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개요


이란(공식 명칭: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서아시아(중동)에 위치한 나라로, 역사적으로 페르시아로 알려졌다. 국토 면적은 약 164만 8천km²에 달해 세계에서 16~17번째로 넓으며, 인구는 **약 9,200만 명(2025년 기준)**으로 중동 지역의 주요 국가 중 하나이다. 수도는 테헤란이며,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지리
위치와 경계: 이란은 서아시아의 이란 고원에 자리잡고 북쪽으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과 접하며, 북부 경계의 일부는 카스피해 연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터키(북서부)와 이라크(남서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남쪽 경계는 페르시아만과 오만만 해안을 따라 약 1,770km에 걸쳐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동북쪽)과 파키스탄(동남쪽)과 접경한다. 이란의 국토는 높은 산악 지대와 내륙 분지로 이루어진 이란 고원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총 면적은 약 164만 km²로 세계 17위권의 면적을 가진다.
지형: 이란의 지형은 산악 지대가 가장 큰 특징으로, 북쪽에 엘부르즈(알보르즈) 산맥, 서부에서 남동부로는 자그로스 산맥이 뻗어 있다. 자그로스 산맥의 여러 봉우리는 해발 3,000m를 넘으며, 남부에는 4,000m를 넘는 고봉도 다수 있다. 이란 최고봉은 다마반드 산(엘부르즈 산맥, 5,610m)으로 활화산이며, 중동 지역 최고 높이이기도 하다. 최저 지대는 카스피해 연안으로 해수면보다 약 28m 낮고, 국토 내 가장 긴 하천은 카룬 강이다. 내륙에는 넓은 고원 분지와 사막이 펼쳐져 있는데, 중앙의 다슈테카비르(대염사막)와 남동부의 루트 사막이 대표적이다. 루트 사막은 지구 상 최고 수준의 지표면 온도가 기록될 만큼 뜨겁고 건조한 지역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편 북서부 이란에는 대형 소금호수인 우르미아 호수가 있으나, 담수 공급 감소와 증발로 면적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
기후: 이란은 다양한 기후대를 포괄하며, 아열대부터 아한대까지 지역마다 기후 차이가 크다. 북부 카스피해 연안 지역은 온화하고 습윤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쾨펜 기후구분상 온난습윤으로 분류된다. 반면 내륙 고원과 남쪽 해안 지역은 건조한 사막 및 스텝 기후에 속하며, 한여름에는 남부 페르시아만 연안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폭염과 높은 습도를 보인다. 고지대와 산악 지역은 겨울철 기온이 매우 낮아 한대에 가까운 추위를 기록하기도 한다. 겨울철에는 시베리아 고기압이 남하하여 이란 내륙에 한랭하고 건조한 날씨를 가져오고, 여름철에는 아열대 고압대의 영향으로 고온 건조한 날씨가 지속된다. 연 강수량은 지역 편차가 커서, 북부 엘부르즈 산지나 캅카스 인근은 연 1,000mm 이상 비가 오는 반면, 중앙 사막 지대는 100mm 이하에 불과한 곳도 있다. 이러한 기후와 지형 조건으로 인해, 예로부터 이란에서는 관개농업과 오아시스 정착지를 중심으로 한 농경 문화가 발달해 왔다.
역사
고대 페르시아: 이란 지역은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고대 문명이 번성한 세계 최古의 문명권 중 하나이다. 기원전 6세기경,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성립되면서 이란은 본격적인 고대 제국의 중심에 섰다. **키루스 2세(키루스 대왕)**는 기원전 550년경 메디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하였으며, 이후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등을 정복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후계자 다리우스 1세 치세에는 행정 제도 정비와 도로망 구축, 페르세폴리스의 건설 등이 이루어져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으로 멸망하였으나, 이후에도 이란 고원에는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와 사산 왕조(3세기7세기) 등의 이란계 제국이 연이어 들어서며 고대 페르시아의 정치·문화적 전통을 이었다.
이슬람 시대와 왕조 교체: 7세기 중엽 사산 왕조가 아랍 무슬림 군대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고 마침내 651년 멸망함으로써, 이란은 이슬람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이후 수세기 동안 이란 지역은 우마이야, 아바스 왕조 등의 칼리프 통치 아래 있었지만, 이란인은 언어와 문화를 지켜내며 페르시아 정체성을 유지했다. 910세기 이후 사만ids 등 이란계 토후국들이 자치를 누리면서 페르시아 문예 부흥이 일어났고, 몽골 제국의 침공과 일시적인 지배(13세기)를 거친 후 1501년 사파비 왕조가 이란 전역을 통일하였다. 사파비 왕조의 샤 이스마일 1세는 **시아파 이슬람(12이맘파)**를 이란의 공식 국교로 정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왕조를 세웠는데, 이로써 이란은 시아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 사파비 왕조 몰락 후,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 잔드 왕조, 이어 카자르 왕조(17961925)가 차례로 집권하였다. 카자르 왕조 시기에 이란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고, 러시아·영국과의 경쟁 속에 국력이 쇠퇴하였다. 1906년에는 입헌혁명이 발생하여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으나 정치 혼란이 지속되었고, 결국 1925년 군인이던 레자 샤 팔라비가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하여 팔라비 왕조를 열었다.
현대 이란과 이슬람 혁명: 팔라비 왕조(19251979) 치하에서 이란은 급속한 근대화·세속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석유 자원의 개발로 부를 축적하였으나 권위주의 통치와 서구 열강과의 밀착으로 사회적 불만이 쌓였다. 1979년,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대중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샤가 축출되고, 호메이니를 최고지도자로 하는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이란 혁명(1979)**으로 불리며, 중동 지역 질서를 뒤바꾼 역사적 사건이다. 혁명 직후 새 정권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19791981) 등으로 서방과 갈등을 빚었고, 1980년에는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에 돌입하여 8년간 막대한 인명·경제 피해를 입었다. 1988년 휴전 후 이란은 전후 재건과 함께 정치적 안정을 모색했으며, 1989년 호메이니 사망 이후에는 알리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로서 국가를 이끌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이란은 인구 증가 억제, 경제 자유화 등 개혁 정책을 부분 도입하였으나, 2000년대 중반부터 핵개발 문제로 다시 국제 제재에 직면하며 경제·외교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지역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유지하며, 최근까지도 내부적으로 개혁과 보수 세력 간의 긴장, 대외적으로 핵 개발 이슈와 제재로 인한 갈등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문화
종교와 사회 관습: 이란은 이슬람교가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사회로, 전체 인구의 약 99%가 이슬람 신자이며 이 중 90% 가량은 시아파(12이맘파)에 속한다. 시아파는 이란의 국교로서 국가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며,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수니파 무슬림은 약 5~9% 정도로 소수파이며 주로 쿠르드족, 발루치족, 투르크멘족 등 일부 소수민족 집단에 속해 있다. 이슬람 이외의 종교로는 바하이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등이 소수 존재하는데, 공식 통계는 없으나 바하이 신자가 30만 명 이상, 기독교인은 약 30만 명, 조로아스터교도 3만여 명, 유대인은 2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음주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여성의 히잡(머리 스카프) 착용이 의무화되어 있으며, 사회 전반에 전통적인 이슬람 관습이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이란인들은 이슬람 이전 고대 페르시아의 문화유산도 소중히 여겨, 새해인 노루즈(춘분 때 맞이하는 페르시아력 새해)나 율다(동지 축제) 등은 종교와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큰 명절로 기념된다. 이러한 전통 축일에는 가족이 모여 세시 풍습을 즐기는 등 이란 특유의 생활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예술과 문학: 페르시아 문화는 세계적으로 그 예술성과 풍부한 유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페르시아 문학은 10세기 이후 꽃피운 시 문학의 황금기로 명성이 높다. 10세기 국민서사시 *“샤나메”*를 지은 피르다우시, **루미(Rumi)**와 하페즈(Hafez), **사디(Saadi)**와 우마르 하이얌 등 걸출한 페르시아어 시인들은 사랑, 영성, 인생에 대한 주옥같은 시들을 남겨 이란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묘소가 있는 쉬라즈 등지는 오늘날까지 문학 애호가들의 성지처럼 여겨지며, 이란인들은 일상 속에서도 유명한 시 구절을 인용하는 등 시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예술 분야에서는 페르시아 미니어처 회화와 서예, 타일 공예가 오랜 전통을 지닌다. 이슬람 시대에 발전한 아라베스크 무늬의 타일 장식과 쿠파 서체의 아름다운 서예 작품들은 이란의 모스크와 건축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페르시아 융단(카펫)**은 전통 수공예의 정수로 여겨지는데, 정교한 문양과 색감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카펫 박물관이나 **타브리즈의 전통시장(바자르)**은 페르시아 양탄자 직조 기술과 디자인의 발전상을 잘 보여준다. 그 밖에 도자기, 금속 세공, 직물 자수 등 다양한 전통 공예가 지역별로 특화되어 발전해 왔다.
건축과 문화유산: 이란에는 수천 년에 걸친 역사를 반영하듯 다양한 건축 양식의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궁 터인 페르세폴리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는 광대한 석조 기단과 기둥, 부조 예술로 고대 페르시아 건축의 웅장함을 전해준다. 이슬람 시대에는 이슬람 건축이 꽃피어, 이스파한의 이맘 광장(나그셰 자한 광장)과 이맘 사원, 셰이크 로트풀라 사원 등은 정교한 타일 모자이크와 돔, 대칭적 정원 배치로 이란 이스파한 건축양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스파한은 “절반은 천국”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사파비 왕조 시기의 걸작들이 집중되어 있다. 또한 카자르 왕조 시기의 **고궁(골레스탄 궁전)**이나, 이슬람공화국 수립 직후 건립된 기념비적 구조물인 아자디 탑(테헤란의 해방탑) 등 근현대 건축도 이란의 문화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란의 20여 곳의 유적·유산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축을 비롯한 풍부한 문화유산은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음악과 영화: 이란의 전통 음악은 페르시아 고유의 **고전음악(전통 7곡 형식인 “대스가”)**으로 발전해왔으며, 산투르, 타르 등의 전통 악기를 기반으로 한 선법 체계 음악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음악은 수피즘의 영향과 어우러져 영적인 색채를 띠며, 현대에도 클래식 음악과 퓨전되어 연주되고 있다. 한편 이란은 영화 예술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아스가르 파르하디 등의 감독이 주도하는 이란 영화는 인본주의적인 스토리텔링과 예술성으로 국제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다. 파르하디 감독은 2010년대 들어 두 차례나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여 이란 영화의 위상을 높였고, 자파르 파나히 등 신세대 감독들도 사회 비판적인 영화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음식과 일상: 이란 음식은 향신료와 허브를 풍부하게 사용한 페르시아식 요리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쌀과 고기를 주재료로 한 첼로 케밥(양념고기 구이를 버터밥과 함께 먹는 요리)은 이란을 대표하는 음식이고, 향신료와 채소로 맛을 낸 호르메 사브지(허브 스튜), 페센준(석류소스 견과 스튜) 같은 전통 찌개 요리도 즐겨 먹는다. 특히 이란인은 세계 최대 생산국이기도 한 사프란을 음식에 풍미를 더하는데 활용하며, 요구르트, 석류, 말린 라임 등 독특한 재료도 자주 쓰인다. 차 문화도 이란 사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진한 홍차에 각설탕을 곁들이거나 허브차를 마시는 찻집 문화가 발달해 있다. 일상 의복의 경우 전통적으로 남녀 모두 헐렁한 튜닉과 바지를 입고 여성은 바깥에서 히잡으로 머리를 가리지만, 도시 지역에서는 현대적인 패션과 절충되어 다양한 옷차림이 나타난다. 전통 의상과 현대 의상이 공존하는 거리 풍경은 이란의 빠른 사회 변화를 반영한다.
인구
인구 규모와 성장: 이란의 인구는 2020년대 초반 기준 약 9천만 명을 넘어 지속 증가하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약 1.1%를 차지한다. 이란은 인구 규모 세계 17위 정도의 대국으로, 중동에서는 이집트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 인구 증가는 20세기 후반 한때 매우 높았으나, 최근에는 출산율 감소로 증가율이 크게 둔화되었다. 특히 1980년대 초반 한 여성당 출생아 수(TFR)가 6명을 넘었던 것에 비해, 산아제한 정책 등의 영향으로 2000년대 이후 출산율이 2명 이하(약 1.7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변화로 이란 사회는 인구 고령화 추세가 나타나고 있으며, 2025년 기준 중위 연령은 약 34세로 높아졌다. 그럼에도 전체 인구 중 젊은 층 비율이 여전히 높아, 15~29세 청년 인구가 한때 전체의 3분의 1을 넘기도 하는 등 (2010년대 초 기준) 청년층이 사회의 주축이 되고 있다. 도시화도 빠르게 진행되어, 현재 인구의 약 **73%**가 도시에 거주한다. 대도시권을 중심으로 한 도시 인구 집중이 뚜렷하며, 수도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권에 인구가 밀집해 있다.
민족 구성: 이란은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아온 다민족 국가이다. 국민 대다수는 이란계 페르시아인으로 추산되며,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약 60% 내외)을 차지하는 최대 민족집단이다 . 그 다음으로는 투르크계 아제르바이잔인이 큰 비중을 차지하여 약 16% 정도로 추산되며, 주로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 지방의 타브리즈 등지에 거주한다 . 그 밖에 쿠르드인(~10%)이 서북부와 서부 산악 지대에 살고, 룰르족(루르, ~6%)과 발루치인(~2%), 아랍인(~2%) 등이 남서부와 남동부 등에 분포한다 . 투르크멘족과 카슈가이 등 기타 소수 유목민 집단도 약 2% 가량을 이루며, 소수이지만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같은 기독교계 소수 민족과 유대인, 아프리카계 후손 집단도 존재한다 . 이처럼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국가 정체성 측면에서는 페르시아 문화와 시아파 이슬람이라는 공통 분모가 사회 통합의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언어: **공용어는 페르시아어(파르سی)**이며 이란 전역에서 행정과 교육, 대중매체에 사용된다. 페르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로서 아랍 문자에 기초한 자체 문자를 사용하며, 이란인의 **국어(國語)**로 기능한다. 이란 국민의 다수가 모어로 페르시아어를 구사하지만, 민족적 구성에 따라 다양한 언어들이 혼재되어 있다. 북서부의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는 아제리어(튀르크어의 일종)가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서부와 북서부의 쿠르드 거주 지역에서는 쿠르드어가 사용된다. 남서부 호즈스탄 등 아랍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아랍어가, 남동부 발루치족 지역에서는 발루치어가 쓰이는 등, 각 지방의 주요 소수민족 언어가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사용되고 있다. 또 기후가 온화한 북부 카스피해 연안 지역의 길라키어와 마잔다라니어, 중서부의 룰르어 등 페르시아어에 가까운 여러 방언/소언어들도 존재한다. 정부는 모든 공립학교에서 페르시아어로 교육을 실시하되, 지역어를 과목으로 가르치는 것을 일부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 이후 공식 통계에서 언어·민족 분포를 조사하지 않고 있어 정확한 인구 비율 파악이 어려우며, 페르시아어 위주의 동질화 정책으로 소수 언어의 지위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 편이다.
종교 분포: 앞서 언급했듯 이슬람 시아파가 이란의 국교이며, 국민 다수가 시아파 무슬림이다. 이란은 시아파 신정 체제를 채택한 국가로서, 시아파는 국가 공식 행사와 법체계, 교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우선적 지위를 갖는다. 수니파 이슬람 신자는 전체의 약 5~10%로 추산되며, 주로 쿠르드족, 발루치족, 투르크멘족, 아랍인 공동체 등 특정 민족 집단에 속해 있다. 헌법상 시아파 이슬람이 국교이나, 수니파도 이란 내 공인된 이슬람 공동체로 인정되어 자체 사원과 성직자 조직을 유지한다. 헌법이 공인한 소수 종교로는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기독교(아르메니아 및 아시리아 교회)가 있으며, 이들 종교 공동체는 각기 국회에 할당 의석을 가진다. 다만 이슬람에서 이단시되는 바하이교는 공인을 받지 못해 신자들이 사회적 차별과 탄압을 겪어왔다. 전통적으로 이란은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이자 한때 불교, 유대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가 공존했던 땅이지만, 현대 이란에서는 이슬람교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제
산업 구조: 이란 경제는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자원 중심 경제이면서도 농업, 공업, 서비스업이 고르게 분포된 비교적 다각화된 경제이다. 석유산업은 20세기 초반부터 이란 경제의 핵심 동력으로, 1908년 원유 발견 이후 국영 석유회사(NIOC)를 통해 국가 재정을 떠받쳐왔다. 이란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에너지 부국으로, 확인된 원유 매장량이 약 1,376억 배럴(세계 3~4위 규모)이며 천연가스 매장량은 약 29.6조 입방미터로 러시아에 이어 세계 2위에 해당한다. 이러한 풍부한 화석연료 자원 덕분에, 원유와 가스 수출은 한때 전체 외화 획득의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 석유·가스 부문 외에 이란의 주요 산업으로는 자동차 제조, 석유화학, 철강·광업, 시멘트 등 제조업 부문과 농업, 건설업, 무역·서비스업 등이 있다. 이란은 중동 지역에서 제조업 기반이 비교적 발달한 나라로서, 국산 자동차 브랜드(예: IKCO의 Samand 등)를 생산·보급하고 있고, 가전제품과 기계류 등 공산품도 일정 수준 자체 생산하고 있다. 농업 부문에서는 곡물, 면화, 사탕무, 쌀, 과일, 견과류 등을 재배하며 세계 최대의 피스타치오(토후메) 생산국이자 대추야자, 호두 등의 주요 생산·수출국이다. 특히 카샨 등지에서 재배되는 사프란(홍색의 값비싼 향신료)은 전세계 생산량의 대부분을 이란이 공급한다. 전통 수공업으로 유명한 페르시아 융단(카펫)은 여전히 중요한 수출품이며, 관광객 대상 판매와 해외 수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무역과 자원 수출입: 석유 및 가스 수출은 이란 경제의 lifeline으로, 주요 수출품은 원유, 정제 석유제품, 천연가스, 석유화학 제품 등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 외 전통적으로 수출 효자품목으로는 카펫, 피스타치오·대추야자 등의 견과·건과류, 샤프란, 화학비료, 철강 및 금속제품, 자동차 부품 등이 있다. 이란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과거 유럽과 일본 등이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2010년대 이후 제재로 서방 시장이 막히면서 중국, 인도, 터키, 대한민국 등이 원유와 제품의 최대 수입국이 되었다. 수입은 산업 설비, 기계류, 전자제품, 차량, 의약품, 소비재 등을 주로 들여오며, UAE(두바이 경유), 중국, 터키 등이 주요 교역창구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미국과 단교하여 미국과 직접 무역이 없고, 서방의 제재로 무역에 제약을 받아왔으나, 비서방 국가들과의 교역과 밀무역 경로를 통해 필요한 물자를 확보해 왔다.
경제 정책과 제재 영향: 이란은 혁명 이후 국가 주도의 중앙통제 경제 성향이 강했으며, 대규모 국유기업과 공기업, 종교재단(보니아드)이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부 민영화와 시장경제 도입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국가 계획 및 보조금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이다. 2000년대 중반 석유호황 시기에는 정부가 연간 1천억 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을 에너지·식품 부문 등에 지급하여 국민생활을 안정시켰으나, 이러한 보조금 정책의 비효율이 지적되어 2010년대에 보조금 개혁 및 현금 지원으로 전환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국제적으로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과 지역 군사활동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경제 제재를 받아왔다. 미국과 유엔의 제재는 특히 2010년대 초반 이란 경제에 큰 타격을 주어, 원유 수출량이 이전의 절반 이하로 급감하고 통화인 리알화 가치가 폭락하는 등 위기가 있었다. 2016년 이란이 서방과 **핵합의(JCPOA)**를 맺은 후 한때 제재가 완화되며 원유 수출과 경제가 부분 회복되었으나, 2018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핵합의 탈퇴와 제재 복원으로 다시 경제가 위축되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 통화가치 하락은 이란 경제의 만성적 문제로 남아 있으며, 정부는 이에 대응해 수입 대체 산업화와 “저항 경제”(타의 의존을 줄이고 자체 역량 강화) 노선을 천명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란 경제는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제재로 대외 투자 유치와 국제 무역에 제약을 받고 있어,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2020년대 들어 중국, 러시아 등과의 협력 강화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제재 우회망을 구축하는 등 경제 활로를 모색 중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란을 “전환기 경제”(과도기적 경제)로 분류하며,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 중인 국가로 보고 있다.
지정학
중동에서의 위치와 역할: 이란은 지리적으로 걸프만과 코카서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국이며, 중동 지역의 핵심 강대국 중 하나로 꼽힌다. 인구, 면적, 군사력 면에서 중동 최고 수준인 이란은 페르시아만과 홀르무즈 해협을 접하고 있어 세계 에너지 수송로를 통제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다. 이란은 시아파 이슬람권의 종주국을 자처하며, 수니파 왕정 국가들이 주도해온 중동 정세에 시아파 진영의 맹주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아랍 국가들과 지역 패권을 두고 경쟁과 견제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와 시리아의 시아파 민병대 등을 지원함으로써 지역 분쟁에 깊숙이 관여해 왔고, 이는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이라 불리는 이란-시리아-헤즈볼라로 이어지는 반(反)서방·반이스라엘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대립 관계에 있으며, 팔레스타인 무장정파(하마스 등)를 지지함으로써 이스라엘과 적대하고 있다. 중동의 여러 분쟁(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 등)에서 이란의 지원과 개입은 주변국 및 서방과의 마찰 요인이 되고 있으며, 이란은 이를 **“이슬람 혁명의 이상을 수호”**하고 **“반제국주의 투쟁”**의 일환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2023년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주변국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중동 질서에 도전하는 개혁 세력이자 비(非)아랍권 중심국으로서 특수한 위상을 지닌다.
미국 및 서방과의 관계: 이란의 국제 관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는 미국과의 갈등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미국을 **“큰 악마”**로 규정하며 반미 노선을 견지해 왔고, 미군은 1980년대 이라크-이란 전쟁 당시 이라크측을 우회 지원하는 등 상호 적대해왔다. 1979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 이후 미국은 즉각 이란과 단교하고 자산 동결, 무역 금지 등 제재 조치를 취했으며, 이후 수십 년간 이란에 대한 경제·군사 제재를 단계적으로 확대해왔다. 1984년부터는 이란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여 무기 금수와 원조 중단을 실시했고, 1995년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는 이란의 핵개발 의혹과 헤즈볼라·하마스 등 무장단체 지원을 이유로 미국 기업의 이란 에너지 부문 투자 금지, 이란과의 모든 무역·투자 금지 등의 강경 조치를 취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이란의 우라늄 농축 활동이 본격화되자,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통해 다자 제재 결의를 이끌어내고 금융 제재, 원유 수출 제재 등 “최대 압박” 전략을 시행했다. 이러한 제재로 2012년 이란 리알화 가치가 반토막 나고 인플레이션이 폭발하는 등 이란 경제는 큰 충격을 받았다. 2015년 이란이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독일(P5+1)과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즉 이란 핵합의를 체결하면서 한때 긴장이 완화되었다. 이 합의로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대가로 미국·유엔 제재가 일부 풀려 이란의 원유 수출이 증가하고 경제도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핵합의를 탈퇴하고 이란에 대한 모든 제재를 복원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2019~2020년 미국은 이란산 원유를 구매하는 제3국까지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시행하고,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드론 공습으로 살해하는 등 강경한 대결 노선을 걸었다. 이란도 이에 맞서 우라늄 농축 농도를 높이고 미군 주둔 중동 기지에 미사일 공격을 가하는 등 대응하여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되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핵합의 복원 협상이 시도되었으나 2023년 현재까지 교착 상태이며, 미국은 이란의 탄도미사일 개발과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 공급 등) 문제 등을 추가로 제기하며 포괄적 합의를 압박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란-미국 관계는 40년 넘게 대립 구도를 이어오고 있으며, 미국의 제재 하에서 이란은 **국제 금융망(FATF 등)**에서 고립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럽 연합 국가들은 핵합의 이후 이란과 경제협력을 재개했으나, 미국 제재 재개로 상당 부분 교역이 감소하였다. 이에 이란은 **“동방정책”**을 내세워 중국, 러시아, 인도 등과의 경제·안보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핵 문제와 국제안보: 이란의 핵개발 문제는 21세기 국제 외교의 가장 민감한 현안 중 하나이다. 이란은 NPT(핵확산금지조약) 가입국으로서 핵무기 보유를 공식적으로 부인해왔으나, 우라늄 농축시설 비밀 건설 사실이 2002년 드러난 이후 핵무기 개발 의혹을 받아왔다. 이란 정부는 평화적 원자력 이용권을 주장하며 우라늄 농축을 지속했고, 2006년부터 유엔 안보리는 이란의 농축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와 제재를 부과했다. 앞서 언급한 2015년 핵합의는 이란이 농축 농도 3.67% 제한, 농축용 원심분리기 수량 감축, 국제사찰 수용 등을 받아들이는 대신 제재 해제를 약속받은 것으로, 한때 이란 핵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한 사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미국의 탈퇴로 합의가 파기 수순에 들어가자, 이란도 2019년 이후 합의상의 핵활동 제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해제하고 고농축(60% 수준) 우라늄 생산 등으로 맞섰다. 이란의 핵활동이 진전됨에 따라 이스라엘 등은 군사 옵션을 거론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단기간 내 핵무장 가능한 **“핵능력 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2021년 출범한 라이시 정부는 협상보다 자력 돌파 기조를 보여주고 있으나, 2023년 들어 서방 억류자 석방과 동결 자금 해제 등의 부분 합의가 이뤄지는 등 긴장 완화 조짐도 나타났다. 이란 핵 문제는 중동의 안보 환경과 핵확산 이슈, 그리고 미국과 중국·러시아 간 패권 경쟁과도 맞물린 복합적 사안으로, 향후 이란의 국제 지위와 제재 운명을 좌우할 핵심 변수로 남아 있다.
국제 기구 및 외교 지향: 이란은 1945년 유엔 창설 회원국이며, 비동맹운동(NAM), 이슬람협력기구(OIC), 석유수출국기구(OPEC), 경제협력기구(ECO) 등 다수의 국제 기구 회원이다.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비판적인 국가들과 연대하여 G77, 상하이협력기구(SCO) 등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2023년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이란 외교는 **“독립, 자유,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혁명 슬로건을 내세워 어느 블록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 노선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제재 장기화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자, 현실적으로는 중국·러시아와 전략적 제휴를 강화하고 인근 신흥국들과 경제 교류를 넓히는 **“동진정책”**을 적극 추진 중이다. 특히 중국과는 25년 장기 포괄협력 협정을 맺고 일대일로 구상에 협력하는 한편, 러시아와는 군사기술 교류와 공동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밀착하고 있다. 반면 걸프만의 아랍 이웃국들과는 종파 차이와 역내 영향력 경쟁으로 긴장이 지속되었으나, 2023년 중국의 중재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등 관계 개선에도 나서고 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는 이란과 오랜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미국 제재로 경제협력이 위축된 상태다. 이란의 지정학적 위치와 풍부한 자원은 기회이자 위협으로 작용하며, 국제 제재와 갈등 속에서도 자주적 생존을 모색하는 이란의 외교 행보는 계속해서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주요 도시
• 테헤란(Tehran): 이란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알보르즈 산맥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인구는 시내에 약 900만~1000만 명, 수도권까지 합치면 1,600만 명 이상으로 중동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이다. 1796년 카자르 왕조 때 수도가 된 이래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현재 정부기관과 대기업 본사, 유수 대학들이 몰려 있다.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유입으로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현대적 대도시이지만, 도시 곳곳에 골레스탄 궁전, 그랜드 바자르 등 역사 유적도 남아 있다. 차량 증가와 분지 지형 탓에 대기오염 문제가 심각하며, 인구 과밀과 교통 혼잡도 큰 도전이다. 그럼에도 테헤란은 이란 혁명 기념비인 아자디 탑, 밀라드 타워 등의 상징물이 우뚝한 이란의 심장부로서 기능하고 있다.
• 마슈하드(Mashhad): 이란 동북부에 위치한 제2의 도시로, 라자비 호라산 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약 330만~420만 명으로 추산되며(추계 연도에 따라 차이, 2019년 약 420만 명), 테헤란 다음가는 규모이다. 마슈하드는 시아파 8대 이맘 리자의 성역(능)이 있는 성지 도시로, 어원도 아랍어로 “순교지”를 뜻한다. 거대한 이맘 리자 영묘 단지는 연 수천만의 순례객이 찾는 이슬람 세계 주요 순례지이며, 단지 내에 황금 돔의 영묘와 모스크, 신학교 등이 밀집해 있다. 도시 경제는 종교 관광에 크게 의존하며, 수공예 상품과 사프란 등 농산물 교역도 활발하다. 아프가니스탄 및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교통 요충지로서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상의 상업 중심이었고, 현대에도 철도·도로를 통해 이들 지역과 연결된다.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이란 남부가 피해를 입자 산업 인프라 일부가 마슈하드로 이전되기도 했다. 오늘날 마슈하드는 종교성과 현대성이 공존하는 도시로, 낮에는 영묘를 참배하는 순례자들로 붐비고 밤에는 네온 불빛이 밝힌 도시 생활이 펼쳐진다.
• 이스파한(Isfahan): 이란 중부 내륙에 위치한 역사도시로, 인구 약 220만 명의 이란 제3의 도시이다. 사파비 왕조 시절인 17세기 초 샤 아바스 1세에 의해 수도로 번영하여 “이스파한은 세계의 절반”이라는 찬사가 나올 정도로 화려한 문화도시로 발전했다. 도심의 나그셰 자한 광장(이맘 광장)은 세계문화유산으로, 광장을 둘러싸고 이맘 사원, 셰이크 로트풀라 사원, 알리카푸 궁전 등이 위치해 사파비 왕조 건축과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스파한은 또한 길게 뻗은 자얀데 강과 그 위의 시에-o-세 폴(33개 아치 다리) 등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며, 공예 시장과 전통 바자르가 발달한 관광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대 이스파한은 섬유, 철강, 군수산업 등의 공업 도시이기도 해서 “이란의 산업 수도”로 불리며, 원자력 시설과 항공기 제조공장 등도 인근에 있다. 전통과 산업이 어우러진 이스파한은 이란인들에게 문화적 자부심의 대상이며, 매년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도시이다.
• 타브리즈(Tabriz): 이란 북서부에 위치한 이란령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중심 도시로, 동아제르바이잔 주의 주도이다. 해발 약 1,350m 고원지대에 자리하며, 인구 약 140만~170만 명으로 이란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 인구 다수가 투르크계 아제리인으로, 아제리어가 일상어이며 페르시아와 투르크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지역색을 지닌다. 타브리즈는 역사적으로 실크로드 교역의 거점이자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역사도시이다. 일한 왕조 및 사파비 초기에 수도 역할을 했으며, 1906년 입헌혁명 당시 개혁 운동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타브리즈의 바자르(재래시장)**는 중세부터 이어져 온 거대한 실내시장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데, 특히 명산품인 페르시아 카펫과 수공예품 거래로 명성이 높다. 도시 곳곳에 청砖 사원(고색 메스지드)과 카잔 칼레시 성채 등의 역사 유적이 있고, 인근 교외에는 아제르바이잔 전통 마을인 칸도반(바위집 마을) 같은 관광지도 있다. 현대 타브리즈는 터키와의 교역 관문으로서 상업과 제조업(자동차 공장 등)이 발달했으며, 이란과 튀르키예(터키), 남캅카스 지역을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시라즈(Shiraz): 이란 남서부 파르스 주의 주도로, 인구 약 170만~180만 명 규모의 이란 제5의 도시이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명망이 높아, “시인의 도시”, **“장미와 나이팅게일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는 이 곳이 페르시아의 대시인 하페즈와 사디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곳이며, 아름다운 정원과 꽃으로 가득했던 전통에 유래한다. 시라즈에는 하페즈 영묘와 사디 영묘가 정원과 함께 꾸며져 많은 문학 애호가와 관광객이 찾는다. 또한 9세기 이슬람 건축의 걸작인 바크테라즈 모스크, 19세기 카자르 양식의 나시르 올몰크 모스크(분홍 모스크) 등 역사적인 사원과 건축물이 도시 경관을 수놓고 있다. 시라즈는 근교에 있는 페르세폴리스와 파사르가다에 등 아케메네스 왕조의 유적에 접근하는 관문 도시로서, 이란 역사 관광의 거점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했으나 혁명 이후 금주령으로 그 문화는 자취를 감추었다. 현대 시라즈는 대학교와 연구기관이 많아 교육 도시로도 알려져 있으며, 전자산업 등 경공업이 발달해 있다.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문화유산 덕분에 이란인들이 가장 살기 좋다고 여기는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인문 (사회와 생활)
가족과 사회 구조: 이란 사회는 전통적으로 가족 중심의 공동체 문화가 강하며, 가족이 개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위로 여겨진다. 가족 구조는 과거 대가족 제도가 일반적이어서 부모·자녀뿐 아니라 조부모, 삼촌·고모 등 확대가족이 가까이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젊은 층의 핵가족화가 진행되었으나, 지금도 결혼이나 장례 등 주요 행사에는 대가족 친척들이 모이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존비어 체계의 페르시아어 경칭 문화와 연장자 존중 전통이 뿌리깊어, 가족 내 서열과 연장자 권위가 비교적 분명한 편이다. 사회 전반에 가부장적 가치관이 남아 있어, 가족에서 남성 가장(아버지 또는 맏형)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부양 책임을 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교육 수준 향상과 경제 여건 변화로 도시 중산층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약화되고, 부부가 함께 결정하고 책임지는 민주적 가족 문화로 변모해가고 있다. 결혼은 대체로 중매나 친지 소개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슬람법상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나 오늘날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일부일처제 결혼이 일반적이다. 이혼율은 과거 매우 낮았으나 최근 도시 젊은층을 중심으로 증가 추세이며, 이에 따라 이혼 여성을 보는 사회적 시선도 다소 변하고 있다. 출산율 급감으로 자녀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부모 세대에 5남매 이상도 흔했으나 현재는 1~2명 자녀를 둔 핵가족이 도시에서는 표준적이다.
성 역할과 여성 지위: 이슬람 공화국 하의 이란에서는 공적 분야에서의 성역할 구분이 비교적 엄격한 사회로 여겨진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기반한 법체계 아래, 남성과 여성은 상속, 증언, 여행 등의 일부 법적 권리에서 동등하지 않게 취급되며 여성에게 제약이 가해진다. 예를 들어 여성이 법정에서 증언할 때 남성의 절반의 증언 가치를 인정받거나, 혼인 시 법적 후견인이 필요하며, 아버지쪽 혈족이 어머니보다 양육권에서 우선하는 등의 조항이 존재한다. 또한 여성의 공개적 행동에 대해 비교적 엄격한 규범(복장 규정, 통행 제한 등)이 적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법·제도상의 제약과는 별개로, 현대 이란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역할은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여성들의 약진이 두드러져, 현재 이란의 대학 진학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으로 구성될 만큼 여성의 고등교육 참여율이 높다. 이는 1979년 혁명 직후 여성 문맹 퇴치와 교육 장려 정책의 성과로, 1970년대 25% 미만이던 여성識字率이 최근 85~90% 수준으로까지 향상되었다. 대학에서는 의학, 과학, 공학 계열 전공에도 여성 학생이 다수 진출해 있고, 여성 과학자와 의사, 교수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반면 경제 활동 참가율 측면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여전히 낮은 편이다. 2020년대 현재 이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15% 내외에 불과하여, 같은 이슬람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오만 등과 견줘도 절반 수준에 그친다. 이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가사·육아 전담 관념이 강하고 노동시장에 편입되기 어려운 문화, 그리고 일부 직종에서 여성 고용 제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최근에는 고학력 여성의 증가로 전문직이나 예술·언론 분야 등지에서 커리어우먼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전체적으로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아직 낮은 편이며 임금 격차와 유리천장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남녀 불평등에 도전하는 여성운동도 점차 활발해지고 있는데, 1990년대 이후 여성 잡지와 단체들이 법 개혁과 권리 신장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사건 이후 벌어진 시위에서는 “여자, 삶, 자유”라는 구호 아래 여성의 자유와 권리 확대 요구가 전국적으로 분출되며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이는 이란 사회에서 성역할 재규정과 여성의 지위 향상이 중요한 시대 과제로 대두되었음을 보여준다.
교육과 젊은 세대: 이란 사회는 인구의 상당 부분이 청년층으로 구성되어 매우 젊고 역동적인 것이 특징이다(다만 최근 출산율 저하로 고령화가 진행 중). 젊은 세대는 대체로 부모 세대보다 교육 수준이 높고,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외부 세계의 문화에 더 개방적인 경향을 보인다. 현재 이란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아 전체 인구의 다수가 온라인에 접근할 수 있으며, 1020대 젊은층은 SNS를 통해 글로벌 트렌드에 빠르게 동참하고 있다. 정부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일부 SNS와 해외 사이트를 검열·차단하고 있으나, 젊은층은 VPN 등 우회 수단을 활용해 정보를 접속하는 일이 흔하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등장은 이란 사회의 의식 변화를 촉진하여, 민주화와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나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이 과거보다 확산되고 있다. 예컨대 1990년대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연애 결혼과 만남 문화가 증가하고, 일부 젊은층은 결혼을 미루거나 동거를 택하는 등 전통과 다른 생활양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또한 젊은층 실업과 경제난, 정치적 폐쇄에 대한 불만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어, 1999년 대학생 시위, 2009년 “녹색 운동” 시위, 20172019년 연료값 인상 시위 등 주기적인 청년층 주도 시위로 표출되었다. 특히 앞서 언급한 2022년 여성 인권 시위는 20대 이하 젊은 여성들이 적극 참여하여 국내외의 큰 주목을 받았다. 가정 내 세대차도 커져, 젊은층은 종교적 경향이 부모 세대보다 약하고 가치관이 보다 자유로운 반면, 기성세대는 혁명 이념과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세대 갈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이란 사회 전반에는 가족 유대와 공동체 의식이 여전히 강하기 때문에, 세대 간의 단절보다는 대화를 통해 균형을 찾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종합하면, 이란의 인문·사회 분야는 급속한 현대화와 전통이 혼재된 과도기적 모습으로, 청년층의 변화 주도와 기성 권위 구조 간의 상호작용 속에 새로운 사회상이 형성되어 가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
교육 체계: 이란은 의무교육과 국비 교육제도를 통해 국민 교육 수준 향상에 크게 성공한 나라로 꼽힌다. 초등교육은 6년, 중등교육(중학교 3년 + 고등학교 3년)으로 구성되며, 1979년 혁명 이후 무상의무교육 정책으로 농촌 지역까지 학교망이 확충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 절반 이하였던 성인 문해율이 꾸준히 상승하여, 2020년대 현재 성인 문해율은 약 85~90% 수준에 달한다. 특히 청년층(15~24세) 문해율은 98% 이상으로 교육 보급이 거의 완료된 상태이며, 남녀 간 문맹률 격차도 크게 줄었다. 정부는 교육부 산하에 문해교육 운동 기구를 설립해 혁명 직후부터 성인 문자교육을 진행했고, 그 성과로 2021년 기준 6세 이상 인구의 90.5%가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중등교육까지는 국공립학교에서 무료로 제공되며, 고등교육은 국공립대학과 사립대학(이슬람 자유대 등)이 병존한다. 국립대 입학은 **전국 대학입학시험(콘쿠르)**의 엄격한 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며, 상위 명문대로 테헤란대학교, 쉬라즈대학교, 이스파한 공대, 샤리프 공과대학 등이 손꼽힌다. 혁명 직후 이슬람 문화를 반영한 교육과정 개편이 있었으나, 과학·기술 교육도 강조되어 현재 이란의 과학공학 인력 배출은 세계적인 규모에 속한다. 대학 재학률은 혁명 전보다 20배 이상 높아져, 1977년 대학생 수 10만여 명에서 현재 400만 명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대학 숫자도 1970년대 말 22개에서 2000년대 후반에는 국립 54개, 사립 289개로 늘어났다. 특히 이슬람 아자드 대학은 전국에 캠퍼스를 둔 거대 사립대학 시스템으로, 매년 많은 학생을 수용하여 고등교육 보급에 기여하고 있다. 기초교육에서 남녀 구별 교육(남녀 학교 분리 및 교사 동성 배정)이 시행되고 있지만, 고등교육 이상에서는 남녀공학 대학이 일반적이다. 여성의 대학 진학이 활발하여 일부 이공계 학과의 경우 여학생 비율이 절반을 넘기도 하며, 의학계열에서는 여성 진출이 두드러진다. 교육 내용은 국가 교육과정으로 통일되어 있으나, 일부 국제학교와 소수민족 언어 학교(예: 아르메니아 학교)도 운영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란의 교육 수준은 중동 지역에서 상위권에 속하며, 문해율과 과학 교육 성취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과학 기술과 연구: 이란은 정부의 집중 투자와 인적 자원 덕분에 과학기술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2000년대 이후 논문 발표 편수 등 과학 연구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 2022년 스코퍼스(Scopus) 기준 연구 논문 발표 수 세계 15위를 기록하였다. 이는 2010년경 20위권 밖에서 꾸준히 상승한 결과로, 특히 나노기술과 의학, 화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이란은 중동 지역에서 과학 출판물 수 1위를 유지해왔으나, 최근 Web of Science 기준으로는 튀르키예에 이어 2위가 되는 등 경쟁이 치열하다. 연구 인프라 측면에서, 이란혁명 이후 과학 부문 투자가 꾸준히 증가하여 테헤란, 이스파한, 테헤란의 3대 과학기술단지를 비롯한 과학 도시들이 조성되었다. 우주기술 분야에서도 자체 인공위성(Safir, Simorgh 로켓 발사)을 개발·발사하며 중동에서 독자 우주개발 역량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생명공학, 의약품 생산에서도 인슐린, 백신 등 상당 부분 자급이 가능하고 줄기세포 연구 등 첨단 분야에 진입해 있다. 특히 나노기술 연구는 SCI 논문 수에서 세계 5위권에 오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원자력 기술은 전력 생산과 의학용 동위원소 생산 등에 응용되고 있다. 이러한 과학기술 발전은 경제 제재 하에서도 자립을 추구한 결과로 평가되며, 이란 정부는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해 “인재 유출 방지” 및 연구 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두뇌 유출(해외 이민) 문제가 제기되고, 폐쇄적인 연구 환경과 검열로 인한 학문의 자유 제약 등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젊은 과학자들은 국제 경진대회에서 입상하고 국제 공동연구에 참여하는 등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2023년 Nature Index 보고서에 따르면 이란은 연구 경쟁력에서 세계 32위를 차지했으며, 특히 공학 및 화학 분야에서 강세를 보였다. 이란의 과학기술 부문 성과는 이슬람 혁명 이후 서방의 고등교육 인력 유출에도 불구하고 국내 교육 시스템과 정부 지원으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사례로 주목받는다.
교육의 사회적 역할: 이란에서는 교육이 사회계층 이동과 신분 상승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특히 의사, 교수, 엔지니어 등 전문직이 사회적 명망을 얻는 경향이 있어, 청년층 사이에 해당 직종을 목표로 한 교육열이 높다. 대학 입시 경쟁이 치열하여, 사교육과 입시학원 문화도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2010년대 중반에는 교육열로 인한 지나친 경쟁과 스트레스 문제가 대두되어, 정부가 대입 시험을 개편하고 지방 대학을 확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기술교육 및 직업훈련도 강화되어, 직업 전문학교나 전문대학이 늘어나면서 산업 인력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문해율 향상과 함께 출판과 언론, 예술 분야 인재들도 배출되어, 현재 이란은 상당한 수의 소설가, 언론인, 영화인들이 활동하는 문화 생산국이기도 하다. 이러한 교육 발전에도 불구하고, 도농 간 교육 격차와 성별 분야 편중 등의 과제가 남아 있다. 농촌 및 낙후 지역에서는 교사 부족과 진학률 저조 문제가 일부 존재하며, 도시 상류층은 사립학교나 해외 유학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계층 간 교육격차도 드러난다. 정부는 의무교육의 질 개선과 교육 평등을 정책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란의 교육 체계는 혁명 이념에 충실한 인재 육성과 국가 발전에 필요한 과학기술 역량 배양에 주안점을 두고 운영되어 왔으며, 지난 수십 년간 높은 문해율과 과학 성취라는 성과를 거둔 동시에 글로벌 표준과의 접목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상태다.
인물
• 키루스 대왕(기원전 600?~기원전 530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로서, 세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고대 군주이다. 기원전 6세기 중엽 메디아 왕국을 굴복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으며, 이어 소아시아의 리디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여 당시로서는 인류사상 최대 영토 제국을 건설했다. 정복지의 종교·풍습을 존중하는 관용적 통치로 알려졌고, 특히 유대인을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킨 일로 구약성경에도 등장한다. 그의 무덤(이란 파사르가다에 위치)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키루스의 제국 건설은 이후 이란이 고대 세계의 중심 문명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흔히 **“인권 선언”**으로 불리는 키루스 실린더碑를 남겨 관용 정책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1902~1989년):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이끈 지도자이자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창시자이다. 시아파 고위 성직자(아야톨라) 출신으로, 팔라비 왕조의 세속화 정책과 부정부패를 비판하며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1978~79년 혁명 기간에 망명지에서 돌아와 혁명을 주도하였고,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린 후 신정일치의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여 **이란 최고지도자(라히바르)**에 취임했다. 재임 중 이란을 시아파 신정 국가로 재편하고 서방으로부터 독자노선을 걸었으며,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시에는 국가 통합을 이끌었다. 호메이니는 반미·반서방 노선으로 유명하여 미국을 “악의 제국”이라 지칭했고, 1989년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종교적 칙령(파트와)을 내려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다. 1989년 사망 시 테헤란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추산 최대 1천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란에서는 그를 **“이맘 호메이니”**라 부르며 혁명의 아버지로 숭배하고, 그의 사상(호메이니즘)은 현재 이란의 국가 이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 마흐사 아미니(2000~2022년): 이란의 여성 인권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떠오른 22세의 쿠르드계 이란 여성이다. 2022년 9월 테헤란을 방문 중이던 아미니는 히잡 착용 상태가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가쉬테 에르샤드)**에 연행되었고, 구금 중 의문사하였다. 당국은 심장마비라고 발표했으나, 목격자 증언과 조사 결과 구타 등 물리적 폭력에 의한 사망 정황이 드러나 국내외적인 공분을 일으켰다. 그녀의 죽음은 이란 전역에서 “여자, 삶, 자유” 구호를 내건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불타올라, 특히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히잡을 불태우거나 머리카락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통해 여성 억압에 대한 저항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위는 이란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체포자를 남겼으나, 국내외에 이란 여성 인권 상황을 환기시키고 일부 제도 변화 논의를 촉발하였다. 마흐사 아미니의 이름은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시민자유 투쟁의 아이콘으로 거론되며, 2023년 유엔은 이란 정권의 그녀에 대한 폭력을 규탄하는 인권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란 내부의 세대·성별 갈등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후 이란 정부는 도덕 경찰 제도를 한때 축소하는 등 진화에 나섰으나 여성 복장에 관한 규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아미니는 **“진아 마흐사 아미니”**라는 쿠르드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사후 쿠르드 지역과 전세계 디아스포라 쿠르드인 사회에서도 커다란 연대 시위가 벌어지며 민족 문제와 인권 문제가 결합된 국제 운동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마흐사 아미니는 이란에서 이어지는 변화 요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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