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ie

나라 시대(710~794) 서민 문화 조사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11. 7.
반응형


1. 서민의 일상생활


나라 시대 서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촌락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했습니다. 특히 지방의 일반 농민은 벼농사와 밭농사를 통해 자급자족을 하였으며, 국가는 인구조사와 토지분배를 위해 6년마다 호적(戶籍)을 작성하고 정기적으로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 농민 다수는 국가로부터 구분전(口分田)이라는 토지를 나눠 받아 경작했고, 남자에게 2단(약 0.2ha), 여자에게는 그 3분의 2 크기의 전지를 지급하였는데, 이 반전수수법에 따라 6세 이상 모든 남녀가 토지를 부여받았습니다 . 이렇게 지급된 땅은 사망 시 국가에 반환하는 공지공민(公地公民) 원칙 하에 관리되었으나, 8세기 들어 인구 증가로 경작지 부족이 심화되고 조세 부담이 가중되자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일이 늘었습니다 . 실제로 8세기 중반에는 조세 제도의 부담으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포기하고 “부랑자(浮浪者)”로 유랑하게 되었고, 이들을 노동력으로 사적으로 고용하는 호족들이 나타나 국가의 토지제도(정전제)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 이를 막기 위해 정부는 723년 삼세일신법(개간지 3대 세습 허용)과 743년 간전영년사재법(개간지 영구 사유화 허용)을 차례로 시행하여 농민의 개간을 장려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호족과 귀족이 사유지인 장원(庄園)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농민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

나라 시대 서민의 의식주 생활은 귀족과 큰 격차가 있었습니다. 주거 형태를 보면, 귀족은 여러 동의 당풍식(唐風式) 저택과 정원을 갖추고 넓은 부지에 호화로운 가옥에서 살았으나, 서민은 전통적인 움집(竪穴式住居)이나 작은 초가에 거주했습니다  . 특히 지방 농민들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땅을 움푹 파고 지은 집에서 생활했으며, 일부 비교적 부유한 도성의 평민만이 나무기둥을 땅에 박아 지은 소규모 초옥 2~3동과 우물·작은 밭이 있는 집을 갖추었을 뿐이었습니다  . 의복 면에서도 귀족은 비단으로 만든 당풍 의상을 여러 겹 겹쳐 입었지만, 평민들은 마삼이나 삼베로 만든 코소데(小袖) 한 벌만 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 8세기 시인 야마노우에노 오쿠라(山上憶良)의 「빈궁문답가(貧窮問答歌)」에 나타난 농민의 모습에 따르면, 농민들은 해어진 소매 없는 헌 옷을 걸치고 판잣집에 살며, 집 안 흙바닥에는 짚을 깔았을 뿐이라고 묘사됩니다 . 이러한 묘사가 보여주듯 서민 주거는 난방이나 단열이 취약하여 겨울엔 한기, 여름엔 더위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생활환경은 열악했습니다.

식생활 또한 현격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귀족의 식탁에는 흰 쌀밥과 국물 요리, 다양한 채소(죽순, 유채나물 등)나 해산물 반찬, 오이나 가지 절임 등이 풍성하게 올라갔고, 우유를 졸여 만든 치즈 비슷한 별미 蘇까지 등장하는 등 영양과 맛이 현대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사치스러웠습니다  . 반면 농민 등 서민들은 주식으로 조·수수 등 잡곡이나 보리를 먹고 나물 반찬이나 산나물이 든 국을 곁들이는 정도였습니다  . 풍년에는 그나마 나았지만 흉년이 들면 이러한 단출한 식사조차 구하기 어려워 굶주리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며칠씩 굶어 밥을 짓지 못해 부엌 가마에 거미줄이 쳤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이러한 기근과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서민들은 오히려 높은 세금과 부역 의무까지 져야 했습니다.

직업과 노동 면에서, 서민 대부분은 자작농 또는 국유지의 소작농으로 농사를 지었고 일부는 수공업과 상업에도 종사했습니다. 나라 시대의 율령 체제 아래 평민 남성들은 군역과 부역을 부담했는데, 성인 남자에게는 1년에 60일 이내의 노동력을 세금으로 바치는 역(役)이 부과되었습니다. 이를 요(庸)라 하여 보통 수도 건설이나 토목 공사에 동원되었으며, 노동 대신 포(布)를 납부하여 면제받기도 했습니다 . 또한 각 지역 농민들은 조세로 조(調)라는 특산물을 바치고, 곡물 수확의 약 3%에 해당하는 조세(租)를 쌀로 납부했는데 , 실제로는 지방관리나 호족에게 바치는 몫까지 더해져 농민들이 내는 실질 부담률은 수확량의 약 20%에 달했다고 합니다  . 게다가 세금은 흉년에 감면되지 않고 일정액을 부과했고, 남편이 역역으로 동원되어 집을 비운 동안에도 남은 가족에게 똑같이 조세와 부역 의무가 지워졌습니다  . 이러한 혹독한 조세 부담 때문에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농민이 속출하여, 나라 시대 전기부터 고향을 버리고 유랑민(流民)이 되는 사례가 급증했습니다 . 사회 불안이 커지자 일부 농민들은 울분을 표출하기 위해 몰래 방화 소동(神火)을 일으켜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

가족 구조는 대가족적 경향을 보였는데, 나라 시대의 호적 등 기록에 따르면 일반 농민 호구는 평균 8~10명 정도의 가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이러한 대가족은 부부가 결혼 후에도 각자 본가에 머무르는 혼인 관습(듀오로컬 결혼) 등으로 인해 부부 양가의 가족이 유동적으로 합쳐진 결과로 해석됩니다 . 국가 통제의 기본 단위였던 호(戶)는 혈연으로 엮인 가족 공동체였으며, 나라 시대에 이르면 대부분의 호가 실제 친족 단위로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 한편 이 시기에는 노비 계층도 존재하여, 인구의 약 10%는 천민(賤民) 신분으로 노예와 유사한 노비(奴婢)로 취급되었습니다 . 노비 신분은 매매되기도 하고 자유민과의 결혼이 금지되는 등 사회적 차별을 받았으며, 생산 노동과 귀족의 사역에 동원되면서 최하층 삶을 꾸렸습니다 .

https://valuable12.com/entry/일본-나라시대710794의-역사와-문화

일본 나라시대(710~794)의 역사와 문화

1. 정치 제도와 권력 구조나라시대에는 율령체제(律令体制)가 정비되어 천황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 구조가 확립되었습니다. 701년 제정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을 바탕으로, 최고 국정

valuable12.com

2. 서민의 신앙과 종교생활


나라 시대 서민들은 샤머니즘적 자연신앙(카미 신앙)과 새롭게 전래된 불교를 함께 접하면서 복합적인 신앙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마을 단위의 신토(神道) 신앙이 강하여, 농촌의 평민들은 마을 수호신이나 토지신에게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자연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적 관습을 이어갔습니다. 사실 나라 시대 일본인들의 대다수는 농업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며, 자연과 조상의 정령(카미)을 섬기는 신토를 신앙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 논과 산, 강마다 토착 신을 모시는 작은 신사(社)를 세우고 봄에는 풍년을 비는 제전, 가을에는 수확 감사제를 올리는 등 농경 의례가 서민들의 연중행사였습니다. 예컨대 마을 단위로 첫 벼 모내기 전 제사를 지내거나 수확 후 니이나메사이(新嘗祭)에 준하는 감사제를 지역 신사에서 거행하였고, 잦은 자연재해나 역병에도 카미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제의를 거행하며 정신적 위안을 얻었습니다.

한편 불교의 전파는 처음에는 왕실과 귀족 중심의 국가 행사로 장려되었지만, 나라 시대 중엽부터 점차 민간 신앙으로서의 불교도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 쇼무 천황(聖武天皇)은 불교를 나라의 질서 확립에 활용하기 위해 741년 전국 각지에 국분사(국분지)와 국분니사라는 관립 사원을 세우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 이에 따라 각 지방에 하나씩의 절과 비구니 사원이 건립되어, 서민들도 가까운 국분사에서 불교 의례를 접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특히 752년 나라의 동대사(東大寺)에 거대한 비로자나불(노사나대불)이 주조되고 개안법요가 성대히 열리자 수만의 백성이 모여 대불 개안법회를 참관하고 불법의 위엄을 체험하였다고 전합니다. 쇼무 천황 부부는 불교를 깊이 신봉하여 삼보(불·법·승)의 노예”임을 자처하며 백성들에게 불법 수호를 장려했고 , 이러한 윗사람의 모범은 서민들이 불교에 친숙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교 승려들은 각지에 파견되어 호국경(護国経)을 설파하고 백성들의 액운을 막는 주문(呪文)과 호마 의식을 행하여 민심을 얻었으며, 질병이 돌 때면 약사여래상이나 관음보살에 기도하는 풍습도 퍼졌습니다.

당시 서민들에게 불교는 다소 추상적이고 어려운 철학으로 다가왔지만, “나무아미타불” 같은 염불 신앙이나 미륵 하생 신앙 등 간단한 구원의 메시지는 민간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컨대 전염병이나 가뭄 같은 재난이 닥치면 절에서 대중 법회와 방생회를 열어 백성들도 참여시켰고, 천황은 743년 대불 조성의 조서를 발표하며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불사에 동참하여 공덕을 쌓을 것을 권장했습니다 . 또한 고켄 천황(称徳天皇)은 770년 일백만통의 다라니(百万塔陀羅尼)를 목조 소탑에 봉입하여 전국에 배포함으로써, 백성들까지 쉽게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인쇄 불경 부적을 만들었습니다 . 이처럼 나라 시대 후반에는 불교 경전이나 주문을 모든 가정에까지 보급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비록 한문 해독이 어려운 평민이라도 불탑이나 불상에 기도하고 부적을 지니는 방식으로 불교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나라 시대 서민들의 민간 신앙은 신토와 불교가 서서히 습합되는 특징을 보였습니다. 정부 주도로 불교를 장려하면서도 태양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 등 기존 신토의 신을 불교의 부처와 동일시하는 사고가 나타나, 쇼무 천황은 아예 대불을 태양신의 화신으로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 이러한 신불 습합(神仏習合)의 흐름 속에서 백성들은 절에 가서는 불공을 드리고 집과 마을에서는 카미에게 제사를 올리는 이중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민간 신앙으로, 나라 시대에는 음양오행설과 도가 사상의 요소들이 도래하여 귀족사회뿐 아니라 민간에도 주술적 풍습으로 퍼졌습니다 . 예를 들면 길일과 흉일을 따지는 음양도(陰陽道)의 관념이 생겨나 방향과 날짜를 가려 이사하거나 외출을 삼가는 풍습이 일부 번졌고, 산악 신앙과 선도(仙道)가 융합된 슈겐도(修験道)의 기원이 되는 산중 수도 전통도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민간에서는 잡귀를 쫓는 부적을 쓰거나 기우제·해원제를 지내는 등 소박한 주술 행위로 불안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축제·제의는 서민 공동체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전통적인 마쓰리(祭り) 행사는 마을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자리였고, 연중행사로 정월의 오쇼가쓰(お正月)*부터 오봉(お盆)까지 각종 세시풍속을 즐겼습니다. 설날에는 *카도마츠(門松)를 세우고 조상신을 맞이하였으며, 정월 대보름에는 밭갈이 축원제를 지내거나 길쌈 노래를 부르는 풍습이 지역마다 있었습니다. 여름 철 오봉 축제 때는 조상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본오도리(盆踊り) 같은 민속 무용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추며 밤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또한 각지의 수호신 축제(例祭)에는 주민들이 가마(神輿)를 메고 행진하거나 사자춤을 추며 카미를 즐겁게 해드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러한 민속 예능과 놀이가 서민 문화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3. 민속예술과 전통놀이


나라 시대에는 귀족 중심의 정제된 예술 외에도 서민들의 흥겨운 민속예술과 놀이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가구라(神楽)로, 신토 제사 때 봉헌되는 춤과 음악을 가리킵니다.(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귀멸의 칼날의 히노카미 카구라는 바로 이 가구라에서 기원합니다) 가구라는 신에게 바치는 노래와 춤으로 기원을 두며, 애니미즘 신앙에 뿌리를 둔 일본 고유의 무악(舞樂)입니다 . 오늘날까지도 전해지는 이 전통은 나라 시대에도 이미 전국 각지에서 인기가 있었으며(홋카이도를 제외한 전현 지역에서 성행 ), 마을 축제 때 무녀(巫女)나 주민들이 북과 종소리에 맞춰 신을 모시는 춤을 추던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암굴 설화에 유래한 아마노우즈메의 춤 이야기가 《고사기》 등에 실려 있는데, 이는 가구라의 기원 설화로 여겨지며, 나라 시대에 이러한 신화적 춤의 의식이 지역 사회에서 행해졌음을 시사합니다. 가구라 외에도 각 지역에는 전통 민요를 부르며 춤을 추는 풍습이 있어, 모내기철이나 추수철에는 풍작을 비는 노래와 춤이 자연스럽게 퍼졌습니다. 이러한 민속 무용과 음악은 마을 공동체의 단합과 오락의 기능을 하여, 고된 노동의 활력소가 되어주었습니다.

한편, 기악과 공연 예술 측면에서는 기가쿠(伎楽)와 산가쿠(散楽) 같은 외래 공연 예술이 도입되어 민간 오락으로도 자리잡았습니다. 기가쿠는 백제의 승려 미마지(味摩之)가 전래한 가면무극으로, 나라 시대에 동대사・고후쿠지 등 주요 사찰에서 정기적으로 공연되었습니다 . 거대한 나무 탈을 쓴 연기자들이 무언극에 가까운 춤과 몸짓으로 불교 설화나 희극적 이야기를 연출했는데, 대사(大寺)의 법요 행사의 일환으로 펼쳐진 기가쿠는 일반 백성들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 실제 기록에 따르면 기가쿠는 야외에서 행렬을 지어 연주되었고,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동작으로 관중을 즐겁게 하여 문자 해독력이 없는 서민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가면 인물 중에는 술 취한 외국왕(酔胡王)이나 노파(老婆) 등 희극적 캐릭터도 있어, 백성들은 웃음 속에 불교의 교훈이나 세속 풍자를 접했습니다. 이러한 기가쿠 공연은 7~8세기 서민 대중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헤이안 시대의 산가쿠(猿楽)와 노(能)로 이어지는 일본 연극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

https://valuable12.com/entry/일본-나라시대와-동대사도다이지의-역사적-의의-연원-특징-그리고-불교적-가치사천왕상-의의#google_vignette

일본 나라시대와 동대사(도다이지)의 역사적 의의: 연원, 특징, 그리고 불교적 가치(사천왕상 의

일본 역사에서 奈良時代(나라 시대)는 단순히 찬란한 문화의 꽃이 피었던 시기가 아니라, 정치적 혼란과 자연재해 속에서 국가적 통합과 안정의 기반을 마련했던 시기로 평가됩니다. 특히, 이

valuable12.com


음악 분야에서는 조정의 아악(雅楽)과는 별개로, 민간에서 토속 음악과 민요가 불렸습니다. 《만엽집(万葉集)》에도 동국민요(東歌)나 변방 수비병사들의 사키모리 노래(防人歌) 등이 실려 있는데, 이는 동국(지금의 간토 지방) 농민들과 지방 하급 군인의 애환과 정서를 담은 노래로 평가됩니다. 비록 한문 표기로 적혔지만 실제 구전되던 가요를 수집한 것이어서, 나라 시대 서민들의 입말과 감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례입니다 . 예컨대 《만엽집》에 실린 어떤 노래는 남편이 장기간 부역으로 떠나 있자 아내가 “당신 없는 사이에 누구와 베개를 베고 자란 말이오” 하고 한탄하는 내용인데, 이는 평범한 서민 부부의 애환을 노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서민층의 구전가요와 속요 일부가 문헌에 기록되기도 했으며, 특히 동국 지역의 민요들은 후대 일본 와카(和歌) 문학에 영향을 주어 소박하고 솔직한 서민 정서를 문학 속에 흐르게 했습니다 .

서민들의 놀이 문화로는 스모(相撲)와 각종 놀이놀이가 있었습니다. 스모는 본래 신에게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여쭙는 신사 의식에서 유래한 씨름 경기로서, 나라 시대에 이르러 일본 각지에서 풍년을 점치는 제의로 정착되었습니다 . 봄철 파종기나 가을 수확기에 맞춰 마을 청년들이 한데 모여 힘겨루기 대회를 열고, 승패에 따라 그 해 농사의 길흉을 점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이렇게 민간의 풍작 기원 의례로 퍼진 스모는 차츰 제도화되어, 8세기 후반부터는 7월 7일 칠석 무렵에 천황과 조정 귀족들 앞에서 펼치는 “스모 세치에(相撲節会)”라는 궁중 행사로 발전했습니다 . 즉, 서민들의 놀이이자 의례였던 스모가 국가 공식 행사로 승격되며, 귀족 사회에서도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서민들은 연날리기, 공기놀이, 바둑 등 간단한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일부 있으며,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정월에는 연을 날리고, 단오 무렵에는 그네를 뛰는 등 세시 풍속과 연결된 놀이 문화를 향유했습니다. 특히 정월 초하루에 아이들이 하네쓰키(羽根突き)라는 배드민턴 비슷한 채껏놀이를 하거나, 오정월(端午)에 창포를 달인 물로 목욕하며 장수와 건강을 비는 풍습이 있어 놀이와 의례가 결합된 형태를 띠었습니다.

4. 서민 문학 및 구술 전통


나라 시대의 문학 창작은 주로 귀족과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서민들의 이야기와 노래도 구비문학(口碑文学)의 형태로 전승되었습니다. 당시 일반 평민은 한문 해독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채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들이 각 지역에 풍부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지방 전승 지식을 수집하여 8세기 초에 《풍토기(風土記)》 편찬을 명했습니다. 713년 겐메이 천황의 칙령으로 각 국의 관리자에게 “옛 노인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옛 이야기를 아뢰라”는 지침이 내려졌고, 그에 따라 각 지방의 토지의 이름 유래, 산천의 특징, 신화와 전설 등이 보고되었습니다  . 현재 전해지는 《이즈모 풍토기》, 《하리마 풍토기》 등 일부를 보면, 지역별 신화와 민담, 설화가 다수 실려 있습니다 . 예컨대 《이즈모 풍토기》에는 그 지방 창세신화와 지명 설화들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해당 지역의 토착민들이 오래 전부터 구전해온 이야기들을 집필관이 받아 적은 것입니다 . 이처럼 당시 문자가 민간에 깊이 보급되지 않아, 마을 늙은이의 입담만이 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수단이었다는 평가대로, 구전 설화는 서민 사회에서 역사를 전승하는 핵심 매체였습니다 .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인 《고사기》(712)와 《일본서기》(720) 역시 궁정 시각에서 쓰였으나, 그 기반에는 오랜 구전 신화와 전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 이를테면 천지개벽과 신들의 계보를 다룬 신화 파트는 궁중의 히에다노 아레(稗田阿礼)가 외워 전하던 서사시를 받아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수록된 신화 역시 그 뿌리는 옛 서민들이 밤늦은 무렵 모닥불 곁에서 전하던 신화 이야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국가 편찬 과정에서 일부 각색되었겠지만, 궁극적으로 나라 시대의 국가문학도 민간의 구술 전통을 수집·정리한 산물이었던 셈입니다 .

민담과 옛 이야기도 이 시기에 많이 전해졌습니다. 《풍토기》에 보이는 각종 지명 유래담이나 토착 신의 일화들은 지방 주민들 사이에 오래 구전되던 민담입니다. 예를 들어, 히타치국 풍토기에는 어떤 호수의 용신이 나타나 딸을 시집보냈다는 이야기나, 토지가 부족해 남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설화 등이 실려 있는데, 이는 서민들이 대대손손 말로 전해오던 이야기가 국초 편찬 사업을 통해 남겨진 사례입니다. 또 훗날 헤이안 시대 설화집인 《日本霊異記》나 《今昔物語集》에 나오는 불가사의한 담화들 중 상당수는 나라 시대는 물론 그 이전부터 구전되어 온 민간 설화들입니다. 귀신, 요괴, 복수담과 같은 민간 전설들은 문자 기록이 거의 없던 나라 시대 서민들에게 입소문으로 퍼져 나가 공동체 공포와 윤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설화 전통은 아이들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고, 어른들에게는 교훈이나 금기를 전하는 기능을 하여 비문자 사회에서의 교육과 오락을 겸했습니다.

민요와 구술시도 서민 문학의 중요한 축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만엽집》에는 귀족뿐 아니라 하급 관리, 우민(右民) 등의 작품까지 폭넓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 편찬자는 신분을 불문하고 4,500수 이상의 와카를 모았는데, 천황부터 하급 관인까지 망라된 이런 편집 방식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습니다  . 그 결과 《만엽집》에는 변방 경비를 서러워하는 병사들의 노래, 가난에 허덕이는 농부의 탄식 등도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야마노우에노 오쿠라의 「빈궁문답가」가 그 한 예로, 앞서 보았듯이 가난한 농민의 겨울나기 고통을 사실적으로 노래하여 훗날까지 전해졌습니다 . 이처럼 문자 기록이 제한적이던 시대에도 노래를 통한 구술 전승은 활발하여, 서민들이 부르던 노래 중 일부는 훗날 문헌에 기록되거나 향유층을 넘어 귀족 문학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나라 시대 서민들의 언어는 문어(文語)인 한문과 달랐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와 노래가 한문으로 문자화되는 과정에서 본래 음운을 표기하는 만요가나(万葉仮名)가 창안되었습니다 . 《만엽집》에는 이러한 만요가나가 활용되어 일본어 음을 그대로 적은 작품들이 있어, 당시 서민들이 실제 어떻게 말하고 노래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줍니다 . 즉, 귀족 문화가 중국 한자에 의존한 반면 서민 문화의 구술 전통은 일본 고유의 언어를 유지했고, 그것이 차츰 문자로 포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후대 9세기 초 가나(仮名) 문자의 발명으로 이어져, 헤이안 시대의 일본어 문학 개화에 토대가 되었습니다. 결국 나라 시대 서민들의 구비 전통은 단순한 이야기거리를 넘어, 일본어 문학의 토양이 되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5. 귀족 중심 문화와의 차이점 및 서민 문화의 후대 영향


나라 시대의 귀족 문화와 서민 문화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귀족 문화는 당대 천평문화(天平文化)라 불릴 만큼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불교 미술과 한문학, 당풍 의복과 건축 등 국제적이고 화려한 요소들로 채워졌습니다 . 귀족들은 당나라 장안성을 본뜬 수도 헤이조쿄(平城京)에 살면서, 붉은 기둥과 흰 벽의 웅장한 저택에 거주했고 정원에 연못과 정자를 꾸몄습니다 . 남녀 귀족은 사치스러운 비단 옷을 겹쳐 입고 향락을 즐겼으며, 음률에 맞춰 가가쿠(雅楽)를 연주하거나 중국 고전 시가를 읊조리는 등 높은 교양 생활을 누렸습니다  . 반면, 서민 문화는 소박하고 현실 생활에 밀착한 형태를 띠었습니다. 서민들은 좁은 초가집이나 움집에서 대가족이 밀집해 살았고, 끼니 해결과 조세 납부에 쫓기는 궁핍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 의복 또한 귀족의 화려한 당풍 의상과 달리, 실용적이고 거친 천으로 만든 옷 한두 벌이 전부였고 맨발로 다니는 일도 흔했습니다 . 귀족들이 서역의 보물과 불교의 법요로 호사스러운 삶을 영위할 때, 농민들은 들판에서 땀 흘려 농사짓고 밤에는 가족들과 입담을 나누며 근근이 삶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

예술・오락 면의 차이도 뚜렷했습니다. 귀족들은 중국과 서역의 악기를 모아 당현금, 비파, 생황 등으로 연주하는 당풍 아악을 즐겼고, 불교 의식에 맞춰 우아한 무용(舞楽) 공연을 감상했습니다. 이에 반해 서민들은 농사일 노래, 마을 굿판의 춤 등 민속 예능을 스스로 즐겼습니다. 귀족 문학으로는 한문으로 쓰인 역사서와 율령, 칙찬 시집 등이 있었지만, 서민들은 글자를 모르기에 구전 동화와 전설로 웃음과 교훈을 나누었습니다 . 귀족들은 궁정에서 개최되는 가이후소(懐風藻) 같은 한시 모임이나 칸슈(漢詩) 경연에 참여했지만, 서민들은 절에서 열리는 설법회나 노천 시장의 곡예 공연을 접하며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습니다. 요컨대 귀족 문화가 세련되고 문자 중심이었다면, 서민 문화는 소박하고 구술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계층 문화의 분화에도 불구하고, 나라 시대 서민 문화는 후대 일본 문화의 전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선 문학적 측면에서, 《만엽집》에 포착된 서민들의 언어와 정서는 이후 헤이안 시대 국풍문화(国風文化)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 헤이안 조정에서 가나 문자로 쓰인 《고킨와카슈》 등의 와카 문학이 꽃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라 시대부터 축적된 일본어 서정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특히 만엽조(万葉調)로 불리는 소박하고 힘찬 노래 어법은 조정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여, 훗날 아리아리케한(在り在りけ翰) 스타일의 와카로 계승되었습니다 . 또한 민간 설화들은 헤이안 말기의 설화문학에 적극 수용되어, 《일본영이기》나 《곤자쿠 이야기집》 등에서 서민적 색채를 띤 이야기들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민중의 지혜와 교훈이 귀족 문학에 스며들어, 후세 문학 작품들에서 다양한 삶의 모습과 가치관을 그려내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공연 예술의 전승에 있어서도 서민 문화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나라 시대의 기가쿠와 산가쿠로부터 발전한 사루가쿠(猿楽)는 헤이안・가마쿠라 시대에 서민 오락으로 인기를 끌었고, 결국 이는 노가쿠(能楽)와 교겐(狂言)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 특히 사루가쿠는 본래 떠돌이 예인들이 민간에서 연희하던 것이었는데, 나라 시대에 그 싹이 튼 후 헤이안 시대 궁정의 후원까지 받으며 노(能)로 정착한 것입니다. 또한 가구라는 헤이안 시기 궁중의식 속 내전 가구라(内廷神楽)로 채택되어, 신앙의례임과 동시에 궁중 예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 이는 가구라가 민간에서 시작되어 국가 행사로 격상된 사례로, 서민 예술이 상류 문화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 예입니다. 스모 역시 나라 시대 민속놀이에서 비롯되어, 헤이안 시대 이후 무사계층의 무예 단련을 거쳐 에도 시대에는 “국기(国技)”로 불릴 만큼 서민의 국민적 오락으로 발전했습니다  . 이처럼 나라 시대 서민들이 즐기던 놀이와 예능은 형식을 달리하면서도 명맥을 이어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로 승화되었습니다.

신앙과 축제 부문에서도 서민 문화의 유산은 막대했습니다. 나라 시대 백성들이 행하던 신토 제의와 마쓰리는 중세~근세를 거쳐 현대까지도 각 지역 향토 축제로 남아 있습니다. 예컨대 나라 시대 이래 마을 공동체가 거행한 농경 의례들은 에도 시대에 더욱 발전하여, 쌀농사 주기에 맞춘 마쓰리들이 전국적으로 정착했습니다 . 현대 일본 각지의 신사에서 열리는 *레이사이(例祭)나 본오도리, 풍년제 등은 그 뿌리를 나라 시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도 많습니다. 또한 신불습합 전통은 메이지 신불분리령 이전까지 계속되어, 중세 일본의 종교는 늘 민간신앙 속에 불교가 섞인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결국 나라 시대 서민 문화는 귀족 문화의 그림자에 가려 기록은 적지만, 민족 문화의 저변으로서 일상생활, 신앙, 예능,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귀족 문화는 시류에 따라 당풍에서 국풍으로 변모하며 시대에 따라 양상이 크게 바뀌었지만, 서민 문화는 민중 생활 속에서 오랜 전통을 꾸준히 이어가며 일본 문화의 뿌리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훗날 에도 시대에 꽃핀 서민 중심의 대중문화(조닌 문화)의 토대가 되었고 , 현대에 이르러서도 지역 축제나 민요, 전통공예 등에서 그 맥락과 정서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문화청 문화재과, 나라국립박물관 간행물; 《万葉集》, 《続日本紀》 등 고전 자료; 우리역사넷 등 국내 일본사 해설자료. (각주 및 인용은 본문에 표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