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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통일신라와 당(唐) 왕조의 외교·문화·경제 교류 기록 총정리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6.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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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676~935년) 시기에 신라와 중국 당 왕조 사이에서는 사신 파견, 책봉(冊封) 관계, 조공 및 무역, 문화·기술 교류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국 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중국 정사인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에 이러한 교류의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다. 아래에서는 사서별로 주요 기록을 시대순으로 발췌하고, 원문, 번역, 해석을 덧붙여 정리한다.

1.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라-당 교류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통일신라 시기 당과의 중요한 외교 사건들을 비교적 자세히 담고 있다. 특히 신라 왕의 즉위 때 중국 황제가 내린 책봉 조서와 정기적 사신 파견 및 조공 기록, 문화적 교류에 관한 일화들이 눈에 띈다. 아래에 몇 가지 핵심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681년 – 신문왕 즉위와 당 고종의 책봉
• 원문: “唐高宗遣使册立為新羅王,仍襲先王官爵 ”
• 번역: “당(唐) 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신라 왕으로 책봉하고, 전임 왕의 관작(官爵)을 그대로 잇게 하였다.”
• 해석: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 김정명이 즉위하자, 당 황제가 정식으로 승인하는 의미에서 책봉 조서를 보냈다. 신라 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 겸 various 관직… 신라왕” 등의 칭호로 봉하며, 이전 왕이 받았던 당의 관직과 작위를 그대로 인정해준 것이다. 이는 신라가 당의 번속국으로서 공식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이처럼 신라 왕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당 황제는 칙명을 내려 책봉하는 冊封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은 주변국 군주의 정통성을 승인하고 신라는 명목상 冊封체제에 편입되는 형식을 취하였다.

686년 – 유교 경전 요청과 당 측의 하사
• 원문: “遣使入唐,奏請《禮記》并文章。則天令所司,寫《吉凶要禮》…勒成五十卷,赐之 ”
• 번역: “신라가 사신을 당에 보내 『예기』 등 서적을 요청하였다. 이에 측천무후(則天)는 관계 관서에 명하여 『길흉요례』 등을 발췌하여 50권으로 책을 만들어 내려주었다.”
• 해석: 신문왕 6년(686년경) 신라는 당의 유교 경전과 문장을 구하고자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시 당의 실권자였던 측천무후는 예악·예법에 관한 책인 『예기』의 핵심 부분을 뽑은 《길흉요례》 등 문헌을 편찬해 총 50권에 달하는 책을 신라에 하사하였다 . 이 일화는 신라가 적극적으로 당의 선진 문물과 유교 문화를 수용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신라는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당으로부터 들여온 유교 경전을 교육에 활용함으로써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이처럼 문화·기술 교류의 일환으로 당의 학문과 제도를 도입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702년 – 성덕왕 즉위, 당 황제의 애도와 책봉
• 원문: “唐則天聞孝照王薨,為之舉哀,輟朝二日,遣使弔慰,冊王為新羅王 ”
• 번역: “당나라 측천무후가 효소왕의 붕어를 듣고 그를 위해 곡을 하며 조정을 이틀 동안 폐했다. 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새 임금인)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 해석: 효소왕의 죽음과 성덕왕 김흥광(재위 702~737)의 즉위 시 당나라 조정의 반응에 대한 기록이다. 이 때 당의 황제는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로, 먼 이국 왕의 사망 소식에도 이틀간 조회를 중지하고 애도를 표했으며, 사신을 보내 조문과 위로를 전했다 . 또한 성덕왕을 새 신라왕으로 책봉하면서 이전 왕이 받았던 “장군(將軍)·도독(都督)” 등의 칭호도 그대로 승인해주었다. 이는 당시 신라가 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당 황제가 신라 왕실의 변동에 예우를 갖추어 대응했음을 보여준다. 배경으로, 신라는 7세기 중엽 당 태종 때부터 친당 외교를 펼치며 당의 연호와 복식 제도를 받아들이고 군사동맹을 맺는 등 긴밀히 협조해 왔는데 ,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신라는 예의의 나라(군자국)이라는 평가까지 받아 당과 우호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738년 – 효성왕 책봉과 문화 교류 (유교·바둑 외교)
• 원문: “璹將發,帝制詩序,太子已下百寮咸賦詩以送。帝謂璹曰:『新羅號為君子之國,頗知書記,有類中國。以卿惇儒,故持節往,宜演經義,使知大國儒教之盛。』又以國人善碁,詔…楊季膺為副,國高奕皆出其下。 ”
• 번역: “형숙(邢璹)이 떠나려 할 때, 황제가 친히 시의 서문을 짓고 태자 이하 백관들이 모두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황제가 형숙에게 이르기를:『신라는 군자의 나라라 일컬어지고 글과 기록을 제법 알며, 그 풍속이 중국과 비슷하다. 경(卿)이 독실한 유학자이기에 절월(節)을 가지고 가는 것이니, 마땅히 경전의 뜻을 잘 펼쳐 저들로 하여금 대국(중국)의 유교가 융성함을 알게 하라.』 또 (신라) 그 나라 사람들은 바둑을 잘 두므로, 황제가 명하여 양계응(楊季膺)을 부사로 삼아 함께 보내니, (양계응은) 그 나라에서 고수라고 하는 자들도 모두 그의 아래에 있었다.”
• 해석: 효성왕 김승경(재위 737~742)이 즉위하자 당 현종은 책봉 사절 형숙을 신라로 파견하였다. 현종은 사신이 떠나기 전에 친히 시(詩)의 서문을 짓고 태자 및 문무백관들도 작별 시를 지어 보낼 만큼 각별한 예를 갖추었다. 나아가 황제는 형숙에게 신라는 군자(君子)의 나라로 불릴 만큼 예의와 글을 아는 문명국이니, 그대 같은 학식 깊은 선비가 가서 경전의 참뜻을 펼쳐 유교의 융성을 알리라고 당부하였다 . 이는 당시 신라가 당으로부터 문화 수준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단순한 조공국이 아니라 도덕과 예의를 지닌 문명 파트너로 격상된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 또한 황제는 “신라 사람들은 바둑을 잘 둔다”고 언급하며 당 최고 수준의 바둑 기사인 양계응을 함께 보내어 바둑 교류를 주선하였다 . 실제로 형숙이 신라에 머무르는 동안 당 사절단과 신라인들 사이에 바둑 대국이 펼쳐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일화는 문화·스포츠 외교의 일종으로서, 단순한 조공 사절 파견을 넘어 유학 경전과 오락을 통한 교류까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황제가 특별히 현인을 보내 경전을 전파하도록 한 것은 당 문화의 영향력 확대 의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신라에 대한 호감과 우호 증진의 제스처였다. 이때 형숙 등 사절단에게 효성왕은 금, 보물, 약재 등을 두텁게 선물하였고 , 당 나라는 별도로 사신을 보내 **왕비 박씨를 책봉(冊封)**하는 등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듬해 739년 효성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정조(正朝) 하례를 했고, 당 사신 형숙은 귀국길에 노자(老子)의 『도덕경』 등 서적을 신라 왕에게 선물로 전해 주고 갔다 . 이와 같이 군왕 책봉을 계기로 양국 간 학문과 취미 분야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문화 교류가 전개되었다.
• 추가 해석: 739년 형숙 일행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갈 때 신라 왕은 황금 30냥, 비단 50필, 인삼 100근을 하사하여 후하게 대접하였고 , 740년에는 다시 당에서 사신을 보내와 효성왕의 왕비를 책봉해주었다 . 이러한 빈번한 왕실 교류는 신라-당 간 친선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당 현종은 신라를 일컬어 군자국(君子國)이라 칭찬하고, 신라인이 시·서(詩書) 등 한문학에 능통함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 이는 당시 신라 승려와 유학생들이 대거 당에 건너가 유학하고 귀국한 사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실제로 『자치통감』 등에는 정관 14년(640년)경부터 장안 국자감에 고구려·백제·신라 등 외국 유학생들이 운집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인들의 적극적인 유학(遊學) 활동을 알려준다 . 이러한 인적 교류를 통해 신라는 당의 선진학문, 제도, 문화를 받아들여 자국의 통치와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활용하였다.

756년 – 안록산의 난 시기 신라의 사신 파견 (당 현종의 칭송 시)
• 원문: “王聞玄宗在蜀,遣使入唐,溯江至成都朝貢。玄宗御製御書五言十韻詩赐王曰: ‘嘉新羅王歳修朝貢…’ ”
• 번역: “신라 왕이 현종이 촉(蜀)에 계심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성도(成都)까지 가서 조공하였다. 이에 현종이 친히 오언십운체의 시를 지어 신라 왕에게 내려주기를: ‘아!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닦아오는 것을 가상히 여기노라…’라고 하였다.”
• 해석: 경덕왕 김헌영(재위 742765) 때인 755756년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당 현종은 수도 장안을 떠나 촉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내전으로 국력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신라는 변함없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과 친조(親朝)의 예를 다했다. 신라 사신 일행은 먼 길을 항해하여 난을 피해 있는 현종을 직접 찾아가 조공을 바쳤고, 이에 감동한 현종은 친히 신라 왕에게 보내는 시를 지었다 . 그 시에서 현종은 “신라 왕이 해마다 예를 행하고 조공을 다하니, 예악(禮樂)과 의리의 이름을 잘 실천하고 있다”, 멀리 바다를 건너와 와준 것을 가상히 여긴다는 내용으로 신라의 의리를 극찬하였다 . 이 일은 『삼국사기』와 『자치통감』 등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현종의 칭송시는 열 운(韻)의 한시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신라가 당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켰음과 동시에, 당 조정도 신라를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자 조공국으로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는 발해 등과 대치하던 당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남쪽 협력자였는데, 현종은 시를 통하여 “신라왕이 예의와 음악의 이상을 실천하여 예악의 나라로서 이름이 높다”고 찬양하며 신라의 지속적인 우방 역할에 감사와 격려를 표했다 . 한편 이 기록은 안록산의 난이라는 위기 국면에서 조차 양국이 외교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며, 신라 사신단이 사천성까지 가서 조공을 올린 사실은 동아시아 해상 교통로를 통한 교류의 활발함도 나타낸다.

(기타) 정기 조공·무역 사신 파견 사례
• 위 사례들 외에도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시기 당과 정기적인 사신 왕래와 조공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예를 들어 705년 성덕왕 때 “3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 733년에는 당 현종의 요청에 따라 신라군이 발해를 남쪽에서 공격하는 나·당 연합군사 작전이 있었는데 큰 눈으로 실패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 734~735년에도 신라는 당에 사절을 보내고 백마 등을 바쳤으며 , 극심한 가뭄과 흉년이 들어 어려울 때 당에 진상한 마필이나 토산물에 대한 면세와 구제 조치를 청하기도 했다. 760년대 안사의 난 수습 후에도 신라는 주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고, 당 측은 신라 사신을 예부시랑 또는 검교예부상서 등 종3품 내지 종2품 상당의 벼슬로 임명하여 예우하였다  . 예컨대 768년 경덕왕 때 당 황제는 신라가 보낸 사신을 예부상서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 이러한 조공 사절의 왕래는 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당에 89차례 사신을 보냈고 당에서도 신라에 100여 차례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 이를 통해 해상 교역로를 통한 경제·무역 교류도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당에 보낸 조공품으로는 금, 은, 향로, 말, 매, 모직물, 인삼, 솔개 가죽 등이 있었고, 이에 대한 답례품으로 당에서는 비단, 책략, 약재, 공예품 등을 내려주었다고 전한다.
• 특히 828년 신라의 장보고(張保皐)는 해적을 소탕하고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여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망을 구축하였는데, 이를 통해 사무역도 크게 증진되었다. 신라인 해상 세력의 약진으로 노예 무역 등이 근절된 점도 주목된다. 《신당서》 신라전에 따르면 “태화 연간(827~835년) 이후로 바다에서 신라인을 파는 일이 없었다”고 하여, 당 조정이 여러 차례 금령을 내리고 장보고가 해적을 평정한 결과 *해상에 신라 노예 매매가 사라졌다고 적고 있다 . 이는 국제 해상 교역의 질서 확립과 함께 인적 교류의 안전망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 말기 교류: 9세기 후반 당나라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신라는 꾸준히 교류를 이어갔다. 예컨대 883년 신라의 유학생 최치원은 당의 과거에 급제해 당 관직에 올랐다가 귀국하여 계원필경 등의 저술과 개혁 건의를 남겼는데, 그의 사례는 신라 지식인의 당 유학과 귀환을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이다. 894년에는 신라 사신으로 간 김윤후가 당 희종에게서 『구당서』 등 역사서를 하사받았다는 설도 있으며, 906년 당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신라 사신은 장안에 머무르며 정세를 살폈다고 한다.

이처럼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와 당나라는 7세기 후반부터 9세기 후반까지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중국皇帝-신라왕의 군신(君臣) 관계였지만, 상호 실리와 문물을 교환하며 우호를 다지는 모습이 다수 포착된다. 신라는 당으로부터 책봉과 문화적 승인을 얻어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했고, 당은 신라로부터 성의 있는 조공과 협력을 얻어 동아시아 질서 유지에 활용하였다.

2. 『삼국유사』에 나타난 신라-당 교류 일화


일연(一然)이 13세기 후반에 편찬한 『삼국유사』에는 사서(史書)라기보다는 설화와 불교기사 중심으로 신라 역사가 기록되었다. 이 중에는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를 배경으로 하는 흥미로운 설화들이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여부와 별개로,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신라와 당의 관계가 어떻게 비춰졌는지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로 거타지(居陀知) 설화를 들 수 있다.

진성여왕 때 거타지 설화 – 당 황제가 내려준 특별한 예우

신라 말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때의 인물 거타지에 관한 설화에는, 당나라 황제 앞에서 신라 사신이 파격적 대우를 받은 장면이 묘사된다.
• 원문: “…仍命二龍捧居陁趂及使舡, 仍護其舡入于唐。唐人見新羅舡有二龍負之, 具事上聞。帝曰: 『新羅之使必非常人。』賜宴坐于羣臣之上, 厚以金帛遺之 ”
• 번역: “…곧 두 마리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받들어 사신 배를 따라붙게 하고, 또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에 이르게 하였다. 당인(唐人)들이 보니 신라의 배에 두 마리 용이 그 배를 떠받들고 있었으므로, 그 일을 모두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신라의 사신이 반드시 범상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하고,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어 (중국) 신하들 모두 위에 앉도록 하였으며, 많은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 해석: 이 설화에서 거타지는 신라의 활 잘 쏘는 장수로 등장한다. 거타지가 우연히 용왕의 노인을 구해 준 인연으로 용왕은 자기 딸을 거타지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딸을 꽃가지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 품에 넣은 뒤 신라 사신선을 쫓아 당나라로 함께 가도록 한다 . 이때 용왕은 두 마리 용을 붙여 배가 빨리 가도록 돕고 끝까지 호위하게 하는데, 당나라 연안에 도착한 신라 사신의 배를 두 마리 용이 떠받드는 광경을 당 사람들이 직접 목격하게 된다. 황제에게 급보가 올라가자, 당 황제는 “신라에서 온 사신은 필시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며 크게 놀라고 경탄한다. 황제는 즉시 조정을 열어 신라 사신을 국빈으로 예우하였고, 연회석상에서 그를 당의 모든 신하들보다 윗자리에 앉히는 특별 대우를 하였다. 그리고 금과 비단 등을 두둑이 선물로 주어 돌려보냈다고 한다 .
이 이야기는 환상적 요소를 담고 있지만, 몇 가지 역사적 시사점을 준다. 우선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사신이 당 황제 앞에서 당대신들보다 윗자리에 앉을 만큼 존중받았다고 전승함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표현하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통일신라 사신이 그런 대우를 받았을 가능성은 낮지만, 최소한 신라 사신의 위신과 교양이 높이 평가받았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용이 배를 호위하는 장면은 신라 사신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당대의 상상력과 해상 교통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거타지는 훗날 아내가 된 용녀와 함께 귀국하는데, 이는 신라와 당의 교류를 인적 교류 (타국 여성의 입국) 형태로 상징화한 면도 있다.
결국 이 거타지 설화는 “신라가 하늘(용왕)의 도움을 받을 만큼 덕이 있는 나라이고, 그 사신은 당 황제도 감탄할 영험을 지녔다”는 식으로 신라 왕실과 국가의 위신을 드높이는 서사이다 . 이를 통해 볼 때 통일신라 말기까지도 신라인들은 당과의 관계에서 자국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 문화적 우위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밖에도 최치원이 당에서 돌아와 남긴 흔적이라든가, 신라 승려들의 당 유학과 구법행각 등 다양한 일화가 전하는데, 이러한 설화들은 신라와 당의 교류를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조명해 준다.

3. 『구당서』 (舊唐書) 속의 신라 기록


중국 당 왕조의 정사(正史)인 『구당서』 (945년 편찬)는 동이열전에서 신라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실린 신라 관련 기록은 당 조정이 파악한 신라의 지리, 풍속, 왕계와 함께 신라-당 교류의 사실들을 간략히 전한다.
• 원문: “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其國在漢時樂浪之地 .”
• 번역: “신라국은 본래 변한(卞韓)의 묘예(후예)이다. 그 나라 땅은 한(漢)나라 때의 낙랑군 땅에 있다.”
• 해석: 『구당서』는 신라를 삼한 중 변한의 후예로 규정하고, 신라의 영역이 옛 한나라 낙랑군 땅에 해당한다고 서술한다. 이는 중국사가 신라를 한반도 남부의 종족이 세운 나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구당서 신라전에는 신라의 건국설화와 왕계가 간략히 소개되고, 신라의 국내 풍습과 산물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高祖(당 고조) 때 김진(金眞)을 낙랑군왕에 봉한 이래로 그 후손들이 대대로 임금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어 , 당 고조(이연)가 초기에 신라 김씨 왕실을 낙랑군왕으로 책봉한 사실을 언급한다. 이는 621년(신라 진평왕 당시)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 처음 통교했고, 당에서 신라왕을 낙랑군왕으로 책봉하였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구당서』는 신라의 관직명, 복색 제도, 장례 풍습, 언어와 문자 등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신라의 의복은 고구려와 비슷하다”거나 “문자는 중국과 동일하다”는 식으로 적고 있다 . 이는 통일신라 시기 신라가 이미 한자 문화권에 완전히 편입되어 있었고, 제도적으로도 당과 유사한 시스템을 채용했음을 뒷받침한다.
• 『구당서』에는 또한 신라의 조공 및 사신 파견에 관한 연표식 기록이 일부 있다. 예컨대 당 현종 개원 21년(733) 조에는 “신라왕 김흥광(金興光)이 조카 김지렴을 보내 입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위에서 언급한 발해 공격 협조 직전 신라 사신이 입조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 또 개원 23년(735)*에는 “신라왕이 사촌동생 김상을 보내 입조하였다”는 등, 신라왕족이 직접 당에 가는 사례도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당 조정이 신라의 왕족 사신 파견을 중시하고 일일이 연대별로 적어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가 빈번히 왕실 일원들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외교에 공을 들였음을 시사한다.
• 『구당서』 신라열전 말미에는 8세기 중반 이후의 일을 간략히 언급하면서, 발해의 건국과 신라의 관계도 다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문이 단편적으로 남아있어 자세하지는 않다. 전반적으로 『구당서』의 신라 기록은 후대에 편찬된 『신당서』에 비해 간략하며, 당과 신라의 기본적인 관계(조공-책봉)를 개괄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당 태종 이래 나당협공, 나당전쟁, 통일 완수 후의 외교까지 일련의 흐름을 중국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있다.

4. 『신당서』 (新唐書) 속의 신라 기록


북송대(11세기)에 구당서를 보완하여 편찬된 『신당서』 역시 동이열전에서 신라전을 싣고 있다. 신당서 신라전은 구당서 내용을 거의 계승하면서도, 통일신라 후반기의 사정과 당 멸망 무렵까지의 상황을 추가로 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 원문: “新羅, 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同光元年, 新羅國王金朴英遣使者來朝貢。長興四年, 權知國事金溥遣使來…自晉已後不復至 ”
• 번역: “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다. 한나라 낙랑의 땅에 자리 잡고 있다. … 당 동광 원년(923년)에 신라국왕 김박영(金朴英)이 사자를 보내 와서 조공하였다. 당 장흥 4년(930년, 즉 933년)에는 권지국사(金溥) 김부가 사자를 보내 왔다. … 오대 진(晉) 이후로는 다시 오지 않았다.”
• 해석: 신당서의 서두는 구당서와 거의 같으나, 당이 멸망하고 5대가 들어선 후의 신라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 구체적으로, 후당(後唐) 장종(莊宗)의 연호 동광 원년(923)에 경명왕 박승영(朴昇英, 김박영으로 잘못 표기된 것으로 보임)이 사신을 보내 후당에 조공하였고, 후당 명종 장흥 4년(933)에 경순왕 김부(金溥, 당시 왕위는 아니나 ‘권지국사’로 불림)가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한다 . 그 뒤 후진(後晋)이 들어서고 신라는 더 이상 조공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된 김승영(박씨)과 김부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두 왕(경명왕, 경순왕)에 해당한다. 이로 미루어, 신라가 후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국력이 쇠퇴하던 중에도 중원 왕조 (후당)에 조공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신라는 멸망하였고, 후당→후진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와중에 더 이상 신라의 사신은 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당서 신라전은 결론짓는다. 이는 신라의 국가 종말이 중국 정사에 간접적으로 기록된 사례라 할 수 있다.
• 한편, 『신당서』 신라전에는 9세기 해상 무역에 관한 중요한 대목이 포함되어 있다. 당 문종 태화 연간(827~835) 이후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하여 바다에서 신라인을 매매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적은 부분이다 .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라 노예 무역 근절에 대한 것으로, 구당서에는 없던 통일신라 후반 해상질서의 개선을 기록한 점에서 눈길을 끈다. 또 신당서는 신라가 동쪽으로 “장인(長人)”이라는 사람들과 접해 있다고 부연하는 등 지리 지식도 보완되었다고 한다 . 이러한 차이는 편찬 시기의 정보 축적과 시각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송대 역사가 구양수 등이 편찬한 신당서는, 당대에 쓰인 구당서보다 비교적 객관적이고 조심스런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다. 신라에 대해서도 “풍속이 미개하다”거나 하는 일부 구당서식 표현을 빼고, 객관 사실 위주로 기술하였다. 전반적으로 신당서 신라전은 통일신라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대강을 망라하여, 신라는 변한의 후예로 출발해 당말오대 시기에 멸망했다는 맥락을 명확히 보여준다.

5. 『자치통감』에 나타난 신라-당 교류 기록


『자치통감』(司馬光 등 편찬, 1084년 완성)은 춘추전국부터 오대에 이르는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통사로, 당과 신라의 관계도 당시 연도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 중심 서술이기 때문에 신라 관련 기사는 당 황실의 시각에서 간략히 등장하지만, 당-신라 간 주요 사건을 연표로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 733년 발해공격 협조: “開元二十一年 (733년) … 遣王子某率兵出海, 南討渤海 ” 등으로, 당 현종이 발해를 정벌하고자 신라에 남쪽에서 협공을 요청하여 신라군이 바다를 건너 발해 남방을 공격했음을 전한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해 겨울 신라군은 폭설과 혹한으로 병사의 절반을 잃고 성과 없이 철수했다고 한다 . 이 기록은 신라가 당의 대외 군사작전에 참여한 사례로, 나·당 동맹이 군사적 협력으로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 755~756년 안사의 난: 위 『삼국사기』 부분에서 설명한 신라의 사천성 조공 사건도 『자치통감』에 수록되어 있다. 현종이 촉으로 피난간 지정 연간(756년) 조를 보면, 신라 사신의 내조와 현종의 하사시(賜詩) 이야기가 언급된다. 이를 통해 혼란기에도 조공을 지속한 신라의 충성과 이에 화답한 당 황제의 조치를 알 수 있다 .
• 신라 멸망: 『자치통감』은 10세기 중엽까지 서술되므로 935년 신라의 멸망도 다루고 있다. 진종(후진) 2년(935년경)조에 신라 마지막 왕이 고려에 항복하여 신라가 망했다는 취지의 언급이 있다. 다만 자치통감은 중국 내정사가 중심이기에 신라 멸망 자체를 자세히 논하지는 않고, 발해가 거란에 멸망(926년)하고 신라가 고려에 흡수(935년)되어 더 이상 조공국이 아니게 되었다는 정도를 간략히 보여준다.
• 문화교류 측면: 자치통감에서는 당의 장안 국자감에 모여든 신라 등 외국 유학생이나, 신라 승려들의 왕래에 대한 언급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652년 당 고종 때 신라 승려 원측이 당에 가서 현장 법사의 제자가 되었고, 640년대에는 앞서 언급한 신라 유학생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 이는 통일 이전부터 신라-당 사이에 지적·불교적 교류가 깊었고, 통일신라 시기에도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자치통감은 이러한 흐름을 당의 시각에서 짤막히 언급하지만, 신라가 동아시아 국제교류망에 적극 참여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以上의 내용을 종합하면, 통일신라 260년간 당 및 중국 왕조와의 외교, 문화, 경제 교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조공-책봉 관계의 유지: 신라는 당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고, 당 황제는 신라왕을 ○○왕, 도독 등의 칭호로 책봉하였다. 왕위 교체 시마다 책봉장이 내려지고 신라왕의 대외적 정통성이 확인되었다  . 이러한 관계는 형식적으로는 중국 중심의 천하관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상호 이익을 교환하며 안정된 외교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 빈번한 사신 왕래와 무역: 신라는 8~9세기 동안 수십 차례 사신을 파견하고 당으로부터도 많은 사신을 받았다 . 해로(海路)를 통한 왕래가 활발하여, 산둥 반도-황해-남해를 잇는 항로로 사절과 상인이 오갔다. 신라 사신은 때로 왕족이나 고위 관리가 겸했고, 이들은 당에서 관작을 제수받는 등 예우를 받았다. 상인들은 신라방, 신라소 등 당 국내 거주지에서 활동하며 신라향(新羅香), 신라布 같은 상품을 교역했다. 장보고의 해상활동 이후 해적 위협이 줄어들고 노예무역이 금지되면서 교역 환경도 개선되었다 .
• 문화·기술의 쌍방 교류: 신라는 당으로부터 유교 경전, 역사서, 불경 등을 수입하고, 유학생과 승려를 파견해 선진 학문과 종교를 배웠다 . 당의 율령법, 과거제, 관복제도 등을 수용하여 통치 구조를 정비했다. 반대로 신라의 금 공예, 향료, 인삼, 바둑 문화 등이 당에 소개되었고, 신라인의 뛰어난 음악과 무용도 당 궁정에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헌덕왕 때 범종 주조 기술이나 선덕여왕 때 당 비단 기술 등이 전해졌다는 기록도 있어, 구체적 기술교류 사례로 거론된다.
• 상호 인식: 당나라는 신라를 초기에는 하나의 번국으로 대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군자국이라 높여 부르는 등 문화적 성숙을 인정하게 되었다 . 신라는 당을 천조(天朝)로 숭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국의 전통과 독립적 위상을 지키려 하였다. 예컨대 태종 무열왕의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했다가 당에서 충고하자 이를 변경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 미묘한 외교적 자존심을 조율하기도 했다. 신라인 지식인들은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가지기도 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예의와 도덕을 아는 문명인으로서 오랑캐가 아니라는 자부심이었다 .

마지막으로, 통일신라와 당의 교류는 10세기 초 당과 신라가 거의 동시에 몰락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된다. 907년 당이 멸망하고, 935년 신라가 고려에 통합되면서 7세기 중엽부터 이어져온 조공·책봉 관계도 끝이 났다. 그러나 그동안 축적된 풍부한 문화적 유산과 교류의 기억은 이후 고려와 송의 관계로 계승되었다. 통일신라 시기의 한중 교류사를 담은 위의 사료들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전형으로서 오늘날까지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 있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유사』, 『구당서』·『신당서』 동이열전 신라조, 『자치통감』 당기 등 관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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