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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2~3세기 일본 왜(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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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3세기 ‘왜’의 역사적 배경
2. 국가 구조와 정치 체계
3. 경제 활동: 농업, 제조, 교역
4. 문화와 종교적 특징
5. 사회 조직과 풍습
6. 언어와 문자 사용
7. 한반도 및 중국과의 외교 관계
8. 결론: 종합 평가와 역사적 의의

1. 서론: 2~3세기 ‘왜’의 역사적 배경


23세기경은 일본 열도의 야요이 시대 말초기 고훈 시대로서, 선사적 농경 사회에서 초기 국가로 변화하던 시기이다. 중국 측 사서에는 이 시기의 일본을 왜(倭)로 칭하면서 다수의 소국(小國)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 대륙에서 전래된 벼농사와 금속기 문화의 보급으로 곡물 생산 증대와 관개 수리의 통제가 가능해지자 사회 계층이 분화되었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하는 소국들이 성립되었다 . 실제로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전한 농경·금속 기술을 바탕으로 규슈에서 혼슈까지 야요이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북규슈 지역에서 한반도의 고인돌과 동일한 형태의 무덤이 출현하고 당시 일본인의 평균 신장이 남부 한반도인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인적 교류가 활발했음이 확인된다 .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3세기 중엽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여왕 히미코(卑彌呼)를 중심으로 한 야마타이국(邪馬台國) 연맹이 나타나게 된다. 본 보고서에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통칭 「위지 왜인전(魏志倭人傳)」) 등의 중국 측 사료와 최신 일본 고고학 연구 성과를 토대로, 서기 2~3세기경 일본 ‘왜’의 정치 구조, 경제 활동, 사회·문화상 및 대외 교류 양상을 종합적으로 고찰한다.

2. 국가 구조와 정치 체계


2~3세기경 ‘왜’는 통일 왕국이 아니라 수많은 소국(일종의 부족 국가)들로 분립된 상태였다. 중국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왜인은 바다 건너 여러 산섬에 거주하여 나라와 읍락을 이루고 있는데, 예전에 약 100여 개국이 있었고 한(漢)대에는 조공한 자들도 있었다. 현재는 통역을 통해 교류 가능한 나라가 30국가량이다.”고 전한다 . 이처럼 약 100여 개의 크고 작은 정치체가 난립하였으나, 그중 북규슈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 연맹체가 나타나 중국과 사절을 교환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위지 왜인전은 특히 2세기 후반에 각 소국 간에 장기간 내전과 혼란이 발생하였음을 전하는데, 약 70~80년 동안 남자 왕들을 추대해오던 왜국이 5~6년간의 혼란 끝에 모두 함께 한 여성을 왕으로 세웠다고 한다 . 그 인물이 바로 여왕 히미코(卑彌呼)로, 야마타이국이라는 나라를 도읍으로 삼아 다수의 소국을 통솔하게 되었다 . 중국 기록에 따르면 히미코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귀도(鬼道), 즉 주술적 권위를 기반으로 통치했으며, 나이가 많고 평생 미혼이었고 남동생이 국정 수행을 보좌했다고 한다 . 히미코 즉위 이후 왜국은 안정을 찾아 연맹 형태의 정치 체계가 성립되었는데, 히미코가 통치한 야마타이국을 여왕국이라 지칭하며 주변의 여러 소국들이 이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쳤다 . 위지 왜인전에는 “여왕국으로부터 북쪽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여왕국을 중심으로 통할하며, 여왕이 특별히 파견한 일대율(一大率)이 이들을 검찰한다”고 되어 있다. 이 일대율이라는 관리가 항상 이토국(伊都國)에 주둔하면서 여왕의 명을 받아 북쪽 제후국들을 감독하였으니, 중국의 자사(刺史)처럼 행동한 것으로 묘사된다 . 이는 히미코 치하에서 중앙 집권적 통제의 일부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히미코의 통치 양상은 독특한 신정 정치의 성격을 띠었다. 그녀는 즉위 이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정무를 보았는데, 궁궐에 1,000여 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지냈으며 자신을 뵙는 자는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 대신 오로지 한 명의 남자만을 곁에 두어 음식 시중과 연락을 담당하게 하였고, 거처에는 망루와 성책을 엄중히 둘러 항상 무장한 자들이 호위하였다고 전한다 . 이러한 기록은 히미코가 강력한 카리스마와 신성성으로 백성을 다스린 반면 실제 정무는 남동생이나 측근 남성이 보좌하며, 군사력을 갖춘 경호 체제를 통해 권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히미코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은 세력도 존재했다. 위지 왜인전은 “여왕국의 남쪽에 구노국(狗奴國)이라는 나라가 있으니 남자가 왕이며 여왕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 구노국은 히미코와 대립한 세력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3세기 중엽 히미코 사후에 구노국과 전쟁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 히미코가 약 248년경 사망하자 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일시적으로 남자 왕이 옹립되었으나 내분으로 1천여 명이 살해당하는 등의 큰 소요가 일어났다 . 결국 여왕의 종실(宗室)에 속한 13세의 소녀 이요(壹與)가 뒤를 이어 여왕으로 추대되었고 비로소 국내가 재안정되었다고 한다 . 이는 여성 지도자에 대한 신민들의 지지가 여전히 강했음을 시사하며, 히미코 사후에도 왜 연맹의 지속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후 기록에서 이요에 대한 추가 언급은 드물고, 3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야마타이국 연맹도 점차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

현대 연구에서는 히미코가 다스린 야마타이국의 위치와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전통적으로는 야마타이국을 일본의 중앙부인 기나이(畿內) 지역, 곧 훗날 야마토 정권이 자리잡은 나라현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과, 규슈 북부의 큐슈설로 양분된다 . 규슈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사서상의 거리 기록 및 북규슈 야요이 유적들(예: 이토시마의 평원유적,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유적 등)의 규모를 근거로 야마타이국을 규슈 지방 연맹왕국으로 본다. 반면 기나이설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일본 최초의 거대 고분인 나라 사쿠라이시 하시하카(箸墓) 고분을 히미코의 묘로 비정한다거나 , 히미코 사후 등장한 전방후원분 고분들이 일본 열도 전역에 확산된 사실에 주목한다. 실제로 길이 280m에 달하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인 하시하카 고분이 3세기 중엽 나라 분지 마키무쿠 유적에 출현한 것은 당시 일본의 정치 중심이 규슈에서 기나이로 이동했음을 시사한다 . 이후 3세기 후반4세기에 걸쳐 연이어 조영된 대형 고분들과 그 통일된 묘제의 전국적 확산은 일본 열도에 보다 중앙집권적인 고대 국가(야마토 정권)가 성립해감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 이처럼 23세기 왜의 정치 구조는 다수 소국의 연맹체로 출발하여 이후 고대 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3. 경제 활동: 농업, 제조, 교역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의 발달은 2~3세기 왜 사회 경제의 기반이었다. 야요이 시대에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수전(水田) 농경 기술이 정착하면서 곡물의 잉여 생산 및 저장이 가능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 증가와 계급 분화가 촉진되었다 . 중국 기록에도 “사람들이 벼, 기장, 삼과 뽕나무를 재배하고 양잠을 한다. 방직으로 가는 모시와 비단실, 면포 등을 생산하며… 그 땅에는 소나 말, 범, 표범, 양, 까치가 없다.”고 하여, 당시 왜의 농산품과 생산 활동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 즉, 논농사를 통해 쌀을 생산함과 동시에 삼베와 비단 등 섬유 생산도 이루어졌으며, 아직 대형 가축은 없어서 주로 인력 농경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수확한 곡물에 대한 조세 징수와 저장을 위한 고상식(高床式) 창고도 각지에 마련되었는데, 이는 국가 경제 기반이 형성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

당시 왜는 청동기·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무기와 농기구 제조에도 활용하였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왜인들은 전쟁 시 창과 방패, 목궁(木弓) 등을 사용했고, 대나무 화살촉은 상황에 따라 철제 혹은 골각제를 사용하였다 . 이러한 언급은 이미 철제 무기·도구의 보급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며, 실제 야요이 후기 유적에서 철제 농기구와 무기가 출토되고 있다. 다만 일본 열도 내 철 자원 산출이 제한적이었기에, 이 시기 철 소재는 주로 한반도 남부(변한 등지)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규슈 야요이 유적에서 한반도산 철부(쇠도끼)나 철정(鐵鋌) 등이 발견되고, 한반도에서도 일본산 야요이 토기가 출토되는 등 한·일 간 물자 교류의 증거가 다수 확인된다.

내부 경제에서는 시장 교역의 형태도 나타났다. 중국 기록에 “각국에 시장이 있어 물자가 있거나 없음을 서로 교환하며, 여왕국에서 파견된 대왜(大倭)’라는 관리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고 한다 . 이는 왜 연맹 내에서 중앙정부가 지방 시장의 거래를 통제하고 있었다는 흥미로운 정보로, 당시 소국들 사이에 잉여 생산물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시장에서는 주로 곡물, 직물, 공예품 등이 거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해안 지역에서는 어패류나 소금, 내륙에서는 목재나 섬유 등의 교환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도자기 및 토기 생산도 활발하여, 저장성과 운반성이 높은 야요이 토기가 생산되어 식량 비축과 교역에 사용되었다 . 야요이 토기는 이전 시대의 조몬 토기에 비해 얇고 대량 생산에 적합한 형태로, 이러한 변화도 경제 생산성 향상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외 교역 측면에서, 왜는 중국 및 한반도와의 무역·조공 관계를 통해 귀금속·철제·청동기 등의 선진 물자를 확보하였다. 3세기 위나라로 사신을 보낼 때 히미코가 받은 청동 거울 100매 와, 규슈 북부 야요이 무덤에서 출토된 다수의 중국제 동경(銅鏡)들은 이러한 대외 무역의 산물이었다. 또한 한반도 남부와 해상 교류로 철 소재와 공예품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왜의 토인(土人)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 남북으로 다니며 곡물을 사왔다는 기록도 있어 ,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민간 차원의 해상 무역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요컨대 2~3세기 왜의 경제는 벼농사를 축으로 한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계층화된 재분배 경제의 양상을 보였으며, 대내적으로는 시장을 통한 지역 교환, 대외적으로는 중국·한반도와의 교역 및 공납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갔다.

4. 문화와 종교적 특징


2~3세기 왜 사회는 자연 숭배와 샤머니즘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히미코 여왕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무녀(巫女)적 지도자가 정치적 권위를 행사하였다. 『위지 왜인전』에는 히미코가 “귀도(鬼道)를 신봉하여 능히 대중을 현혹시켰다(事鬼道、能惑衆)”고 기록되어 있는데 , 여기서 말하는 ‘귀도’란 인간 세상을 넘어선 신령(鬼神)의 힘을 빌려 예언이나 주술을 행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히미코가 나라를 다스릴 때 점복(占卜)으로 길흉을 판단하는 등 제정일치적 통치 형태를 보였다고 전하며, “늘 불을 피운 짐승뼈를 태워 금가는 모양으로 점을 쳤다”고 하여 중국의 쇄골점(龜甲占)과 유사한 골상 점술 풍습을 기록하고 있다 . 이는 당시 왜의 지배층이 주술적 권위를 기반으로 통치하고, 종교 의례가 국가 운영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히미코의 종교적 권위는 훗날 일본 신화에 나타나는 태양신 신앙과도 연결을 짓는 해석이 있다. 일부 연구자는 ‘히미코(卑彌呼)’를 “해의 아이(日御子)” 혹은 태양을 모시는 무당 여왕으로 보기도 하며 , 그녀가 다스린 야마타이국을 일본 야마토 왕권의 전신으로 파악하는 설도 존재한다. 고고학적 발견으로는, 후쿠오카현 이토시마 평원유적의 무덤에서 지름 46cm에 이르는 거대 동경(銅鏡) 여러 장과 다량의 옥·장신구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해당 무덤의 피장자가 태양신을 받들던 무녀(巫女), 다시 말해 히미코 자체이거나 관련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 이처럼 제사장적 성격의 여성이 정치권력을 행사한 사례는, 왜 사회에서 종교와 정치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음을 방증한다.

일반 백성들도 애니미즘적 신앙과 주술적 풍습을 일상에서 실천하였다. 농경 사회의 특성상 풍요와 다산을 비는 제사가 행해졌고, 하늘의 해·달이나 자연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자연 숭배 사상이 널리 퍼졌다. 특히 바다로 둘러싸인 환경 탓에 물의 신, 바다의 신에 대한 신앙이 중요했고, 이를 반영하듯 남자들은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새기는 풍습이 있었다. 중국 기록에는 “남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낯과 몸에 문신을 했다”고 하며, 그 이유에 대해 “고대에 큰 물고기나 물짐승의 해를 피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 즉, 물속에서 고기잡이를 많이 하는 왜인들이 물괴를 쫓는 주술로서 문신을 했고, 후대에는 그것이 단순 장식(裝飾)의 의미로 변했다고 한다 . 문신의 무늬나 위치, 크기는 부족마다 혹은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어떤 부족은 왼쪽에, 어떤 부족은 오른쪽에 무늬를 넣고, 크고 작은 문신으로 사회적 위계를 표시하기도 했다 . 이러한 문신 문화는 일본 열도 주민들의 심미관과 신앙관을 잘 보여주는 특징적인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의복과 주거 문화는 비교적 소박하고 실용적이었다. 남자는 상투 모양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아무 쓰개를 하지 않은 채, 나무 껍질로 만든 천(목면木綿)으로 머리를 동여매었다고 한다 . 입는 옷은 폭이 넓은 천을 재봉하지 않고 단지 끈으로 이어서 두르는 형태였는데, 섬유를 짜는 기술은 있었지만 옷을 꿰매는 재봉 기술이 발전하지 않아 두루마기형의 포획(抱衣)을 걸치는 수준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여자들은 앞이 트이지 않은 통옷을 입었는데, 마치 한 겹 짜리 이불에 가운데 구멍을 뚫어 머리를 내밀고 입는 형태였다고 하니 , 오늘날 말로 하면 펀치ョ 비슷한 원피스형 의상으로 추정된다. 여성들은 머리를 뒤로 땋아 늘이고 이마 쪽으로는 내려뜨렸으며(被髮屈紒), 남녀 모두 맨발로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중국인이 보기에도 왜인들은 추위와 더위를 별로 타지 않고 (온난한 기후 덕분에) 겨울에도 생나물을 먹으며 지냈다고 하며, 피부에는 붉은 빛깔의 안료를 발랐는데 이는 마치 중국인이 분바르듯 미용 또는 의식의 목적으로 몸을 단장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 이러한 묘사는 당시 왜인들의 수수한 옷차림과 더불어 청결을 중시하는 습관도 보여준다. 예컨대 “사람들이 겨울이나 여름이나 매일 몸을 씻는다”는 언급이나, 장례를 치른 후 온 가족이 강이나 바다에 들어가 목욕재계를 하는 풍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 왜인들이 물로 씻음을 통한 정화 의례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사회 규범 면에서, 왜 사회는 비교적 풍속이 엄격하고 치안이 양호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위지 왜인전은 “풍속이 음란하지 않고(不淫), 부녀자들은 정조 관념이 강해 질투하지 않으며, 도둑질이 적고 송사(訴訟)도 드물다.”고 전한다 . 일부다처제 풍습이 있어 신분에 따라 처의 수가 달랐는데, 귀족인 국내의 대인(大人)들은 아내를 45명까지 두고, 평민 계층인 하호(下戸)도 23명의 아내를 두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 그러나 여성들은 음탕하게 행동하지 않고 남편 간의 질투도 심하지 않았다고 하니, 일부다처 사회에서 비교적 안정된 가정 제도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은 엄격해서, 가벼운 죄를 지으면 그 처자식을 몰수(노비로 삼고), 중한 죄는 그 집안과 일족 전체를 몰살하거나 노예화하는 형벌이 있었다고 기록된다 . 이러한 연좌제적 처벌은 죄질에 따른 엄중한 법 집행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왜 사회가 혈연 집단의 연대 책임을 중시했음을 시사한다. 신분 질서도 뚜렷하여 “존비(尊卑) 간에 각각 차등과 서열이 있어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복종한다”고 하니 , 족장급 지배층과 평민·노비 계층 간 위계질서가 분명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예절과 관습 측면에서, 왜인은 상대에 따라 독특한 예법을 행했다. 신분 높은 사람(대인)을 만나면 “아랫사람(하호)은 길 가다 마주치면 뒷걸음질치며 풀숲으로 비켜선다. 말을 전하거나 일을 아뢸 때는 쭈그리고 앉거나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짚어 공경을 표시한다.”고 한다 . 이러한 배례(拜禮) 풍습은 중국의 예법과는 사뭇 다른데, 특히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무릎을 꿇는 대신 손뼉을 치는 등 독자적 예의 표현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 또한 귀인이 말에 답할 때 “‘아이(噫)’라는 소리로 승낙을 표시하는데, 이는 중국에서 ‘예(然諾)’라고 허락하는 것과 같다”는 기록도 있어 , 언어적으로도 예스(yes)를 나타내는 고유한 표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윗사람에게 극진히 예를 갖추고 아랫사람은 몸을 낮추는 사회 풍습이 정착되어 있었으며, 이는 계층 질서가 일상생활에서 준수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음주 문화와 가무풍속도 있어서, 사람들의 천성은 “술을 좋아하는 성품”이었고 , 장례식 등 의례 시에는 곡을 하는 상주와 달리 다른 참석자들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된다 . 가족 제도와 관련해서는 독특하게 부모 형제가 함께 자지 않고 각각 따로 잤다고 하는데 , 이는 세대나 성별 간에 주거 공간을 구분한 것으로 해석되며, 일부다처 가족에서 아내와 자녀 그룹별 거처가 나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2~3세기 왜 사회는 계층 질서와 예의범절을 중시하면서도 소박하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6. 언어와 문자 사용


언어 측면에서, 2~3세기 왜인들이 사용한 고유 언어는 정확히 어떠한 계통이었는지 단정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후대의 일본어의 전신(알타이계 통説)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시기는 아직 문자가 도입되기 전이라서, 왜인의 언어가 직접 기록으로 남겨진 자료는 없다. 『위지 왜인전』 자체는 한자로 서술된 중국 측 기록이므로, 왜의 지명과 관직명을 한자로 음차한 몇 가지 단서만 전해줄 뿐이다. 가령 위지에는 왜의 관직명으로 “히코(卑狗)”, “히메(卑奴母離)” 등의 음차 표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훗날 일본어에서 남성 귀족 명칭에 쓰인 “彦(히코)”, 여성 명칭에 쓰인 “姫(히메)”와 연관된 어휘로 해석된다  . 이로 미루어 보아 3세기경 왜에서는 이미 고대 일본어계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중국인이 이를 전해 들은 음을 한자로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사서에는 왜인들이 웃어른에게 대답할 때 아이(噫)라는 말을 썼다고 하여 , 이는 오늘날 일본어의 “はい(하이, 예)”에 해당하는 매우 이른 시기의 일본어 어휘 기록으로 여겨진다 .

문자 사용에 대해서는, 2~3세기 시점에 왜 사회 내부에 문자를 사용하는 전통은 없었다고 한다. 위지 왜인전은 “이러한 일에 대해 당시 문자가 존재하지 않아 기록에서 찾을 수 없으나 유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언급하는데 , 이를 통해 왜인들이 자체적인 문자 체계를 갖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공식 기록이나 행정 문서를 남기는 관습이 없었고, 사회 기억은 구전이나 결승(結繩) 등의 방법으로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훗날 일본에 문자가 본격 도입되는 것은 5세기경 한자(漢字)가 전래되고 나서의 일로, 히미코 시대에는 아직 문자의 사용이 정착되지 않았다. 따라서 히미코가 위나라에 보낸 국서나 위 임페라토르가 히미코에게 내린 칙서 등의 문서는 중국 한자로 작성되었겠지만, 이는 한반도 대방군 등 중계 거점의 한인(漢人) 관리나 통사(通事)가 작성·전달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당시 왜인 자신들은 한자를 읽거나 쓰지 못했으므로 외교 문서의 작성과 해독을 한인 통역에 의존했을 것이다 . 이러한 정황은 위지 왜인전에 “지금 교류하는 바는 모두 통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今使譯所通)” 는 구절에서도 드러나는데, 왜-중국 간, 혹은 왜-한반도 간 의사소통이 통역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문자 기록은 없었지만 왜인들이 자체적인 약속 표지를 사용한 흔적도 있다. 예를 들어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이던 57년에 후한 조정이 왜의 한 소국에게 하사한 금인(金印) — 이 금인은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고 새겨진 도장 — 이 18세기 일본에서 실제로 발굴되었다 . 이처럼 황제의 칙명을 상징하는 인장을 받았다는 것은, 비록 왜인이 그 한자 내용을 읽지 못하더라도 권위의 징표로서 이를 소중히 간직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도장 문화는 이후 일본이 한자의 수용과 함께 인장(印章)을 통치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전통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정리를 하면, 3세기 왜는 고유한 문자는 없고 구비 전통에 의존하던 구술 사회였다. 이 때문에 왜 내부의 역사나 전승은 후일 일본서기 등이 편찬되기까지 수 세기 동안 사실과 신화가 뒤섞인 채 구전되었다. 다만 대외 교류의 필요 속에서 왜인들은 중국 한자를 점진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45세기경부터 한자를 빌려 자기 언어를 표기하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그 시초는 이 시기보다 후대이지만, 2~3세기 왜의 대중들에게 한자는 신비한 선진 문화의 산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자의 부재는 오히려 당시 왜 사회가 구술 의례나 시각적 상징(예: 문신, 결绳)의 문화에 더 의존했음을 말해주며, 이것이 그들 문화의 한 특징이었다.

7. 한반도 및 중국과의 외교 관계


1세기 후반 후한 광무제가 왜국에 하사한 “한위노국왕(金印)” 금인. 이 금인은 1784년 일본 규슈 시카노시마에서 발견되어 후한서 기록의 진실성을 입증한 유물로, 직경 2.3cm의 소형 금도장이다 (후쿠오카시 박물관 소장). 이러한 금인은 고대 한·일 외교 관계의 상징적인 사례이다.

2~3세기 ‘왜’의 대외 관계는 주로 중국과 한반도를 향해 이루어졌다. 중국과는 이미 후한 시대부터 교류의 기록이 나타나는데,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서기 57년, 왜국의 한 소국인노국(奴國)의 왕이 후한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인수(印綬)를 하사받았다 . 이때 받은 것이 바로 위 사진의 한위노국왕(金印)”으로, 후한이 왜 소국의 왕을 정식 책봉하며 내려준 금도장이다. 또한 107년(영초 원년)에도 왜국 왕 수승(帥升) 등이 중국 조정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자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이는 왜가 일찍부터 한반도의 낙랑군·대방군 등을 경유하여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2세기 중엽 이후 왜국 내부 정세가 혼란했던 시기에는 대외 교류도 뜸해졌으나, 3세기 위나라 때 다시 활발한 외교 접촉이 전개된다.

위나라와 왜국의 관계는 여왕 히미코의 적극적인 외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히미코는 즉위 후 주변 소국들의 추대를 받자, 서기 238년(경초 2년)에 왜 사신 난승미(難升米) 등을 위나라 洛陽(낙양)의 조정에 파견하여 조공 사절을 보냈다 . 이에 대해 위 황제 명제(明帝)는 히미코를 “친위왜왕(親魏倭王)”, 즉 “위에 친순한 왜국의 왕”으로 봉하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내렸고, 아울러 청동 거울 100매 등 하사품을 주었다고 중국 사서는 전한다 . 히미코는 받은 금인을 위 신하들에게 보여주며 위나라의 승인을 얻은 정통 왕권임을 과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239년에는 위나라 대방군 태수 등이 히미코에게 다시 칙서를 전달하고 인수(印綬)를 수여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240년 위의 사절이 직접 왜국에 와서 황제의 조서를 전하기도 하였다 . 이러한 밀접한 교류는 히미코가 외교를 통해 국제적 승인과 물자를 획득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외교 관계는 히미코 사후에도 잠시 지속되었다. 히미코의 후계자인 여왕 이요(壹與) 역시 즉위 직후인 244~247년경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고, 위나라는 왜 사신들에게 중랑장 등의 관직과 함께 은해(恩惠)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 다만 3세기 말 위나라가 멸망하고 서진(西晉)이 들어선 후에는 왜와 중국의 교류도 한동안 끊기는데, 서진 태시 2년(266년)에 왜에서 진에 사신을 보낸 것이 잠깐 기록된 정도이다 . 이는 히미코 사후 왜 연맹의 세력이 약화되고 한동안 중국과 공식 외교가 중단되었음을 시사한다. 요약하면, 2~3세기 왜-중국 관계는 책봉 형태의 조공 외교로, 왜는 중국 황제로부터 인증된 왕위와 귀한 물자(금은, 거울 등)를 받는 대신 향토 산물을 조공하고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조공책봉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  .

한반도와 왜의 관계도 이 시기 점차 부각된다. 우선 교통로 측면에서, 왜국이 중국과 교류하려면 반드시 한반도를 경유해야 했다. 실제 위지 왜인전에는 “왜 왕이 낙양의 위 조정이나 대방군, 제한국(諸韓國) 및 대방군 사자가 왜에 올 때마다, 모두 항구에서 물품과 문서를 검열한 후 여왕에게 보냈다”는 구절이 있다 . 여기서 제한국이란 한반도의 삼한(마한·진한·변한) 여러 나라를 가리키며, 이 기록은 왜와 한반도 지역 사이에 사신과 물자가 드나들었음을 알려준다. 특히 대방군은 중국이 한반도 북부에 설치한 군현(낙랑군의 남쪽에 위치)으로, 왜 사절은 대방군을 통해 육로로 한반도 남부 삼한 지역을 지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 이 과정에서 왜인들은 한반도 남부의 여러 소국들과 접촉하여 통행을 협조받고, 때로는 교역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측 기록에서도 왜와의 접촉이 전해진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기원 173년(아달라 이사금 20년) 여름 5월에 “왜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 이는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시기보다 이른 시기의 언급으로, 역사적 사실성에 논란은 있으나 적어도 통일 이전 삼한·초기 신라사회에서 왜와의 외교 접촉 전승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에는 이후로도 종종 왜인(倭人)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이는 대개 왜구 혹은 왜국 군대의 침입 등 부정적 맥락이 많다. 예컨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엽 사이 신라 석우로왕 조에는 왜인 병선이 해안을 침범했다는 등 기술이 있으나, 이러한 초기 기록들은 사실이라기보다 후대 편자의 첨가나 전승적 요소로 보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4~5세기 이후에 가면 한반도 남부의 가야·백제와 왜의 관계가 본격화되어, 왜가 군사 지원을 보내거나 기술자·이주민을 받아들이는 등 보다 공고한 교류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2~3세기 단계에서는 왜와 한반도 삼한 세력 간에 주로 무역 및 선진문화 수용 차원의 접촉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변한 지역의 풍부한 철은 왜가 크게 필요로 한 자원이었고, 왜가 변한 및 가야로부터 철을 수입하는 대가로 곡물, 직물, 공예품 등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규슈 북부의 야요이 유적에서 한반도 가야계 토기와 철기가 나오는 한편, 한국의 가야 유적에서도 왜계 토기나 장신구가 출토되는 등 물질 교류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당시 한반도 남부와 왜가 해상 교역 파트너로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2~3세기 왜국의 대외 관계는 중국과의 조공외교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인정받고 선진 문물을 도입하는 한편, 한반도 삼한 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실질적인 물자 교환과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는 형태였다. 이러한 대외 교류는 이후 일본 고대 국가 성립과정에서 문자, 불교, 철제 문화 등을 수용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왜가 인식되기 시작한 출발점이 되었다.

8. 결론: 종합 평가와 역사적 의의


서기 2~3세기의 일본 ‘왜’ 사회는 청동기·철기 시대의 도래와 함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원시 공동체에서 초기 국가 단계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많은 소국들이 난립한 가운데 여왕 히미코를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출현하여 일시적이나마 정치 통합을 이룬 점은, 일본 고대 국가 형성사의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이 시기의 정치 구조는 제정일치적 성격을 띠어, 샤먼적 권위를 지닌 지도자가 부족 연맹을 이끌었고, 중국과의 책봉 관계를 통해 국제적 승인을 받음으로써 권위를 공고히 했다 . 경제적으로는 벼농사 기반의 농경 경제 위에 계층화된 재분배 시스템이 나타났으며, 철기·직물 생산과 내륙 교역의 성장으로 사회경제적 복잡성이 증대되었다. 사회 문화적으로는 문신, 다처제, 엄격한 예법 등 독자적인 풍습이 유지되었고, 문자 기록이 부재한 가운데 구전과 의례를 통해 공동체 전통이 이어졌다 .

무엇보다 2~3세기 왜는 한반도 및 중국과의 활발한 접촉을 통하여 외부의 진보된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 편입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호 교류는 이후 일본열도가 고대 왕권 국가(야마토 왕권)로 발전하는 데 촉매 역할을 했으며, 한반도 삼국 및 중국 왕조와의 역사적 관계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3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치 중심이 규슈에서 기나이로 이동하고, 거대 전방후원분 고분 문화가 일본 전역에 확산된 것은 왜 연맹이 보다 포괄적인 고대 국가로 성장해가는 변곡점으로서, 사실상 ‘왜국(倭國)’이라는 고대 일본 국가의 성립을 상징한다 .

결론적으로, 서기 2~3세기 일본 ‘왜’의 역사는 내부적으로는 국가 체제의 태동기이자 외부적으로는 국제 무대에 등장한 시기로 요약될 수 있다. 비록 이 시기의 자세한 모습은 제한된 사료와 고고학 자료에 의존하지만, 중국의 동이전 기록과 일본 열도의 발굴 성과를 종합하면 당시 왜 사회의 정치 조직, 생활상, 그리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상당 부분 복원할 수 있다. 이는 한반도와 일본 고대사의 연계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하며, 오늘날 동아시아 문화권 형성의 기원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한·일 공동 연구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고대 ‘왜’의 실체와 그 역사적 의의가 한층 더 명확히 규명되기를 기대한다.

참고 자료: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전” 원문 및 한글 번역  , 『후한서』 “동이열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본” 항목, 사이토 다다시 외 일본고대사,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고고학 DB 등.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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