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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서울 지명에 나타난 중국적 영향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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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지명들 가운데는 한자어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고, 그 형성에는 역사적으로 중국 문화와 언어의 영향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본 보고서에서는 서울의 주요 지명들이 어떻게 중국 기원의 언어 요소나 명명 관습, 그리고 역사적 중국 문화·행정 용어를 반영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시대별 배경과 지명 유형별로 사례를 구분하고, 각 지명의 한자(漢字) 유래와 그 함의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을 제공합니다.

1. 시대별 배경: 한자 문화권 속의 서울 지명 형성


1.1 고대~삼국시대: 한자 기록의 도입과 초기 지명 표기


한반도에 한자가 전래되기 전까지 서울 지역의 지명은 순수 고유어로 불렸습니다. 예컨대 오늘날 한강은 본래 고구려와 백제 시대에 아리수(阿利水) 또는 한수(寒水) 등으로 불렸는데, 이는 고대 한국어로 ‘큰 물’ 또는 ‘신성한 물’을 의미했습니다 . 이후 중국 문화가 도입되면서, 한강을 표기할 때 중국 한자 ‘한’(漢) 자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 ‘한(漢)’ 자는 원래 중국 한나라 또는 한족을 가리키지만, 발음과 “크다”는 옛 의미의 유사성 때문에 한강의 음을 표기하는 데 차용되었습니다. 즉 아리수에서 한수로의 변화는 한자 사용을 통한 의미전이로 볼 수 있으며, 이후 한강(漢江)이라는 한자 지명이 정착한 것은 이 지역이 중국과의 교류가 잦던 삼국시대 이후의 일입니다 .

백제의 첫 서울인 위례성 역시 한자 기록에서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 하남(河南)은 “강 남쪽”이란 뜻의 중국식 지리용어입니다 . 이는 한강을 기준으로 한 남쪽에 수도가 있었음을 한자어로 표현한 사례로, 일찍이 중국식 방위 개념이 지명에 반영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지금의 서울 일대를 관할구역으로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고, 이 지역을 *한양군(漢陽郡)*으로 개칭하였습니다 . 한산주는 “한산(漢山)”이라는 산 이름에 중국식 행정구역 접미사 주(州)를 붙인 것으로, 당시 신라 경덕왕이 전국 지명을 중국식 한자명으로 개정한 정책의 일환입니다. 한양군(漢陽郡)*에서 한양(漢陽)은 “한수의 북쪽(陽)”이라는 의미로 풀이되며, 한수(한강) 북안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 이처럼 신라 말기부터 서울 지역 명칭에 한자 사용과 중국식 지명 관념(방위 개념, 행정 단위 명)이 적극 도입되었습니다.

1.2 고려시대: 남경과 한양 – 중국 왕도(王都) 모델의 차용


고려 왕조는 한반도 내 여러 지역에 삼경(三京) 제도를 두어 부도(副都)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중국 당나라 등의 다중 수도 체제를 본뜬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서울 지역은 고려 시대에 남경”(南京)이라 불렸으며, 개경(개성)과 서경(평양)과 함께 삼경의 하나로 격상되었습니다 . 남경(南京)이라는 이름 자체가 중국에서 수도로 삼았던 남경과 글자가 같고 뜻도 “남쪽 수도”라는 의미여서, 고려가 중화 왕조의 수도 명명 관습을 차용했음을 보여줍니다. 고려 문종 21년(1067)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처음 남경을 설치하고 궁궐을 지은 기록이 있으며 , 이후 이 남경을 두고 천도 논의가 있을 정도로 중시하였습니다.

고려 중기 이후, 몽골 간섭기를 거치며 지명이 몇 차례 바뀌기도 했습니다. 1308년에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개편하였다가, 공민왕 5년(1356년)에 다시 한양부를 남경으로 환원하는 식으로 명칭이 흔들렸습니다 . 이러한 변천은 중국 황실과의 외교 관계나 내정 변화에 따른 개명으로 풀이되는데, 고려 왕들은 당시 원나라 황제의 이름 글자를 피하기 위해 지명을 바꾼 사례도 있습니다 . 예컨대 고려 충선왕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글자가 들어간 지명을 피하거나, 또 중국 황제가 사용하는 한자를 피해 개칭하는 등 중국 황제를 의식한 지명 변경을 행했습니다 . 한편, 고려가 멸망 직전 한양을 일시적으로 북경(北京)이라 부른 기록도 있는데, 이는 새 왕조(조선)를 세우려는 움직임 속에 명나라와 관계 설정을 위해 사용된 호칭으로 여겨집니다 (명 태조 주원장의 칙령문 등에서 고려 왕을 북평왕(北平王)으로 봉한 예가 있음).

정리하면 고려시대의 서울 지명은 한양(漢陽), 남경(南京) 등으로 불리며, 중국식 한자 지명과 수도 개념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습니다. 한양이라는 이름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도 통용되어, 한자 문화권에서 서울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명칭이 되었습니다.

1.3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의 건설과 유교적 명명


조선은 건국과 함께 한양 천도를 단행하고, 이곳을 한성(漢城)이라고 공식 호칭하였습니다 . 한성부는 “한(漢)강의 성” 즉 한강이 있는 성읍이라는 뜻인데, 중국 측 사서나 교류 문서에서도 조선 수도를 한성(漢城)으로 표기하게 됩니다 . 조선 태조는 도성을 설계하면서 유교 이념에 입각한 도시 계획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도시 내 지명을 짓는 방식에도 유교적, 중국적인 영향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

대표적인 예로, 조선 초기 한양 도성의 사대문(四大門) 명칭에는 오상(五常)이라 불리는 유교의 다섯 가지 덕목(仁 인, 義 의, 禮 예, 智 지, 信 신)을 부여했습니다 . 동쪽 대문에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하여 ‘인(仁)’, 서쪽 대문은 *돈의문(敦義門)*이라 하여 ‘의(義)’, 남쪽 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여 예(禮)의 가치를 담았습니다. 북쪽 대문은 당초 소지문(炤智門)이라 하여 ‘지(智)’(밝은 지혜)를 상징하려 했으나, 최종적으로 숙정문(肅靖門)으로 명명되어 “엄숙하고 고요히 다스린다”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 중앙에 해당하는 종각(鐘閣)은 보신각(普信閣)*이라 이름 붙였는데, 여기에는 ‘신(信)’(믿음)의 글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도성의 문과 종루 이름에 유교 덕목을 하나씩 대응시킨 것은 중화 문명에 대한 동경과 본받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실제로 “성곽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유교의 오상(五常) 이념을 구체화하여 성문을 건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 조선 왕조가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하며 도시 공간에도 중국 성리학적 질서를 투영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조선 한성부는 행정적으로 5부(五部) 아래 방(坊)이라는 중국식 도시 행정구역을 두었습니다. 한성부 초기에는 동·서·남·북·중부의 5개 부 아래에 무려 52개의 방(坊)을 설치하였는데 , 이들 방의 명칭 대부분이 두 글자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방 이름에 유교적 덕목이나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표는 당시 한성부 방명 일부와 그 한자 뜻을 정리한 것입니다.

표 1. 조선 한성부 ‘방(坊)’ 명칭의 예시와 그 의미 (일부)

방 이름 (한자) 한글 발음 한자 의미 비고 (덕목/상징)
燕喜坊 연희방 제비 연, 기쁠 희 – “기쁜 제비” 길상: 제비는 길조로 여김
崇敎坊 숭교방 높일 숭, 가르칠 교 – “가르침을 숭상함” 유교: 교육 존중
彰善坊 창선방 드러날 창, 착할 선 – “선을 드러냄” 유교: 권선장려
建德坊 건덕방 세울 건, 덕 덕 – “덕을 세움” 유교: 덕치 이념
瑞雲坊 서운방 상서로울 서, 구름 운 – “상서로운 구름” 길상: 길운(吉運) 상징
蓮花坊 연화방 연꽃 연, 꽃 화 – “연꽃” 불교/길상: 청정의 상징
樂善坊 낙선방 즐길 낙, 착할 선 – “착함을 즐김” 유교: 락선(樂善) 정신
貞善坊 정선방 곧을 정, 착할 선 – “곧고 착함” 유교: 정조와 선량
安國坊 안국방 편안 안, 나라 국 – “나라를 편안케 함” 유교: 치국안민 이념
嘉會坊 가회방 아름다울 가, 모일 회 – “아름다운 모임” 길상: 태평성대 비유
仁昌坊 인창방 어질 인, 창성할 창 – “인의(仁義)가 창성” 유교: 인의흥창(興仁之門과 관련)
興盛坊 흥성방 일어날 흥, 성할 성 – “흥하고 번성함” 길상: 번영 기원

자료: 『경조오부도』 등 조선시대 서울의 방명 기록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한성부의 방 이름들은 충직, 예의, 선행과 같은 유교적 가치(忠, 孝, 仁, 義, 禮 등)**나 길상어(瑞, 嘉, 興 등)를 담고 있습니다 . 예를 들어 *명례방(明禮坊)*은 “밝은 예의”라는 뜻으로 예절을 밝히는 고장이라는 의미를 지녔고 , 호현방(好賢坊)은 “어진 이를 좋아함”이라는 뜻으로 현인을 존중하는 취지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명명 방식은 중국 왕조 도성의 방리(坊里) 제도에서 영향받은 것이며, 지명을 통해서도 유교적 교화를 구현하려는 조선 조정의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한편, 한성부 성밖 지역(성저십리)이나 강변 취락들의 지명은 대개 자연발생적 명칭을 한자로 표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오늘날 용산, 마포, 한강 주변의 나루터 이름들은 원래 주민들이 부르던 이름을 음이나 뜻에 맞추어 한자로 적은 사례입니다. 예컨대 동작진(銅雀津)은 조선 시대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하는 나루터 중 하나로, 원래 토박이들이 동재기나루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음차하여 동작진이라 쓴 것입니다 . 동재기라는 말 자체는 뚜렷한 뜻보다는 소리 이름이었으나, 표기할 때 의미를 고려해 “동(銅, 구리)”와 “작(雀, 참새)” 자를 붙여 구리빛 참새”란 뜻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 이처럼 한자 표기 과정에서 생긴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진 예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한강 나루 중 하나인 노량진(蘆梁津)을 들 수 있습니다. 본디 이 나루는 한강에 갈대가 많아 불린 노들나루가 그 전신인데, 이를 한자로 적을 때 갈대 ‘로’(蘆) 자와 들보 ‘량’(梁) 자를 써서 노량으로 표기했습니다 . 蘆梁津은 직역하면 “갈대 다리 나루” 정도로 해석되지만, 실제로는 순우리말 지명을 음에 따라 옮긴 것입니다. 후일 이 한자 이름이 굳어져 지금의 노량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 밖의 자연 지명들은 한자를 빌려 표기하되, 때로는 소리만 따오거나 (音借) 때로는 의미까지 고려한 경우(意譯)가 혼재합니다 .

종합하면 조선시대 서울의 지명 체계는 도성 내부에서는 계획적으로 부여된 한자 지명(유교덕목, 길상어 등)이 지배적이었고, 도성 외곽에서는 민간에서 쓰이던 자연 지명을 한자로 기록하여 행정지명으로 삼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한성부의 지명들은 모두 한자로 표기·운용되었고, 이 한자는 곧 중국 문화권의 보편 문자였기에 지명도 중국과 공통된 언어 자원 속에서 이해·소통될 수 있었습니다.

1.4 개항기~일제강점기: 경성(京城)과 창지개명(創地改名)


1900년대 초 개항기 이후, 서울(한성)은 일본의 영향권에 들면서 지명 체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조선총독부는 서울의 이름을 경성부(京城府)로 고쳤는데, *경성(京城)은 한자로 “도성”, 즉 수도 도시”를 의미하며 중국에서도 일반 명사처럼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 일본어로 경성을 케이조”라고 읽었으나, 여전히 표기는 漢字로 했기에 대외적으로는 조선의 수도가 京城”으로 통용되었습니다. 이는 식민 지배 하에서도 서울이 한자문화권 도시로 기능했음을 보여줍니다.

일제 강점기 기간 특히 1914년에는 총독부가 전국적인 창지개명(創地改名)을 단행하여 수많은 행정구역 명칭을 개정하였습니다. 서울의 경우, 조선시대의 5부·방 제도가 폐지되고 일제가 부·면·정(町) 체계를 도입하면서 동네 이름들이 대거 개칭되었습니다. 이때 새로운 동명들은 상당수가 기존 이름을 일본식 행정단위 정(町)으로 바꾸거나, 아예 새로운 한자 이름을 부여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명례방(明禮坊) 일대는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혼마치”(本町, 본정) 등으로 불리다가, 광복 후 그 지역명을 명동(明洞)*ㅣ으로 계승했습니다. 명동이라는 이름은 한자 표기로는 밝을 ‘명(明)’에 골 ‘동(洞)’ 자를 쓰는데, 이것은 본래 명례방의 ‘명(明)’과 방 대신 동(洞)을 붙인 것입니다 . 그러나 禮(예) 자가 빠지고 그냥 “밝은 동네” 정도의 뜻만 남으면서, 한자 지명의 축약으로 원래 담긴 유교 의미가 희석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조선인 거주지역의 많은 옛 지명들도 일본식 표기에 따라 한자명이 정해졌습니다. 예컨대 오늘날 청계천(淸溪川) 이름이 1910년대에 생긴 것입니다. 본래 조선시대에 그 하천은 그저 “개천”(開川, 열린 내)이라 불렸는데, 1914년 일제가 도시 미관을 이유로 맑을 청(淸), 시내 계(溪) 자를 붙여 맑은 시내라는 뜻의 청계천으로 바꾸었습니다 . 공식 지도와 문서에서 청계천으로 명명한 것은 식민정부가 주도한 한자식 개칭이었으며, 이후 이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됩니다. 이처럼 일제는 기존 지명 가운데 토착색이 강한 것들을 없애고 듣기에 좋은 의미의 한자 지명으로 변경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중국의 전통적 미감에 맞춘 길상어 사용이라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청계’처럼 긍정적 의미를 담은 명칭들은 중국을 비롯한 한자권에서 흔히 쓰이던 방식이기도 했지요.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 서울이 팽창하면서, 성 밖의 많은 마을이 행정동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때 순우리말 마을 이름들도 대부분 한자 동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관악구 일대의 봉천동(奉天洞)은 일제 시기 경성부로 편입되며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원래 그곳은 ‘서리풀’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하늘을 받든다는 뜻의 봉천(奉天)이라는 한자명을 새로 지어 부여한 것입니다 . 산세가 워낙 높아 하늘을 떠받치는 듯하여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전해지지만 , ‘奉天’은 사실 중국에서도 봉천성(奉天省), 봉천시로 불리던 지역(현재 심양(瀋陽))이 있을 정도로 익숙한 한자어 조합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후 남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이 봉천 지명을 즐겨 사용하였고, 조선의 지명 개편에도 이러한 한자어들이 차용되었습니다. 그 결과 봉천동 같은 이름이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일제가 새로 조성한 지역이나 도로에 붙인 이름 중에는 중국 역사인물이나 지명을 딴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을지로(乙支路)는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성명을 딴 거리이지만, 乙支라는 표기는 중국식 성씨처럼 보이는 한자 표기입니다. 실제로 을지문덕의 ‘을지’는 정확한 어원이 전하지 않아, 삼국사기 편찬자가 임의로 酉(닭 유) 변에 十(십) 자를 붙인 乙과 支를 조합해 만든 표기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후 일제가 1910년대 경성부에 길 이름을 부여할 때 이 한자 이름을 따와 을지로(乙支路)라 명명하였고 , 해방 후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자식 인명 지명(충무로, 세종대로 등)도 식민지기와 해방 후 도로명 등으로 정착하여, 겉으로는 중국과 관련 없어 보이는 한국 역사인물 기념도로들도 형식은 한자어로 되어 있습니다.

1.5 광복 이후: 서울과 한자 지명의 현재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과 주소 체계가 개편되었지만, 서울의 지명에서 한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식 표기는 한글로 바뀌었을 뿐, 그 어원과 의미는 한자어인 지명이 대부분입니다. 광복 직후 미군정은 도시명을 다시 서울로 부르게 하였고, 1946년부로 경성(京城)이라는 한자 이름은 폐지되었습니다. 서울은 순우리말이라 한자로 적을 수 없었고, 그래서 한동안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서울을 옛 이름인 한성(漢城)으로 불렀습니다 . 실제로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까지 중국 언론은 漢城奧運이라고 표기했었습니다 . 그러나 2005년에 이르러 서울시는 중국어권에서 서울을 부르는 공식 표기를 수도 서울의 발음을 살린 셔우얼(首爾)로 변경하였습니다 . 首爾은 발음상 Seoul과 유사하면서, 글자 뜻은 “머리 수(首)”, 이을 이(爾)로 조합되어 으뜸가는 도시라는 긍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 이로써 서울은 자국어 명칭을 유지하면서도 한자 문화권에 ‘수도’임을 나타내는 의미를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서울의 행정구 명칭들도 거의 모두 한자어입니다. 1940~50년대에 구(區)와 동(洞) 체계가 자리잡으면서, 기존 한자 지명을 한글로 표기하되 그 한자식 의미를 살려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를테면 1970년대에 신설된 강남구(江南區)는 “강의 남쪽”이라는 뜻의 전형적인 중국식 지역 명칭이며, 강서구(江西區), 강동구(江東區), 강북구(江北區) 등도 모두 한강을 기준으로 한 동서남북 방위를 한자로 나타낸 구 이름입니다. 이런 방식은 중국의 하남(河南), 하북(河北) 같은 지명과 구조가 같아, 서울이 새로운 행정구역을 만들 때에도 중국식 방향 개념을 답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밖에 영등포구(永登浦區)나 송파구(松坡區)**처럼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한자 지명을 구명(區名)으로 삼은 경우도 있고, 노원구(蘆原區)**처럼 한국어 고유지명 ‘벌말(갈대밭 마을)’을 직역한 경우도 있습니다. 서초구(瑞草區)의 사례는 흥미로운데, 이 지역 옛 이름 ‘서리풀’을 한자로 옮기면서 상서로울 서(瑞), 풀 초(草)*자를 취하여 상서로운 풀”이라는 뜻으로 미화하였습니다 . 이는 한자 지명이 주는 어감과 상징을 고려한 작명으로, 전통 시대부터 이어져온 음(音) 차용과 뜻(義) 부여의 혼합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의 지명 가운데는 이렇게 한국 고유어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뒤 한글로 다시 적은 것들이 많아서, 일견 순우리말처럼 보이나 실제 뜻은 한자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신촌(新村), 창동(倉洞), 필동(筆洞) 등은 모두 한자어(새 마을, 창고 골목, 붓골)을 한글로 쓴 것입니다. 반대로 남산, 북악산처럼 한자 그대로 읽는 지명도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한자를 쓰지 않게 된 후로 지명의 한자적 의미를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지명 속 한자어는 여전히 그 의미맥락을 간직하고 있어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말없이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명 변경을 통한 의미 교정도 현대까지 이어진 중국적 영향의 사례입니다. 조선시대 효종이 이태원의 이름을 바꾸었던 일처럼,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뜻이 불길하거나 어감이 나쁜 지명을 고친 사례가 있습니다. 일례로 이태원(梨泰院)은 조선시대에 한때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불리며 좋지 않은 유래담(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겁탈당한 여인들과 혼혈 아기들의 슬픈 사연)과 연결되었는데, 이를 개탄한 효종이 “배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의 梨泰院으로 개명하였습니다 . 이 결정으로 지역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 것이죠. 이러한 지명 개명은 중국에서도 황제의 칙령 등으로 흔했는데, 한국도 그 영향을 받아 지명에 담긴 상징성을 중시해온 것입니다.

2. 중국적 영향 유형별 사례 정리


서울 지명에 드러나는 중국의 영향력을 지명 유형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강(江)·산(山) 등 자연 지명: 주요 하천과 산 이름에 한자어 사용. 예) 한강(漢江) – ‘한(漢)’자를 차용하여 표기 ; 북한산(北漢山) – “한강 북쪽의 산”이란 중국식 방위 개념 적용; 남산(南山) – “남쪽 산”, 도성 남쪽 주산(主山)을 가리키는 명칭; 용산(龍山) – “용의 산”, 중국 신화의 길상 동물 *용(龍)*에 빗댄 이름. 이처럼 자연 지명에 한자 보편 개념(강, 산 등)과 상징물(용 등)을 활용함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 어디서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 도성·행정 지명: 수도 및 행정단위 이름에 중국식 표현 도입. 예) 한성(漢城) – 한자를 사용한 조선 수도명 ; 한양(漢陽) – “한강의 북쪽 양지”라는 뜻의 한자 지명; 남경(南京) – 고려의 서울 지역 수도명으로 중국 남경에 대응 ; 오부·방 제도 – 한성부의 행정체계를 중국 도시 행정 구획을 모방하여 5부 52방 설치, 방 이름에 덕목·상서로운 한자어 사용 ; 경성(京城) – 일제강점기 서울의 한자 명칭으로 “수도”라는 의미의 중국어 통용 어휘 . 또한 현대 행정구 이름도 강남/강북처럼 중국식 방향+지형 용어를 답습한 사례가 많습니다.
• 유교 가치 및 중국 문화 반영 지명: 도시 시설명과 동네 이름에 유교 사상, 중국 문화 상징을 부여. 예) 숭례문(崇禮門)·흥인지문(興仁之門) 등 사대문 – 유교 오상 ‘예’, ‘인’의 체현 ; 보신각(普信閣) – ‘믿음’의 상징을 종각 이름에 사용 ; 효자동(孝子洞) – ‘효자’라는 유교 윤리를 동명으로 삼음; 충신동(忠信洞) – ‘충과 신’이라는 덕목을 지명화; 관상감(觀象監)·문묘(文廟)·사직(社稷) 등 – 중국에서 전래된 학문기관명, 공자사당, 토지곡식신 제단 이름이 그대로 서울의 지명이나 시설명으로 쓰임. 또한 모화관(慕華館) – “중국을 흠모하는 집”이라는 뜻의 건물이 있었던 터로, 조선이 명(明)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었는데 그 명칭 자체가 중국에 대한 동경을 담아 지어져 지명으로도 회자되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지명을 통한 유교 교화와 중국에 대한 문화적 동질성 표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한자 표기의 음차·의역: 한국어 고유지명을 한자로 적으며 발생한 변화. 예) 동작진(銅雀津) – 토착어 ‘동재기’를 소리 맞추어 적되 “銅雀”이란 의미를 부여하여 결과적으로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동작대(銅雀臺)”를 연상시키는 이름이 됨 ; 개천 → 청계천(淸溪川) – 평범한 고유어 명칭을 한자어 청계로 바꾸어 이미지 세탁 ; 서리풀 → 서초(瑞草) –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골라 붙여 “상서로운 풀”이라는 길한 뜻을 부여 ; 봉천(奉天) – 토박이 지명에 없던 뜻이지만 한자 선정으로 “하늘을 받듦”이라는 뜻 생성 . 이처럼 음의 차용과 의미의 재부여는 한자 문화권 내 지명 전환 과정에서 빈번했고, 서울의 여러 동명과 지역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 지명 개명의 정치·사회적 고려: 중국 황제 이름이나 부정적 의미를 피하려 개명한 사례. 예) 이태원(異胎院 → 梨泰院) – “다른 씨의 태를 가진 (아이들의) 집”이라는 흉측한 옛 이름을 배나무 동산을 뜻하는 이름으로 바꿈 ; 고려 시대에도 황제의 이름과 충돌하는 군현명을 바꾸는 등 중국 황제를 의식한 피휘(避諱) 사례 다수 . 대한제국기에는 아예 한성부를 황성(皇城)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황제국이 된 조선의 수도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 황제 칭호의 영향을 받아 생긴 지명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는 서울이 중국어권에서 한때 한성(漢城)으로 불리다가, 이것이 한(漢)=중국 한족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수도(首都)”를 의미하는 首爾로 변경된 것도 일종의 정치적 고려에 따른 지명 변경입니다 .

3. 결론


서울의 지명사는 곧 중국 한자문화권 속에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국시대 이래로 한강, 한산 등 주요 지명이 한자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서울의 지명에는 중국의 언어적 영향과 문화적 가치관이 깊숙이 투영되었습니다. 순우리말 지명조차도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거나 , 한자 표기 자체가 지명의 정체성을 규정짓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는 수도 한양을 중화 이념의 무대로 삼아 도성의 문명(門名)과 행정구역 명칭 하나하나에 덕치를 구현하려 했고  , 이러한 전통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한자어 지명을 통한 이미지 쇄신과 같은 형태로 계승되었습니다 .

물론 서울이라는 이름 자체는 순우리말이라 한자로 적지 않지만, 이조차도 중국에서는 “首爾”, 즉 “으뜸가는 도읍”으로 표기되어 옛날처럼 한자 문화권과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오늘날 서울 시민들은 일상적으로 한자를 쓰지는 않으나, 명동, 종로, 을지로, 성북, 서대문 등 도시 곳곳의 이름에 살아있는 한자어의 뜻은 서울의 유구한 역사와 중국에서 전해진 문화적 영향의 깊이를 증언합니다. 서울 지명에 담긴 이러한 중국적 영향 요소들을 이해하면, 지명의 유래 속에 숨은 의미와 서울의 정체성을 더욱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자료: 서울 지명 유래 관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한성부·남경(고려) 항목   , 브런치 자료 등 . (상세한 출처는 본문 각주 표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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