라 가문은 무사 세력의 힘을 빌리다가 오히려 그들에게 실권을 넘겨주게 된다 . 호겐의 난 결과 후지와라 일족이 몰락하고 황실의 상황정치마저 실권을 잃었으며, 대신 승리한 무사 가문들이 정계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 특히 헤이지의 난 이후에는 승자였던 다이라 가문(平氏)의 수장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가 권력을 장악하여, 사위인 고시라카와 천황을 배후에서操り 손자 안토쿠 천황을 옹립하는 등 후지와라식 섭정 체제를 모방한 무가정권(武家政権)을 수립했다 . 기요모리는 친족들을 요직에 대거 임명하고 송나라와의 무역을 장려하는 등 20여년간 실권을 쥐었으나  , 지나치게 궁중 귀족 생활에 심취하여 지방 통제에 소홀한 사이 라이벌인 미나모토 가문(源氏)이 힘을 길렀다 . 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반기를 들며 겐페이 전쟁(源平合戦)이 발발하였고, 1185년 단노우라 해전에서 다이라 가문이 멸망함으로써 헤이안 조정의 통치는 사실상 끝을 맞았다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승리 후 동생들을 보내 교토와 서일본의 잔여 세력을 평정하고, 1192년 역사상 최초의 막부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열어 무사계급이 통치하는 시대를 열었다  . 이로써 헤이안 시대 말기에 등장한 무사정권은 이후 에도 막부까지 약 700년간 일본의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
사회
헤이안 시대의 사회 구조는 문벌 귀족 중심의 엄격한 신분질서를 보였다. 수도 헤이안쿄에 거주하는 상급 귀족층(公家)은 중앙관직과 토지지배권을 세습하면서 향락적인 생활을 누렸고, 관직은 특정 가문이 대대로 맡는 세습제로 굳어졌다 . 후지와라 가문을 비롯한 몇몇 유력 귀족 가문(예: 미나모토, 다이라 등)은 황실과의 인척관계나 공적인 공헌을 통해 권문세가로 성장하여, 조정의 고위직과 경제적 혜택(장원 소유 등)을 독점하였다 . 중급 귀족들은 각자 가업으로 전해지는 행정 전문 기능을 담당하거나 지방에 파견되어 국사(國司)로서 지방행정을 맡았다 . 이와 같이 귀족 사회 내부에는 지위에 따른 위계가 뚜렷했고, 귀족들은 학문・문예에 능통한 교양을 중시하며 세련된 궁정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편 지방 사회에서는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호족층과 새로운 무사층이 등장하였다. 농민(백성)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사원이 소유한 장원(莊園)이나 정부의 공령(公領)에서 농업 생산에 종사했고, 중앙정부와 영주에게 세금이나 지대를 바치며 생활했다. 9세기 후반부터 토지 소유 및 과세 권한이 지방 유력자들에게 위임되자, 지방 호족들은 토지를 집적하고 사병을 거느리며 사실상의 지방 통치자로 성장하였다  . 일부 몰락한 하급 귀족이나 무예에 능한 관리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호족의 휘하 무장(武裝)이 되거나, 스스로 무리를 이끌고 지토(地頭)와 같은 토착 세력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치안이 불안해지자, 치안 유지와 반란 진압을 위해 무사 계급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귀족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무사들을 양성하고 무장을 지원하였고, 무사들은 그 대가로 토지나 지위를 부여받으며 귀족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 이렇게 형성된 초기 무사들은 본래 귀족의 사병이었으나, 점차 동일한 무사 계층으로서의 정체성과 연대감을 키워나갔다. 10세기경에는 지방 상급층이었던 토호들이 무사를 통솔하여 무문(武門)을 형성하였고, 그중 유력한 가문이었던 미나모토・다이라 등의 가문은 스스로 황족의 후예임을 내세우며 전국적 무사집단의 통솔자로 부상했다 . 12세기 중반의 권력 투쟁에 무사들이 대거 동원되면서 무사는 더 이상 귀족의 하인이 아닌 독자적 정치세력이 되었고, 마침내 정권을 탈취하여 새로운 무사 사회를 열게 되었다 .
문화
헤이안 시대에는 당나라풍의 외래 문화에서 벗어나 일본 고유의 귀족 문화가 성숙하였다. 9세기 말 견당사(遣唐使) 파견이 중단되고 일본 조정이 자국 문화에 집중하면서  , 중국 한문 일변도의 문화에서 일본어와 고유 신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이 이뤄졌다. 한문은 여전히 행정과 학문의 공식 언어였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가나 문자의 발명과 보급으로 일본어 문학이 활짝 꽃피었다. 특히 남성이 공식 교육을 통해 한문에 능했던 반면, 여성들은 한자에서 파생된 히라가나 문자로 창작 활동을 펼쳤는데, 이는 일본어로 쓰인 걸작 문학들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 헤이안 궁정에서는 와카(和歌)라고 불리는 31음절의 단시 형태의 시가 매우 발전하여, 여러 황실 와카 선집(대표적으로 고킨와카슈 편찬, 905년)이 편찬되었다. 와카를 멋지게 지어 교환하는 것은 귀족들의 필수 교양이자 사교 수단이었고, 즉석에서 아름다운 시구를 짓는 능력이 곧 개인의 평가로 이어졌다고 한다 . 이 시기 궁정 여성들이 쓴 수필과 소설은 세계적 문학 유산으로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1008년경) 는 무라사키 시키부가 지은 세계 최초의 장편 심리소설로 꼽히며,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枕草子, 1002년경)는 궁정 생활의 세태와 미의식을 경쾌하게 그려냈다. 이들 작품은 우아한 미의 추구에 몰두한 헤이안 귀족들의 삶과 정서를 생생히 전해준다 .
궁정 문화의 발달과 함께 예술과 미학도 일본화되었다. 전통적으로 불교 미술과 공예는 당나라의 양식을 모방하였으나, 11세기경부터 야마토에(大和絵)라고 불리는 일본풍의 회화가 유행하여, 궁중 생활이나 신사・사찰의 전설 등을 선명한 채색화로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 겐지 이야기의 여러 장면을 그린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絵巻)와 같은 두루마리 그림이 제작되어 문학과 미술이 결합되기도 했다. 귀족들의 건축 역시 일본적인 심미안이 반영되어, 저택은 중국식 당탑풍 대신 개방적이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신덴즈쿠리(寝殿造) 양식으로 지어졌다. 신덴즈쿠리 건축은 중심 건물인 신덴(寝殿)과 연못・정원을 중심으로 누각과 복도가 대칭적으로 배치된 저택 구조로, 귀족들의 거처와 정원 생활을 중시한 형태였다 . 불교 사찰 건축도 귀족들의 이상을 반영하여 정토(淨土)의 세계를 형상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교토 우지에 세워진 평등원(Byōdō-in) 봉황당(鳳凰堂)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1053년에 후지와라 요리미치가 별장 터에 지은 아미타불당이다 . 봉황당은 연못 가운데에 봉황이 나는 형상의 우아한 전각을 지어 극락정토를 지상에 구현한 건축으로 평가받으며, 현재 일본 10엔 동전의 도안으로도 유명하다 .


평등원 봉황당(鳳凰堂, 11세기 건립)은 헤이안 시대 귀족 문화의 미의식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연못과 조화를 이룬 신덴즈쿠리 양식의 정점이다.
의복 분야에서도 일본 고유의 복식이 확립되었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 당풍의 복식을 모방하던 것에서 벗어나 점차 일본 풍속과 기후에 맞는 옷차림이 도입되었는데, 남녀 모두 직령(直領) 형태의 긴 소매 옷을 기본으로 하되 특히 귀족 여성들은 여러 겹의 옷을 겹쳐 입는 화려한 복식을 선호했다  . 귀족 여성의 예복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주니히토에(十二単, “12겹 옷”)로, 말 그대로 최대 열두 겹까지 비단 옷을 겹쳐 입는 호화로운 궁정 의상이다 . 각 속옷과 겉옷의 색조를 계절과 절기에 맞추어 조합함으로써 풍류를 표현했고, 신분에 따라 겹의 수가 달라졌는데 최고위 여성은 12단 이상을 입기도 했다  . 그렇게 입은 옷은 무게가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여 한번 자리에 앉으면 쉽게 일어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전한다 . 한편 남성 귀족의 정장으로는 소쿠타이(束帯)라는 복식이 확립되었는데, 가는 긴 소매의 포와 폭넓은 바지로 이루어진 옷차림에 머리에는 검은 관(烏帽子 또는 冠)을 쓰는 것이 특징이었다 . 이러한 헤이안 시대의 복식 문화는 이후 기모노로 대표되는 일본 전통의상의 토대가 되었으며, 현대에도 일왕 즉위례나 전통혼례 등의 의식에서 계승되고 있다 .
종교
헤이안 시대에는 불교와 신토(神道) 신앙이 모두 융성하며 상호 영향력을 주고받았다. 나라 시대에 국가불교를 후원하던 전통은 이어졌으나, 헤이안 초기 8세기 말~9세기에 새로운 불교 종파들이 전래되어 일본 불교 사상의 지형을 바꾸었다. 804년 승려 사이초(最澄)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천태종(天台宗)을 들여왔고, 이듬해 쿠카이(空海)는 진언종(眞言宗, 일본 밀교)를 배워 귀국하였다. 천태종은 중국의 천태사상(《법화경》 중심)을 기반으로 “일체 중생이 불성을 지닌다”는 보편적 해탈 가능성을 강조하였고 , 교토 근교의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暦寺)를 본거지로 황실의 깊은 신임을 얻어 발전했다 . 진언종은 밀교계통의 수행법을 전하는 종파로, 만다라・다라니(주문)・의식 등 비밀스런 의례 수행을 중시하여 신비성과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귀족들의 호응을 얻었다 . 쿠카이 자체도 뛰어난 시문・서예・예술적 재능으로 칭송받으며 황실과 귀족 사회의 지원을 받아 진언밀교를 확산시켰다 . 이 두 밀교 계열 종파의 등장은 일본 불교의 주류를 교학적 학문불교에서 귀족 불교・호국 불교로 변모시켰으며, 국가 권력과 불교 세력이 더욱 밀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 귀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번영을 기원하는 불교 행사를 열고 사원을 건립했으며, 불교 미술과 사상이 궁정 문화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신토 신앙도 여전히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있었다. 천손족인 천황가의 위엄은 이세 신궁과 같은 신토 제사를 통해 상징화되었고, 지역사회에서는 토착 신인 카미(神)에 대한 제사가 백성들의 생활의식으로 지속되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불교와 신토가 공존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신불습합 현상이 뚜렷해졌다. 불교 측에서는 일본의 신들을 부처의 화현으로 해석하는 본지수적(本地垂迹) 사상이 제기되어, 신사 경내에 절을 세우거나 불상에 신호(神號)를 부여하는 일이 생겼다. 이에 따라 귀족들은 불교 의식을 행하면서도 신들에게도 제사를 지내는 이중 신앙을 발전시켰다. 11세기경부터는 불교계에서 말법 사상(末法)이 퍼져, 법이 쇠퇴하는 말세에는 오직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 영향으로 귀족과 평민 모두 정토 신앙을 널리 수용하여, 염불만으로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아미타 신앙이 유행하였다 . 대표적으로 귀족 승려 겐신(源信)은 왕생요집을 지어 말법 시대의 지옥과 극락을 생생히 묘사하며 염불 수행을 권장하였고, 말기인 1175년에는 법련(法然)이 최초의 독립적인 정토종 종파를 개창하여 훗날 평민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헤이안 시대 종교는 귀족들의 보호 아래 다채롭게 꽃피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서 새로운 민중 신앙의 조짐이 나타나며 이후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 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제
헤이안 시대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농업 기반의 토지 경제였다. 나라 시대에 시행된 율령체제는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하고 백성에게 균등 분배한 뒤 조세를 거두는 공지 공민제 원칙을 내세웠으나, 헤이안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커졌다 . 인구 증가와 행정력의 한계로 토지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조세 수취가 어려워지자, 9세기 말~10세기 초 정부는 세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개개인에 대한 조세 부과를 포기하고 대신 토지 단위로 조세를 매기는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지방 행정관인 국사(國司)들에게 토지 관리와 세금 징수를 위임하였다 . 이러한 왕조국가 체제(王朝国家体制)하에서 지방 유력자들은 국가로부터 일정한 세수만 납부하고 그 외 잉여 생산물은 자율적으로 취할 수 있게 되었고, 국가 역시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의 자치를 묵인하였다 . 그 결과 지방 토착 세력은 자신들의 사유지나 경작지를 확대해 갔고, 특히 중앙의 유력 귀족이나 사원이 지방 토지를 *장원(庄園)으로 확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장원이란 원래 개간이나 헌납 등으로 조정으로부터 면세 특권을 인정받은 사유지로 출발했으나, 헤이안 초기부터 점차 법제화되어 10세기경에는 합법적인 사유지 제도로 정착되었다 . 유력 귀족 가문과 사원 세력은 경쟁적으로 장원을 확보하여 그 규모를 늘렸고, 조정에 세금 면제(不輸)와 검약(不入) 특권을 받아내어 자기 토지를 국가의 간섭 없이 운영하였다 . 한편 경제적 약자인 농민들은 스스로 토지를 지키기 힘들었으므로, 토지 소유권을 권문세족이나 사원에 바치고 그들의 장원 소작농이 되어 보호를 받는 대신 수확 일부를 바치는 편을 택했다 . 이러한 추세로 인해 나라 시대 이래의 공전(公田)은 급격히 줄어들고 국고 수입은 감소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농민이 중앙 조정의 세금망에서 이탈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 이는 한편으로 헤이안 중기 이후 귀족들이 국가의 녹봉이나 봉록이 아니라 자신들이 소유한 장원 수입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구조를 만들었다. 후지와라 씨 등은 광대한 장원 경제 기반 위에서 부와 권세를 유지하였으며  , 국가는 실질적으로 장원공령제(荘園公領制)라 불리는 이중 토지 제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11세기 고산조 천황은 이러한 장원 남설을 막고 재정을 확충하고자 1069년 기록장원권수소(記錄莊園券契所)를 설치하여 불법 장원의 정리와 허가되지 않은 신규 장원 설치 금지령을 내렸으나, 기득권층의 반발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다만 이러한 조처들은 이후 장원의 증가 속도를 늦추는 정도의 역할은 하였다 .
전반적으로 헤이안 시대 경제는 현물 경제의 성격이 강했다. 국가에서 공식 화폐(如: 와도카이친 화 등)를 발행하던 것은 10세기 무렵 중단되었고, 상업 활동도 송나라 등과의 일부 교역을 제외하면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귀족들은 토지에서 걷히는 쌀, 포목, 특산물 등으로 생활하였고, 도시의 시장에서도 물물교환 거래가 일반적이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 다이라노 기요모리 집권기에 선박을 통한 중국과의 교역이 시도되어 약간의 상업 활기가 더해졌으나 , 여전히 경제의 근간은 각지 장원과 공령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이었다. 따라서 토지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생산력을 키우느냐가 귀족과 국가 재정 모두에 중요했으며, 이 때문에 토지 지배권을 둘러싼 귀족 간 분쟁이나 토지 관리자인 무사의 위상이 점차 높아져갔다. 결국 경제적으로도 중앙집권적 율령 경제는 해체되고 지방 분권적 장원제 경제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무사 정권이 떠받치는 봉건제적 질서의 태동을 의미하기도 했다 .
군사
헤이안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군사 제도는 고대의 징병제에서 지방 무사 중심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792년 간무 천황은 군역 부담으로 인한 농민 피폐를 우려하여 일반 농민 징병제를 폐지하였는데 , 이는 역설적으로 각 지역에서 유력 호족들이 사병을 양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헤이안 조정은 정규군을 보유하지 못한 대신, 필요 시 각지의 유력자들을 임시 관군으로 임명해 반란이나 외적에 대응했다 . 예를 들어 797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초대 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에미시족 토벌을 성공시켰고, 이후에도 지방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무사들이 배출되었다 . 9~10세기 동안 중앙 권위가 약화되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귀족이나 사찰들이 자신들의 장원을 지키기 위해 무장 집단을 갖추게 되었고, 치안 유지와 세금 징수를 맡은 검비위(검찰+치안 무관)나 지방무사들이 등장하였다 . 이들은 처음에는 귀족의 통제를 받았으나, 전투 경험을 쌓고 무력을 바탕으로 결속하면서 독자적인 무사도 문화가 싹텄다. 10세기 중엽에는 다이나곤 다이라노 마사카도 등이 관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규슈에서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해적 난 등 무사가 주도하는 반란이 발생하여 중앙정부를 위협했다. 11세기에는 동북지방에서 전구년의 역(前九年の役, 1051–1062)과 후삼년의 역(後三年の役, 1083–1087)이라 불리는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는 에미시계 토호 아베・기요하라 씨 등을 정벌하려는 지방 무사의 전투였다 . 이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요시이에 부자(源頼義・義家)는 무사들 사이에서 영웅시되었고, 미나모토 집안이 동북 방면 무사를 통솔하는 명문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헤이안 말기로 갈수록 중앙 정부보다 무가(武家)의 실력이 두드러졌고, 황위 계승 분쟁에도 무사가 개입하는 시대가 되었다 .
1156년의 호겐의 난과 1159년의 헤이지의 난은 무사가 귀족을 대신하여 정권 쟁탈전에 본격 뛰어든 사건이었다. 이 싸움들에서 패배한 후지와라 씨와 일부 황족 세력은 몰락하고, 승자인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권력을 독점하여 최초의 무가 정권을 세웠다 . 기요모리는 정략 결혼과 무력 탄압을 병행하며 20년간 통치했으나, 그의 말년 무사 사회 내부의 반발과 지배력 약화로 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 이어 5년간 벌어진 겐페이 전쟁은 전국 무사들이 두 편으로 갈려 싸운 내전으로서, 일본 역사상 결정적인 무력 충돌이었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이끄는 겐지(源氏) 군이 여러 전투(우지 강 전투, 이치노타니 전투, 야시마 전투 등)에서 헤이시(平氏) 군을 격파하여, 최종적으로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측 주력과 안토쿠 천황마저 바다에 가라앉았다 .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패권을 손에 넣었고, 헤이안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쇼군(將軍) 칭호와 각지에 대한 지배권(수호・지토 임명권 등)을 인정받아 1192년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하였다 . 이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무사 계급이 연 군사정권으로, 헤이안 시대에서 가마쿠라 시대(중세)로의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헤이안 시대 말엽에 대두된 무사들은 정치와 군사의 주역이 되었고, 일본은 이후에도 무사 계층이 지배하는 중세 봉건 시대를 이어가게 되었다 .
Sources: 헤이안 시대의 정치와 문화   , 사회 구조 변화  , 경제 제도와 장원제  , 종교와 사상  , 군사와 전쟁  . (각주 번호는 연결된 출처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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