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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산업

'외부'에 고정된 나침반: 한국 정치의 대외의존성과 정체성의 위기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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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의 정체성은 경제 정책(성장 대 분배), 사회적 가치(보수 대 진보), 정부의 역할 등 자국 내부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 지형은 매우 이례적인 특징을 보입니다. 정당이나 정치 세력의 근간이 주체적인 정치 철학이나 비전보다는 '친미(親美)', '친중(親中)', '종북(從北)'과 같은 외부 국가에 대한 태도나 친밀도에 의해 규정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상적인 정치 발전 과정을 벗어난 현상이며, 한국 사회가 역사적,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태생적 대외의존성'이 정치 영역에 깊숙이 투영된 결과입니다. 주체적인 이념이 아닌 외부와의 관계가 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현실은 한국 정치가 직면한 구조적 한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1. 이념을 압도하는 '관계의 정치'


한국 정치에서 외교 정책은 국내 정치의 하위 변수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규정하는 최상위 변수로 작동합니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종종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대북관)'와 '미국과의 동맹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대미관)'입니다.
* 보수 진영: 강력한 한미동맹을 국가 존립의 기반으로 삼으며 '친미'는 단순한 외교 노선을 넘어 안보와 정체성의 동의어로 간주됩니다. 이들에게 대립항은 주로 '종북' 또는 '친중'으로 설정됩니다.
* 진보 진영: 민족 자주와 남북 화해를 중시하며, 한미동맹에 대해서는 보다 균형 잡힌 관계를 추구합니다. 이는 종종 보수로부터 '종북' 또는 '반미'라는 공격의 빌미가 됩니다.
이처럼 정치적 주관이 내부에서 형성되지 않고 외부와의 관계로 표현되면서, 복지, 노동, 환경 등 국민의 삶과 직결된 중요한 국내 의제들은 부차화되거나 외교·안보 이슈에 종속되는 현상이 반복됩니다.

2. 근본 원인: 지정학적 숙명과 의존의 역사


이러한 기형적인 정치 구조는 한국 현대사의 특수한 경로와 지정학적 조건에서 기인합니다.

(1) 국가 형성 과정의 외부 의존성
대한민국의 탄생 자체가 주체적인 혁명의 결과가 아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부 강대국의 질서 재편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이어진 분단은 국가의 정통성이 외부 후원자와의 관계에 깊이 연동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국 정치는 시작부터 자생적인 이념 투쟁이 아닌, 외부 세력이 제시한 이념(자유민주주의 vs 공산주의)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들의 지원에 의존하는 형태로 출발했습니다.

(2) 전쟁과 분단: 생존이 이념을 압도하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의존성을 고착화했습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에서 남한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고, 이는 한미동맹을 국가 운영의 절대적인 상수로 만들었습니다. 북한이라는 실존적 위협 앞에서 '안보'는 모든 국내 이슈를 압도하는 최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생존의 문제가 외세와의 관계에 종속되면서, 주체적인 이념이 발전할 공간은 극도로 협소해졌습니다.

(3) 경제 발전 모델의 대외 지향성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 구조 역시 대외 의존적이었습니다. 한국은 수출 주도형 성장 모델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외부 시장(미국, 일본, 이후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제적 성공이 외부 환경에 크게 좌우되면서, 어떤 외부 세력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느냐(친미냐 친중이냐)는 문제는 국가의 경제적 생존과 직결된 핵심적인 정치적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4) 지정학적 조건과 '사대주의'의 심리적 유산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은 끊임없이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강자의 권위에 의존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심리적 관성은, 현대 정치에서도 강대국을 롤모델로 삼거나 그들의 권위에 기대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행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3. 문제점과 한계: 주체성의 상실과 전략적 경직성


정치적 정체성이 외부 국가와의 관계로 정의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심각합니다.

(1) 국내 정치의 왜곡과 극단적 대립
가장 큰 문제는 주체적인 국가 비전과 담론이 실종된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국내 의제들이 독자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색깔론'에 희생됩니다. 예를 들어, 복지 확대를 주장하면 '북한식 사회주의'로 매도되는 식입니다. 이는 건강한 정책 경쟁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상대를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적'으로 규정하는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를 초래합니다.

(2) 전략적 자율성의 축소
국제 정세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국내 정치가 특정 국가에 대한 교조적인 태도에 매몰되어 있으면 유연한 대응이 불가능해집니다. 특히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친미'와 '친중'의 이분법적 대립은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을 심각하게 제약합니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용적인 외교 대신, 어느 편에 설 것인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되기 쉽습니다.

(3) 국가 비전의 부재
정당들이 고유한 철학과 비전을 바탕으로 경쟁하기보다 외부 권위에 기대어 정당성을 확보하려 할 때, 장기적인 국가 비전이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 한계를 보입니다. 이는 책임 정치의 실종과 민주주의의 질적 성장을 저해합니다.

결론: '의존'에서 '주체'로의 전환을 향하여


'친미', '친중', '종북'이라는 프레임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현상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극복해야 할 구조적 대외의존성의 가장 고통스러운 단면입니다.
지정학적 현실과 안보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외부를 향한 시선을 내부로 돌려야 합니다. '어느 나라와 친할 것인가'를 넘어,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주체적인 철학과 비전을 바탕으로 정치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이는 외부 의존성이라는 역사적 굴레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주체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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