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정치 제도와 권력 구조
나라시대에는 율령체제(律令体制)가 정비되어 천황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 구조가 확립되었습니다. 701년 제정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을 바탕으로, 최고 국정 기관인 태정관(太政官) 아래 8개의 성(省)이 설치되고 관료들이 업무를 분담했습니다 . 중앙 귀족들은 출신 가문과 능력에 따라 위계(位階)와 관직을 받아 관료제로 편입되었으며, 천황의 칙명에 따라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충신”으로 규정되었습니다 . 일본 전국은 국(国) – 군(郡) – 리(里)의 행정구역 체계로 편성되어, 약 60여 개의 지방 국엔 수도에서 파견된 국사(国司)가 통치를 맡았습니다 . 모든 토지와 국민은 건국 이래 공유지 공민(公地公民) 제도 하에 천황의 지배에 속한다고 규정되었고, 이론상 천황이 모든 지배권을 쥐는 전제 군주제가 표방되었습니다  .
천황은 명목상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실제 정치 과정에서는 귀족 세력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특히 율령 제정에 관여한 후지와라 가문 등 유력 귀족들은 조정에서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며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나라시대 전기에는 후지와라 후히토(藤原不比等)의 아들 네 명이 고위직을 차지했으나 737년 역병으로 사망한 후, 황족 출신 다치바나 모로에(橘諸兄) 등이 집권하는 등 권력이 부침했습니다 . 8세기 중엽에는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가 정권을 잡았으나, 쇼토쿠 천황(称徳天皇, 옛 코켄 천황)이 총애한 승려 도교(道鏡)가 권력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 도교는 한때 태정대신 선지(太政大臣禅師)에 올라 정치에 개입하고, 신탁을 빙자해 황위 계승까지 노렸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좌절되었습니다 . 이 사건 이후 승려의 정치 개입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훗날 간무 천황이 불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분으로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기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율령체제하에서 국가의 법과 제도는 당(唐) 제국을 본받았지만, 일본적 특성도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천황을 중국 황제에 필적하는 존재로 삼아 “동이의 작은 황제국” 세계관을 표방하면서, 천황을 “중화”로, 이민족을 “오랑캐”로 규정하는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이상적으로 세웠습니다  . 이는 스스로를 문화의 중심으로 여긴 중국의 세계질서를 모방하면서도, 일본 천황의 권위를 동등하게 내세운 것입니다. 또한 율령에 기초한 이상적 행정 시스템과 현실 정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해, 지방 호족이나 유력 귀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고 율령에 없는 관직(예: 섭정, 간백)이 후일 등장하는 등 권력 구조는 점차 변모해갔습니다. 그럼에도 나라시대는 일본 최초로 성문 법령과 관료제를 갖춘 중앙집권 국가를 완성한 시기로서, 이후 일본 정치제도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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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와 사상: 불교의 발전과 신도
나라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급속히 발전했으며, 국가불교 이념이 확립되었습니다. 천황과 조정은 불교를 나라를 수호하는 사상적 기반(“진호국가” 사상)으로 여겨, 대규모 법회와 기도를 통해 국태민안을 기원했습니다 . 특히 쇼무 천황(聖武天皇, 재위 724~749)은 불교를 통한 국정 안정을 도모하여, 741년 칙령으로 전국 각지에 국분사(국분僧寺)와 국분니사를 세우게 했고 , 수도 헤이조쿄에는 대불사를 창건했습니다. 쇼무 천황은 승려 료벤(良弁)을 주지로 하여 도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고, 743년에는 높이 15m에 달하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 대불 주조를 발원하여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 이 거대한 청동불상은 시가라키궁에서 주조를 시작한 뒤 완성되어, 752년 교양(開眼) 법회가 거행되었습니다 . 이 법회에는 출가 후 퇴위한 쇼무 상왕과 광명황후, 딸인 고켄 천황(훗날 쇼토쿠 천황)까지 참석했을 만큼 국가적 대사였습니다 . 또한 쇼토쿠 천황은 퇴위 전인 765년에 수도에 사이다이지(西大寺)를 건립하는 등 불교 진흥을 계속했습니다 .
이 시기 나라에는 불교의 여러 학파와 사상이 꽃피었습니다. 수도 남쪽의 7대 사찰(남도칠대사: 도다이지, 사이다이지, 곤고부지/다이안지, 야쿠시지, 간고지, 고후쿠지, 호류지)에서 승려들은 경전을 연구하며, 삼론종, 성실종, 법상종, 구사종, 화엄종, 율종 등의 남도육종 학파를 형성했습니다 . 대규모 사경(寫經) 사업도 추진되어, 특히 광명황후가 발원한 일체경(一切経) 간행 사업은 대불 조성, 국분사 설립과 더불어 시대의 대사업으로 꼽혔습니다 . 외국으로부터 고승과 불교 지식도 속속 유입되었습니다. 당에 파견된 유학생 출신 승려인 도지(道慈, 삼론종)와 겐보(玄昉, 법상종) 등이 새로운 경전과 교리를 가져왔고, 당나라의 감진(鑑真, 간진) 대사가 754년 다섯 번의 실패 끝에 일본에 도착하여 계율과 불경을 전했습니다 . 감진은 나라에 도쇼다이지(唐招提寺)를 세워 계율을 전수했고, 인도 출신의 보리선나(菩提僊那)는 도다이지 대불 개안회의에 참석하여 국제적 불교 교류를 보여주었습니다 . 이 밖에도 린난(임읍, 참파) 출신의 승려 불철, 당의 도선, 신라 승려들도 일본 불교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
한편 국가가 불교를 보호하는 동시에 통제도 강화했습니다. 율령에는 승니(僧尼) 취핵 및 승단 규율을 정한 승니령이 있어, 국가 허가 없이 함부로 출가하거나 민간 포교를 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 그러한 금제를 어기고 민중 포교와 사회사업에 나선 대표적 인물이 승려 행기(行基)입니다. 행기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금령을 어기고 불법을 전파했으나, 한편으로 농업용 관개 시설을 정비하고 시혜자(施薬院)와 같은 자선시설을 세우며 도로 건설 등 공익사업을 전개해 민중의 두터운 지지를 얻었습니다 . 초기에는 탄압받던 행기를 결국 정부가 포용하여 대불 조성에 참여시키고, 그 공로로 대승정(大僧正)의 최고 승계급을 내린 일은 국가불교 정책의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 이처럼 나라시대에는 “불교를 통한 국정 안녕”이라는 명분 아래 불교가 융성했지만, 동시에 국가 권력은 불교계를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
본래 일본 고유 신앙인 신토(神道) 또한 국가 제사의 중심으로 존중되었습니다. 천황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자손이라는 신도적 왕권 이념을 내세웠고, 이세신궁을 비롯한 각지의 신사에 대한 봉사를 이어갔습니다. 나라 시대에는 신도와 불교의 공존이 특징적이었는데, 불교를 지원하면서도 한편으로 신들에게도 불법 수호의 역할을 부여하는 신불습합(神仏習合) 사상의 태동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8세기 후반 하치만신(八幡神)을 대보살(大菩薩)로 칭하며 대불 조성을 가호한 신으로 받드는 일이 있었고, 나라의 귀족들은 불공과 함께 신사에도 참배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불교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생겨, 앞서 언급한 도교 사건 이후로 승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금지하고 여성 천황의 재위가 끊기는 등(이후 약 800년간 여성 천황 부재)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습니다  .
3. 문학과 예술: 만엽집과 천평문화
나라시대는 일본 문학과 예술이 본격적으로 개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 등장한 가장 대표적인 문헌으로 <만엽집>(万葉集)이 있습니다. 만엽집은 약 4,500여 수의 와카(和歌, 일본 고대 가요)를 모은 일본 최고(最古)의 가집으로, 귀족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노래를 한데 담았습니다 . 편찬 시기는 8세기 중엽(대략 759년경)으로 추정되며, 일본어 노래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 만엽가나(万葉仮名) 방식을 사용하여 기록했습니다 . 만엽집은 일본 고유의 서정과 언어를 풍부하게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되며, 이후 일본 문학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한편 조정 주도로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들도 편찬되었습니다. 712년에는 일본 신화와 황실의 기원을 기록한 <고사기>(古事記)가 완성되었고, 720년에는 한문으로 서술된 <일본서기>(日本書紀)가 편찬되어 일본의 건국과 고대사를 체계화했습니다 . 이 두 사서는 천황권의 신성함을 뒷받침하는 신토적 세계관과 통치 이념을 담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또한 713년부터는 각 지방의 지리, 생산물, 전승 등을 보고하게 한 풍토기(風土記) 편찬령이 내려져, 몇몇 지방의 풍토기가 편찬되었습니다 . 비록 현재는 이즈모국 풍토기 등 일부만 전하지만, 이를 통해 당시 지방 사회와 자연에 대한 인식 일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학 작업들은 모두 국가의 정치적·문화적 성숙의 소산으로서, 한창 진행되던 토지·조세 제도 개편 작업과 병행하여 이루어졌습니다 . 즉 나라 시대의 문학은 국가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일본 고유의 전통을 글로 남겨 후세에 전하는 문화 의식의 발현이었습니다.
나라 시대 예술과 미술은 당나라를 비롯한 대륙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도 일본적 개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미술 양식으로 “천평문화”(天平文化)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이는 729~749년 사이 쇼무 천황 때의 연호인 천평에 유래한 명칭입니다 . 천평문화기에는 불교 미술이 황실과 귀족의 적극적 후원 아래 화려하게 발전했습니다. 도다이지 대불전(大仏殿)은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목조 건축물이었고, 내부에 안치된 나라 대불(비로자나불)은 높이 약 15미터의 청동좌불로서 그 장엄함이 국력의 상징이었습니다  . 나라 시대의 조각은 당나라 조각 양식을 받아들여 사실성과 생동감을 띠게 되었습니다. 특히 건칠조(乾漆造)와 소조(塑造) 기법을 활용한 불상들이 다수 제작되었는데, 이는 나무로 형태를 만들고 삼베천에 옻칠을 해서 형상을 표현하는 기술입니다  . 그 결과 인체의 세밀한 표현과 자연스러운 동세가 가능해져, 나라 시대 후기에는 사실적인 초상 조각도 등장했습니다 . 예를 들어 나라 고후쿠지(興福寺)에 전해지는 734년 제작 아수라상(阿修羅像)은 건칠로 만든 3면 6비상으로, 표정이 생동감 있게 묘사된 나라 조각의 걸작입니다. 회화 분야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벽화나 불화가 발달했으며, 당의 회화법을 받아들여 채색이 풍부하고 인물 표현이 사실적인 작품들이 제작되었습니다. 나라 시대에 제작된 호류지 금당 벽화나 다카마쓰 고분 벽화 등은 당시의 그림 기법과 미감을 보여줍니다.
나라 시대 예술은 국제적인 교류의 산물이기도 했습니다. 도읍 헤이조쿄에는 당, 신라, 서역에서 온 상인과 기술자들이 드나들며 각종 공예품과 기술을 전했습니다  . 쇼무 천황과 광명황후의 애장품을 보관한 정창원(正倉院) 보물창은 당시의 예술과 국제 교류를 증명하는 유산입니다. 정창원에는 당삼채 도자기, 서역의 유리그릇, 페르시아 산 바둑판, 인도산 향목, 비단 직물, 가야금과 피파 등의 악기 등 8세기 각지의 공예품 6천여 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 이들 유물은 상당수가 일본에서 만들어졌으나, 디자인과 기법 면에서 당나라 양식의 영향이 뚜렷하여, 동시대 일본 문화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외래 문화를 흡수했는지를 보여줍니다 . 이러한 풍부한 문화적 교류 덕분에 나라 시대의 예술은 다양성과 생기가 넘쳤으며, 나아가 일본만의 독자적 요소와 융합되어 독특한 미감을 창조했습니다  . 비록 표현 양식은 중국풍을 모방했어도, 그 안에 담긴 정서는 와카와 같이 일본어로 노래한 문학이나 신토적 정서와 결합되어 일본 문화의 개성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
나라시대 대표 문학 작품인 만엽집의 필사본 일부 (사진은 후대인 헤이안시대의 교정 필사본). 만엽집은 8세기 중엽까지의 다양한 일본 가요를 한자로 음차하여 기록한 선집으로, 일본 고전문학의 원형이자 백미로 평가된다 .
4. 건축과 도시계획: 헤이조쿄(平城京)의 조영
710년 나라시대가 개막하며 수도가 후지와라쿄(藤原京)에서 헤이조쿄(平城京), 즉 현재의 나라(奈良)로 천도되었습니다 . 헤이조쿄는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을 본떠 건설된 계획도시로서, 바둑판처럼 반듯한 가로와 세로 도로망이 특징입니다  . 도시는 남북 9조, 동서 8조로 구획된 약 25㎢ 면적의 직사각형이었고, 인구 5만~10만 명 가량의 당대 최대 규모 도시였습니다 . 다만 완전한 정방형이던 장안과 달리, 헤이조쿄는 동쪽으로 “외성”(外京)이라 불린 지역이 돌출되어 약간 불규칙한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 이 외성 지역은 훗날 나라 시가의 중심이 되었으며, 도시 구조상 필연적으로 변경된 부분이었습니다 .
헤이조쿄의 배치는 풍수와 유교적 이념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도성의 북쪽 중앙에 천황의 거처인 평성궁(平城宮)을 배치하고, 남쪽으로 주작대로(朱雀大路)라는 폭 75m의 큰 길을 내어 도성을 남북으로 관통시켰습니다  . 주작대로의 남단에는 남쪽 정문인 나츠메문(羅城門)이, 북단에는 궁성의 정문 주작문(朱雀門)이 위치하여 장대한 축선을 형성했습니다. 이는 “황제는 북쪽에 좌정하고 남쪽을 향해 천하를 굽어본다”는 중국 고대 사상에 따른 것으로, 천황을 북극성에 비유해 도성의 북극(北極)에 안치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 궁성 내부에는 조회와 의식을 거행하는 대극전(大極殿), 정무를 보는 조정(朝堂)원 등이 자리했고, 황족의 거처인 내전(内殿)이 그 뒤편에 배열되었습니다 . 대극전은 ‘태극전(太極殿)’이라고도 불리며, 우주의 중심인 태극에 천황을 비정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권위의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
헤이조쿄 도시는 좌우 대칭으로 설계되어,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좌경(左京)과 우경(右京)으로 나뉘었습니다. 각각의 경(京)에는 다시 수십 개의 방(坊)으로 불리는 가로세로 구획이 있었고, 한 변 약 500m 크기의 블록들이 도시를 채웠습니다  . 각 방은 다시 16등분 등의 작은 구획으로 세분되어 주택과 공공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도시 서남부에는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라는 두 개의 시장이 조성되어 물자 교역이 이루어졌습니다. 헤이조쿄에는 조정 관청, 관료 귀족의 저택, 일반 서민 가옥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으며, 당대 선진 도시계획 사상이 구현되었습니다 .
흥미로운 점은 헤이조쿄에는 장안성과 달리 도성의 성벽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당시 일본에서는 이민족의 침입 우려가 비교적 적었고, 기존 후지와라쿄에도 성곽이 없었기에 개방형 도시로 구획되었습니다. 대신 궁성 주위에 해자를 둘러 외부와 경계를 삼았을 뿐입니다. 도시 내부에는 불교 사찰들도 주요 구성 요소였습니다 . 국가 주도로 대규모 사원이 조성되어, 도다이지를 비롯한 여러 사찰이 도성 내나 주변에 위치했습니다. 예컨대 약사寺(薬師寺)와 고후쿠지(興福寺)는 수도 이전에 이미 존재한 사찰을 710년 경에 헤이조쿄로 이전한 사례입니다 . 이처럼 도시와 사찰이 공존하는 모습은 일본 고대도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헤이조쿄의 건축 양식은 당풍(唐風) 건축을 본뜨면서도 일본 고유방식이 혼재했습니다 . 궁성과 사찰의 중심 건물들은 당나라식 기와지붕과 단층 또는 중층 목조건축으로 웅장하게 세워졌습니다. 한편 주택 등은 여전히 일본 전통 기법인 굴립주 초석식에 널판지붕을 얹는 형태도 사용되었습니다 . 목재를 주재료로 한 일본 건축은 화재와 훼손으로 현존하는 사례가 드물지만, 나라시대 건축으로 세계 최고(最古) 수준의 목조건축물인 호류지(法隆寺) 금당과 오중탑이 현존하여 그 수준을 짐작하게 합니다. (호류지는 나라시대보다 약간 앞선 아스카 시대 건축이지만 나라 시대에도 중창을 거쳤습니다.) 나라시대 후기에는 불사 건축이 난보(南都) 지역에 집중됨에 따라 목재와 인력 부담이 커져, 간무 천황이 헤이안 천도로 옮긴 뒤에는 사찰 건축 제한령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헤이조쿄(平城京) 유적의 1/1000 축소 모형 (나라시 청사 전시). 사진 중앙에 주작문과 대극전이 보이며, 바둑판처럼 구획된 도시 구조와 북쪽의 궁성 배치를 보여준다  . 나라 시대의 헤이조쿄는 당대 동아시아 도시계획의 정수를 반영한 수도였다.
5. 대외관계: 당(唐)과 신라 및 기타 교류
나라시대 일본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당나라, 신라 등과 외교 관계를 맺고 문물 교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663년 백제 부흥을 지원하다 백촌강 전투에서 당-신라 연합군에 패한 후 한동안 대외 사절 파견을 중단했던 일본은, 율령국가 체제가 정비된 7세기 말8세기 초에 다시 교류를 재개했습니다 . 702년 정부는 당에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703년 첫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했습니다 . 그 후 나라시대 동안 약 20년에 한 번 꼴로 견당사가 파견되어 9세기 초까지 모두 10차례 이상 이루어졌습니다 . 각 견당사단은 대사 이하 많게는 4척의 배에 5006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여한 대규모 사절단이었습니다 . 항해는 동중국해를 건너는 위험한 여정이었기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일본은 당의 선진 문화를 배우려는 열의로 이를 감수했습니다 . 견당사에는 외교 교섭 역할 외에도 유학생, 승려, 기술자 등이 수행하여 당에 머물며 학문과 기술을 배웠습니다 . 그 중 일부는 장기간 당에 체류하거나 아예 귀국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귀국하여 일본 문명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는 당 조정에 등용되어 고위 관료로 활약했고,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는 17년간 당에서 유학하며 유교 경전과 과학 지식을 익혀 귀국 후 조정의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 또한 승려 겐보는 5,000권이 넘는 불경을 가지고 돌아와 불교 연구를 발전시켰습니다 . 이처럼 견당사와 유학생들은 새로운 사상과 학문, 예술을 전함으로써 천평문화의 풍요로움을 가능케 한 주역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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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관료인 일본인 아베노 나카마로 생애와 한시
아베노 나카마로는 일본 나라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당나라에서 54년간 활동하며 한·중·일 문화 교류의 상징이 된 인물. 그의 생애는 학문적 성취와 시인·학자들과의 깊은 우정으로 빛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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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은 외교적으로 중국 황제의 冊封(책봉)을 공식으론 받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조공관계와 유사한 형태로 교류했습니다 . 일본 국왕(천황)은 자신을 중국 황제와 대등한 “일본 국왕”으로 칭하는 국서를 보냈지만, 견당사들은 정월 당 조정의 조회에 참석해 당 황제에게 조하(朝賀) 예를 갖추는 등 실질적으로는 조공국 지위에 준하는 예법을 따랐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외교 형식은 어디까지나 의례적인 것으로, 일본측은 내심 자국을 “중화”로 여기는 자부심을 유지했습니다 . 당의 입장에서도 일본은 변방의 소국에 불과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친선 관계를 맺고 각종 지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유교, 한자, 불교 등 당 문화의 공유를 통해 한반도, 일본, 동아시아 각국이 교류하며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습니다  .
신라와의 관계는 보다 복잡했습니다. 7세기 후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에 대해, 일본은 처음에는 군사적 긴장 속에 대치했습니다. 8세기 초까지는 신라가 당과 갈등 중이었기에 일본에 빈번히 사신을 보내 우호를 유지하려 했고, 일본도 이를 받아들여 어느 정도 조공 형식의 사신 왕래가 있었습니다 . 그러나 일본이 율령 체제를 갖추고 자국 중심 의식을 높이면서 신라를 자신보다 하위의 “번국(蕃国)”으로 대우하려 한 탓에 외교 마찰이 잦았습니다 . 신라는 통일 후 국력 신장으로 대등 외교를 주장했지만, 일본은 이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이로 인해 신라는 8세기 중반 이후 일본에 사신 파견을 중단하였고, 779년을 끝으로 양국의 공식 교류는 단절됩니다 . 한때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신라 정벌을 계획하여 발해와의 연합공격까지 모색했으나(신라를 견제하려는 발해와 공모), 발해의 미온적인 태도로 실행되지 않았고 나카마로 실각으로 무산되었습니다 . 비록 국가 차원의 공식 외교는 끊겼어도, 민간 교역은 계속되었습니다 . 신라 상인들은 일본에 빈번히 왕래하며 당과 남방의 물산을 중계하였고, 정창원에 남아있는 당 및 서역 보물 중 상당수는 신라인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 따라서 나라 시대 말기에는 “신라 사신은 끊겼으나 신라 상인은 오히려 활발”한 상태로, 경제적 교류는 지속되었습니다 .
한편 8세기 초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발해(渤海)와는 우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발해는 713년 처음 사신을 보내 일본과 국교를 트고자 했고,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식하여 환영했습니다 . 일본은 발해를 신라에 맞설 우방으로 여겨 여러 차례 견발해사를 파견하고 활발히 사신을 교환했습니다 . 일본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발해에도 국서를 보낼 때 “황제에 대한 신하” 형식을 요구했지만, 발해는 직접적인 굴욕을 피하기 위해 **“계”(啓)**라는 독특한 격식의 국서를 보냈습니다 . 이 형식은 엄밀히 말하면 군신관계 문서는 아니지만 상대에게 예를 갖춘 개인 서한 형식으로, 발해 나름의 외교적 지혜였습니다 . 일본 조정은 발해의 이러한 편법을 몇 차례 문제삼았으나 결국 관례로 받아들였습니다 . 발해와 일본은 9세기 초까지 총 13~14차례 사신을 주고받으며,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국내적으로 일본 조정은 북방의 에미시(蝦夷) 정복과 남쪽의 하야토(隼人) 평정에도 힘썼습니다. 나라 시대 동안 규슈 남단의 하야토족 반란을 여러 번 진압하고 이들을 동화시켰으며, 혼슈 북동부의 에미시에 대해서는 다군(柵)을 설치하고 군대를 보내 정복을 시도했습니다 . 774년811년에 걸친 에미시와의 전쟁(삼팔년 전쟁)은 나라 말헤이안 초에 걸쳐 벌어진 대규모 전투로, 동북지역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복 전쟁은 율령국가의 화내(化内) 확장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당시 조정은 자신들의 통치가 미치는 영토(化内)와 그 밖의 외부(化外)를 구분하여 문명 대 비문명으로 인식했습니다 . 이처럼 나라 시대 일본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국제적 위상을 모색하고 대외적으로는 주변국과 교류하면서, 한편으로는 내부의 이민족 토벌을 통해 통일 국가로서의 토대를 다져나갔습니다.
6. 경제 및 사회: 토지제도, 조세와 호적
나라시대의 경제 기반은 농업 생산력과 이를 바탕으로 한 토지·조세 제도였습니다. 율령제에서는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규정하고, 농민에게 일정 면적의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가 일정 시기가 지나거나 죽으면 반납받는 반전수수법(班田収授法)을 시행했습니다 . 6년마다 국가가 호적(戸籍)을 작성하여 인구를 조사하고, 6세 이상 남녀에게 땅을 분급하였습니다 . 성인 남자에게는 2단(段)의 논을, 여성에게는 그 3분의 2인 2단의 2/3(약 1.3단)을 지급했는데, 1단은 약 0.12헥타르(360평) 정도 면적이었습니다 . 이처럼 성별에 따라 차등을 두되 기본적으로 광범위한 농민층에 땅을 나눠준 것은, 자영농에게 생산 책임을 지우고 국가가 직접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할당받은 토지는 구분전(口分田)이라 불렸으며, 수취 대상이 되었습니다 . 반전수수에 따라 나라 시대 일본의 경작 가능 토지는 약 60만정(町, 약 72만 헥타르) 정도였고, 인구는 대략 500만~6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 인구에 비해 토지 자원이 빠듯했지만, 율령 정부는 가능한 한 전국민에게 경작지를 지급하려 했고, 실제로 이 제도와 호적을 전국적으로 비교적 철저히 시행한 흔적이 역사 기록에서 나타납니다 .
농민들은 국가에 여러 형태의 조세와 역역을 부담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수확량의 약 3~5%에 해당하는 조(租)라는 벼 곡물세를 냈습니다. 또한 지역 특산물이나 직물을 바치는 조(調)와, 수도 또는 지방 관아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이 부과되었습니다 . 노동력 부담인 역은 보통 잡요(雑徭)라 하여 1년에 60일 이내의 부역으로 규정되었는데, 현실적으로 농민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이에 일부는 잡요 대신 포(布)나 기타 물품을 바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었는데, 이를 용(庸)이라 불렀습니다 . 요는 일종의 인두세로 볼 수 있으며, 수도 건설이나 궁실·사찰 공사 등 국가 사업에도 동원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호구 단위로 국경 방위에 차출되는 군역(군마(軍馬)나 위(衛) 등)과, 해당 지역의 토목 공사에 동원되는 역역이 있었습니다. 나라 시대의 조세 체계는 농민에게 상당한 부담이었으나, 율령 정부는 이를 효율적으로 거둬들이기 위해 역참 제도(駅制)를 정비하여 주요 도로에 역원을 설치하고 조운(漕運)을 통해 수도로 조세를 운송했습니다 . 이는 일본이 중앙집권적 재정을 운영했음을 보여주며, 이전까지 각 지방 호족이 거두던 조세를 중앙정부가 직접 취하도록 한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이상적 토지·조세 제도에 여러 모순과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우선 8세기 중반에 이르러 인구가 증가하고, 개간 가능한 땅이 부족해지면서 6년마다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 또 잦은 부역과 과중한 세금으로 농민 삶이 피폐해져, 기록에 따르면 730년 무사시(武蔵)국 등 여러 지역의 대부분 가호(家戶)가 생계 유지조차 힘든 빈곤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 에치젠(越前)국의 경우 1,019가구 중 996가구가 궁핍하다는 보고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토지와 호적을 버리고 도망치는 “탈민(脱民)”, 부랑인(浮浪人)이 급증했고, 국가의 과세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
이를 해결하고자 정부는 토지 정책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723년에는 새로 개간한 토지를 개간자에게 3대까지 사유를 허용하는 산세일신법(三世一身法)을 시행했고, 그래도 개간이 부진하자 743년에는 개간한 토지는 영구히 사유로 인정하는 컨덴에이넨시자이호(墾田永年私財法)를 반포했습니다 . 이로써 새로 일군 토지는 국가에 반납하지 않아도 되어 사실상 사유지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 이러한 조치들은 농민들의 개간 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유력 귀족과 사원들이 대규모 토지 개간에 나서 거대한 장원(荘園)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그들은 권력과 자본을 이용해 토지를 사재로 만들고, 조세를 면제받거나 사면(私免)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들도 이러한 귀족·사원의 장원 밑으로 들어가 소작인이나 부속민이 됨으로써 조세와 부역의 책임을 피하려 했습니다 . 그 결과 나라 시대 후반에는 공지공민제의 붕괴가 가속화되어, 겉으로만 유지될 뿐 사실상 국가가 장악하는 토지는 줄어들고 세원(稅源)도 고갈되었습니다  .
사회 구조 면에서, 나라 시대 일본은 율령이 규정한 신분 질서가 있었으나 점차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율령법상 국민은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으로 구분되었고, 천인은 노비 등으로 세습적 하층신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일반 농민인 양인들도 경제적 곤궁으로 노비화하거나 낙오하는 사례가 늘었습니다. 또 호적을 버리고 유랑하는 이들이 증가하자, 정부는 이들을 붙잡아 강제로 호적에 재편입하려 했습니다. 772년에는 도망자 색출을 위해 “부랑인 금지령”을 내리고 귀농을 장려했지만 근본 대책은 되지 못했습니다. 한편 귀족 계층은 율령 관제에 따라 위계를 받아 차등적 특권을 누렸습니다. 8세기 후반이 되면 상위 귀족들은 경제 기반으로 장원을 확보하고, 율령체제는 유명무실해져 갔습니다. 즉 나라 시대 말엽에는 농민 몰락과 귀족·사원의 토지 겸병이라는, 일종의 양극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이러한 사회경제적 추이는 훗날 중세 봉건제도의 태동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나라 시대 경제의 또 다른 일면으로 화폐 경제의 도입을 들 수 있습니다. 708년 일본 최초의 동전인 화동개진(和同開珎)이 주조되어 유통을 시도했습니다 . 정부는 화폐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711년 축전서위령(蓄銭叙位令)을 발표, 일정량 이상의 동전을 모아 바치면 관위와 작위를 올려주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여전히 물물교환과 곡물 경제가 주류여서, 화폐의 보급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다만 수도와 대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화폐 유통이 늘어나, 상업 활동의 단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국영 주전소(鑄錢所)에서 여러 차례 추가 주조령을 내려 화동개진 이후 수종의 동전을 발행했으나, 10세기경까지 화폐 경제는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정리하면, 나라 시대의 경제·사회는 율령에 의해 국가가 농민을 직접 지배·과세하려는 체제였으나, 현실적 제약과 운영상의 문제로 점차 무너져갔습니다 . 농민 공동체의 자율은 약화되고 많은 농민이 귀족 지배 하로 들어가거나 부랑화하였으며, 국가권력은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나라 시대 후반 통치자들의 고민거리였고, 간무 천황 등은 이를 해결하고자 행정 개혁과 지출 절감, 유랑민 귀농 정책 등을 시도했습니다  . 하지만 근본적으로 율령체제는 이 시기에 한계를 드러내,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중앙정부의 토지 지배력은 쇠퇴하고 귀족·사원 경제가 주류가 되는 방향으로 역사적 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7. 나라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유산
나라시대(710~794)는 일본사가 중국 문화의 적극적 수용을 통해 크게 도약한 시대이자, 일본 고유의 전통과 융합하여 독자적 문화를 꽃피운 시기입니다. 이 시기 일본은 중국의 율령 법제를 수용해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완성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한 통치 이념을 확립했습니다 . 또한 불교를 국가 종교로 삼아 정치와 사상을 통합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불 개안과 전국 사찰망 건립과 같은 전대미문의 사업을 실행했습니다  . 나라 시대의 천평문화는 국제적 교류를 바탕으로 한귀한 일본 문화의 황금기로, 도다이지 대불과 쇼소인 보물에 집약되듯이 그 풍요와 찬란함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손꼽힐 만한 것이었습니다  . 만엽집에 대표되는 문학의 발흥, 정창원의 공예품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정리된 신화와 역사 등은 모두 나라 시대가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라 시대 후반에 이르면 율령 정치는 관료제의 부패와 토지제도의 붕괴로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 귀족과 사원이 대토지 소유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농민 다수는 조세 부담으로 몰락하여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 이러한 문제는 헤이안 시대로 넘어가며 점진적으로 장원제(荘園制)와 봉건화로 이어져, 중세 일본사회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라 시대는 이상적 중앙집권 국가를 실현하려 한 시도와 그 한계를 함께 보여준 시대였던 것입니다 . 간무 천황이 794년 수도를 헤이안쿄(平安京, 교토)로 옮긴 결정은, 나라 시대에 불거진 여러 폐단 – 특히 교권과 세속권력의 밀착, 재정 궁핍 – 을 해소하려는 의도였습니다  . 이는 나라 시대가 다음 시대의 개혁을 촉발한 역사적 교훈으로 기능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나라 시대의 유산은 다양하게 남아 있습니다. 우선 옛 수도 나라(헤이조쿄) 일원은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도시 유적과 사찰, 신사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 도다이지, 고후쿠지, 야쿠시지, 도쇼다이지 등 나라에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과 불상들은 세계적으로도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수많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도다이지의 거대한 대불전(현 건물은 에도시대에 재건되었으나 여전히 세계 최대 목조 건축 중 하나)과 그 안의 나라 대불상, 나라 공원 일대의 사슴과 신사(가스가타이샤)에 이르는 풍경 등은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 나라 국립박물관과 쇼소인에서는 당시의 불교 미술품과 공예품을 전시하여 천평문화의 정수를 오늘날에도 접할 수 있게 합니다. 나라 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은 일본의 국학(国学)과 역사학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되었고, 만엽집은 일본어의 아름다움과 사상의 원형을 담은 작품으로서 현대까지 애독되고 있습니다. 일본 천황가의 신성화, 이세신궁 제사 등도 나라 시대에 정립된 황실 신토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나라 시대는 일본이 자국 문화를 세계 문화와 연결시킨 시대였습니다. 바다 건너 당, 신라, 발해 뿐 아니라 멀리 중앙아시아와 인도까지 이어진 실크로드의 다양한 문물이 나라를 통해 일본에 들어왔고, 이를 소화해 독창적 문화로 발전시킨 경험은 이후 일본 문화의 개방성과 적응력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나라 시대의 고분과 사찰에서 출토된 유리, 옥, 직물들은 당시 국제무역망에서 일본이 교류했음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나라(奈良)라는 지명 자체가 “나라(国)”와 발음이 같아 일본 국가 형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듯이, 나라 시대는 일본이 고대국가로서 성숙한 결정적 시기였습니다. 그 유산은 건축, 미술, 문학, 사상, 제도 등 다방면에 걸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며, 일본 역사의 한 정점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
표: 나라시대 주요 연표
연도 (서기) 주요 사건 및 업적
710년 수도를 나라(헤이조쿄)로 천도 . 일본 최초의 상설 수도 형성.
712년 《고사기》 편찬  – 일본 신화와 황실 계보 기록.
720년 《일본서기》 편찬 – 첫 정식 관찬 역사서 (한문 편년체).
723년 산세일신법 시행 – 신규 개간지 3대 세습 허용  .
727년 발해,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 파견 – 일본-발해 국교 수립 .
729년 장관 나가야왕 변으로 후지와라 사형제가 정권 장악 (정치적 사건).
735~737년 천연두 대유행 – 후지와라 4형제 등 귀족 다수 사망, 인구 격감.
741년 쇼무 천황, 국분사 건립 칙령 반포  – 전국에 사찰망 구축.
743년 대불(大仏) 조성 발원  (도다이지), 컨덴영년사재법 시행 – 신규 개간지 영구 사유화 허용  .
745년 쇼무 천황, 수도를 잠시 돌아 다시 나라로 복귀 – 헤이조쿄 재도읍.
752년 도다이지 노사나불 개안회 거행  – 국가 불교 위용 과시.
754년 당 승려 감진(鑑真) 입일 – 도쇼다이지 개산, 계율 등 전수 .
757년 다치바나 노라마로의 난 실패 – 후지와라 나카마로 권력 장악, 잡요 부담 완화 등 개혁 시행  .
764년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난 실패 – 승려 도교 일시 집권, “법왕” 칭호 사용 .
770년 쇼토쿠 천황 사망, 도교 추방 – 후계자로 광인 천황 옹립 (여성 천황 단절).
784년 간무 천황, 수도를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이전 – 나라 시대 사실상 종료.
794년 수도를 헤이안쿄(平安京)로 최종 천도 – 헤이안 시대 개막.
주: 위 연표는 나라 시대의 중요 정치·문화적 사건을 요약한 것이다. 연도는 서기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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