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ie

2~3세기 중국과 일본 왜의 관계 연구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11. 7.
반응형


서론: 시대적 배경과 연구 범위


서기 23세기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후한(後漢)과 삼국 시대 위(魏) 등 중국 왕조와 일본 열도 왜(倭) 사이에 초기 교류가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이 당시 일본 열도는 여러 소국으로 나뉜 야요이 시대 후반고훈 시대 초기에 해당하며, 문자 기록이 없어 중국 측 사서에 의존해 역사를 복원합니다. 중국은 한(漢) 제국의 정치적 기반 위에 조공-책봉 체제를 통해 주변 이민족을 포섭하고 있었고, 왜 또한 이에 편입되어 외교 사절 파견, 조공(朝貢)과 책봉(冊封) 관계를 맺었습니다  . 본 보고서에서는 2~3세기 후한 및 위나라와 왜국의 관계를 외교·조공 사건, 중국 사서 기록, 구체적 사료 인용과 분석, 고고학적 검증, 그리고 중국의 왜국 인식 및 국제 질서 속 위치 측면에서 고찰합니다.

외교 및 조공 관계: 후한에서 위나라까지


후한과 왜의 초기 교류 (1~2세기)


후한 광무제 때인 57년(建武中元 2년), 왜국의 소국인 노국(奴國)이 사신을 보내 조공과 알현을 행했습니다. 『후한서』에 따르면 “노국이 바다를 건너 와 공물을 바치니, 광무제가 그에게 인수(印綬)를 하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때 내려준 금인(金印)이 바로 1784년 일본 규슈 시카노시마에서 발견된 유명한 한위노국왕(金印)입니다 . 이 금인의 바닥에는 “漢委奴國王”(한나라가 왜의 노국왕에게 내린 도장)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노국 왕이 후한 조정에 의해 왜국 노국왕으로 책봉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후한 조정은 이런 금인을 주변 속국 왕들에게 내려주어 황제를 정점으로 한 서열 질서에 편입시키는 외교 정책을 폈는데, 노국에 내린 금인은 왜가 처음으로 이 중화 질서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유물입니다 .


후한 광무제가 57년 왜 노국 왕에게 하사한 금인 “漢委奴國王”의 실물. 1784년 일본 시카노시마에서 발견되어 후한서 기록의 진실성을 입증했다. 금인에 새겨진 다섯 글자는 ‘한(漢) 나라가 왜(委=倭)의 노(奴)국 왕에게 내린 인장’이라는 뜻이다  .

후한과 왜의 공식 교류는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졌습니다. 107년(영초 永初 원년)에는 왜국 왕 수승(帥升) 등이 다시 후한 안제에게 생구(生口) 160명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생구는 살아 있는 노복 즉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왜국이 후한에 인적 자원을 조공품으로 올린 것입니다. 수승 등은 천자를 뵙기를 청원했다고 하나, 상세한 접견 여부는 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절 파견은 후한 조정에 왜국의 존재를 재차 알렸고, 중국 측 사서들은 이를 통해 왜를 한반도 남쪽 바다 건너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체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

3세기 초 왜의 통일자 등장과 위(魏)와의 외교


2세기 후반 후한 말엽에는 왜국 내부에 큰 변동이 있었습니다. 중국 『후한서』 기록에 따르면 “환제와 영제 연간(147~189년) 사이 왜국에 큰 혼란이 있어 여러 나라가 서로 공격하여 오랫동안 주인이 없었다”고 합니다 . 이 내란을 수습하고 등장한 인물이 바로 여왕 히미코(卑彌呼, 비미호)입니다. 사료에 따르면 “나이가 많도록 시집가지 않은 한 여자가 귀신 숭배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므로, 여러 나라가 함께 그녀를 왕으로 세웠다”고 전합니다 . 즉, 각지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제정일치의 무녀 지도자를 옹립한 것입니다. 히미코는 즉위 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동생 한 명에게 정사를 보좌시켰으며 시녀 1천 명을 거느렸다고 합니다  . 거처에는 엄중한 목책과 망루, 호위병이 배치되어 있었고 법도 또한 매우 엄숙했다고 하여, 당시 왜 사회에 계층화된 통치 질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히미코의 등장은 일본 열도에서 하나의 광역연합체(邪馬台國, 야마타이국)의 형성과 대외 관계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중국에서는 한 왕조가 무너지고 삼국이 정립되던 때로, 특히 위나라(조위, 220~265년)가 북중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히미코는 왜의 여러 소국들의 추천을 받아 여왕이 된 후, 위나라와 공식 외교를 맺어 자신의 지위를 공인받고자 했습니다. 239년(경초 景初 3년) 히미코는 위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과 친선을 청원합니다 . 당시 대방군(帶方郡) 태수 유하(劉夏)가 왜 사신을 받아들여 낙양의 조정으로 보냈고, 이에 위나라 황제는 같은 해 12월 히미코에게 칙서를 보내 회답했습니다 . 칙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짐은 왜 여왕 비미호(卑彌呼)를 친위왜왕(親魏倭王)으로 봉하고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를 내리노라…” 

위 황제는 히미코를 중국 황제에 친순한 왜국의 왕으로 책봉하고, 그 증표로 금으로 된 인장과 자색 인끈을 하사하였습니다. 이는 57년 노국에게 내린 한나라 금인과 마찬가지로, 위 조정이 히미코의 통치권을 공식 승인하고 국제적 지위를 부여한 행위였습니다. 이 칙서에서 황제는 “그대가 먼 곳에서 조공을 바치니 그 성심이 가상하다”라고 히미코의 충성과 효성을 치하하였고, 아울러 왜 사절로 온 난승미(難升米)와 도시우리(都巿牛利)에게도 각각 중랑장과 교위라는 관직과 은인·청수를 내려 포상하였습니다  . 이러한 책봉 외교를 통해 히미코는 주변 소국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고, 중국 황제는 왜를 조공국으로 편입시켜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위나라와 야마타이국의 교류는 몇 차례 더 이어졌습니다. 240년경 위 조정은 히미코에게 특별 사신을 보내 노란 깃발(黃幢) 등의 하사품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 그러나 히미코 치세 말엽에 왜국 내 분쟁이 다시 발생합니다. 야마타이국에 복속되지 않은 구노국(狗奴國)이라는 세력이 여왕과 반목하여 서로 싸웠고, 히미코는 위 대방군에 사자를 보내 이 내분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 위나라는 즉각 칙서를 들고 장정(張政) 등을 파견하여 양측을 회유하도록 했으나, 그 사이 히미코가 사망하고 맙니다.『삼국지』 위서에 따르면 히미코는 거대한 무덤에 장사지냈는데, 지름 100보(약 150m) 크기의 봉분을 쌓았고 남녀 노비 100여 명을 순장시켰다고 합니다 . 히미코 사후 initially 남자 왕을 세웠으나 국중이 복종하지 않고 다시 큰 혼란이 벌어져 수천 명이 살육당했습니다 . 결국 부득이 히미코의 왕족으로 어린 13세 소녀 이요(壹與)를 새 여왕으로 옹립하자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고 합니다 . 이요는 즉위 후 위에 사자를 보내와 장정을 비롯한 중국 사절을 20여 명의 수행단과 함께 본국으로 호송하며, 남녀 생구 30명과 진귀한 진주 5천 개, 비단 등을 위 황제에게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로써 3세기 중엽까지 왜와 중국 왕조의 공식 교류는 일단락되며, 이후 서기 266년에는 야마타이국에서 새롭게 들어선 서진(西晉) 조정에 조공 사절을 보내는 등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중국 사서에 나타난 왜국의 기록


중국의 역사서들은 당시 왜국의 상황과 풍속을 비교적 상세히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전”과 『후한서』 동이열전 등에 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야마타이국의 위치, 여러 소국의 분포, 사회 풍습, 생산품과 생활상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사료에 나타난 왜국의 모습을 구체적인 인용과 함께 살펴보고, 그 의미를 분석합니다.

『후한서』의 왜국 묘사


5세기 남조 송나라 범엽(范曄)이 편찬한 『후한서』에는 동이열전에 마한·한(韓) 다음 왜국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후한서』에 따르면, “왜는 한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여러 산과 섬에 의지하여 국읍(國邑)을 이루고 있으며, 총 백여국이 있다”고 합니다 .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 한반도 낙랑군을 설치한 이후, 한과 교류가 닿은 왜의 소국은 약 30여 국으로서, 각 나라 수장들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대대로 세습했다고 합니다 . 이 기록은 일본 열도에 다수의 소국 연맹이 존재했고, 중국과 교류한 일부는 자신들을 왕국으로 표방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 큰 왜왕은 야마타이국에 거주한다”고 하여, 히미코가 통치한 야마타이가 여러 왜국 소국 중에서도 중심 세력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후한서는 낙랑군 치소에서 야마타이국까지의 거리를 12,000리로 기록했는데, 이는 왜국의 대략적 위치를 중국 동남 해상, 지금의 일본 부근으로 인지한 것입니다 . 이어 “그 땅은 대체로 회계(중국 동남 연해) 동쪽에 있으며, 주애(海南島)와 가깝고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고도 하였는데, 이는 왜를 남방 해상 세계의 일부로 파악한 대목입니다 . 실제로 일본의 기후가 온난하여 “겨울과 여름에도 생나물을 먹고 맨발로 다닌다”고 한 묘사는 다소 과장되었지만, 중국인이 보기에 왜는 남방의 이국 풍토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후한서』는 왜인의 사회와 문화를 간략히 전하는데, 남자들은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하고, 그 문신의 모양과 위치로 신분의 높고 낮음을 구별한다”고 하였습니다 . 이는 고대 일본인의 문신 풍습(문신=文身)을 나타낸 것으로, 실제로 일본 선사 유적에서 얼굴에 문신 혹은 얼굴 문양이 표현된 토우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또한 “남자는 가로로 폭 넓은 천을 두르고 꿰매지 않은 옷을 걸쳐 입으며, 여자는 머리를 풀어 하나로 묶고 홑옷 같은 것을 중앙에 구멍을 내어 머리를 내밀고 입는다”고 옷차림을 묘사합니다 . 이 기록은 당시 왜인들이 바느질된 옷보다 직사각형의 옷감을 몸에 두르는 형태의 복식을 주로 했음을 시사하며, 고고학적 자료로 보아도 바느질 기법과 직조기술이 중국에 비해 덜 발달했음을 뒷받침합니다. 식생활에 대해서는 “손으로 먹고 변두(木製의 그릇)에 담는다”고 했는데 , 이는 식기를 사용하던 중국과 달리 손으로 집어먹는 풍습을 야만적으로 여긴 표현입니다. 또 “사람 성품이 술을 좋아하고, 장수하여 100세 넘는 이가 많다”고도 하여 , 먼 이국의 사람들을 어느 정도 낭만화하여 묘사한 측면도 엿보입니다. 범죄 벌칙에 대해 “도둑질이 거의 없고, 시기도 적으며, 죄를 지으면 그 처벌로 그 아내 자식을 노비로 삼고, 큰 죄는 그 집안을 멸한다”고 하여 , 비교적 엄격한 법제를 운용했던 것으로 기록합니다. 이러한 후한서의 설명은 일부 중국인의 유가적 이상(태평한 동이의 나라) 관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동시에 왜 사회가 비교적 소박하고 공동체 규범이 강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무엇보다 『후한서』의 백미는 앞서 소개한 후한 시기 왜와의 외교 사건들입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57년 노국 사신에게 금인을 내렸고 107년 왜왕이 다시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을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원문을 직접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建武中元二年(57년), 왜노국(倭奴國)이 봉공하고 조회하니, 사신이 스스로 대부라 칭하였다. (노국은) 왜국의 극남계이다. 광무제가 인수를 주었다. 안제 영초 원년(107년), 왜국 왕 수승 등이 생구 160명을 바치고 뵙기를 청하였다.” 

이처럼 후한 시대 왜국 관련 기사는 간결하지만 금인 하사나 노예 조공 같은 핵심 사실을 명료하게 전합니다. 또한 “환제·영제 때 왜국에 큰 난리가 있어 여러 해 동안 주인이 없다가, 한 여자인 히미코를 왕으로 세웠다”는 기록도 후한서에 나타나는데 , 이는 후한서 편찬 시기에는 이미 위서 ‘왜인전’의 내용(히미코의 존재)을 참고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히미코의 등극과 귀도(鬼道) 통치에 대한 후한서의 언급은 『삼국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후한 말부터 3세기 초까지 왜의 정세 변화를 전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 왜인전」의 상세 기록


진수(陳壽)가 3세기 말에 집필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전”은 후한서보다 훨씬 상세하게 왜국을 묘사하는 사료입니다. 이 책은 위나라 경초 연간(230년대)에 작성된 대방군 및 낙랑군 기록, 그리고 위 조정에 파견된 왜 사신들과 이를 수행한 중국 관리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서 「왜인전」의 내용은 크게 왜국까지 이르는 여정과 거리에 대한 지리 묘사, 여러 소국의 이름과 규모, 왜인의 풍습과 사회, 그리고 여왕 히미코에 대한 이야기와 위나라와의 교역 등으로 구성됩니다.

우선, 위서에 제시된 한반도에서 왜로 향하는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방군을 떠나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한반도 남단의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는데 여기까지 약 7천여 리 입니다. 거기서 바다를 건너 1천여 리 동남쪽으로 가면 대마국(對馬國)(쓰시마 섬)에 닿고, 다시 남쪽으로 1천여 리 바다를 건너면 일대국(一大國)(이크국, 이키 섬 추정)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 이어 배로 또 1천여 리 가면 규슈 북쪽 해안의 말로국(末盧國)에 닿고, 거기서 육로로 500리를 가면 伊都國(이토국), 다시 동남쪽으로 100리 가면 奴國(노국), 동쪽으로 100리 가면 不彌國(불미국)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 이 불미국에서 남쪽으로 20일간 항해하면 投馬國(투마국), 다시 남쪽으로 수로 10일 + 육로 1달을 가야 비로소 여왕의 도읍 사마대국(邪馬壹國)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 즉, 규슈 북부에서부터 여러 소국을 거쳐 상당히 남쪽이나 내륙 깊숙한 곳까지 이동해야 야마타이에 도달한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이 경로 기술을 둘러싸고 후대에 야마타이국 위치 논쟁(규슈설 vs 기나이설)이 있었지만, 다수 학자는 거리 단위 과장과 중복 이동 가능성을 감안하여 야마타이가 일본 혼슈 중서부(기나이) 지역, 즉 초기 야마토 정권 지역으로 보는 견해를 지지합니다  . 위서의 경로 묘사는 일견 모순되거나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쓰시마와 이키 섬, 규슈 서북부 등을 경유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한반도-규슈 간 해로가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일본 고고학에서도 쓰시마·이키에서 한반도계 토기와 중국계 동전 등이 출토되어, 이들 섬이 한-왜 교류의 중계 기지였음을 뒷받침합니다.

위서 「왜인전」은 왜국의 풍속에 대해서도 상세히 전합니다. 먼저 생업과 산물로서 “벼와 피, 삼베를 재배하고 누에치기와 방직을 알며, 가는 모시와 면포를 생산한다. 흰 진주와 푸른 옥이 나고, 산에는 단토(丹土)가 있다”고 했습니다 . 여기서 단토는 붉은 흙(진사)으로 붉은 안료를 뜻하며, 실제 위서 다른 대목에 왜인이 “몸에 붉은 단즙을 바르기를 중국의 분 바르듯 한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 또한 “그 땅에 소, 말, 호랑이, 표범, 양, 까마귀가 없다”고 하였는데 , 이는 일본 열도에 당시 말과 소가 없었다는 중요한 정보입니다. 고고학적으로도 말과 소는 4세기 이후에 한반도에서 도입된 것으로 보이며, 3세기 이전 일본에는 말·소 가축화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가축·짐승이 없다는 점은 왜를 미개하게 보는 요소였겠으나, 이는 사실에 부합하는 기록입니다. 병기로는 “창과 방패, 목궁(木弓)을 쓰는데, 활은 아래가 짧고 위가 길며, 화살은 대나무로 만들고 철촉이나 골촉을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 이러한 무기 묘사는 일본 야요이 문화의 청동무기(창·검)와 활 문화를 반영하는데, 일본에서는 3세기경 철촉 화살과 목제 방패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어 기록과 부합합니다. 반면 중국에서는 기병과 철제 무기가 활발히 쓰인 데 비해 왜는 기마병이나 대형 전투 장비가 없고 경무장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일본 나라현 사쿠라이 시의 3세기 고분에서 발견된 다수의 청동 거울 파편(위)과 중국 위나라 시대 삼각연(三角緣) 거울의 도안(아래) 등이 발굴된 이 고분에서는 중국 위(魏)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거울 100여 점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삼국지』에 기록된 “위 황제가 히미코에게 동경(銅鏡) 100면을 보냈다”는 일화를 뒷받침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위서에는 여왕 히미코와 관련된 기사가 자세합니다. 후한서 내용과 유사하게 “원래 왜인들은 남자 왕이 있었으나, 오래 전부터 난리가 끊이지 않다가 한 여자 비미호(卑彌呼)를 왕으로 세웠다”면서 히미코의 등장 배경을 설명합니다 . 히미코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귀신 붙이는 술법(鬼道)을 행하여 사람들을 홀렸다”, “결혼하지 않았고 동생이 보좌하였다”, “왕이 된 후에는 오직 한 남자만이 음식과 말을 전달하고, 나머지는 모두 여자 시종이다” 등 신비화된 통치 형태를 묘사합니다  . 이 내용은 히미코가 무녀적 성격의 지배자였음을 시사하며, 실제 일본의 전설이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여왕 핌미코(혹은 히미코) 혹은 신공황후 등의 모델로 여겨집니다. 특히 히미코가 통치 기간 은둔하며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동생을 통해 정사를 돌봤다는 구절은 향후 일본 고대사에서 여성 샤먼 군주의 전형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

위서에 나타난 히미코와 위나라의 관계는 앞 절에서 다룬 외교사와 일치합니다. 239년 히미코가 난승미 등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고, 위 명제는 히미코에게 친위왜왕이라는 책호와 금인 자수를 내렸다고 상세히 전합니다 . 또한 위나라로부터 받은 하사품 목록도 실려 있는데, 칙서에서 “교룡문을 수놓은 비단, 누에고치 비단, 색비단 수십 필 등을 답례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히미코가 위에 보낸 예물로는 “남자 노예 4명과 여자 노예 6명, 그리고 비단 2필 2장” 등이 언급되므로 , 실제 왜가 위에 보낸 것과 위가 답례로 준 것이 무엇인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왜는 주로 노예 인력과 지역 특산물(진주, 비단)을 바쳤고, 위는 직물과 의복 재료를 주로 내려 양측 교류가 물물교환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히미코가 위로부터 동경 100면을 받았다는 부분인데, 이 내용은 배송지 주석에 의해 보충되었거나 암시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 위서 본문에는 직접 “백면의 동경”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지만, “친위왜왕 히미코에게 보답으로 교류문錦 5匹, …(이하 생략)” 등의 기록과 이후 고고학 발견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히미코에게 하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위나라 거울들이 일본 각지 고분에서 다수 출토되어 사료와의 상관성을 뒷받침합니다  .

마지막으로 위서 「왜인전」은 히미코 사후의 정세도 전합니다. 히미코가 죽자 거대한 무덤과 순장 소식, 남자 왕 추대 실패와 이요라는 13세 여자 방계 왕의 옹립, 그리고 이요가 다시 위에 사신을 보내와 더 많은 조공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일련의 사건 서술로 이어집니다 . 이 기록을 통해 3세기 중엽 왜 사회의 계승 문제와 불안, 그리고 다시금 중국 조정의 승인을 얻어 정통성을 확립하려 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히미코-이요로 이어지는 여왕 계승은 단절 없이 왜가 중국과의 외교를 지속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며, 실제 이요의 사절은 위나라 대신 서진(265년 건국) 조정에 파견되어 266년에 조공한 것으로 『진서』에 전합니다. 이는 비록 위서에는 실리지 않았으나, 히미코 사후에도 왜국이 중화 왕조와의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고고학적 발견과 사료의 검증


중국의 문헌 기록은 후대에 편찬된 것이므로,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주변 지역의 고고학적 증거가 중요합니다. 다행히도 2~3세기 한중일 교류를 뒷받침하는 여러 물증이 발굴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중국 사서의 내용과 부합하거나 때로는 의문을 제기하며, 역사를 다각도로 검증할 수 있게 합니다.

57년 한위노국왕 금인의 발견


후한 광무제가 57년에 노국 사신에게 내렸다는 금인(金印)은 18세기 일본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1784년 에도시대 후쿠오카 번의 시카노시마(志賀島)에서 한 농부에 의해 작은 금인장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그 인면에 새겨진 글자가 바로 “漢委奴國王”이었습니다  . 발견 직후 일본의 학자 가메이 난메이가 이 금인을 조사하여, 『후한서』에 기록된 바로 그 “왜노국왕 금인”임을 밝혀냈습니다 . 무게 약 109g에 순금 95%로 만들어진 이 도장은 손잡이가 뱀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고, 옆면에 끈을 끼우는 구멍이 있어 당시 중국 봉인 제도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 후한서에는 단지 “인수(印綬)를 주었다”라고만 했지만, 당대에 금으로 만든 인장에는 자줏빛 끈(紫綬)을 달아 내려보냈다는 사실이 『한원(翰苑)』 등의 당나라 문헌에 나타나 있습니다 . 실제로 금인 발견 당시 자색 끈은 남아있지 않았으나, 자색 인끈을 내렸다는 기록을 통해 이 인장이 금으로 만들어졌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해줍니다 . 일본 후쿠오카시 박물관에 소장된 이 금인은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이 사서에 처음 등장한 증거로 교과서에도 소개되는 중요 유물입니다 . 금인의 발견은 『후한서』 기록의 신빙성을 강하게 뒷받침하였고, 중국 황제가 왜의 소국 왕을 책봉하여 자신의 체제에 편입시킨 구체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 나아가 한나라의 인장 수여 제도(재질과 끈 색으로 지위 구분)가 왜까지 적용되었음을 보여주어, 왜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편입되었음을 물증으로 증명합니다 .

히미코와 위의 교류: 거울·유물의 증거


3세기 히미코 시대의 대외 교류를 입증하는 유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중국산 청동거울과 기타 부장품들입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위나라 황제가 히미코에게 동경(청동거울)을 보내준 것으로 여겨지는데, 과연 일본 각지 고분에서 다량의 중국산 거울들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3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고분들에서 중국 위나라의 연호나 특징을 지닌 청동거울이 발견되어 관심을 모았습니다 . 그 대표 사례로, 일본 야마구치현 다케시마 고분에서 나온 삼각연 신수문경(三角緣神獸文鏡)이 있습니다. 이 거울에는 위나라의 연호인 “정시 원년(正始元年, 240년)” 명문이 새겨져 있어, 위 제국에서 주조한 거울임이 명확합니다 . 흥미로운 것은 『삼국지』의 기록대로 240년은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고 위로부터 답신과 예물을 받은 시점이며, 일본 학계에서는 이 거울을 히미코에게 하사된 100면의 동경 중 하나일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 사실 여부는 단정할 수 없으나, 이 거울과 동일한 유형의 삼각연 거울들이 일본 각지(군마, 효고, 나라의 고분 등)에서 출토되고, 심지어 한국 규슈의 카노쿠라 고분 등에서도 발견되어 히미코 시대 거울의 분포 경로를 연구하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거울들은 위나라가 왜에 보낸 교류품이 각 지역 수장 무덤에 부장되었거나, 혹은 왜 국내에서 정치 동맹의 증표로 배포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만약 히미코가 받은 100면의 거울을 주변 소국 수장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것이 곧 야마타이 연맹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

고고학자들은 한동안 일본에서 출토된 삼각연 거울들이 일본에서 자체 제작되었는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인지 논쟁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나라현 사쿠라이 시 쵸우스야마 고분(桜井茶臼山古墳)에서 거울 파편 385조각이 발굴되고 정밀 분석한 결과, 최소 100면 이상에 달하는 거울들이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 이 중 상당수는 중국 위나라에서 만든 거울(중국제 56면)과 일본 국내제 21면으로 구성되고, 특히 26면은 삼각연 신수경이었습니다 . 일부 거울 조각은 앞서 언급한 다케시마 거울과 같은 주형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어 , 중국 위나라계 거울이 일본에서 직접 수입되었음을 뒷받침합니다. 쵸우스야마 고분의 거울 출토량(100여 면)은 사서에 언급된 “백 면”과 일치하여 큰 화제를 모았고, 해당 고분의 피장자가 야마타이국의 최고 지배자 계열일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 이 발견은 히미코의 야마타이국을 기나이(畿内) 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에 힘을 실어주었고, 당시 야마토 정권의 중앙 집권적 위상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거울 외에도 일본의 야요이 후기~고훈 초기에 중국제 동판, 철기, 유리옥 등이 다수 전래되었는데, 예컨대 한나라의 오수전(五銖錢) 동전이나 명광개(明光甲, 철제 갑옷) 파편 등이 큐슈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왜인들이 한반도 낙랑군 등을 통해 물자 교류를 활발히 했고, 선진 기술과 재화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삼국지』 등이 전하는 왜인의 농경·직조 기술 보유나 철제 무기 사용 등의 진술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합니다.

한편, 히미코 자신의 무덤으로 여겨질 만한 대형 고분에 대한 연구도 주목됩니다. 『삼국지』는 히미코의 무덤이 지름 150m에 달한다고 했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거대한 전방후원분 가운데 하나인 나라현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과 규모가 비슷합니다. 하시하카 고분은 전설상 야마토토토히모모소 히메의 묘로 알려졌으나, 실제 축조시기가 3세기 중엽(240~260년 경)으로 과학적 연대측정되어 히미코의 사망 시기와 부합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만약 히미코의 묘가 하시하카 고분이라면, 그 주변에서 인골 등이 발견되지 않아 순장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초기 야마토 왕권의 실체와 히미코 전설을 연결짓는 단서가 될 것입니다  . 아직 결정적 증거는 없으나, 일본 학계는 마키무쿠 유적(纒向遺跡) 등 기나이 지역 대규모 취락(3세기 전반 조성)에서 히미코 시대의 정치 중심지 흔적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들은 중국 사서의 기록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 역사였음을 점차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중국의 왜 인식과 국제 질서 속 왜의 위치


고대 중국은 천자를 정점으로 한 중화세계의 질서 속에 사방의 이민족을 편입시키는 화이관(華夷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 사서들이 전하는 왜에 대한 인식도 이러한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호칭부터가 그러합니다. 중국은 일본 열도를 가리켜 ‘왜’(倭)라고 불렀는데, 글자 자체는 사람을 낮춰 이르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후세에 일본 측 요청으로 화(和)로 표기를 바꾸기 전까지, 중국인은 왜를 대체로 소인, 왜소한 자 등의 뉘앙스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2~3세기 시점에서 중국 왕조는 왜를 단순히 멸시의 대상만으로 여기지 않고, 교화하고 포섭할 수 있는 ‘동이’의 일원으로 보았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에서 공자는 “구이(九夷)라도 군자가 거처하면 무엇이 누추하랴”라고 말했음을 인용하며, 동이족은 본래 유순하고 예의가 있는 이들로 묘사됩니다  . 이는 중국이 동쪽 오랑캐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고 교화 가능한 존재로 여겼음을 뜻하며, 왜 역시 교류를 통해 왕화(王化)를 받아들일 잠재적 번국(藩國)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왜가 중국과 처음 공식 접촉한 57년, 광무제가 곧바로 금인을 내린 것에서도 중국의 포섭 전략이 엿보입니다. 후한과 위는 모두 왜 사절을 환대하고 왕으로 봉작함으로써, 왜를 제후국 대하듯 예우했습니다. 실제로 한나라의 인수 제도에서는 황제나 제후왕에게 옥새/금인을 사용하고, 그 리본 색을 황제는 붉은색, 제후왕은 자색으로 구분했는데  , 왜 왕에게 자색 인끈의 금인을 준 것은 곧 제후와 유사한 예우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 다만 이러한 책봉은 어디까지나 일방적 선포일 뿐, 중국이 실질적으로 왜를 지배하거나 간섭할 힘은 없었습니다. 중국 조정은 조공-책봉을 통해 명목상의 중화질서의 외연 확대와 황제 권위 과시 효과를 얻었고, 왜의 지배층은 중국 황제로부터 승인 받은 권위의 상징물(금인·칙서 등)을 획득하여 내부 통치에 활용하는 상호 이익 관계였습니다.

국제 질서 속에서 2~3세기 왜의 위치는 주변부의 소국이지만 존재감 있는 귀순국으로 볼 수 있습니다. 후한서에 “요동태수 채융이 북방에서 위세를 떨치자, 예맥과 왜와 한이 만 리를 멀다 않고 와서 조공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 이는 1세기 후한 초기부터 왜를 포함한 동이 제국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조공하는 문명권의 일부로 묘사된 예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왜가 특별한 군사적 위협을 주는 적대 세력은 아니었고, 조공을 통해 예물을 바치고 황제의 은혜를 받는 먼 이국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위서 「왜인전」에서도 왜 사신들이 중국에 와서 모두 스스로 “대부”(大夫)라 칭하며 격식을 차렸다고 전하는데 , 이는 실제 계급과 상관없이 중국 조정에 예를 갖추고자 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기술은 중국인이 보기에도 왜 사절들이 예의를 알고 예물을 갖춰 온 온순한 번국으로 비쳐졌음을 나타냅니다.

중국은 왜를 한반도의 삼한 등과 함께 동쪽 오랑캐(東夷)의 하나로 분류하였지만, 세부적으로는 한(韓)족과 구별하여 왜만의 특성을 인식했습니다. 『후한서』에 “[변진의 남쪽 경계가 왜국과 가까워서 문신한 사람이 많다]”는 대목이 있고 , “[진한의 철은 예맥·왜·마한도 와서 사간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이는 왜가 한반도 남부의 삼한과 교류하거나 영향권을 나누는 존재로 파악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철 생산이 없던 왜는 한반도에서 철을 수입했는데, 이는 낙랑·대방 등 중국 군현의 중계 아래 국제 교역에 편입된 것입니다 . 또한 “마한의 남쪽 경계가 왜와 접한다”고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 왜가 단순히 섬나라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와도 해상 경계를 이루는 세력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중국인 필자는 왜의 풍속을 기록하며 자기들 역사와 연관짓는 중화 중심 해석을 곁들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위서에는 “옛날 하나라 소강의 아들이 회계에 봉해졌을 때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하여 교룡의 해를 피했다. 오늘날 왜의 바닷사람들도 물고기와 조개를 잡으러 물에 들기에 이와 같이 문신하여 큰 고기와 바다 짐승을 쫓는다”고 하였습니다 . 즉,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 왜인의 문신 풍습을 설명한 것입니다. 또 진시황 때 서복이 동쪽으로 떠나 불로초를 구하다 돌아오지 않고 어떤 섬에 정착해 수만 가구가 되었다는 전설을 소개하며, 일본 열도 사람들이 그 후예일 수 있다는 식의 언급도 있습니다 . 이러한 내용은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중국인들이 왜를 자국 역사나 신화 체계 속 하위 요소로 편입하려 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결국 중국이 본 왜의 위치는, 멀리 떨어져 있고 풍속은 이질적이지만 교화 가능하고 조공을 통해 질서에 참여하는 변방 소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훗날 당나라가 일본을 동쪽의 작은 번국 정도로 취급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3세기 위-왜 교류에는 중국측의 실리적 고려도 깔려 있었습니다. 238년 위나라는 공손연 토벌로 요동 일대를 평정한 후 대방군을 설치하였고, 곧바로 왜로부터 히미코의 조공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동안 요동의 군벌 세력 하에 막혀 있던 한-왜 교역로가 재개된 것을 의미합니다 . 위 조정은 히미코에게 후한 이래 끊어졌던 책봉을 부활시킴으로써, 자신들이 한의 정통 계승자임을 과시하고 새로 확보한 요동-한반도 남부 영향권을 활용하여 해외 교역품(예: 진주, 상아 등)을 얻고자 했을 것입니다. 실제 히미코가 바친 남녀 노예 10명과 방직물 등은 위로선 그리 귀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후 이요가 바친 흰 큰 진주 5천 개와 공청대구주(孔青大句珠) 2매 등은 상당한 가치의 해양 산물입니다 . 이는 왜가 남방계 물산의 공급지로서 중국에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며, 왜를 포섭함으로써 얻는 경제적 이득도 고려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결론: 초기 중국 한나라와 일본 왜의 교류의 의의


서기 2~3세기 중국과 왜의 관계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형성과 일본 고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후한과 위나라의 사서에 기록된 왜 관련 기사들은 비록 일부 편견과 한계가 있으나, 고고학적 발견으로 그 사실성이 상당 부분 입증되었습니다. 왜의 소국 군주들은 중국 황제로부터 인장과 칭호를 받으며 정통성 부여를 얻었고, 중국은 주변 이민족을 끌어들여 천하관의 구현과 교역 확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히미코 여왕의 등장은 일본 열도에 초기 정치연합이 형성되고 대외 교섭 능력이 생겼음을 뜻하며, 중국과의 외교를 통해 야마타이국(=야마토 정권?)이 권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이 시기의 교류로 전해진 금인, 청동거울, 철기, 직물 기술 등은 일본 고대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일본측은 이를 토대로 이후 야마토 왕권을 성장시켜 나갔습니다.

최신 연구 성과 또한 이러한 역사상을 더욱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과거 문헌에만 전하던 금인이 실제로 발견되고, ‘100개의 거울’ 전설이 고분 발굴로 사실일 가능성을 보이는 등, 사료와 유물이 만나 퍼즐을 맞추어 가고 있습니다  . 물론 여전히 야마타이국 위치나 히미코 정체 등에 논쟁이 남아 있지만, 한중일 학계의 협업과 발굴을 통해 조금씩 해답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2~3세기 중국-왜 관계는 일본이 국제사회에 등장한 출발점이자, 동아시아 문화권 형성의 한 장면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비록 황제와 왜왕의 위계 차이는 있었으나, 이 시기의 교류는 후대까지 이어질 중일관계의 기틀을 놓았으며, 고대 일본이 중화 문명권의 일부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중·일 삼국의 역사가 밀접히 연결된 뿌리로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참고 자료: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전”, 『후한서』 동이열전, 위키문헌 번역본  ; Fukuoka City Museum 금인 해설  ; Arkeonews 고고학 뉴스  ; e국보 해설  등.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