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ie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건국과 멸망 과정 총정리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5. 11. 8.
반응형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사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어 두 아들이 각각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때 서로마 제국(녹색)은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히스파니아, 갈리아,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등 서방 지역을 관할했고, 동로마 제국(적색)은 발칸반도,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 등 동방 지역을 관할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았다  . 이러한 동서 분할 통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세기 혼란기 이후 제국의 효율적 관리 목적으로 시작한 사두정치(二帝統治)에 기원을 두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를 계승하여 330년 비잔티움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함으로써 동쪽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 이후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서방)과 동로마 제국(동방)이라는 두 역사적 흐름으로 나뉘어 전개되었으며, 각자의 건국 배경과 멸망에 이르는 과정이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 형성과 멸망의 연대기
• 395년 –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후 로마 제국이 둘로 분할되면서, 그의 아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 어린 호노리우스 치세 초기에 실권을 쥔 장군 스틸리코 등이 국정을 보좌하였으나, 서방의 통치 기반은 이미 약화되고 있었다. 서로마의 영역은 이탈리아 및 서유럽 일대로, 로마 자체는 상징적 수도였고 실질 행정 중심은 라벤나 등으로 이동하였다.
• 5세기 초 – 게르만족 등의 이민족 침입이 본격화되었다. 406년 라인강을 넘어 대거 이동한 반달족, 수에비족 등이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로 진입하고,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 섬을 차지했다. 특히 410년에는 서고트족 왕 알라리크 1세가 로마 시를 점령·약탈하여 제국에 충격을 주었다 . 이는 800년 만에 외적이 “영원의 도시” 로마를 함락한 사건으로, 서로마의 권위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후 서로마 정부는 이민족의 왕들을 로마 장군이나 연합군 지휘관으로 임명하며 붕괴를 지연시켰으나, 속주 방어선이 무너지고 제국 서부 영토 대부분이 각종 야만왕국으로 떨어져 나갔다 .
• 451년 – 훈족의 아틸라가 이끄는 대군이 갈리아를 침략하였으나,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와 서고트 연합군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를 격퇴하였다 . 이 승리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불꽃”으로 불리지만,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53년 공적이 높았던 아에티우스를 시기하여 암살하고 말았다 . 아에티우스 사후 서로마의 군사력은 급속히 붕괴되어, 북아프리카(카르타고)에 반달 왕국이 건국되고 455년에는 반달족에 의한 두 번째 로마 약탈이 벌어지는 등 제국은 통제력을 상실해갔다 .
• 475~476년 – 서로마의 실권을 장악한 장군 오레스테스가 황제를 교체하며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옹립했으나, 이는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가 되었다. 476년 9월 4일, 게르만 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군대를 격파하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 오도아케르는 자신을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언하고 더 이상 서방에 황제를 세우지 않았으며, 로마 원로원은 황제의 관 insignia를 동로마의 제논 황제에게 보내 서쪽 황제의 공위(空位)를 알렸다 . 일부 옛 장군들이 명목상의 황제를 자칭하기도 했으나(율리우스 네포스 등), 480년 최후의 claimant였던 네포스가 암살당하면서 서로마 황제의 계보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 약 서기전 27년 아우구스투스로 시작된 로마 제정(帝政)의 서방 부분은 이렇게 종말을 고하였으며, 이후 서유럽은 게르만계 여러 왕국들의 시대(초기 중세)로 접어들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 형성과 변화, 최후의 몰락
• 395년 – 테오도시우스 1세의 제국 분할로, 그의 맏아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 동로마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발칸반도, 소아시아, 중동의 레반트와 이집트에 이르는 동방의 부유한 지역들을 지배하였다 . 동방은 서방에 비해 도시화와 부가 발달하고 인구도 많아 상대적으로 탄탄한 행정·재정을 갖추고 있었다. 그 결과 동로마는 5세기 동안 서방보다 안정적으로 제국을 유지하였고, 막대한 공물을 지급하여 훈족 등 침략 세력을 회유하고 용병으로 고용하면서 서방의 위기를 종종 지원할 수 있었다 . 실제로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대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쌓아 도시를 철통같이 방어했고, 아틸라의 훈족이 위협하자 금 300kg의 공물을 바쳐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
• 476년 –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단일한 합법 정부를 자처하게 되었다 . 당시 동로마 황제 제논은 이탈리아의 오도아케르를 자치적인 “파트리키우스”로 인정하면서도 서방 영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였고, 후에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를 지원하여 이탈리아를 재정복하도록 하였다 . 이렇듯 동로마는 명목상 옛 로마 세계의 통합을 내세웠으며, 공식 국호도 끝까지 “로마 제국”으로 유지되었다 .
• 6세기 중엽 –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가 등장하여 동로마의 국력을 일시적으로 부흥시켰다. 그는 로마의 옛 영광을 되살리고자 벨리사리우스 장군 등의 활약으로 서방 영토 회복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533554년 사이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격파하여 로마와 이탈리아를 탈환했으며, 나아가 스페인 남부의 일부 지역까지 다시 로마의 지배하에 두었다 . 일리리아(발칸 서부)는 이후 약 천 년간, 이탈리아는 약 500년간, 북아프리카는 약 100년간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남았다 . 그러나 이 무리한 정복 전쟁과 페스트 창궐 등의 여파로 동로마의 국력은 소진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제국은 곧 다시 수세 국면에 처하게 된다.
• 7세기 변화 – 헤라클리우스 황제(재위 610~641)는 동로마의 체질을 일신하였다. 그는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행정구역을 테마(Theme) 체제로 재편하는 등 국가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 이로써 동로마 제국의 문화는 로마적 전통에서 그리스적 색채로 크게 전환되었으며, 후세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이후의 동로마 제국을 가리켜 별도로 **“비잔틴 제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 헤라클리우스 시대에 페르시아와 치열한 전쟁 끝에 국력을 쏟아부은 사이, 아라비아에서 등장한 이슬람 세력이 급속히 확장되어 동로마 영토를 잠식했다. 7세기 중후반까지 동로마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 광대한 영토를 신생 이슬람 칼리프국에 상실하고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중심의 제국으로 축소되었다 . 이후 몇 세기 동안 동로마는 비교적 작은 영토 안에서 내정과 군제를 재정비하며 생존하였고, 불가리아 제국 등 발칸의 신흥 세력과 공방을 벌이면서 명맥을 유지했다.
• 10~11세기 – 마케도니아 왕조 치하에서 동로마 제국은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누렸다. 바실리우스 2세(재위 976~1025) 등 역대 황제들은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고(1018년),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북부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는 등 중세 비잔틴의 절정기를 이끌었다 . 그러나 11세기 중엽부터 내분과 국력 누수가 심화되었고, 결정적으로 1071년 아르메니아 방면에서 만지케르트 전투가 발생하여 동로마 군이 셀주크 튀르크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 이 패배로 동로마 제국은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잃었고, 튀르크족은 소아시아 내륙에 정착하여 훗날 룸 술탄국을 건국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 동로마는 갑작스런 영토 상실로 국력이 급추락하였으나, 이후 콤네노스 왕조의 알렉시오스 1세 등이 즉위하여 일시적으로 국운을 회복한다.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에 지원을 요청하여 제1차 십자군(1096년)을 간접적으로 유도했고, 그 결과로 일부 소아시아와 지중해 동부 해안의 영토를 되찾기도 했다.
• 1204년 – 제4차 십자군이 원정 경로를 돌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자행하였다. 십자군 세력은 동로마의 수도를 점령한 뒤 약탈을 벌이고 라틴 제국이라는 새 국가(가톨릭 봉건 정권)를 수립하여, 동로마 제국의 명맥은 한때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 동로마의 황족과 귀족들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니케아, 트라브존드(트레비존드), 에페이로스 등지에 망명 정권(후계 국가)을 세웠다. 그 중 소아시아의 니케아 제국이 가장 강력하여, 1261년 니케아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흥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 그러나 57년간의 라틴 지배로 수도와 제국은 극도로 약화된 상태였으며, 팔레올로고스 왕조 아래 몇 세기 연명하긴 했지만 예전의 광대한 영토와 부흥기는 재현되지 못했다.

1453년 5월 29일,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대군과 거대한 대포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두 달간에 걸친 치열한 공성전 끝에 도시가 함락되었고,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전투 중 전사하였다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1000년 이상 지속된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스만의 메흐메트 2세는 정복 후 자신을 “로마 황제” (Kayser-i Rûm)로 칭하며 로마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나 ,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의 멸망은 이 1453년 동로마의 붕괴로 간주된다 . 약 1500년에 걸친 고대 로마의 국가 체제는 이렇게 막을 내렸으며, 그 유산은 이후 르네상스와 근대 유럽 문명 속에 이어지게 되었다 .

참고 문헌 및 출처: 로마 시대 및 비잔틴 시대 역사 개요        등. (한국어 위키백과 및 관련 사료 참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