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역사적 형성과 변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오늘날 종로 일대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18년 백제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수도 위례성(한성)을 세운 후 약 500년 동안 서울 지역은 백제의 수도였고 ,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하면서 이 지역을 한산군으로 편제하고 북쪽에 남평양이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하였습니다 . 이후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였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한산주(漢山州)로 편입되었습니다 . 고려 시대에 들어서 이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아 1067년(문종 21)에는 지금의 종로구를 중심으로 한강 이북 일대에 남경(南京)이 설치되었습니다 . 고려 숙종 때인 1104년에는 남경에 궁궐을 완공하고 행정관청(남경유수부)을 두어 개경, 서경과 더불어 서울 지역을 별도 수도로 경영하였습니다 . 고려 말 우왕과 공양왕 대에는 한때 이곳으로 천도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1394년 조선 개창 후 한양(漢陽)이 새 왕조의 수도로 결정되었습니다 .


조선시대: 한성부와 종로의 중심
조선 태조는 1394년 한양 천도를 단행하고, 현재의 종로 일대에 조선 왕조의 수도 한성부를 건설하였습니다. 계획도시로 설계된 한양 도성에서는 종로가 광화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 동서로 가로지르는 주간선 도로로 만들어졌습니다 . 이 대로의 한가운데, 남북대로와 교차하는 지점(현재 종로2가 일대)에 도성의 종루(鐘樓), 즉 보신각 종각이 세워졌습니다. 종각에서는 매일 밤 10시 인정(人定)의 종을 쳐 통행금지를 알리고 도성 4대문을 닫았으며, 새벽 4시 파루(罷漏)의 종소리로 성문을 다시 열었습니다 . 이처럼 종을 치는 누각에서 사방으로 뻗은 길이라는 뜻에서 이 길을 종로(鍾路)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후 도로명뿐 아니라 지역명(종로구, 종로동)과 주소 체계(종로1가~6가)에도 사용되는 지명이 되었습니다 . 당시 종각 주변 거리는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린다고 하여 운종가(雲從街)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습니다 .
조선 시대 종로는 한성부 시민생활의 중심지로서 정치·행정 중심지와 상업 중심지가 교차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광화문 앞에서 육조 관청이 늘어선 남북대로(세종로)가 국가 통치의 핵심 공간이었다면, 종로 일대는 시전과 시장이 밀집한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 실제로 종로를 따라 국가 공인 상점인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한 다양한 시전 상점들이 자리하여 조선 최고의 번화가를 이루었습니다 . 종로에는 시전 상인과 백성들이 몰려 활기를 띠었고, 낮에는 보신각 종이 통행을 허락하는 순간부터 상업이 시작되어 밤까지 번영하였습니다. 한편 종로 뒤편으로는 말탄 양반을 피해 일반 백성들이 다니던 피맛골 골목이 형성되는 등 서민 생활문화도 함께 발달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종로변에 가설건물과 좌판들이 늘어나며 거리 폭이 줄어들 정도로 상업이 활발했습니다 . 이러한 조선 한성의 도심 구조에서, 종로는 500여 년간 도성의 경제와 민생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1910년 국권 피탈로 시작된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이 경성부로 개칭되고 도시 구조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종로 일대도 일제가 시행한 도시정비의 영향으로 1920년대 중반부터 도로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총독부는 1925년 광화문~종로4정목 구간의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고 아스팔트 포장을 시행하는 등 종로의 도로 폭을 대대적으로 확장·정비하였습니다 . 이것은 식민지 근대화의 일환이었으나, 도로 확장 과정에서 도로 변의 토지가 일본인 자본에 매각되고 한인 상권이 위축되는 결과도 빚었습니다  . 실제로 일제 시기 종로 양편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백화점과 은행, 상점들이 들어서 조선인 상권을 위협했고, 전통적 풍경이었던 종로의 초가 상점들이 근대식 건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종로는 식민지기 내내 민족운동과 저항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는 태화관과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수많은 시민이 종로 거리로 몰려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함으로써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 탑골공원 팔각정에 모인 군중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종로와 사대문 안 거리 곳곳을 행진한 이 사건은 전국적인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종로 보신각 앞 네거리도 만세시위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종로는 한편으로 식민지 도시개조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 저항의 상징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 현대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 종로는 해방공간과 대한민국 건국의 중심 무대가 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알리는 기념식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 앞 광장에서 거행된 것은 종로구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출발점에 서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그러나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서울이 전쟁터가 되면서 종로 일대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종로구청이 있던 중앙청 건물이 전쟁 중 폭격과 포격으로 파괴되고 광화문을 비롯한 여러 역사 건축물이 훼손되는 등, 종로는 격동의 현대사를 그대로 겪었습니다. 전쟁 후 종로는 서울의 재건과 함께 복구되어 다시 수도 서울의 심장부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1960~70년대 이후 서울이 급격히 팽창하고 도심 기능이 분산되는 와중에도, 종로는 여전히 행정·경제의 요충지이자 문화의 중심지로 남았습니다. 1974년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종로를 따라 개통되었는데, 이는 종로가 서울 교통의 대동맥으로서 여전히 중요함을 재확인시켰습니다 . 종로 일대에는 정부부처 청사, 금융기관, 언론사 본사 등이 밀집하여 행정과 비즈니스의 중심지 구실을 했고, 한편으로 남촌(명동)과 신흥개발지인 강남으로 상업중심이 이동하는 가운데서도 종로는 전통 상권과 상징성을 유지했습니다. 오늘날 종로구는 조선왕조 500년의 유산인 경복궁·창덕궁과 종묘, 보신각 등 문화재가 자리한 역사문화지구인 동시에, 현대적인 빌딩과 상점가가 늘어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공간으로 발전해왔습니다 . 세월이 흐르고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변모했어도, 종로 거리에는 여전히 다양한 세대의 시민과 관광객들이 오가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활력이 넘치고 있습니다.
종로구 주요 지역 및 동명(洞名)의 유래
역사도시 종로구 안에는 각 동네마다 독특한 이름의 유래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인사동, 낙원동, 원서동처럼 이름 자체에 옛 지명이 담긴 경우도 있고, 종로1가~6가처럼 행정 편의상 새로 생긴 이름도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종로구 내 주요 지역 및 법정동 이름의 유래와 그에 얽힌 역사적 배경을 소개합니다.
인사동(仁寺洞)
종로구를 대표하는 문화거리인 인사동은 그 지명부터 조선 시대 한성부의 옛 행정구역을 이어받았습니다. 조선 초기 한성부 행정구역 개편 당시 현재의 인사동 일대는 중부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방(堅平坊)에 속해 있었습니다 . 이후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관인방에서 이름을 딴 ‘인(仁)’ 자와, 같은 지역에 있던 대사동(大寺洞)에서 이름을 딴 ‘사(寺)’ 자를 합쳐 인사동(仁寺洞)이라는 새 동명이 제정되었습니다 . 인사동이라는 공식 지명은 이렇게 만들어졌지만, 그 배경에는 이 지역의 유서 깊은 절과 탑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전기 세조 때 현재 탑골공원 자리에 세워진 큰 절 원각사(圓覺寺)가 바로 그것입니다. 원각사는 대웅전인 대광명전을 비롯하여 400여 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만 남아 있습니다 . 조선 후기 문헌인 한경지략에 “대사동은 즉 탑사동이라 불렀으니 옛날에 원각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실제로 한성 시절 이 일대 마을은 원각사에 세워진 거대한 10층 석탑에 연유하여 탑골, 탑동(塔洞) 혹은 탑사동(塔寺洞)으로 더 널리 불렸다고 합니다 . 현재 인사동길에 전통 골동품 상점과 문화공간이 밀집하게 된 배경에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때 순조의 왕비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인경궁과 도화서(그림 그리던 관청) 터도 인사동 부근에 있었고, 대한제국기에는 이 일대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며 거리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인사동’이라는 동명은 단순히 행정구역 이름을 넘어, 고려·조선시대의 사찰 문화와 일제강점기의 근대화를 모두 아우르는 전통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
낙원동(樂園洞)
낙원동이라는 지명은 직역하면 ‘즐거운 동산, 낙원의 동네’라는 뜻으로 매우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상은 일제강점기 행정개편의 산물입니다. 본래 이 지역은 조선 시대에 교동(校洞), 어의동(於義洞), 탑골 또는 원동(園洞) 등으로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 조선시대에 한양의 향교(鄕校)와 각종 학교 시설이 모여 있어 ‘교동’이라 불렸고, 또 한편으로는 탑골공원이 위치한 곳이기에 주변을 탑동(塔洞)이라고도 했습니다 . 1910년대 일본인들이 경성에 대규모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탑골 일대를 손댔고, 1919년 탑골공원이 근대식 공원으로 개장되면서 이곳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잡았습니다. 이후 1914년 일제가 전국적인 창지개명(創地改名)*을 단행하면서, 이 지역에 있던 ‘원동(園洞)’의 원(園) 자에 ‘즐거울 락(樂)’ 자를 붙여 낙원동(樂園洞)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습니다 . 일제는 탑골공원이 “도심 속의 낙원지”라 여겨진다며 이러한 작명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 그러나 낙원동의 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곳은 이름과 달리 ‘낙원’보다는 교육과 개혁의 현장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조선 후기 이 일대에 박은식, 안창호 등이 세운 낙원동 교육회관에서 독립운동 모임이 열렸고, 해방 후에도 단국대·건국대 등의 전신 교육기관들이 이곳에서 출범하였습니다 . 또한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가 낙원동에 들어서면서 3·1운동 등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낙원동은 악기상가와 음식골목으로 유명하지만, 그 지명에는 일제가 조선의 옛 지명을 지우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고, 동시에 그 이면에는 교육과 항일의 역사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서동(苑西洞)
창덕궁과 창경궁 뒤편에 위치한 원서동은 지명 자체에 궁궐과 관련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원서동이라는 이름은 1936년 일제가 경성부의 정(町)명을 개편하면서 붙인 것으로, 창덕궁 후원(後苑)의 서쪽에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원(苑)의 서쪽 동네’란 의미로 정해졌습니다 . 해방 직후 1946년에 이 일본식 정명이 그대로 한글 동명 ‘원서동’으로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하지만 원서동 지역의 옛 이름은 훨씬 오래된데, 조선시대에는 단순히 원동(苑洞) 또는 원동(院洞)으로 불렸습니다 . 여기서 ‘苑’과 ‘院’ 두 가지 한자가 모두 쓰였던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조선 초기 이 동네에는 왕실 관련 사찰인 정업원(淨業院이 있었습니다. 정업원은 폐비(廢妃) 등 왕족 여성들이 출가하여 수행하던 비구니 사찰로, 도성 안 승려 거주를 금지한 엄격한 법도 속에서도 예외적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은 사찰이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종 때 이 정업원의 노비가 18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가 자신의 거처 인수궁을 정업원 경내에 짓기도 했습니다 . 이처럼 정업원(院)이 위치한 동네라 하여 원래는 ‘원동(院洞)’ 또는 정업원동이라 불렸는데, 훗날 한자 표기가 혼용되며 ‘원동(苑洞)’으로도 쓰이게 되었습니다 . 동시에 이 지역엔 창덕궁의 뒷동산 일대에 궁중 별서인 함춘원(含春苑)과 천문 관측기관 관상감이 있었는데, 함춘원의 ‘원(苑)’과 관상감이 있던 관상감골(觀象監골) 등의 지명이 전해져 옵니다 . 결국 일제가 창덕궁 비원(秘苑) 일대 방향을 기준으로 동명을 원서정(苑西町)으로 정리하면서, 궁궐의 후원을 상징하는 ‘苑’ 자를 택해 ‘서쪽’을 붙였던 것입니다 . 현재 원서동은 창덕궁 담장을 따라 형성된 조용한 주택가이지만, 그 이름은 궁궐의 아름다운 후원과 왕실 사찰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채 전해지고 있습니다.
종로1가~6가
종로 1가, 2가, … 6가와 같은 지명은 서울 도심의 도로 구간을 가리키는 독특한 주소 체계입니다. 원래 조선 한성부 시기에는 종로 일대를 동서로 구분하여 여러 방(坊)과 동(洞)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종로1·2가 지역은 한성부 서부 숭신방에, 종로3가는 중부 관수방, 종로4가는 동부 연화방, 종로5·6가는 동부 창선방과 건덕방에 해당했던 곳입니다 . 이러한 방·동 명칭들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행정구역 개편으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서울 시내 수백 개의 옛 동리를 통합·정비하여, 주요 간선 도로를 따라 정목(丁目)이라는 일본식 주소를 설정하였습니다 . 이에 따라 종로 길을 여섯 구간으로 나누어 종로 1정목~6정목이란 이름을 붙였고, 1943년 경성부 종로구가 신설될 때 이 주소들이 종로구로 편입되었습니다 . 광복 후 1946년 미군정은 일제식 정목 지명을 모두 우리말 ‘가’ 자 표기로 바꾸면서 종로1정목6정목은 오늘날처럼 종로1가6가로 개칭되었습니다 . 이렇게 탄생한 종로 1가6가라는 이름은 본래 ‘종로’라는 하나의 큰 길을 편의상 구간별로 나눈 행정용 호칭입니다. 종로1가는 보신각 종각이 있는 종각 네거리 일대, 종로2가는 종로와 삼일대로가 만나는 종로2가 교차로, 종로3가는 탑골공원과 청계천이 만나는 부근, 종로4가는 종로와 돈화문로가 교차하는 종로4가 사거리, 종로5가는 종로와 종묘앞길이 만나는 곳, 종로6가는 동대문(흥인지문) 인근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종로1가6가는 행정동으로는 종로1·2·3·4가동과 종로5·6가동으로 묶여 관리되고 있습니다. 비록 ‘1가, 2가’ 하는 이름 자체에 특별한 옛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지만, 이 명칭들은 근대기 서울 주소체계의 변화와 도시 발전의 과정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종로라는 도심 대로가 서울의 동서축 중심이라는 지위는 변함없음을, 1가에서 6가로 이어지는 거리명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신동(昌信洞)
동대문 북쪽 낙산 기슭에 위치한 창신동은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새로 만든 이름입니다. 조선 초기 이 지역은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에 걸쳐 있었는데 , 1914년 경성부가 여러 작은 동네들을 통합하면서 인창(仁昌)의 ‘昌’자와 숭신(崇信)의 ‘信’자를 한 글자씩 따서 昌信洞(창신동)이라는 동명을 제정하였습니다 . 창신동의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창성할 창, 믿을 신’으로, ‘창대하고 신의 있는 마을’ 정도의 뜻을 띠지만, 실제로는 두 옛 지명에서 한 글자씩 조합한 행정편의적 명칭입니다. 비록 이름은 새로 지었으나, 창신동 일대에도 여러 전통 지명이 전해져 옵니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자지동(紫芝洞), 홍수동(紅樹洞) 같은 자연마을이 있었습니다 . 자지동은 단종 비 정순왕후가 폐위 후 생계를 잇기 위해 이 동네에서 자주빛 옷감을 염색해 팔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실제로 이 동네 샘에서 보랏빛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 홍수동은 ‘붉은 열매 맺는 나무(붉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19세기 이곳에 한글 소설을 찍어내던 방각본 소설방이 있어 문학사적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 또한 창신동의 산자락에는 조선 후기 무관 이수광이 머물며 저술활동을 하던 초가 비우당(庇雨堂)이 있었고, 한양 도성을 방어하던 5대 사정(射亭) 중 하나인 좌룡정(左龍亭) 활터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 일제강점기에는 창신동 낙산 아래로 일본인들의 석재 채취로 커다란 채석장이 생겨 돌산밑이라 불린 절개지가 생겨났고 , 해방 후 특히 6·25전쟁 이후에는 북에서 피난 온 이주민들과 도시빈민들이 창신동 비탈에 밀집하면서 봉제공장과 달동네가 공존하는 곳으로 변모했습니다. 한때는 경성 최고의 부촌이었다가 이후 산동네 서민촌으로 떠밀린 창신동 절벽마을의 변화상은 한국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현재 창신동은 재개발과 도시재생을 통해 변모 중이지만, 그 이름 속에는 조선시대 방명을 합성한 지명의 유래와 함께 왕실의 애환, 민간의 삶이 녹아 있던 여러 전통 지명들의 기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
혜화동(惠化洞)
대학로 일대의 혜화동은 조선 시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혜화문은 1396년(태조 5) 한양 도성 축성과 함께 북동쪽 성곽에 세워진 문으로, 초기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습니다 . ‘홍화’는 큰 교화를 뜻하고 ‘혜화’는 은혜로운 교화를 뜻하는데, 중종 6년(1511) 창경궁 정문에 ‘홍화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자 도성의 이 문을 혜화문으로 개칭하였습니다 . 혜화문은 동쪽 소문이라 하여 동소문이라고도 불렸고, 북대문인 숙정문이 늘 닫혀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북쪽 출입문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특히 서울 동북방 거주민들과 북쪽 여진인들이 주로 드나들던 관문이 바로 혜화문이었습니다 . 1928년 일제가 혜화문의 문루를 헐어버리고 1939년 아치형 석문마저 철거하여 한때 흔적이 사라졌다가, 1990년대 도로 확장 공사 중 일부 복원되어 지금은 성곽 길가에 옮겨져 남아 있습니다 . 혜화동이라는 동명은 1914년 경성부 혜화동으로 처음 행정구역에 등장했고, 1936년 혜화정(惠化町)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 1946년 다시 혜화동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 조선시대 혜화동 일대는 동부 숭교방과 숭신방에 속한 지역으로, 선농단이 있던 숭교방의 분위기를 이어 받아 궁궐과 종묘로 가는 관문 노릇을 했습니다 . 특히 한성부 동쪽 성밖에는 한양도성의 저자거리가 펼쳐져 있었는데, 혜화문 밖도 마찬가지로 번성하여 조선 후기에는 교외 시장과 주막들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혜화동은 대학로로 불리며 젊은 문화와 전통이 함께하는 곳입니다. 1927년 지어진 혜화동 성당은 명동성당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성당으로, 붉은 벽돌 고딕양식 건물이 지금도 지역의 랜드마크입니다 . 이처럼 혜화동은 이름부터 조선 도성의 문에서 따왔을 뿐만 아니라, 성문 안팎으로 이어진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채 현대까지 전승하는 동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창동(平倉洞)
북한산 자락의 고급 주택지로 알려진 평창동은 그 이름의 기원이 독특합니다. ‘평창(平倉)’은 글자 그대로는 ‘평평한 창고’라는 뜻인데, 실제로 조선 시대 이곳에 국가의 곡물 창고가 있던 데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 조선 후기 재정 기관인 선혜청(宣惠廳)이 운영하던 여러 곡식 창고 가운데 하나가 이 지역에 설치되었고, 이를 가리켜 상평창(常平倉) 혹은 줄여서 평창(平倉)이라 불렀습니다 . 육전조례 등 고종 때의 문헌을 보면 당시 한성부 상평방 관할 창고로 평창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지명이 그대로 동네 이름이 된 것입니다 . 한편 강원도의 평창군과 이름이 같지만, 서로 연관은 없습니다 . 평창동 일대에는 예로부터 한성부 북쪽 교외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세도가들이 별서를 짓고 살았던 곳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 중기 청백리로 유명한 윤두수 가문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이 있었고,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도 원래 평창동 인근에 있었습니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에는 전국 사찰을 총괄하던 원흥사(元興寺)가 1902년 이곳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 해방 이후 평창동은 도심과 가까운 풍광 좋은 산자락이라는 입지 덕분에 1960년대부터 고급 주택가로 개발되었습니다. 미술관과 갤러리가 많이 들어서 예술인의 마을로도 불립니다. 평창동의 옛 지명을 살펴보면 율목동(栗木洞)(밤나무골), 신창(新倉)(새로 지은 창고 마을), 월계동(月桂洞)(달계(桂) 정자가 있던 곳), 장안(長安)(‘도읍’이란 뜻으로 불리던 큰 부락) 등이 있는데 , 특히 ‘장안’이라는 자연마을 이름은 예로부터 이곳이 한양 도성 밖 별서와 유원지가 발달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평창동 장안 지역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 서울 시민들의 행락지 역할을 했으며, 1970년대까지도 도시 외곽의 한적한 교외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고급 주택과 현대식 건물이 많아졌지만, 평창동 골짜기에 흐르는 옛 평창천 주변으로는 아직도 나지막한 숲과 계곡이 있어 지명 그대로 ‘평온한 창고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평창동이라는 동명의 유래는 이처럼 조선시대의 국가 창고 운영과 관련되어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곳 주민들의 삶과 도시 공간에 역사성을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
각 지명이 품은 의미와 그에 얽힌 역사적 일화를 살펴보면, 종로구가 왜 ‘서울 역사의 축소판’이라 불리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종로의 거리는 한성 백성들의 종이 울리는 삶의 터전이었고, 그 골목과 동네 이름 하나하나가 왕조의 영광과 시련, 식민지의 아픔과 독립의 함성, 그리고 현대 도시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유산을 품은 종로와 그 속의 지명들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만하며, 앞으로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계승될 것입니다.
'histor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웨이보 선정 ‘중국 역사 속 위대한 인물 25인’ (0) | 2025.09.28 |
---|---|
국조오례의 편찬 배경과 체계 (五禮儀) 명나라 (0) | 2025.09.22 |
이슬람 경전 코란 꾸란과 이슬람 전승에 나타난 예수 '이사 이븐 마르얌' (0) | 2025.09.04 |
중국 도교 신 총정리 원시천존 태상노군 영보천존 (0) | 2025.09.04 |
당 황실 혈통과 민족적 기원: 한족인가 선비계인가? (0) | 2025.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